글/ 조원기

조원기 약력 : 사단법인 재한동포총연합회 부총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기, 수필 다수 발표.
조원기 약력 : 사단법인 재한동포총연합회 부총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기, 수필 다수 발표.

1995년 10월의 어느 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살던 상도동 한 사거리 도로변에서 멀지 않는 5층 빌라건물 내부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후 세시쯤, 갑자기 시뿌연 먼지에 뒤덮인 철거현장에서 비명소리에 가까운 공포의 울부짖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스통에 불붙었다! 가스통이 폭발한다! 빨리 달아나라!”

그 고함소리에 놀란 일꾼들은 건물 중심 기둥 밑에 화염 속에 휩싸인 가스통을 보는 순간 사용하던 공구들을 내팽개치고 대문을 향해 비명을 지르면서 죽기내기로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나도 그 속에 섞여 대문 밖까지 뛰어나왔다. 그러나 허리를 굽히고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는 순간, 제자리에 딱 멈춰 섰다가 뒤로 획 돌아서서 불 뿜는 가스통을 향해,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마침 기둥 밑에 누워 있는 가스통에서 세차게 뿜어 나오는 불길이 기둥에 붙어 서있는 가스통을 정면으로 달구고 있었다. 만약 중형 폭탄과도 같은 이 가스통이 폭발하게 되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중심기둥이 무너지며 건물 전체가 폭삭 내려앉을 것이고, 주말이라 2, 3, 4, 5층에 살고 있는 수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 죽음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다시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한국 사람도 아닌,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돈 벌러 한국에 온 평범한 조선족 동포이다. 왜서 그런 용기와 책임감이 생겼을까?  

1992년에 나는 동생의 권유로 고향에서 짊어졌던 생산대장, 사장, 회장 등 모든 직을 내려놓고 한국행을 택했다. 낯설고 물 설은 타향이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동포들과 사장님의 두터운 배려를 받으며 대한민국의 많은 대형 철거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렸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총독부, 청계천복원공사 등 동대문사거리 바닥공사에서는 현장 사고로 갈비뼈가 골절되는 불운에 119에 실려 가서 입원생활도 했다. 특히 서울 남산 뒤편에 있는, 전 국민의 여론 중심에 있었던 안기부 본관 건물 폭파 전에 5층 내부 철거작업을 당시 포크레인 기사였던 내가 1층부터 5층까지 기둥벽면만 남겨두고 모조리 깨끗이 부수고 마무리 짓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의 부친은 청년시절부터 대한민국을 위해 한국교민 청년들로 조직된 ‘한교청년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다는 그런 역사는 당시 문화대혁명시기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역사문제가 되어 창창했던 나의 앞길을 완전히 막아버렸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군 입대를 지망해서  모든 항목이 다 합격되었지만 아버지의 역사문제로 탈락이 되었고, 또 몇 천 명이 지망한 청년들 중에 단 한사람으로 길림시의 한 대기업에 추천되었지만 역시 아버지의 역사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 좌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20대 중반에 그 큰 동네에서 촌민들의 선거로 생산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 후 한국에 나오기 직전까지도 현지 큰 기업의 서기 겸 공장장으로 열심히 일했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는 정신이 몸에 베였던 것일까? 한국 땅에 와서도 나는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자 힘썼다. 보다시피, 생명을 걸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의 현장에서 아우성치며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맞받아 뛰어 들어갔었다. 오로지 가스통 폭발을 막아 주민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기둥 앞까지 뛰어 들어간 나는 불길에 휩싸인 채 세워져 있는  가스통을 발길로 차서 옆으로 굴려 눕혀 놓고, 엎어져 불 뿜고 있는 가스통 밸브를 불속에서 더듬어 쥐고 힘껏 잡아 틀었다. 그러나 빤빤한 바닥에 누워있는 가스통 밸브는 잘 잠기지 않았다. 두루룩 구르면서 내뿜는 불길은 사람까지 온통 불 속에 휩싸이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가스통을 가로타고 앉아 불속에서 다시 밸브를 찾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악” 비명소리를 지르며 밸브를 확 틀어 잠궜다. “팍”, 불 꺼지는 소리가 나의 귀전에는 “꽝” 하는 폭발소리로 들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지나, 먼발치에서 불길 속에서 사투하는 장면을 보던 사람들이 불이 꺼지고 한참 지나서야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 모두들 나를 둘러싸며 부축해주기도 하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하고 엄지를 쳐들었다. 현장은 온통 감격의 도가니 속에 휩싸이어 환호소리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얼마 후, 제 정신이 돌아온 나는 일꾼들을 보고 “자, 됐다, 됐어!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일이나 하자”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둘러 서있는 4명의 직원들에게 “오늘 이 일을 누구든지 입도 뻥긋하지 말라. 부탁한다, 다들 제자리로 갑시다”라고 부탁하고는 동료 직원 박씨의 부축을 받으며 근처 멀지 않는 약국에 들려 화상 연고로 온 손에 칠갑을 했다.

응급처치를 끝내자 나는 현장에 세워둔 화물차에서 잠간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가스 불에 화상을 입은, 뼈 속을 찌르는 상처의 아픔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차문을 잠근 다음 평생 처음 소리 내어 울었었다….

이제 세월은 많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때 현장에 울려 퍼졌던 당황한 비명소리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을 내뿜는 가스통과, 그리고 가스 불에 화상을 입어 뼈 속까지 후비던 상처의 아픔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을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배같이 여기는 세 자식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양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지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일개 조선족 노동자가 한국 국민의 생명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불속에서 폭발위협을 제거해서 대형인명 참사를 막아냈으니 참으로 가슴 뿌듯해 났었다. 이 일은 또 나로 하여금 사회적인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었다.  

현재 나는 사단법인 재한동포총연합회 부총회장과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로 있으면서 중국동포의 이미지 향상과 내국인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고, 자신의 여생을 더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열심히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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