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국 수필가

차동국 약력: 룡정시출신, 연변대학 전과 졸업. 재한동포 문인협회 이사
차동국 약력: 룡정시출신, 연변대학 전과 졸업. 재한동포 문인협회 이사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심해지는지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감성은 살아나 계산해 보거나 저울질해 보다가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잦아진다. 특히 사촌 형이 고향으로 돌아가고부터이다. 형의 다친 허리는 재발하지나 않았는지? 그가 허리 다친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라는 뼈아픈 의구심은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강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고 독선적인 일이지만 말이다.

   사촌 형은 한국에 온 지 이십여 년이라 돈 농사 자식 농사 잘하였다. 그만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체력도 빠질 만큼 빠졌다. 설 쇠려고 고향으로 떠난 것이 코로나 19 때문에 길이 막혔고, 몸도 안 좋고 하니 아예 한국행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노후를 편이 보내려고 하였다.

   사촌 형은 햇수로 나보다 한 살 위라지만 기실 다섯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자라다 보니 친구 사이라 하기가 더욱 가까웠다. 신체가 좋은 그는 약질인 내 앞에서 항상 형이라는 티를 내느라고 어른스럽게 말하거나 행동하면서 사사건건 도와주려고 하였다. 나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속으론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어렸을 때 나의 부모님은 항상 나를 빗대놓고, 공부 잘하고 부모님을 도와 집 안팎 일을 잘하는 사촌 형을 칭찬해주었다. 오기가 생긴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해 봤으나 체 소하고 약질인 데다 게으르기까지 하여 잘 안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하였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대학 입시 제도가 회복되었고 나는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공부를 잘한 형은 시험복습은 아니 하고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대학에 가면 홀로 계시는 어머님 고생이 더욱 많을 것이니 돈을 잘 벌 수 있는 목공 기술을 배우겠다면서 연장 공구를 장만하고 있었다. 원래 부지런하고 눈썰미 빠르고 손재주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고향마을에 갔었다. 부모님은 입이 모자라서 사촌 형의 칭찬을 다 하지 못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도시로 돈벌이 가더니 명절 때마다 어머니 보러 오는 손엔 선물 보따리 한가득 이더란다. 한번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인사드리더니 그 후엔 떡판 같은 손주를 안겨드려 입이 함박 만 하다는 둥, 큰집 아주머니는 아들을 잘 두어서 노년에 세상 부럼 없이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씀 같았다. 부모님을 고생시키면서 공부하는 나에게는 썩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형은 칭찬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 후 나는 작은 진에 배치 받았고 진 변두리에 이사하게 되었다. 친척과 친구들이 짐꾼이 되어 간단한 짐을 날라 대충 정리하고 나니 여인들은 식사 준비하느라 서둘렀고 남자들은 딱히 할 일이 없으므로 마작판을 벌이었다. 형은 마작에 취미가 없어 판에 끼이지 않고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마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한참 뚝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나절이 되었을까 형이 들어오더니 “여기가 어디 사람 살 곳이냐, 간이 화장실들은 모두 잠을 쇠가 잠겨있고 공중화장실은 저 멀리 있더라, 급한 사람은 바지에다 싸지르겠더라”

  밖을 내다본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의 보살핌을 밭는 데 익숙하였으나 그의 말 없는 배려가 너무도 뜻밖이었다. 창문 옆에 서서 나무판자로 지은 간이 화장실을 보면서 갑자기 불러온 감정의 파도와 싸우느라 애를 쓰고 있던 나는 문득 이상한 소리 하였다.      
   “아니, 저 나무는 울타리 막자고 준비한 건데,”
   “울타리고 뭐고 급한 불부터 꺼야지, 울타리 막을 건 이후 내가 짬 내서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 톱과 도끼는 너희들 두고 써라 월급쟁이라도 가정에 필요한 연장은 있어야지, 식사 하구서 사람 많을 때 공터에 옮겨가자”

   나는 형이 두고 간 톱과 도끼를 필요할 때 얼마나 잘 썼는지 모른다. 마누라는 새벽에 간이 화장실 갔다 올 때마다 형을 칭찬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부부간에 티격태격하거나 바가지 긁을 때면 “당신 형님 좀 보쇼, 얼마나 부지런하고 무슨 일이나 빈틈없이 잘 함니까, 사촌 간인데 왜 하나도 아니 닮았을까? 형님을 좀 따라 배우쇼” 시집와서 시부모님의 본을 받아서인지 마누라까지 내게 스트레스 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려서부터 사촌 형을 라이벌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하도 긁어대니 형이란 존재가 육체적으로는 감사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불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은 도시 건설이 잘 안 되어서 아침마다 멀리에 있는 공중화장실은 만원이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들은 가까운 공터에다 자가용 간이 화장실을 짓고 문엔 자물쇠를 놓았었다. 우리도 사촌 형이 만들어준 화장실이 있어서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을 치르지 않고 조용히 볼일을 편히 보게 되었다.
   몇 년 후 우리는 또 이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단독 주택이었는데 비가 새서 지붕이 내려앉은 집을 헐값에 삿다. 나야 물러 터지고 몇 푼 안 되는 월급쟁이나, 융통성이 좋은 마누라의 작전이었다. 진에서 낙엽송을 대주기로 하고 기존의 집을 처분하여 공사비용을 해결한단다. 그리고 공사는 사촌 형에게 도움을 받는단다. 

  준비 작업이 끝나고 바로 공사가 시작되는 날 좀 한다하는 도끼목수와 지인들과 나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몰라 말 공사 반으로 어정거릴 때 멀리서 사는 사촌 형이 연장통을 들고 왔다.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한참 생각하더니 우선 견본 틀을 만들고 각 부속에 맞추어서 한 사람은 활을 가공하고 한 사람은 지지대, 한 사람은 들보를 가공시켰다. 그리고 나와 형이 조립하게 되었는데 마치 협력 업체를 둔 대기업이 라인이 돌듯하니 일이 착착 맡아 떨어지었고 판에 밖은 듯 똑같은 지붕틀이 잠깐 사이에 하나씩 완성되었다. 그 많은 일을 하루에 끝냈다.

   이렇게 시작된 공사가 형의 덕분에 진도가 빨랐다. 인테리어 공사까지 끝내고 보니 전 진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울 만큼 탈바꿈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마누라는 사촌 형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저런 남편이라면 업고 다니고 꿇어 엎드려 모시겠다” 하면서 살뜰히 대접하고 대해주었다. 내가 무의식 가운데 질투할 정도였다. 나는 왜 형의 반만큼이라도 못할까? 의식 형태에서는 형을 존중하고 재능을 칭찬해 마지않으나 무의식 간에는 항상 질투하였고, 총명한 머리와 다재다능한 재주로 내 앞에서 표현하는 것이 그렇게 실을 수가 없었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란 말이 그래서일까?

   사촌 형이 한국에 먼저 오고 몇 년 후 나도 나왔으나 “무 재”인 나는 적응하기 어려워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형은“어떤 직장이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그 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면서 내게 당부하고 지인을 통해서 직장에 소개해 주었다. 단순직이라 월급은 많지 않으나 나 같은 수준으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감인지 떡인지 해야 했다. 형은 눈썰미 좋고 솜씨 좋고 총명해서 일머리 빨리 잡으므로 항상 현장 기술직으로 다니다 보니 급여도 짭짤하였다. 주말이나 명절 때 만나면 돈 많이 버는 형이 산다고 항상 지갑을 먼저 열었다.

   몇 년 전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 현장 기술직에 일자리가 어려울 때 있었다. 그때 형이 일자리를 보아달라는 부탁 전화가 왔었다. 때마침 우리 공장에 기술 일꾼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망설이다 고민하던 끝에 잠재했던 무의식이 울컥하면서 눈감아 버린 적 있었다. 그것은 형이 두각을 펴고 잘해 나가는 것을 보기 싫었고 내 입장이 더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다.
   그 후 형은 일이 없어서 한동안 놀더니 다시 현장 기술직으로 다니다가 한번은 사고가 나서 허리를 많이 다쳤다. 산업재해로 치료 받았지만 몸이 그전 같지가 않다고 했다. 우리 회사에 입사했으면 사고가 아니 나지 않았을까? 하고 한동안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에 후회도 많이 했다.

   몹시 어두운 꿈, 그 속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빛은 사촌 형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나를 어둠 속에 남겨둔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따라잡지 못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으로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랫동안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로 그는 몇 번 내 꿈에 나타났지만 언제나 주변에서 맴돌 뿐 가까이 다가오는 적이 없었다.

  있을 때 잘했을 걸,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못난 자신을 질책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코로나 19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나도 몇 년 사이 고향에 돌아갈 것이니 그동안만이라도 건강한 몸으로 보내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빈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사촌 형 같은 동생으로 거듭날 것이다.

                  20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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