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화 수필가

   

현동화 약력: 흑룡강성 수화시 출생, 북경 상해 광주에서 10여년 간 여행업 종사. 2009년부터 한국으로 이주. 현재 화장품 유통업에 종사. 연변일보, 중국조선어방송넷, 해외문학, 대전중구문학 등에 수필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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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밤새도록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나는 여느 때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맑고 상쾌한 하늘은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나와 속삭이는 듯했다.

 

그렇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지금쯤 엄마 아빠와 동생네는 공항으로 향하고 있겠지? 조금 지나면 공항에서 뛰어노는 조카들의 모습들이 동생 모멘트에 육속 올라오겠지?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팔로 껴안고 매장 안을 서성거렸다.

 

부모님이 다시 여기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어느덧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세월은 나의 얼굴에 거미줄 같은 주름만 늘어놓았지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없다. 바뀐 하나 있다면 일주일에 한번 있던 휴일이 이젠 년에 번도 없어졌다는 . ...

 

분이 한국에 처음 오셨을 적엔 남편의 사업이 망해서 들어온 겨우 3개월 되던 때였다. 어린 딸애를 잠시 엄마네 집에 맡기고 우리 부부는 9개월 아들애만 안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때 중요한 일이 있어 잠깐 들어오셨던 엄마 아빠는 한국행이 처음이었지만 우리도 방금 터였고 아들애도 어렸을 때여서 겨우 경복궁과 동대문 밖에 보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아쉬움만 잔뜩 남겨놓았다. 가시는 공항에 바래다 드리면서 다음에 오실 때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의 곳곳을 보여 드리겠다고 굳게 다짐하였었는데...

 

고등학생인 딸에게 시간 매장을 맡기는 살짝 걱정이 되어서 나는 남편과 함께 아들애를 데리고 시간 맞추어 공항으로 나갔다. 하필이면 길에서 차가 많이 막히고 비행기가 일찍 도착한 탓에 우리의 만남은 내가 몇백 생각했던 감동의 순간도 누릴 없이 도망가는 사람들처럼 황망히 공항을 벗어났다.

나야 일이 년에 번씩 중국으로 들어가지만 부모님이 한국 오시기는 거의 만이라 나와 동생은 분의 이번 한국행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자고 미리 계획을 세웠다 바꾸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더러 매장에 일이 많으니 일에만 열중하라고 하셨다. 동생네는 먼저 시댁으로 가고 우리는 밤늦은 시간 에야 겨우 저녁상을 마주 앉아 회포를 풀며 여기저기 다닐 일정을 맞출 있었다.

 

나는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한다. 처음엔 사람이 근무했는데 둘이 연이어 나가면서 혼자서 매장을 맡아서 관리하게 되였다. 혼자 일하니 마음은 편하지만 사람 일을 혼자 해야 하다 보니 점심시간과 휴일은 매장에 반납하게 되였다. 다행인 것은 수입이 전보다 휠씬 많아졌을뿐더러 매장 안방에 작은 탁자와 침대를 놓고 초등학생인 아들애가 하교하면 퇴근 전까지 먹이고 숙제 시키고 퇴근할 때같이 집에 들어갈 있었기에 나로서는 휴일 없는 시간들을 2 동안 견뎌낼 있었던 것이다.

 

추석이나 설날이나 제삿날이 오면 아는 동생에게 매장을 부탁하고 명절 전날 새벽에 시댁에 가서 차례 음식을 만들어놓고 오후 늦게 돌아와서 일을 마무리하며 나는 항상 분망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매장에서 살다시피 일을 해왔지만 이번에 엄마 아빠가 보름 계시는 동안엔 반나절 이틀에 쉬면서 집식구가 같이 다닐 있는 계획을 미리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분은 어디로 다니 시는 내가 퇴근할 즘에야 집에 들어오셨고 보름이라는 일정이 절반이 지나가도록 내게 아무런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하루는 부모님께 한국의 전통음식을 맛보시라고 인당 십만 원이 되는 한정식집으로 모신 적이 있다. 엄마 아빠는 정갈한 밑반찬들을 드시며 맛있는 집으로 왔다고 칭찬하시다가 순서대로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삼색 , 잡채, 보쌈, 육회, 홍어삼합, 장어구이, , 갈비찜, 조개구이, 불고기, 대하구이, 전복 등에 놀라서 괜히 끼에 몇십만 쓴다고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마음이 아팠다.

 

사실은 일도 팽개치고 매일 분을 모시고 여행도 가고 좋은 데로 모시고 싶었지만 전문지식이 필요한 화장품 매장을 그냥 일당으로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겨우 마음 놓고 맡길 있는 아는 동생이 있긴 하지만 친구도 다른 곳에 출근하며 여유시간에 와서 도와주는 터라 애의 일정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부르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나는 나는 음식이라도 많이 드시라고 매일 맛집을 바꿔가며 고깃집, 횟집, 정식 , 뷔페 들로 없이 예약을 해댔다.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이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을 그것으로 나마 대신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계획대로 내가 쉬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엄마는 이번엔 동생이 애들을 보느라 친구들도 만났다며 조카들을 두고 나가라며 동생을 친구 모임으로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 2 만에 쉬는데 추운데 나가지 말고 낮잠이나 자라며 나를 침대 위로 쫓아냈다. 그렇게 엄마 아빠가 우리 자매와 손주 손녀들만 신경 쓰는 사이 한국 체류 일정은 어느새 열흘이나 훌쩍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잠깐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을 이용해 부모님이 드셔본 음식들을 조금 사드린 것을 제외하고는 애초의 거창한 계획과는 달리 우리는 끝내 그렇다 만한 가족여행 한번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설날 이후 부모님은 드디어 우리와 함께 나들이할 기회가 생겼다. 돌아가신 우리 삼촌의 남매가 서울에 계시는 숙모네 집에 와서 설을 쉬게 되어서 우리는 이튿날 같이 모여서 롯데월드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사촌동생 네도 애들을 데리고 왔고 엄마 아빠도 롯데월드는 가본 적이 없어서 우린 그나마 춥지 않은 실내 놀이터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날 매장을 잠깐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아침 출근 시간을 이용하여 식구들을 인솔해서 롯데월드로 갔다. 먼저 입장권을 구입하고 나서 늦게 도착한 숙모와 동생들을 만나서 기념사진을 찍고 롯데월드로 입장했다. 놀이기구를 조카들은 기뻐서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부지런히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중간에 앉아도 무서운 바이킹을 애들은 뒷좌석에 타고 앉아서 ~내려올 적마다 소리 지르며 만세를 불렀고 공중에 떠도는 풍선놀이기구를 타겠다고 시간 넘게 서야 한다 해도 아이들은 대기 줄에 뛰어가서 끄떡없이 버티고 섰다.


나는 이미 아주 지각을 하였지만 매장은 오픈해야 했기에 하루도 같이 없냐는 식구들의 아쉬운 눈길을 뒤에 달고 급히 일터로 돌아와야만 했다.

 

정신없이 시간 일하고 나니 저녁 식사시간이 되였다. 나는 매장 문을 잠그고 달려갔다. 앞에서 숨을 고르게 하고 들어갔지만 겨울날 얼굴이 땀벌창이 나를 식구들은 반가운 반면 안타까운 얼굴로 왔다며 얼른 먹고 가서 일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왔다 갔다 뛰어다니고 마음이 온통 롯데월드에 가있는 덕에 그날 매출은 결국 예상대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퇴근 집에 가서 보니 엄마 아빠는 조카들 뒤를 따라다니며 흥미 없는 쇼를 보느라 지치셨는지 평소 나를 기다리던 날들과 달리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노곤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항상 자식들을 위해서 한평생 살아오신 오늘도 조용한 데를 산책하고 싶었을 테지만 너네가 좋으면 좋은 거라며 내색 않고 따라나선 분명했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 공항으로 마중 나간 어제 같은데 벌써 공항으로 다시 식구들을 떠나보내야 시간이 다가왔다.

공항에서 보딩패스 받고 짐을 부친 출국심사를 받기 우리는 잠깐 공항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떠나기 한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조카들을 돌보는 엄마 곁에서 서성이다 결국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성격 급한 아빠가 나더러 어서 들어가서 일하라며 출국장으로 향했다. 엄마는 이모랑 헤어지기 싫다고 울먹이는 조카의 손을 잡고 말없이 아빠의 뒤를 따랐다. 동생네도 묵묵히 뒤를 따랐고 우리는 그렇게 이별이라는 순간을 맞이했다.

 

구부정한 분의 뒷모습은 언제 다시 온다는 약속 없이 멀리로 걸어가신다. 드디어 눈가에 고였던 뜨거운 것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어린 나를 업었던 뒷모습이 이젠 서글픔을 업고 내게서 멀어져 간다. 눈물이 끊어진 구슬 마냥 쏟아져 내렸다...

 

생각해 보면 보름 동안 부모님은 내가 퇴근 모시는 대로 따라 주셨다. 시키는 대로 드셨다. 사실 어떤 맛집은 별로였던지 분명 젓가락을 대지 않았는데 얼굴을 바라보며 맛나게 드셨다고 하셨다.

 

어쩌면 분은 알고 있었다. 내가 좋은 곳으로만 모시는 , 그래야만 편했을 마음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사양은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밤중엔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봉투를 넣어 놓으셨다. 짜증 섞인 나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척하시면서 돌려보낸 봉투는 또다시 주머니로 돌아왔다...

 

불효스럽게도 쉬는 없이 일하는 분께 보이고야 말았다. 설마 하셨을 테고 놀라셨을 텐데 산을 보시며 잘한다고 칭찬만 해주셨다. 아파지는 마음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신했으리라. 맑게 웃고 계셨지만 마음 자락은 분명 저리셨을 것이다...

 

이젠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눈물 속에, 인파 속에 묻혀 분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구부정한 뒷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져 가슴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아빠가 속이 불편한 알았더라면 임금님이 드셨다는 수라상보다는 손으로 끓인 청국장 그릇이 낫지 않았을까. 엄마가 쇼핑을 좋아하는 알면서도 팔짱 끼고 시장 한번 가보지 못한 것도 깊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여태껏 엄마 아빠께 뒷모습만 보였던 불효녀였다. 곳으로 학교 , 졸업 곳으로 직장을 찾아 떠날 , 그리고 멀리 여기 한국 땅으로 살려고 ... 내가 친정 갔다 적마다 뒤돌아 보면 묵묵히 서서 손을 흔들어주던 분은 오늘은 내게 뒷모습만 보이며 한번 돌아 보시고 가신다...

 

분의 뒷모습에서 이는 물결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돌아보지 않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분이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와 나에게서 보고 싶지 않았을 무언가를 우리 서로가 너무나 알고 있었기에...
 

2019.12 .20 연변일보 발표작

 

 

            2

고마운 사람들

 

 

 

딸애를 한국에 데려올 때는 12살이 되던 해였다.

 

남편의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말리면서, 고작 태어난 지 9개월인 아들애를 안고 우리는 덜컥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때인지라 당시 우리는 8살이었던 딸애를 잠시 친정집에 맡겨두고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삼 년 지나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기에 당시 한국어를 전혀 못했던 딸애를 데리고 한국으로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한국에서 남편의 일도 차츰 자리가 잡히고 우리가 겪었던 경제 위기의 먹장구름도 거의 걷혔을 즘에 우리 부부는 드디어 딸애를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딸애를 데리고 대안학교로 찾아갔었다.

 

선생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시면서 친절한 상담을 진행하던 그중 선생님이 지리상 위치로 왕복 두 시간 넘게 전철로 이동해야 어린 딸애가 걱정되어 교육국에 전화를 지금 살고 있는 동대문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시 문의하라고 상세하게 방법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여기저기 문의하고 뛰어다닌 끝에 다행히도 처음 계획이었던 집에서 거리가 엄청 대안학교가 아니라 근처에 있고 걸어서 십분 거리인 초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로 입학하던 우리는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딸애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 후 교장선생님이 애써주신 덕분에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딸애 옆에 한중 2개국어를 하시는 번역 선생님이 나란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도와주게끔 배정이 되였다.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에 우리가 비용 부담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여쭤봤더니, 교장선생님은 이건 교육국에서 해주시는 거라 어떤 비용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며 애가 한국어를 최대한 빨리 배우게끔 집에서도 한국말을 주로 사용하며 도와달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렇게 번역 선생님은 옹근 일 년을 딸애 옆에서 공부를 도와주셨고 학교와 집에서의 가르침 끝에 딸애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아이로부터 몇 마디의 어려운 발음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 해도 남들이 믿을 있을 정도로 우리말을 유창하게 쓰는 아이로 성장했다.

물론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고는 말할 없다.

 

다들 걱정하듯이 나도 한국어를 못하는 딸애가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고 혹시 어느 학교나 있을 법한 왕따 문제가 우리 한데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잔뜩 긴장해 있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내가 걱정하던 일은 학기가 끝나고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끝내 터지고 말았다.

 

학기에는 오히려 애가 한국어를 전혀 못했기에 옆에 앉은 번역 선생님과 주로 대화를 많이 했고 방과 후엔 한국어 강습반을 다녔기에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별 탈 없이 무사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자 아이는 학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방학엔 아빠의 강도 높은 한국어 훈련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어 구사능력이 급속도로 늘어난 덕에 이젠 애들끼리 가끔씩 있을 법한 어지간한 말싸움은 쉽게 이길 있게까지 되였던 것이다.

 

어느 날 귀에 자주 들리던, 몇몇 친구를 돌아가면서 왕따시키던 여자애가 그날부터는 불운의 주인공 자리에 딸애를 올려놓았다. 여자애는 하교 집에 오려는 딸애를 체육 강당에 부르더니 중간에 의자를 놓고 다른 애들에게 듯이 다섯 명이 둘러서서 심문 아닌 심문을 했다고 한다. 그 애의 등쌀에 무서워 딸애와 친해지려던 명도 "그래 그때 일은 네가 옳지 않았어."라고 하며 있었던지 없었던지도 몰랐던 딸애가 생각나지도 않는 일들을 끄집어 내어 청문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몇 마디 듣던 딸애는 화가 나서 시비를 가르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담대한 애라도 한 명이서 여러 명을 상대하기는 무리였고 하물며 이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반년 밖에 딸애인 지라 아이들을 더는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이었다. 매일매일 그날에 있었던 일들과 학교에서의 학습 정황을 엄마 아빠에게 말하던 과정은 우리 집의 빼놓을 없는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어김없이 그날 있었던 일이 터져 나왔고 슬픔을 참고 참았던 딸애의 눈물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딸애는 엉엉 울면서 우리 모두 중국으로 다시 가면 되냐고 떼를 썼다.

 

그동안 엄마 아빠와 같이 있기 위해서 참고 있었지만 엄마처럼 어릴 때부터 한국어 중국어를 자연적으로 같이 쓰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우기엔 너무 힘들다며 어릴 엄마처럼 우리말 학교에 다니게 한 게 아니고 중국 학교에 보냈냐고, 집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춰서 중국어로 대화했냐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눈치 보고 힘들었던 날들을 딸애는 눈물로 호소했다.

 

 

나도 어릴 전학을 가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딸애 같은 경우는 새로운 환경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적응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나도 설음이 북받쳐 올랐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실컷 울었다.

 

이튿날 나는 일찍 일어나 딸애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나서 딸애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길에서 나는 딸애에게 말했다.

 

"애야, 어릴 적 엄마가 커서 자랄 적엔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았단다. 그기엔 우리의 뿌리를 잊지 말라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세워놓은 우리말 학교를 쉽게 다닐 수가 있었어. 하지만 몇십 년 지난 우리는 중국의 대도시에서 생활했었기에 조선족 학교가 없어서 하는 수없이 너를 중국 학교로 보낼 수밖에 없었단다. 물론 다른 집들은 집에서라도 한국어를 따로 가르치지만 그땐 엄마가 여행사 일로 출장을 자주 다니다 보니 집엔 봐주시던 한족 아주머니가 대부분 시간을 너와 함께 있었기에 너도 한국어를 전혀 배우지 못했고... 엄마가 일에만 신경 쓰다 보니 우리 딸한테 너무 미안하구나... 그래도 얘야, 어려운 상황일수록 우리 힘내고 이젠 한국어도 잘하기 시작하니 열심히 해보자. 엄마가 지금 교무실로 가서 어제 상황을 말씀드리고 선생님들과 상의해서 좋은 해결책을 찾을 테니 걱정 말고 학교 다니자."

 

딸애는 힘 있게 머리를 끄덕였고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학교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담임선생님과의 짧은 상담 교장선생님의 교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마침 학교 주임으로 계시던 홍 선생님을 만나 먼저 상황을 말씀드렸다. 홍 선생님은 얘기를 듣더니 "어머님, 걱정 마세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어머님이 바로 이렇게 찾아주시니 저희가 모르던 것도 알게 되였고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나의 손을 잡고 토닥여주셨다.

 

선생님께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나의 마음은 역시 불안했지만 원래 학교에서 엄하시기로 소문난 선생님이기에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 들어온 딸애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기쁨에 찰랑거렸다.

 

"엄마, 오늘 애가 애들 몇을 데리고 부르다가 앞에서 기다리던 홍선생님한데 불려 교무실로 가서 엄청 혼났어. 그리고 애한테 따돌림당했던 다른 애들도 날 보고 엄마한테 일찍 얘기하길 잘했다며 자기네도 무서워서 감추지 않고 바로 엄마나 선생님께 얘기했더라면 괴롭힘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이제부터 친하게 같이 다니 재."

 

그날 저녁 딸애는 개선장군을 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일이 있은 후로 딸애는 주위에 친구들이 점점 많아졌다. 딸애도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만 갔다.

 

초등학교 6학년 딸애가 굿네이버스 편지 대회에서 한국어로 편지가 3등 상을 받았다. 딸애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기쁘게 상장을 안고 집으로 왔다. 그 후 딸애는 중학교에 올라가서 한국어 중국어 이중 말하기 대회에 참가해 유창한 한국어와 중국어를 뽐내며 대회 동상을 받아서 우리에게 한결 탄탄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했다.

 

딸애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백일장에서 그동안 갈고닦아온 한국어 실력으로 은상이라는 크나큰 영광을 거머쥐게 되였다. 그날 우리 집은 완전 축제 분위기였고 엄마 아버지와 동생까지 멀리서 딸애를 축하하느라 하루 종일 문자가 빗발쳤다. 그리고 얼마 청춘 노래자랑 예선에서 통과된 딸애와 아들애는 본선에서 신나는 트로트와 댄스 실력으로 관중들의 힘찬 박수소리와 호응을 얻어 인기상을 받았다. 상과 더불어 학생들에겐 상당한 액수의 30만 원이라는 상품권을 받게 되었다.

물론 모든 성과가 딸애의 타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루어지지 않았겠지만 중요한 것은 학교와 교육국 그리고 선생님들의 따뜻한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절대 거두지 못했을 결과물들이었다.

 

집에서 한국어 기초부터 확실히 가르치기에 항상 힘을 보탰던 남편, 누나와 투덕투덕하면서도 말동무를 해주어 제일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었던 아들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꾸준한 응원을 해주셨던 봉사활동 기간의 선생님들, 그리고 통통했던 딸애에게 닭다리 한 개라도 얹어 주시며 한국말 진짜 예쁘게 잘하는구나 하며 힘을 북돋우어 주셨던 학교의 급식 아주머니들, 학년마다 바뀌었던 수많은 담임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와 가르침 속에서 딸애는 어느 새 당당하고 활기찬 3 졸업생이 되였다.

 

며칠 전 딸애와 대학 원서를 넣었다. 어떤 대학에 어떤 전공으로 것이냐 하는 물음에 딸애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국어 국문과에 넣을 거예요. 체계적으로 표현력과 역사, 정치, 문화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워서 한국에서나 어디에서나 우리말과 글을 전파할 있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백일장 은상 때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아니고?”

 

작가도 좋지만 여기 와서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들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분들은 인생에서 정말 고마운 분들이에요. 앞으로 나 같은 학생들이 많아질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분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딸애의 말에 나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서들을 넣고 딸애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이때, 나는 앞으로 국어선생님이 되려는 딸애의 소원 또한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한테 고마운 존재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 도움과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딸애의 마음을 기도에 살포시 얹어본다.

 

PS: 글을 마무리하려는 때에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딸애가 서울여대 자율전공학부(인문사회계열)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소원이 전달되었는지 딸애는 좋은 성적으로 첫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이미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딸애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노력해 준 고마운 식구들에게 삼가 글을 바친다.

 

 

                3

다리 위의 할아버지

 

 

내가 9 동안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다.

 

다리는 전철역으로 통하는 다리인데 내가 출퇴근하려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다.

 

다리 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낡은 우산을 반쯤 펼친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할아버지 분이 계신다.

 

낡은 박스라도 깔고 앉았으면 편하시련만 항상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지만 지나갈 적마다 마음이 살짝 괴로워서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할아버지 옆에는 더러워진 두꺼운 비닐이 덮인 박스가 하나 있었는데 안에는 정체 모를 물건 개가 놓여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그것이 볼펜과 다이어리 같은 것이라는 어렴풋이 수가 있었다.

 

파는 물건인지 하나 사드리고 싶어도 물어보기도 저어되고 돈이라도 드렸다가 그게 실례나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같은 성격의 많은 사람들은 요즘같이 본인이 먹고사는 것조차 고민인 힘든 세상이기에 그냥 바쁜 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떤 날은 찐빵 하나를 들고 앉아 계시는데 주위에는 비둘기 마리가 할아버지가 뜯어주는 부스러기를 부지런히 주어 먹고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자신보다 비둘기를 배불리 먹이는 듯했다.

 

지난겨울은 무지 추웠다. 추운 겨울에도 할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리 위로 출근하셨다.

 

그러던 어느 하루 나는 할아버지 옆에 노숙자 아저씨 명이 나타난 발견했다. 노숙자 아저씨는 박스를 접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고 앞에는 모자를 벗어 놓았는데 지나가다 얼핏 보니 동전 개랑 원짜리 장이 들어있었다. 옆에는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냄새 또한 너무 심하여 급히 저쪽으로 돌아갔다.

이튿날도 지나가면서 보니 할아버지는 한결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았고 아저씨는 어제 모자 안을 채웠던 자신감을 빌어 한발 나아가 사람들이 지날 적마다 굽 석 인사를 하며 모자를 가리켰다. 모자 안에는 어제보다 많은 돈이 차 있었고 그날은 오천 원짜리도 보였다.

 

그렇게 달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고 항상 같은 같은 자세로 있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노숙자 아저씨는 앞에 놓은 모자 외에 머리 위에도 모자가 늘었고 첫날 입던 얇고 누비 솜옷은 두껍고 뜨뜻한 패딩으로 바뀌었다. 옆에 굴러다니던 소주 병은 요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며칠 나는 우연히 다리를 지나가기 위해 기다리던 신호등 밑에 나타난 전에 없었던 화살 표시가 그려져 있는 보았다. 마침 신호등도 바뀌었던 차라 호기심에 화살 표시를 따라 그은 줄을 보며 걸어갔다.

 

나의 발길을 멈추게 곳은 노숙자 아저씨의 앞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깍듯이 굽 석 인사를 하는 아저씨는 모자를 가리키며 살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날 나는 저도 모르게 쭈그리고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두고 아저씨의 모자 안에 돈을 넣고 야 말았다. 마술에 걸린 돈을 넣고 걸어가는 나의 마음속엔 형언할 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화살 표시를 그리던 노숙자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없는데 모자만 남아있는 이상하게 여겨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있다가 조쯤 맞은켠 신호등 옆에서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쓸고 있는 노숙자 아저씨를 발견했다.

 

아저씨는 등에 구청 글씨가 있는 옷을 입고 있었고 열심히 빗자루 질을 하셨다. 그러다 모자에 누가 넣어주면 달려가서 굽 석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모자 안에 돌덩이를 눌러 바람에 모자가 날려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달려가서 쓸던 길바닥을 열심히 쓸었다. 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칼 바람이 몰아치던 다리 위에도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다리 위를 지나던 그날은 갑자기 허전해진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계셨고... 그럼 무엇 때문일까?

 

그랬다. 노숙자 아저씨였다. 노숙자 아저씨가 사라졌다.

 

그날 사라진 노숙자 아저씨는 그 후 다시는 다리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노숙자 아저씨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확신하던 , 그날도 역시 다리를 지나가기 위해 신호등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밑을 내려다보던 나는 문득 익숙한 화살 표시를 발견했다. 그럼 그렇겠지, 노숙자 아저씨는 어디 가서 일을 하다 힘들어서 다시 본업을 시작했나 보다. 그리 생각하던 때에 신호등이 바뀌고 나는 자연적으로 화살 표시를 따라 걸어갔다.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곳에 이르러, 문득 나의 눈을 의심했다.

 

줄이 끊기고 작은 화살 표시가 있는 곳은 뜻밖에도 할아버지의 앞이었다.

 

그렇게 세월 똑같은 옷과 똑같은 동작으로 앉아있던 할아버지, 오늘은 드디어 바뀌었다. 옷도 바뀌었고 오늘은 반은 쭈그리고 반은 턱에 살짝 걸터앉은 것이다.

 

앞에 놓은 박스에 오랜 시간 덮어놓았던 두꺼운 비닐은 조심스레 열려있었고 개의 다이어리와 볼펜 옆에는 작은 팻말이 꽂혀 있었는데 그 기에는 작지만 굵게 또박또박 눌러쓴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전 백원만 보태 주시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순간 갑자기 심장이 꿈틀했다. 주저 없이 볼펜 하나를 구입하고 나서 나의 그날 점심값 5 원을 할아버지의 박스 안에 넣어드렸다.

 

며칠이 지난 아들과 그곳을 지나려던 아들이 할아버지 쪽을 보더니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입을 열었다.

 

"엄마, 할아버지 며칠 티브이에 나왔던 할아버지야! 다리에 엄청 오래 앉아계셨대. 저녁엔 집에 가시는데 침대도 온돌방도 없는 집과 사이를 막아놓은 곳이었어.”

 

그래?”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말을 하신대. 그리고 시설이나 그런데도 들어가신 대. 할아버지는 본인의 힘으로 벌어서 사시는 편한가 . 엄마, 근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저렇게 바뀌었지? 바뀐 보니 이제 지나면 돈도 많이 모으고 좋은 집에 이사 수도 있을 같아!"

 

그래, 그리되실 거야.”

 

나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고 끄덕였다.

 

추운 겨울, 할아버지의 곁에 잠시 머물렀던 노숙자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서 꾸준함과 성실함을 배웠고 생존의 방법도 터득해서 드디어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리고 어쩌면 할아버지는 아저씨에게서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와 자기 어필, 소통 방식을 터득했으며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감사에 대한 표현을 해야 한다는 도리도 깨우친 것이 아닐까.

 

추운 겨울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했고 서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을 지켜본 나는 무엇을 깨 달었던가...

 

나는 아들애의 팔짱을 끼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모진 추위가 가셔지고 봄이 왔다. 다리 위는 이미 완연한 날씨였다. 나는 벚꽃 같은 눈웃음으로 할아버지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할아버지!”

 

2019. 4 송화강 4 발표작

 

 

 

     4

 처  음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처음이라는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 기억 속에 살포시 자리 잡고 있다.

 

세상에 처음 고고성으로 존재감을 알리며 태어났을 , 홀로 서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 엄마 아빠 하고 처음 불렀을 , 초등학교 입학 날이 한 달 지난 어느 날, 살금살금 아빠 뒤를 밟아 처음 학교에 가보고 너무 좋아서 그날 바로 시험 보고 입학했을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게도 처음이 있었고 지금도 가끔씩 인생에서의 많은 처음들을 느닷없이 꺼내볼 때가 있다. 때론 하트 거품이 부드러운 따뜻한 카페라테처럼, 때론 쓰디쓴 아메리카노처럼, 때로는 달콤한 캐러멜마키아토처럼 잔잔하게 혹은 달고 진한 추억에 걷잡을 수없이 녹아들 때가 많다.

 

그렇다면 처음은 누구에게나 신선한 것일까? 새로울 때도 아름다울 때도 아플 때도 감격일 때도,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수많은 처음들이 내게 알록달록 색다른 느낌들을 전달해 주 처음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 종합세트인 것 같다.

 

 

90년대 , 학교 문을 나와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나에겐 처음들이 너무 많았다. 직장이었던 여행사에 취직한 후 한 달 만에 가이드시험도 처음, 가이드 증을 목에 것도 처음이었다.

 

34 일정의 팀을 받았을 너무도 긴장한 탓에 처음 마이크를 잡은 떨리는 손과 그리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목소리에 위축된 나머지 자리에 풍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마운 손님들 덕에 무사히 첫 팀을 마쳤고, 그때 처음으로 손으로 돈을 만져보았다.

 

아마 그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팀을 받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팀은 북경에 있던 내가 기차를 타고 상해공항으로 가서 팀을 마중해 백두산, 도문, 장춘 관광 일정을 마치고 심양으로 보내는 팀이었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때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본 것이다.

 

회사에서 막내였던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많이 기울여 듣는 편이었다. 혼자 처음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나한테 선배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신발을 벗고 비행기에 오르는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웃기려고 그런 번연히 알면서도 괜히 걱정이 되어서 비행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발만 유심히 주시해 보았던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사실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비행기만 처음 타게 아니라 그때의 녹색 기차(녹피차) 침대칸도 처음 타보게 것이었다.

 

침대 칸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상해 기차역에 도착하니 바로 공항으로 이동하라며 회사에서 기차표를 주었다. 기차표를 들고 나는 열차에 올랐다.

 

학교 다닐 돈이 아까워 열몇 시간씩 앉아서 다녔지만 직장에 다니게 되니 회사에서 침대차도 마련해 주고 참으로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선배님들은 본인 돈을 털어서 비행기를 타고 다녔지만 한낱 시골 처녀였던 내게는 처음 타보는 침대차도 너무나 사치였고 만족스러웠다.

 

흔들거리는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고 가방을 열었지만 세면도구만 챙기고 수건은 넣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북경에서 가이드 실습 때와 현지 팀 오성 급 호텔에서 자면서 손 닦을 수건까지 8개의 수건이 올려져 있는 자주 보았던 지라 수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당황해서 복도 켠 창문을 쳐다보던 창가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수많은 수건들이 눈 안에 들어왔다. 수건 생각만 하다 갑자기 보이는 수건들에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가 미처 다른 생각을 새도 없이 손은 벌써 그중 제일 깨끗해 보이는 수건 하나를 낚아 내리고 있었다.

 

아마 그때 무의식 간에 나는 수건들이 호텔처럼 침대 칸에서 제공해 주는 수건으로 알았던가 보다.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맞은 켠에 앉았던 아저씨의 황당한 눈길에 나는 흠칫 놀라서 수건을 떨어뜨릴 했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수건은 것입니다. 쓰셔도 되지만 말은 하고 쓰시는 예의가 아닌가요?"

 

아저씨는 정색한 표정으로 조용히 나에게 말했지만 목소리에서 차 칸을 쩌렁쩌렁 울리던 방송 소리보다 위압감을 느꼈고 아저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쥐구멍, 아니 아니 개미구멍이라도 있으면 어서 비집고 들어가 제발 머리만이라도 파묻고 싶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반응에 웃더니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욕의 기차를 빠져나와 30여 명의 팀을 인솔할 계획으로 홍교공항 국제선에서 겨우 한국 손님들을 픽업한 국내선 이동까지의 길을 나는 물어서 갔다. 차가 밀려 늦게 나왔던 상해 현지 가이드와 우여곡절 끝에 만났지만 그분도 나 같은 왕초보라 당시 단체 짐은 밖에 있던 단체 카운터에서 보내야 하는데 위치를 못 찾아서 우리를 안으로 바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다른 가이드들은 현지 가이드가 짐을 밖에서 부쳐주고 보딩패스를 받아서 안으로 들여보냈던 지라 다들 좌석에 앉아 여유작작 여유를 부릴 얼굴이 빨갛게 되어 이리저리 묻고 묻고 뛰여 다니면서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짐을 부치고 보딩 받고 손님들을 안내하여 비행기 탑승할 때까지 가슴은 방망이질 두근거렸다.

 

처음 많은 손님들을 모시고 비행기를 탔지만 아주 다행스러웠던 그때 손님들이 나처럼 처음 비행기를 타고 효도관광으로 여행 오신 분들이었다.

 

"미스 현은 비행기를 많이 타봤죠? 우린 상해로 처음이고 지금이 두 번째네요" 하는 말씀에 속으로 뜨끔했지만 나는 아주 많이 타본 것처럼 그들을 안심시켜 드리려고 베테랑인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느라 왼쪽 얼굴근육까지 실룩거릴 정도였다.

 

당황한 나는 왼손으로 뺨을 슬쩍 감싸며 "~ 비행기는 멀미가 심해서... "라며 딴청을 부렸다.

 

잠깐씩 조는 척하다가, 기내식이 나오자 집에서 가져온 고추장을 빵에 발라서 맛있게 나눠 드시는 할머니들을 곁눈질도 하다가, 옆에 앉아 계셨던 할머니의 옛날 채소 팔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그머니 관광지에 관한 가이드북도 꺼내 보던 와중에 연길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땐 스루 가이드였던 빼고 도착하는 현지마다 현지 가이드가 따로 나왔었기에 후부터는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있었다.

 

저녁식사 호텔로 손님들을 모시고 나서 현지 가이드와 로비에서 잠시 이튿날 일정을 상의하던 그분은 내게 이게 첫 팀이니 많이 도와달라며 이렇게 한마디 덧붙였다.

 

백두산 여러 번 올라가 보셨죠?”

 

더는 아는 척할 수가 없어서 나도 처음이고 뒤에서 조율할 테니 기사님과 상의하면서 일정을 원만하게 끝내자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튿날, 관광버스 안에서 춤추며 노래하며 몇 시간을 달리고 봉고차를 갈아타고 반 시간을 달려 겨우 백두산 정상 밑에 내렸지만 하루에도 스물네 번 변한다는 현지 날씨는 갑자기 비가 내리고 구름이 가려서 산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차에 가이드 몇이 다가와서 정상에 올라가서 위에선 천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했고 우리 가이드도 따라서 올라갔다. 얇은 일회용 비옷이 바람에 반은 날려 옷은 젖었고 우린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손으로 흙을 짚고 가파른 정상으로 올라갔다.

 

결국 직접 육안으로 확인한 결과도 똑같았다. 위에도 마찬가지로 한치 코앞도 겨우 보일 정도였고 바람도 마치 나를 천지 속으로 날려보내려는 세차게 기승을 부렸다.

 

 

몇몇 차량의 가이드들은 이런 상황에선 기다려도 금방 그칠 비바람이 아니라고 했고 오늘은 천지를 보지 못하고 온천 욕이나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우리는 다시 거꾸로 기다시피 하산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십분 도 안되어 내려올 있는 거리지만 그날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한 손으로 산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서로 붙잡고 내려오느라 우리는 너무 힘겨웠다.

 

열몇 걸음만 남자 우리는 서로 손을 놓으며 농담들을 했다. 내려가면 손님들이 실망하실 텐데 여기서 굴러서 내려가면 차에 가서 설명이 길지 않아도 설득력이 훨씬 높을 것이라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농담이 끝나기 바쁘게 급 바람이 불어왔고 앞의 돌멩이에 걸채어 의도치 않게 진짜 굴러서 내려가 버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를 가이드들이 잡아 일으켰고 우리를 기다리던 몇몇 손님들도 달려와 나를 부축해서 차로 데려갔다.

 

정상은 진짜로 위험하다는 일부러 행동으로 보여줬다면서 가이드들은 그런 내가 대단하다는 황당하다는 표정들이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30여 명을 이끄는 팀의 총 인솔자였던 나는 손님들께 나약한 가이드로 보이기 싫어서 팔다리의 아픔을 깊숙이 감춘 정상 쪽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드렸다.

 

차에서 기다리던 손님들은 백두산 천지를 못 보게 된다는 아쉬 움보단 비옷이 찢겨 날아가고 손과 옷이 흙 범벅이 우리 가이드가 안타까웠던지 그래도 애썼다며 운이 아니니 온천에 갔다가 호텔로 일찍 돌아가도 되냐는 우리 요청에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게 우리 팀은 반수는 돌아가고 반수는 남아서 행여나 걷히게 비바람을 바라보며 요행을 기다리는 다른 팀들을 뒤로 결연히 다음 일정으로 이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오매불망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달려온 분들이었지만 우리가 애쓰는 모습을 어떡하나 예쁘게 봐주고 싶은 고운 심성을 가지셨기에 일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날 저녁 산에서 기다리던 남은 팀들과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종일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결국은 천지를 못 보고 시간을 지체해 다음 일정인 온천욕도 못하게 다른 할아버지들의 수다를 우리는 들을 있었다. 다음날 비록 백두산 천지는 보지 못했지만 불가능한 일정을 빨리 접고 다음 일정을 진행했기에 뜨끈뜨끈한 온천욕과 더불어 온천에서 익은 계란까지 맛보며 여유를 즐길 있었던 우리 팀의 만족도가 옆 팀 할아버지들의 만족도에 비해 훨씬 높아진 것도 며칠간 고생했던 우리에겐 보상이었다.

 

우리 팀은 동창들이 모여서 효도 관광인 지라 그중엔 미국에 지사를 할머니도 계실 정도로 직업이 다양했다.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심양 공항에서 헤어지던 어떤 할머니들은 78 모시고 다녔던 나와의 이별이 아쉬워서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중 미국에 지사를 두고 왔다 갔다 하시는 그분은 뒤쪽으로 가만히 나를 부르더니 수양딸로 삼고 싶은 마음이지만 너무 멀리 있어 언제 볼지도 모르니 나중에 기념품을 보내주시겠다며 기어이 주소를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회사로 도착한 아주 국제 소포를 받아안게 되었다.

 

그 안엔 단아한 고급 한복과 정장 여러 벌이 들어있었고 그 외에도 그때 당시 유행했던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같이 들어있었다.

 

회사 선배님들이 모여와서 한복 가격이 150만은 훌쩍 넘겠다는 모두 유행하는 옷 들이란 어쨌든 좋은 거라는 내게 설명해 줬고 덕을 입어서 인지 나는 매번 일정이 끝날 때마다 수고했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손님들의 선물 소포를 자주 받게 되였다.

 

그렇게 십여 년 나는 많은 마음씨 고운 분들 덕에 명품 화장품과 고급 향수는 한 번도 적이 없었고 옷도 세련되고 예쁜 걸로 입을 있었다.

 

팀이 끝나고 두 번째로 상해에 갔을 그래도 마음이 많이 편안했는데 그게 처음 항주, 소주, 서안 쪽으로 이동하는 팀이라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반년 동안 긴장하고 긴장하며 처음 가보는 관광지들을 헤매고 다녔다.

 

어느덧 북경 고궁박물관엔 발자국이 몇백 번도 찍혔고, 팔달령 만리장성 해발 880미터까지 손님을 찾아 몇 번이나 뛰어 올라갔다 내려왔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나는 일 년에 백두산 천지를 열 번 넘게 다니게도 되였고 일주일에 비행기를 서너 번씩 타면서 가끔 몇 시간 연착되는 비행기 시간에 손님들이 공항 측 해석을 듣다 못해 N번째로 소리 지르며 통역해달라고 짜증 내는 타이밍도 묘하게 가려내고 화장실로 피신하는 센스도 배웠다. 내가 그렇게 여유까지 부릴 정도가 줄은 아마 첫 팀을 하면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 동안 중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베테랑이라는 칭찬이 따라붙을 정도로 자신감이 몸에 처음도 있었고 좋은 , 궂은 가리지 않고 모두 받은 덕에 호주머니가 불룩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호기를 부린 그런 처음도 있었다.

 

수많은 처음을 거치고 생활에 익숙해져서 일상이 무렵, 애들의 교육과 남편의 사업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가이드 생활은 점점 뜸 해지다가 장기화되는 여행 업의 불황으로 완전히 접게 되었다.

 

나는 이상 여행 단체 인솔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한국에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다른 처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후에도 수많은 처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데이트에 설레던 그날처럼 머지않은 어떤 또한 처음으로 행복이 내리는 딸아이의 결혼식장에 서있을 것이고, 내가 처음 엄마가 그날처럼 손주를 안는 감격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처음들이 모여 나의 인생의 페이지들을 달기도 쓰기도 오색영롱한 추억으로 장식하게 것이다.

 

신기했던 십대의 처음들,

용감했던 이십대의 처음들,

도전적이던 삼십대의 처음들,

 

그리고 아직도 나에겐 처음이 많구나를 느끼게 했던 사십대의 처음들

 

많은 아름다웠던 것도 슬펐던 것도 나의 처음들이고 소박한 나의 일상들 속에서 가끔씩 나를 울리는 삶의 한 조각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억 속의 처음이 아름다워지고 슬펐던 것들도 모두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아니다.

 

나는 다만, 수많은 처음들을 거치면서 앞으로의 오십 대, 육십 대, 칠팔십 대에도 나를 찾아와 빼꼼히 들여다보는 처음들을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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