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동북아신문 '백두산문학상' 공모작품

차례 : 가을의 문턱, 바닷가 노송, 철딱서니, 강아지풀, 와송, 도둑게, 인공지능 알파고, 대숲에 이는 바람, 고임돌, 물거품, 군담, 지게와 바지게, 가을의 길목, 알고 싶어요, 낙동강하구에서.

박상진 시인

박상진 약력 : 경남 통영 출생. (사량도). 『부산시인』(2010년 봄호) 신인상 당선. 시집 『다 쓴 공책』,『사량도 아리랑』,『바람과 파도의 거실』. 작가와문학상 수상. 부산문인협회 회원, (사)부산시인협회 회원, 새부산시인협회 회원, 사하문인협회 회원.
박상진 약력 : 경남 통영 출생. (사량도). 『부산시인』(2010년 봄호) 신인상 당선. 시집 『다 쓴 공책』,『사량도 아리랑』,『바람과 파도의 거실』. 작가와문학상 수상. 부산문인협회 회원, (사)부산시인협회 회원, 새부산시인협회 회원, 사하문인협회 회원.

가을의 길목
                           

거품 내뿜던
가마솥의 김보다 더운 바람
밤낮 없이 놀다 간 자리
햇살보다 따갑게 쏟아지던
매미소리 머물던 곳
제 길 찾아 구르던 은행의
잔망진* 발길에 베인 구린내
어느새 가을인가

저녁노을 머물다 떠난
창을 연 스산한 기운
부채질 밀치고 들어앉힌
손끝에 닿을 듯 한 상현달 
갈바람에 이슥토록 닦인 별빛에  
귀뚜라미 사랑노래 가득한 밤
마음 한 자락 접힌 여기
어느새 가을인가


*잔망진; 맹랑하고 경망스런.


 바닷가 노송
 

긴 세월
마디마디 품어 안아
힘줄 불거진 굽은 가지

묻어나는 사연
가슴에 밟혀
발길은 돌층계 붙잡는데

무딘 붓으로
찍어 눌러 잎 그린
하늘 파고든
숨 쉬는 수묵화

부질없는 물음이니
자갈밭 파도 소리
눈 감고 보란다

   
철딱서니
                      

철없던 그 시절
뜨거운 햇살이 이마 찌르고
군불 지피던 한 낮
*고옴다리 잡겠다며 치맛자락 붙잡고
생떼 부릴 적
“*갱물에 멱이나 감고 놀아라” 하실 때는
미워하는 줄 알았다

겨우 머리카락 한 올 얻어
싸리비 끝에 묶고
머리카락 한쪽 끝 파리 묶어
*앵오리를 외치며 냇고랑 둑길 쏘다니다
개선장군 되어 돌아오면
거친 손길로 얼굴 닦아 주시며
왜 그리 야단만 치시던지

새벽잠 아끼시며 공들여 찌른 비녀머리
다시 찌르는 것이 귀찮아서도 아니고
발길에 차이는 고달픔과 째다 만 모시 다발이
*두름밭 거름 무더기만큼 쌓여서도 아니라는 것을

낡은 나일론 그물 같은 후회가
삼복더위 껌처럼 붙어 떼어낼수록 칭칭 감는다

  *고옴다리; 잠자리   *앵오리; 잠자리 부르는 소리
  *갱물; 바닷물   *두름밭; 여름철, 마구간 대신 소를 매는 곳

 

강아지풀
                 

깡마른 담벼락 밑
이슬 말리는 강아지풀
하루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나의 발길 부른다

손끝의 만남으로
가슴에 전해오는 그 시절
동무의 목덜미에
솜털보다 부드러운 꽃술 문지를 때
화들짝 피었던 웃음은
이슬보다 깨끗했었지

꽃대로 쏙* 구멍 간지럽히면
참다못해
쩍 벌린 집게발로 사래 치던
그 쏙은 거울보다 솔직했었다
 
벌판이 아니면 어때 
누군가의 벗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삶이려니   


*쏙; 갯가재의 통영 방언.  


와송
                      

이웃을 마다하고
기름진 흙도 마다하고
기와지붕으로 가더니
이제는 절절 끓는
목 타는 비릉*이라

삶의 하루하루가
끝없는 도전이라지만
바짝 마른
한줌 흙도 흙이라고
바람에 흩날릴까
목숨처럼 움켜쥔 비릉꽃*

초목의 생태적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상 개척하는
그 의지 가상하나
속세 떠난
외로움은 어이할지

세상살이 고단타
밥 먹듯 곱씹어도
모질게 살아가는 너만 하랴
절벽 위 비릉에도
이슬은 내리겠지

*비릉; 바위.
*비릉꽃 ; 와송의 통영 지방 방언

 도둑게
                             

*정지문 틈새로
삶아 둔 보리쌀 소쿠리 넘보다
인기척에 줄행랑치던
그때를 못 잊는가

배고프던 시절
장맛비 속에
흙투성이 짚신과 치맛자락
냇물에 철벅철벅 씻던
초라한 백모님 미소에
거품 물고
양철통 긁어 대던 너의 처절한 몸부림
그때를 못 잊는가

할아버지 *낚잇대 끝에
꽁꽁 묶여 어쩔 수 없이
짠 바닷물 속 문어 밥이 돼야 했던
그 때를 아직도 못 잊는가

비 오는 돌담장을
아무 일도 없는 듯 만지작거리면서도
긴장한 눈망울에 어린 두려움
그때가 언젠데
이젠 너를 볼 때마다
*꽃밭등 안개처럼 오가는 얼굴만
아련히 떠 오른다

*정지문 ; 부엌문  *꽃밭등 ; 통영 사량도 산 이름
*낚잇대 ; 문어 낚는 대나무 장대


인공지능 알파고
                            

인간이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더니
그 기계가
인간을 돌볼 때까지는
그래도 기계였다

기계가
직관과 생각을 맛보려고
인간을 바둑판에 끌어들여
벌인 싸움판의 소용돌이에
집이 부서질 때마다
수 억겁의 술수로
스스로 배우고 터득하며
이 땅에 깃발 꽂으려 하는구나

기계가
많고 많은 수 중에
한 수라도 잘 못 풀어
만약에 삼강오륜을 놓친다면
인간은 밥그릇도 빼앗기고
밥풀떼기 쫒아 허둥대다
정체성도 존엄성도 사라져
허수아비처럼
껍질만 남을까 두렵다


대숲에 이는 바람
                            

낚싯대에 이끌려 철없이 들어가
대밭집 조모이* 호통에 냅다 달아났던
그때 같은 어둑한 대숲
즐비한 대나무 사이 하늘 가린 댓잎
때도 모르고 노닥거리는 갈바람소리

야위고 속 빈 멀대같지만
깊은 바다 속 비밀스런
조기나 민어의 속삭임도 들은 귀라
밤을 새워도 못다 할 잡다한 세상사    

장어나 낙지 살리던 이끼수
멧돼지 잡던 죽창부터 빨랫대에 포구총*
연살*과 그물 깁는 바늘대까지
댓잎마다 풀어놓는 수많은 사연
흠뻑 빠져 맞장구치는 갈바람

식기 전에 저녁 먹어라
수건 두른 비녀머리 돌담장 넘보며
몇 번이나 부를 때까지  
친구들과 타작마당*에서 놀던 때처럼
해지는 줄 모르고 재잘대는 댓잎

*조모이; 할머니.
*타작마당; 보리나 벼 탈곡하는 공용 마당.
*포구총; 팽나무열매를 장전하여 쏘는 대나무총.
*연살; 연의 뼈대.

 

고임돌
                           

크기와 고집 제 각각인
큰 돌 틈새 사이사이
등짝 밀어 넣고 웅크린 작은 돌

어떤 이는
아랫돌 방석삼아 덜거덕거리며
윗돌 받치는 시늉만
어떤 이는
긴긴 세월 눌림의 무게에
부서지고 튕겨져 나갈까 봐
다리 펼 수도
신음소리 한마디 낼 수 없는 굄돌

하잘것없이 뒹굴었을   
네가 아니었다면
파란 이끼 품고 반듯하게 서 있는
돌담도 없으려니
 
여태껏 외골수로 쌓아 올린
곰삭은 돌담에서
나는 과연 어느 돌인가

 
물거품
                          

바람 떠난
길 따라 저 하늘로
갈 길 바쁜 물거품

갯바위 부딪혀
통곡하는 파도가 애처로워
먼발치 줄지어
바라만 볼 뿐
바다 위에 해결책을
그렸다 지웠다 또 그려도
여전히 밥물 끓는 마음

살 붙이고 지낸 세월
한 두 해도 아닌데
날 새면 바위 얼굴 어찌 볼련지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빈 가슴만 동동 서성거린다

 

군담*
                       

뛰자 뛰자 하면서
발 묶어 놓고
마당 쓸고 도랑 치며
거기서 거기인
꿈만 꾸지
벽보고 앉아
손끝도 까딱 안하니
오늘 같은 내일뿐

자고나면 줄기차게
오늘로 오는 내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가기 전에
싸리 엮어 담 치고 꽃씨도 뿌려
향기로운 땀내 나면

행여 담 밖이
치자꽃 향기 같은 그날일지
신발 끈 동여매고 
첫새벽 대문 열어야지   

*군담; 쓸모없는 혼잣말

 

지게와 바지게
                            

지게 걸머지거나 바지게*를 져도 
가쁜 숨에 허리 굽는 것은 마찬가지  
지게는 혼자만의 짐을
바지게는 가장(家長)이란 짐을 지는 것

지겟가지에 바지이* 올린 순간부터
지겟등태 다 닳도록
의지할 것은 지겟다리와 지겟작대기뿐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짐

바람만 불어도 눈물 고이는  
석양에 서성이는 진이 빠진 바지게
어깨 짓누르는 바지이 군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척
숨 찬 황토비탈 터벅터벅 넘는다

*바지게; 바지이를 얹은 지게.
*바지이; 싸리나무로 엮은 반달형 지게용 발채.

 

가을의 길목
                       

거품 내뿜던
가마솥의 김보다 더운 바람
밤낮 없이 놀다 간 자리
햇살보다 따갑게 쏟아지던
매미소리 머물던 곳
제 길 찾아 구르던 은행의
잔망진* 발길에 베인 구린내
어느새 가을인가

저녁노을 머물다 떠난
창을 연 스산한 기운
부채질 밀치고 들어앉힌
손끝에 닿을 듯 한 상현달 
갈바람에 이슥토록 닦인 별빛에  
귀뚜라미 사랑노래 가득한 밤
마음 한 자락 접힌 여기
어느새 가을인가

*잔망진; 맹랑하고 경망스런.


알고 싶어요
                           

고작 탱자나무 이파리
먹고 자란 호랑나비는
보란 듯이
애정의 갈망에 몸부림치는 자
신방 차려주고

누구는 만물에게 자비를
누구는 내 몸처럼 아끼라는데
비누 몇 장 나올 이 몸은
소중한 남의 목숨 당연한 듯
수십 년 먹어도 되는 겁니까

욕심 없이 한자리 서 있는 
나무는 죽어 목재 남기는데
세상을 누릴 만큼 누린 호강에
철없이 우쭐댄 
나는 무얼 남겨야 합니까

힘차게 솟은 해 서산 넘어 갈 때
세상 바꾸고도 아쉬워
마지막 남은 힘
노을 붉게 물들이는데
물살에 흘러가는 나뭇잎 하나 
가야 할 참된 길은 무엇입니까

 

낙동강하구에서
                             

미쳐 날뛰던
빗줄기와 야합(野合) 독기품은 냇물
산모퉁이 종아리 물어뜯고
방축의 뒤꿈치
사정없이 할퀴고 긁어대더니
덧 난 상처의 누런 고름 같은 강물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넘칠 듯 퉁퉁 부르터진 물길은
거슬리면 모조리 밀어버릴 기세
뿌리째 뽑은 검불 휘감으며
바다로 떨어질 천 길 낭떠러지
코앞인줄 모르고 도도하게 흐른다

어디가 바다고 강인지 알 수 없는
명(命)이 곧 끝나버릴 이 순간도   
담담히 내딛는 저 용기
안타깝게 바라보는 저녁노을
불러도 대답 없이 바다로 들어서는
흙탕물의 옷깃만 넌지시 붙잡는다

*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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