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동북아신문 '백두산문학상' 공모작품
차례 : 가을의 문턱, 바닷가 노송, 철딱서니, 강아지풀, 와송, 도둑게, 인공지능 알파고, 대숲에 이는 바람, 고임돌, 물거품, 군담, 지게와 바지게, 가을의 길목, 알고 싶어요, 낙동강하구에서.
박상진 시인
가을의 길목
거품 내뿜던
가마솥의 김보다 더운 바람
밤낮 없이 놀다 간 자리
햇살보다 따갑게 쏟아지던
매미소리 머물던 곳
제 길 찾아 구르던 은행의
잔망진* 발길에 베인 구린내
어느새 가을인가
저녁노을 머물다 떠난
창을 연 스산한 기운
부채질 밀치고 들어앉힌
손끝에 닿을 듯 한 상현달
갈바람에 이슥토록 닦인 별빛에
귀뚜라미 사랑노래 가득한 밤
마음 한 자락 접힌 여기
어느새 가을인가
*잔망진; 맹랑하고 경망스런.
바닷가 노송
긴 세월
마디마디 품어 안아
힘줄 불거진 굽은 가지
묻어나는 사연
가슴에 밟혀
발길은 돌층계 붙잡는데
무딘 붓으로
찍어 눌러 잎 그린
하늘 파고든
숨 쉬는 수묵화
부질없는 물음이니
자갈밭 파도 소리
눈 감고 보란다
철딱서니
철없던 그 시절
뜨거운 햇살이 이마 찌르고
군불 지피던 한 낮
*고옴다리 잡겠다며 치맛자락 붙잡고
생떼 부릴 적
“*갱물에 멱이나 감고 놀아라” 하실 때는
미워하는 줄 알았다
겨우 머리카락 한 올 얻어
싸리비 끝에 묶고
머리카락 한쪽 끝 파리 묶어
*앵오리를 외치며 냇고랑 둑길 쏘다니다
개선장군 되어 돌아오면
거친 손길로 얼굴 닦아 주시며
왜 그리 야단만 치시던지
새벽잠 아끼시며 공들여 찌른 비녀머리
다시 찌르는 것이 귀찮아서도 아니고
발길에 차이는 고달픔과 째다 만 모시 다발이
*두름밭 거름 무더기만큼 쌓여서도 아니라는 것을
낡은 나일론 그물 같은 후회가
삼복더위 껌처럼 붙어 떼어낼수록 칭칭 감는다
*고옴다리; 잠자리 *앵오리; 잠자리 부르는 소리
*갱물; 바닷물 *두름밭; 여름철, 마구간 대신 소를 매는 곳
강아지풀
깡마른 담벼락 밑
이슬 말리는 강아지풀
하루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나의 발길 부른다
손끝의 만남으로
가슴에 전해오는 그 시절
동무의 목덜미에
솜털보다 부드러운 꽃술 문지를 때
화들짝 피었던 웃음은
이슬보다 깨끗했었지
꽃대로 쏙* 구멍 간지럽히면
참다못해
쩍 벌린 집게발로 사래 치던
그 쏙은 거울보다 솔직했었다
벌판이 아니면 어때
누군가의 벗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삶이려니
*쏙; 갯가재의 통영 방언.
와송
이웃을 마다하고
기름진 흙도 마다하고
기와지붕으로 가더니
이제는 절절 끓는
목 타는 비릉*이라
삶의 하루하루가
끝없는 도전이라지만
바짝 마른
한줌 흙도 흙이라고
바람에 흩날릴까
목숨처럼 움켜쥔 비릉꽃*
초목의 생태적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상 개척하는
그 의지 가상하나
속세 떠난
외로움은 어이할지
세상살이 고단타
밥 먹듯 곱씹어도
모질게 살아가는 너만 하랴
절벽 위 비릉에도
이슬은 내리겠지
*비릉; 바위.
*비릉꽃 ; 와송의 통영 지방 방언
.
도둑게
*정지문 틈새로
삶아 둔 보리쌀 소쿠리 넘보다
인기척에 줄행랑치던
그때를 못 잊는가
배고프던 시절
장맛비 속에
흙투성이 짚신과 치맛자락
냇물에 철벅철벅 씻던
초라한 백모님 미소에
거품 물고
양철통 긁어 대던 너의 처절한 몸부림
그때를 못 잊는가
할아버지 *낚잇대 끝에
꽁꽁 묶여 어쩔 수 없이
짠 바닷물 속 문어 밥이 돼야 했던
그 때를 아직도 못 잊는가
비 오는 돌담장을
아무 일도 없는 듯 만지작거리면서도
긴장한 눈망울에 어린 두려움
그때가 언젠데
이젠 너를 볼 때마다
*꽃밭등 안개처럼 오가는 얼굴만
아련히 떠 오른다
*정지문 ; 부엌문 *꽃밭등 ; 통영 사량도 산 이름
*낚잇대 ; 문어 낚는 대나무 장대
인공지능 알파고
인간이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더니
그 기계가
인간을 돌볼 때까지는
그래도 기계였다
기계가
직관과 생각을 맛보려고
인간을 바둑판에 끌어들여
벌인 싸움판의 소용돌이에
집이 부서질 때마다
수 억겁의 술수로
스스로 배우고 터득하며
이 땅에 깃발 꽂으려 하는구나
기계가
많고 많은 수 중에
한 수라도 잘 못 풀어
만약에 삼강오륜을 놓친다면
인간은 밥그릇도 빼앗기고
밥풀떼기 쫒아 허둥대다
정체성도 존엄성도 사라져
허수아비처럼
껍질만 남을까 두렵다
대숲에 이는 바람
낚싯대에 이끌려 철없이 들어가
대밭집 조모이* 호통에 냅다 달아났던
그때 같은 어둑한 대숲
즐비한 대나무 사이 하늘 가린 댓잎
때도 모르고 노닥거리는 갈바람소리
야위고 속 빈 멀대같지만
깊은 바다 속 비밀스런
조기나 민어의 속삭임도 들은 귀라
밤을 새워도 못다 할 잡다한 세상사
장어나 낙지 살리던 이끼수
멧돼지 잡던 죽창부터 빨랫대에 포구총*
연살*과 그물 깁는 바늘대까지
댓잎마다 풀어놓는 수많은 사연
흠뻑 빠져 맞장구치는 갈바람
식기 전에 저녁 먹어라
수건 두른 비녀머리 돌담장 넘보며
몇 번이나 부를 때까지
친구들과 타작마당*에서 놀던 때처럼
해지는 줄 모르고 재잘대는 댓잎
*조모이; 할머니.
*타작마당; 보리나 벼 탈곡하는 공용 마당.
*포구총; 팽나무열매를 장전하여 쏘는 대나무총.
*연살; 연의 뼈대.
고임돌
크기와 고집 제 각각인
큰 돌 틈새 사이사이
등짝 밀어 넣고 웅크린 작은 돌
어떤 이는
아랫돌 방석삼아 덜거덕거리며
윗돌 받치는 시늉만
어떤 이는
긴긴 세월 눌림의 무게에
부서지고 튕겨져 나갈까 봐
다리 펼 수도
신음소리 한마디 낼 수 없는 굄돌
하잘것없이 뒹굴었을
네가 아니었다면
파란 이끼 품고 반듯하게 서 있는
돌담도 없으려니
여태껏 외골수로 쌓아 올린
곰삭은 돌담에서
나는 과연 어느 돌인가
물거품
바람 떠난
길 따라 저 하늘로
갈 길 바쁜 물거품
갯바위 부딪혀
통곡하는 파도가 애처로워
먼발치 줄지어
바라만 볼 뿐
바다 위에 해결책을
그렸다 지웠다 또 그려도
여전히 밥물 끓는 마음
살 붙이고 지낸 세월
한 두 해도 아닌데
날 새면 바위 얼굴 어찌 볼련지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빈 가슴만 동동 서성거린다
군담*
뛰자 뛰자 하면서
발 묶어 놓고
마당 쓸고 도랑 치며
거기서 거기인
꿈만 꾸지
벽보고 앉아
손끝도 까딱 안하니
오늘 같은 내일뿐
자고나면 줄기차게
오늘로 오는 내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가기 전에
싸리 엮어 담 치고 꽃씨도 뿌려
향기로운 땀내 나면
행여 담 밖이
치자꽃 향기 같은 그날일지
신발 끈 동여매고
첫새벽 대문 열어야지
*군담; 쓸모없는 혼잣말
지게와 바지게
지게 걸머지거나 바지게*를 져도
가쁜 숨에 허리 굽는 것은 마찬가지
지게는 혼자만의 짐을
바지게는 가장(家長)이란 짐을 지는 것
지겟가지에 바지이* 올린 순간부터
지겟등태 다 닳도록
의지할 것은 지겟다리와 지겟작대기뿐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짐
바람만 불어도 눈물 고이는
석양에 서성이는 진이 빠진 바지게
어깨 짓누르는 바지이 군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척
숨 찬 황토비탈 터벅터벅 넘는다
*바지게; 바지이를 얹은 지게.
*바지이; 싸리나무로 엮은 반달형 지게용 발채.
가을의 길목
거품 내뿜던
가마솥의 김보다 더운 바람
밤낮 없이 놀다 간 자리
햇살보다 따갑게 쏟아지던
매미소리 머물던 곳
제 길 찾아 구르던 은행의
잔망진* 발길에 베인 구린내
어느새 가을인가
저녁노을 머물다 떠난
창을 연 스산한 기운
부채질 밀치고 들어앉힌
손끝에 닿을 듯 한 상현달
갈바람에 이슥토록 닦인 별빛에
귀뚜라미 사랑노래 가득한 밤
마음 한 자락 접힌 여기
어느새 가을인가
*잔망진; 맹랑하고 경망스런.
알고 싶어요
고작 탱자나무 이파리
먹고 자란 호랑나비는
보란 듯이
애정의 갈망에 몸부림치는 자
신방 차려주고
누구는 만물에게 자비를
누구는 내 몸처럼 아끼라는데
비누 몇 장 나올 이 몸은
소중한 남의 목숨 당연한 듯
수십 년 먹어도 되는 겁니까
욕심 없이 한자리 서 있는
나무는 죽어 목재 남기는데
세상을 누릴 만큼 누린 호강에
철없이 우쭐댄
나는 무얼 남겨야 합니까
힘차게 솟은 해 서산 넘어 갈 때
세상 바꾸고도 아쉬워
마지막 남은 힘
노을 붉게 물들이는데
물살에 흘러가는 나뭇잎 하나
가야 할 참된 길은 무엇입니까
낙동강하구에서
미쳐 날뛰던
빗줄기와 야합(野合) 독기품은 냇물
산모퉁이 종아리 물어뜯고
방축의 뒤꿈치
사정없이 할퀴고 긁어대더니
덧 난 상처의 누런 고름 같은 강물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넘칠 듯 퉁퉁 부르터진 물길은
거슬리면 모조리 밀어버릴 기세
뿌리째 뽑은 검불 휘감으며
바다로 떨어질 천 길 낭떠러지
코앞인줄 모르고 도도하게 흐른다
어디가 바다고 강인지 알 수 없는
명(命)이 곧 끝나버릴 이 순간도
담담히 내딛는 저 용기
안타깝게 바라보는 저녁노을
불러도 대답 없이 바다로 들어서는
흙탕물의 옷깃만 넌지시 붙잡는다
*분;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