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소희

본심 심사위원 장옥관 유성호 김행숙
예심 심사위원 오 늘 최연수 진혜진

흰 코끼리 같은 언덕* 

 

아픈 냄새를 닦아내는 흰 코끼리가 있었다
 
창밖 재구름을 모두 베어버려
반짝이는 언덕 어디에도 거짓은 없는 줄 알았다
 
나를 벗은 옷이 생각을 걸어놓은 좁은 방
옷은 주머니 속, 아픈 것을 넣어두고 잊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마음은 쓰였다
 
언제부터 바람을 빼내야 오래 걸을 수 있다고 믿은 걸까
공터가 필요한 나는 화이트 샌즈** 언덕으로 향하고
후회는 예고도 없이 머리까지 차올랐다
 
흰 코끼리 등에 싣고 온 것들로 평평한 타이어를 만들었다
진실은 굴러가고 거짓은 자꾸 주저앉았다
 
여전히 웅성거림은 집요하게 쫓아왔고
초조한 나는 손을 뻗어
필요한 이야기만을 담아 자리를 떴다
 
당신이 거기에 없어도
당신이 거기에 있어도
흰색이 자꾸 빠져나가는
흔들리는 거짓말 언덕
 
굴러갈 때마다 나는 당신을 외면하곤 했다


*헤밍웨이 소설에서 제목 빌려옴.
**텍사스주에 있는 국립공원.


흔들림에 관하여


우리는 처음 보는 곳으로 갑니다

평평함을 좋아하는 당신은
딱딱해진 내 눈빛을 빤히 쳐다보며

여긴 걷기도 힘든데
속까지 파 내려가면 끝을 알 수 있을까

흔들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노래하고 있어
붕괴를 피하기 위해선 문을 잠가야 해

전기 없이도 몸에 숨겨둔 발전기로
불분명한 긴 오후와 작은 골방까지
허물어진 뒤에 밝게 진화한다고 말합니다
 
지진을 모르는 우린
이머전시 키트 속의 후레쉬와 모종삽 하나로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 자꾸 뒤집힙니다

뒤틀려 가면서도 포개지는 동그라미 속 교집합

아침이 오면
균열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눈부신 평온을 꺼내 보여줄 거야
흔들림이 휩쓸고 간 뒤에도
동그라미 안의 나무는 자라고 있을 거야

완전한 구(球) 안에 우린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다른 모양은 믿지 않았습니다

 

새로 나온 햇살이어서 좋다

 

이별 통보 없이도 가버린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가올 햇살과 빠른 걸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데상브르* 거리 위에 서 있는 나는
두고 온 것이 무얼까 생각하느라 저물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몇 번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거쳐 온 버스
차창 밖으로 하얀 눈은 흩날리고
누군가의 좌석 밑 장갑 한 짝을 바라보며
버리고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잘 들어갔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 밤
모든 것을 알고도 조용히 덮어버리는 흰 눈
원래부터 따뜻한 장갑 속에 있던 것처럼
나는 하얀 이불 속에 누워 있다

성에 낀 창에 들어 있는 새벽
애써 물 주지 않아도 피어나는
한 송이 붉은 꽃 같은 첫 햇살

창을 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 나온 햇살이어서 좋다


*제네바에 있는 거리, 12월 31일이라는 뜻.


6피트 아래*


얼굴을 벗은 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마스크 안으로 번화했던 거리가 숨자 거위 족속이 몸을 말린다 햇빛을 따라 조용히 숨 쉬는 사람들 6피트 간격을 알리는 사이렌에 영혼을 놓는다

건물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살을 찌운다 언제 물어 뜯길지 모르는 한 귀퉁이, 식당 안에는 무엇이 자라는지 모르고 ‘NO DINING IN’ 싸인을 입안에 집어삼킨다 그 안이 더 밝아 보인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밀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낮에도 꿈을 꾼다 여름에 신은 털 장화와 겨울을 버틸 슬리퍼, 티브이 속 중대 발표가 걸어 나온다 공범처럼 다시 나쁜 꿈 안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남의 꿈을 꾸는 사피엔스

6피트 아래*라고 쓴 피켓을 들고 마스크들이 오로라**거리에 서 있다 취급 주의 표시인 듯 검은 점으로 멀어지는 얼굴, 살아내자고 한다

*under the six feet 죽음을 의미.

**시애틀 거리 이름.

 

책상 별자리

 

책상 위를 떠돌던 내 숨소리가 
때때로 별 한가운데서 반짝인다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려면
엔진의 격렬함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늘 모자를 깊게 쓴 탓인지                                    
지원서에 붙은 사진은 젖은 낙엽처럼 그늘져 있다             
고시촌의 쪽방, 몇 명이나
자신의 그림자를 뽑아 사다리를 만들고
별을 하늘에 내 걸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발끝에 귤 봉지만 늘어져 있다
그녀가 내 별을 떠났다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열린 창, 별빛이 울고 있었다          

별을 지우려 불을 켠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도시
대기 중인 나의 별은 자꾸 발사가 지연된다 
그럴 때마다 삐걱이는 서랍을 열어
완강한 아픔들을 하나씩 내다 버린다
내가 탑승하지 못한 채 발사되는 창가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아침 해가 잠깐 지나간 방 안은                                
발사가 취소된 우주선의 대합실처럼 무겁다
나는 다시 수신기를 켜고 별자리 지도를 챙긴다
한 번도 불을 켜 보지 못한 나의 별
책상 위에서 다시 술렁거린다

 

동주해외신인상 수상 소감

나의 시가 따뜻한 물주머니가 되길

 

햇빛에 닿으면 말랑말랑해지는 것들이 시로 태어났습니다.
숨어들수록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시와 대면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숨어있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메일로 받고 프리웨이로 향했습니다. 
차 창문을 내리니 한 번도 소리 내어 본 적 없는 이름들이 미려한 바람으로
나를 다독입니다.

만 피트 상공
가벼워 보이던 구름이 촘촘한 밀도로 
쉬운 게 없음을 선언하는 사이
단호한 숨 하나로
모른 채 놓아준 그것.

새로운 땅, 있던 그대로의 나로 살고 싶었고
마음이 어딘가로 가려 할 때마다 신발 끈을 조이듯 시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나의 시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 번쯤 울어본 추억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물주머니가 되었으면 합니다.
갈 길이 먼 저에게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 동주문학상을 운영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 삶의 등대와 같은 사랑하는 가족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제 더 이상 시를 문밖에 세워두고 싶지 않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김소희 약력
충남 출생 현) 시애틀 거주
2018년 미주 중앙일보신인상.
이메일 : Sohee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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