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 심사위원 장옥관 유성호 김행숙
예심 심사위원 오 늘 최연수 진혜진

검정사과농장


거짓말이라는 매우 나쁜 전염병이 한바탕 농장을 휩쓸고 갔다 농장주인은 뼈대가 드러나고 등이 굽은 기형의 사과나무 아래 죽은 새들을 끌어다 묻었고
가벼운 농담처럼
꼬리와 날개가 파닥거리는 거짓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농장주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검정사과농장]이라는 간판을 당당하게 내걸었고 자석 같은 호기심에 큰손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질서 유지를 강조한 농장주인은 꼬리와 날개를 떼어낸, 둥글게 잘 다듬어진 거짓말을 의기양양하게 건네주었고 큰손들은 생전 처음 보는 검정사과라며 흥분을 했다

이미지처럼 속이기 쉬운 것도 없는 법이지
농장주인은 우아하게 생긴 고양이 이미지 십여 마리를 슬쩍 풀어놓았고 이것으로 거짓말 농장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되었다

거짓말 장사가 대박을 치자 농장주인은 죽은 박쥐나 두더지를 가지고 오는 자들과도 암암리에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공급이 끊기게 되자 획기적인 상품으로 자신의 목을 사과나무에 매달았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거짓말이었다


개미, 장엄하게 죽다

 

깨물지만 않으면 다녀갔는지도 모를
얼마든지 은밀한 발과
먼지만큼 작은 몸을 가진 개미가
주인을 깨물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개미는 어째서
어마어마한 먹잇감에게 목숨을 거는 건지
빵도 메뚜기도 아닌
크고 질긴 골리앗에게 이빨을 심는 건지요

쌀벌레, 나방이, 거미, 개미
그리고 주인으로 구분되는 종種들이
민주적으로 한 집에 살면 좋겠는데

개미 때문에 자신의 환경이 엉망이라며
주인이 그들의 삶을 유달리
참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호소하려니
개미에게는 개미눈물밖에는 없고
목소리마저도 개미목소리여서
(개의 성대를 부러워하긴 하지만 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최후의 저항을 택한 것이지요
참견당하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장엄하게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궁지에 몰리면
개미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공장에 대한 의심

 

무궁화가 만삭의
배를 열어 꽃 한 송이를 내놓았습니다
응애, 거리는 꽃을 보며 나는 자꾸 의심이 생깁니다

저것은 누구의 자식인가
무궁화의 자식이 맞기는 맞는 건가

아랫도리로 반짝 흘러들어 간
한 방울 빗물이 친권을 주장할 수도 있겠다는,
꽃이 봉오리 이전이었을 때
입김 혹혹 불어넣어주었던 햇볕도 그러할 수 있겠다는,
어쩌다 아파트 화단을 돌아나가며
무궁화에게 손길 한 번 주었던 바람도
친권 주장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겁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아기공장이 등장을 했다는
돈만 주면 마음대로 성별을 고를 수 있고
천 송이의 꽃도 주문이 가능하다는 뉴스 탓이지요

개개비 둥지에 알을 집어넣는 뻐꾸기처럼
필리핀, 우크라이나 화분에 근을 묻어두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국산 화분이 점점 는다는 거였지요

내가 너의 어미다 아니다 내가 어미 아니다 내가 아비……

햇볕이, 바람이, 빗물이 다 참견해도 되는
목숨을 가지고
꽃들이 방긋방긋 지구로 오신다는 거였지요

 

파란破卵


횃대에는 캄캄한 시간이 앉아 꾸벅거립니다

어쩌자고 이번 생엔
울음만 주시고 날개는 안 주셨는지요

슬픔이 박꽃처럼 피어나는 지붕을 오르리라
피를 토하듯이
새벽을 알리리라 나팔 같은 꿈을 꾸기도 하였는데,
허무로 지은 둥지에 들어앉아
시도 때도 없는
시간의 오물이나 받고 있습니다

시궁쥐처럼
숨어 들어온 불안이 나를 헐어내네요
들키지 않을 만큼씩만
몰래,

내장 깊숙한 곳에 감춰둔
나를 훔쳐내는 불안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까

운명이 찾아와 천연덕스럽게
줄탁동시에 대해서 말을 걸 때
은젓가락처럼 가볍게 부리를 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밀랍으로 빚었다 해도
날개를 가질 때까지는 귀머거리 돌처럼 견딜 것을

도대체 어떤 부리가
그때 하필 내게로 와서 파란破卵을 제시했던 것입니까


사냥총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총구들이 일제히 나를 겨냥했다
하마터면 손을 번쩍 치켜들 뻔했던
나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하였다

총들은
거만하였고
딱딱하고
거칠어 보였다

옆에다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보안관을 고용한 것처럼 든든해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군살 하나 없이 잘 빠진 몸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불을 가진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첫째는 고용시장이 더없이 좋다는 것이고
일단 고용이 되면
고용주가 철저히 믿어준다는 거다

총은
개보다 날렵하지
개보다 충성스럽지
개보다 단호하지

일할 때가 아니면 사료 값이
전혀 안 든다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아나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곰처럼 뛰룩거리며 도망을 쳤다

등을 겨누는 총구들이 한동안 서늘하였다


[수상 소감]

청둥오리 떼의 슬픔을 빌려

혹한이면 청둥오리 떼가 밤새도록 호수를 두들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물이 얼면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천 수백의 청둥오리가 한꺼번에 날갯짓을 할 때면 천둥소리가 나더라는 말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살기 위해 밤새도록 물보라를 일으키는 목숨이라니요. 한 끼 벌어 한 끼 먹으며 사는 가난한 청둥오리들의 날갯짓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곤 합니다.
사는 일에 지칠 때면 청둥오리 떼가 떠오릅니다.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오리들의 처절한 몸짓이 이민자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환경과 안정된 미래를 위해서 먼 길을 날아왔지만, 꽁꽁 얼어붙은 아메리카의 문화와 언어를 두들기며 절망하는 모습이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회귀본능도 마찬가지고요. 힘들 때마다 ‘귀향’과 ‘고국’이라는 말에 기대어 버티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행위도 그중의 하나지요.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얼과 정신을 일깨우는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집을 낸 지도 어느새 7년이 지났습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던 날들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었는데, 문득 시집에 관련된 메일을 받았어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과연 시가 써지기는 할까?’ 스스로 반문하며 며칠을 고민하다가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여 지난해는 완전히 시에 빠져 살았네요.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시집을 핑계 삼아 고국 방문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좋았는데, 봄에 하려던 시집 출간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을까지 미뤄졌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동주해외작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응모해서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요.

심사를 맡아주신 세 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중에도 예정대로 행사를 진행해주신 주최 측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여러 해 떠돌다 시의 마을로 돌아온 저에게도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한혜영 약력

충남 서산 출생.
미국 플로리다주 거주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본국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계몽아동문학상》 소년소설 당선.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동시집 『개미도 파출소가 필요해』 외 다수의 동화책을 출간함.
이메일 : ashleyh@hanmail.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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