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상지 김상봉

 3년 동안이나 키우든 정이 푹 밴 개를 보내 던 날이다. 떠나는 날까지도 병약한 아내는 부산을 떨었다. 토시 짝만 해서부터 가져다 키워 허리까진 미치진 않지만 큰 수놈이다. 큰 놈 치고는 애교가 많았고 충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을 가려볼 줄 알았다. 한 동네 사람이면 짖지를 않았지만 타 동네 사람이면 컹컹 짖었다. 특히 한번도 드나든 적이 없는 사람이면 벼락같이 알아보고 짖어 대였다. 더욱 신기한 건 친인척이 처음 오더라도 사람이 감지하지 못 하는 특별한 내음이 있는지 코를 벌름거리다 두어 마디 짖고는 꼬리를 흔든다. 걸음발을 타는 젖먹이가 꼬챙이를 들고 때리는 흉내를 내며 다가서도 이리저리 뛰며 귀엽게 장난을 받아주었다.

"어 비, 어 비야!"
어른들이 호들갑 떨며 냉큼 안아가면 서운해진다.     
 
키우든 개를 보내는 아내는 심기가 불편한지 어지럽다며 또 자리에 눕는다. 조석을 거르지 않고 삼 년 동안이나 거두어 먹인 멍멍이를 보내는 이 날은 푸름 해서부터 닭고기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던 아내였다.
  "쌍놈의 새끼, 준 다니 첫 새벽에 와!"
멍멍이는 한치 앞 제 운명도 모르고 예전같이 고추서서 아내가 내민 두 손바닥에 앞발을 척 올려놓고 꼬리를 살살 젖으며 아양질이다. 순간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으니 병약한 아내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동구 밖에서나 마대에 넣어 달라 할 것이지 택시기사에게 마대를 쥐여주었다. 한시 급히 보내 이 장면을 잊으려 한손에는 개 목줄을 단단히 잡고 마대아가리를 개 대가리에 씌우려 했다. 혼자 힘으로는 당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달려와 거들어 주었다.
 "여보시요, 잡아먹으면 절대 안 되우."차에 실려 보내며 애원에 가까운 비린청을 가까스로 뱉으며 차 곁을 떠나는 아내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목줄을 단단히 묶은 후 아구리를 풀어 주 우, 낯이 설어 어설피 매여 달아나면 낭패우."
 "멍멍아, 아침밥을 굶겨 보내는 엄마 꾸짖어 다 오."
 똥개를 3년동안 키워 새집으로 보내는 마음이 이런데 애완견을 10여년씩이나 키우는 이들의 마음가짐이 이해가 된다.

우리 집은 개가 잘 되지 않았다.
어렵사리 이웃 집에서 얻어 온 강아지가 커서 새끼를 낳고 미처 버렸다. 어미 젖을 못 먹은 강아지들은 어머니가 정성껏 쑨 미음을 달 포가량 먹여 주어도 한 마라 한 마리 죽어 나가더니 열 마리가 몽땅 죽어 나 갔다. 말수가 적은 과묵한 아버지께서 담배대를 문설주에 두드리며 엄명을 내렸다.
 "개가 안되는 집안이니 강아지를 얻어 오지마라! 불상하다."

농가에서 개를 1-2년 키워 삼복철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이 애들이 학교간 짬에 허청간 도리목에 개를 매달고 피를 뽑고 가죽을 벗기고 개장국을 끓여 온 동네가 질탕 하루를 즐겼다. 가죽은 선자리에서 합작사(상점)에 가 근들이 소주를 바꾸어 왔다. 주인집 애가 돌아와 뒤늦게 알고 눈물 콧물을 짜며 발버둥이를 친 들 어른들은 아랑곳 않고 뜨거운 국물을 불며 훌훌 마시며 목구멍의 때를 씻어냈다.
"그 놈 성깔 있군. 사내새끼여, 정 주던 짐승인데..."
함지에 물을 채우고 바가지 짝을 엎어 놓고 장단을 치던 사내들은 얼근한 김에 주인집 마누라만 남겨놓고 뺑 손이 친 선잠에 깨여 뽀로퉁 한 아내를 잡아 끌고 와 놀음판에 세운다. 

개야 개야
알락쿵 달락쿵 숫캐야
밤사람을 보고서
에루화 짖지를 말어라
에헤야 데헤야 에헤야 데헤야
얼 사 엄마 둥개 띄여라
내 사랑아!

짧은 밤이 깊어 갔다. 애는 언제 울었냐 싶게 잠방이 바람에 웃 목에 구겨 박혀 잠에 곯아떨어졌다.

내가 성가해서 집안 대소사를 쥐락펴락하는 가장의 틀 거지가 세워져 가자 부친께서 세운 가률家律이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야부리진에서 10여리 상거 한 시골인 신흥촌에 있는 신흥소학가 나의 첫 출근이다야부리는 현現 상지시 4대 진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세기 초엽 제정 로시아 사람들이 중장철로를 부설하면서 작은 촌락들에 불과하던 것이 철로 공정인원들과 가족들이 몰려들고 철로부설 인역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생긴 도회지로써 부대시절이 갗추져 있었다. 규모나 설비가 지금과는 비교가 않되 지만 학교, 진료소, 상점, 음식점 여인숙이 들어섰고 유흥업소인 접대소까지 생겨나 사람들을 끌었다, 일요일이면 로시아 동정교 교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작은 거리를 덮었다. 덩치 큰 양마가 끄는 앞바퀴가 작고 뒤 바퀴 큰 양차洋車가 방울소리를 왈랑절랑 울리며 호기 있게 달리면 사람들이 길 가장자리로 물러서야 하였다. 양차에서 내린 중절모자를 쓰고 개화장을 든 나비 넥타이에 연미복 차림인 수염이 터부룩한 남정네들이 뚱보 여편네들의 팔을 끼고 교당이나 상점을 드나드는 모습이 동양인들 눈에는 경이로 왔다. 굽이 높은 중절모를 한 손에 받쳐들고 허리를 약간 숙이며 팔을 뻗쳐 여인네를 안내하는 모습은 우아하였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사내들이 잘룩한 허리에 물색의 긴 치마꼬리를 살짝 든 물 찬 제비 같은 아가씨들을 리드하는 모습은 한인漢人들 눈에는 별천지 사람들로 보였다. 흠모의 대상이 되였다. 백계 로시아 패잔병들이 몰려들면서 야부리는 문전 성세를 이루었고 거리 이름마저 로시아인들이 아포역니아亞布力泥亞이라 불렀지만 한인들은 혀 꼬부라진 로어露語를 간약 해 야부리로 불렀다 8.15 해방 15년이 지나 내가 취직했을 적만 해도 로시아인들은 일부 쏘련으로 귀국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호주를 비롯한 자유세계로 이민을 갔다. 웅장하진 않았지만 코직크식 건물과 목조건물이 역사 주위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네들의 생업은 작은 과수원을 가꾸고 젖소를 한 두 마리 키우고 꿀벌 수십통을 키우고 겨우내 수렵으로 지냈다. 손재간이 출중한 그들은 작은 연장은 만들어 쓰기를 즐겨 벌통 짜기나 살림집도 통나무로 본지인들과 달리 인가와 떨어진 산비탈을 깎고 아담하게 지었다. 창고에 화덕을 쌓고 쇠를 달구어 모루에 놓고 징강댕강 두들겨 무엇을 만들었고 부처가 마주서서 톱으로 큰 통나무를 켜 요긴한 가구를 뚜딱뚜딱 만들었다. 그들은 야장쟁이였고 재간 많은 목수였다. 말 만한 개를 기르고 세계에서도 유명하였던 3공표 쌍열 엽총이 벽에 걸려있어 낯선 사람들의 진입은 엄두도 못 내였다. 저녁이면 포도 넝쿨 밑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 소프라노로 "카추샤"나 "모스크바 교외의 밤"을 불러 이색적인 풍경을 이루었다.

지난세기 50년대 국제 공산주의 내부 이념 논쟁이 시작 되자 로시아 교민들도 중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종당에는 귀국하느냐? 계속 난민으로 떠돌이 삶을 살아야하는 기로에 놓였다 총망히 이주짐을 싼 그들은 소소한 가정집물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키우던 개들은 떠나는 날까지 동반하다가 야부리역에 버리고 가야하였다. 몇 날 며칠 역사와 살던 집을 오가던 개는 여객열차가 올때마다 애처롭게 울었다고 한다. 결국 충견은 철길 옆에서 굶어 죽었다.  

처남의 과외 취미를 잘 아는 妹夫가 옛 사문동이 소굴이던 심심 산골인 珍珠山 비밀군수공장에 출근할 때 입귀까지 귀가 축 처진 로시아 종 불색에 가까운 사냥개 강아지를 구해주었다. 그 놈이 얼마나 똘똘하고 인정 있게 노는지 온 집 식구가 애지중지 돌보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나는 빨리 자라 물오리이나 꿩 사냥할 때 호수에서 물오리를 건져오고 빗맞은 꿩을 덮쳐 물어 오기 바라서 짬만 있으면 그 놈 훈련에 정신이 없었고 거두기를 상전 모시듯 하였다.
"그 놈 개 여편네보다 더 중한 가봐?"아내의 지청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사냥개 강아지가 2호 보물로 되였으니 이해가 아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아랑곳하지 안았다.
고삐 풀린 말은 어디로 뛸지 모른다.

철이 덜든 나는 기숙 집 일을 도울 생각은 않고 남들이 손바닥만 한 땅뙈기를 파고 심을 때에도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강변을 헤맸다. 시간이 남아도니 잡생각이 났다. 현대 전쟁에 넋을 먹은 중국은 "전민무장全民武裝"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준군사조직인 민병조직民兵을 건립하고 침략자를 인민전쟁의 大海속에서 소멸한다 하였다. 일본군이나 국민당군에게서 빼앗은 3.8식이나 7.9식 보총으로 무장하던 50년대말이였던 중학시절에 병신이라 민병조직에서 제외였다.
"싸! 싸!"
천여명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창격 훈련하는 함성소리는 상지 거리를 삼킬 듯하였고 사춘기에 들어서는 나는 처음으로 구겨지는 자존심에 눈물을 쏟았다.
"본 대를 보여주마!"
그 응어리가 남아있어 오기에 북받쳐 末等 공무원에 속하는 교원이란 신분에 쉽사리 생산재료 상점에서 로시아 제 엽총을 사내였다.

앙칼진 여자의 독기에 오류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5년 간이나 품고 있던 民兵훈련에 제외된 분풀이를 푼 셈이다. 질끈 눈을 감고 몇달 봉급을 때려 넣고 오기를 풀었으니 날 듯 기뻤다. 무슨 정신인지 선생들과 동네 청년 몇을 대동하고 참외막에 가 참외를 실컷 먹였다. 돌아오는 길에 발치에서 메추리가 날아오르자 총 끈도 없는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땅!" 메추리가 떨어졌다
"김선생, 언제 총 쏴 봐 소?"
"그 놈 눈 멀었지?"
나도 난생 처음 쏘는 총이라 믿어지지 않아 주어 온 새를 보고도 어리둥절하였다.   
말을 타면 견마 잡이가 필요하다고 총이 있으니 사냥개가 부러웠으나 기숙집이라 엄두도 못 내였다. 그런데 마침 전근령을 받고 집에서 통근하게 되여 사냥개에 욕심이 동하던 차 매부가 키우던 강아지를 주었으니 과부가 요강뚜껑에 앉은 격이 되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퇴근하니 아내가 울상이 였다.
"강아지 없어졌어요."

길거리 집은 문 단속을 잘 해야 한다. 달 포가량 먹이고 손때가 묻어 영리하게 자라 바깥에 나가 똥오줌도 가리고 들어오던 놈이 조이 반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아 집집마다 찾아보았고 길가는 이 들게 물어보아도 본사람이 없었다.  늘 데리고 나가면 발뒤축에서 냄새를 끙끙 맞다가 멀리 달려갔다가도 인총 속의 주인을 찾아오던 영리한 놈이라 귀엽다고 쓰다듬어주든 이웃들도 안타까워하였다. 먹이가 떨어지면 하다못해 들에 나가 들새를 잡아서 먹였던 강아지이다. 아내가 무슨 죄 있으랴! 개를 못 키우게 하시던 부친도 내 정성에 감복하였는지 곧잘 강아지를 챙기셨던 것인데 담배만 피우다 한마디 하셨다.
"네 것이 안 될 늠이여, 잊어라"

이튿날은 공일이라 나는 자전거를 타고 두개 향鄕의 공로변의 마을들을 이 잡 듯 훑었다. 동네마다 총질하는 이 들게 단단히 부탁하였다. 그 날은 황사가 부옇게 하늘을 덮었고 종일 보슬비까지 내려 내 몰골이 말이 아니다. 포장도로가 아닌 흙 길을 달렸으니 말이다. 눈알만 반들거리고 먼지와 비 물이 게발린 까칠한 모습에 집식구들은 놀랐다. 엉덩이가 쏘고 장단지가 부어 밤에 잠자기가 괴로워 났다. 나는 한달 동안 주일마다 만사를 제 처 놓고 상지시가지를 중심으로 20여리 안의 마을들을 뒤졌으나 강아지를 찾지 못하였다. 내 고집을 꺽지 못한 식구들은 애간장만 태웠다. 나는 분김에 총을 팔았다.
"잘 팔았다. 사냥 가면 온 식솔들 걱정이 태산이여"
"한 짐씩 지고오는 오리이에 해방이네."어머니의 말씀에 이여 아내의 진심이다. 털을 뽑고 솜털을 거스르고 내장 손질을 마치면 짧은 여름 밤을 밝히는 아내의 고역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젠 개를 안 키우겠다!"장엄한 나의 선언이 였다.

총을 팔고 해수가 되여 갈 무렵 그 강아지가 망 짝 만한 사냥개가 되여 주인의 자전거에 매달려 사냥 가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글쎄 세상에 이를 수가 있나? 등불아래가 어둡다고 코앞에서 못 찾았으니? 풋 면목이나 알고 지나던 목재공사의 젊은 직원 녀석이 도적이라니? 2-3백메트 떨어진 멀지 않은 사택에 살고 있었다. 그 사택단지에 갓 사귀던 동족의 사냥친구가 있었는데 초록이 동색이라고 한 단위 사람이 무서웠던지 나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쥐꼬리 같은 박봉薄俸으로 시가지에 살기는 무척 힘들었다. 아내가 직업이 없고 보니 부친이 세상 떠난 후 더는 뻗댈 수 없었다. 아내 몸에는 세번째 생명이 태동하고 있으니까.
자식은 낳아 서울 보내고 쇠새낀(牛) 삼수갑산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푸성귀라도 배부를 때 소리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시골 갑시다. 애들도 크는데..."
"나도 생각이 있다 만 쉽니? 황금알을 준 대도 난 하동 안 간다."
열 여섯에 철도병에 보냈던 큰 아들이 투병 생활 8년만에 돌아가 어머니 가슴에 못으로 박혔는데 어찌 하동으로 가고 싶어 할가?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무참했다. 더 말을 부칠 수가 없었다.
며칠 후였다.
"네가 먼저 가 자리 잡아라. 아버지 유물인 이 낡은 집 팔면 시골에서야..."
"봐 둔 곳 있수?"
"그래 구강포 인심이 제일이다."맺고 끝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이튿날 사람을 찾아 폭탄 같은 전근신청을 내고 짐을 꾸렸다. "노신魯迅도 당원이 아니다. 당에 들지 않고 문학공부 하리라"란 중학생 때 다진 결심이 "문화혁명"을 거치며 무너졌고 어렵사리 입당도 했다. 교장에게 잘 보였던지 승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향 정부 영도의 권유도 완곡히 거절하였다. 결심이 서니 400여명 학생의 촌 학교 교장자리도 중학 어문 교원자리도 고려하란 귀띔도 마이동풍馬耳東風하고 적성에 맞는 간섭 없고 자유스러운 선택을 하였다. 기실 가방 끈이 짧아 중학생을 가르칠 수준이 안되고 사람을 다스릴 수완이 전혀 없어 자그마한 학교에 찾아 들었다. 사람은 자신을 잘 알기에 힘써야 한다. 알아가는 과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괴롭다. 오점들을 스스로 메스를 들이 대여 오려내야 한다. 환경 탓. 친구 탓, 시대 탓, 조상 탓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안된다. 사람이 하기에 달렸다 란 말이 우연하지 않다.
 그런데 웬걸? 시골 살림은 쉽지 않았다.

주정뱅이 맹세는 개 맹세란 말이 있다. 다시는 개를 먹이지 않을 것처럼 맑은 정신에 총을 팔며 맹세하였는데 구강포九江泡에서 뒤집혔다. 내 맹세는 무슨 맹세일가?!
잘하던 못하던 몸으로 때우는 일은 겁대가리가 없었는데 강 건너 도적은 막을 길이 없었다. 신고해야  경찰은 사진 몇 장 찍고 가면 함흥차사격이다. 한 놈 도적을 열이 못 막는다고 도적을 막기위한 방책으로 말만 한 개를 먹이고 밤이면 개 목줄을 풀어놓는 것이다.
구강포에 와 개가 잘 되였다.
"김선생님, 개를 잘 키우네. 바늘귀 떨어지는 소리에도 우렁차게 짖으니 도적이 범접 못하네"
동네 칭찬이 자자하다.
한 주일씩 아내가 입원하여 상지시립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도 걱정이 되여 오면 굶고도 주인이 반가운지 꼬리를 흔들며 길이길이 뛴다.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면 혹시 물리 울 가 걱정 되여 2-3일 먹이를 주고 머리를 다독여주고 떠나면   측은히 바라보던 눈빛이 새삼스럽다.
아내도 좀 차도가 있고 친우들이 간호하여 줄 터이니 집에 가 좀 쉬라고 성화이고 아내도 이 부탁 저 부탁하며 나를 쉬게 하려 등을 밀어 돌아왔다.
이튿날 점심 때이다. 찬밥덩이를 물에 말아서 몇 술 뜨지 않았는데 헨트폰 벨이 울렸다.
"뉘요?"
"병원입니다. 가족 분 빨리 오세요!"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일이 생겼군..."
사방에 전화질 하여 택시를 불렀건만 점심시간이라 올 생각을 안 한다. 나는 걸으며 한 택시기사를 부르며 통첩을 내렸다.
 "자네를 맞아 가고 있으니 알아서 해"하고는 전화를 끊고 징징 걸었다. 10여분이 지나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택시가 달려왔다. 상통을 보니 술이 거나하였다.
"빨리 시 병원으로..."그 녀석도 내 모양세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터미널까지 그 가격인데 병원까진 5위안 더 언수!"
나는 화가 터졌다
"쌍눔새끼, 누굴 놀려? 하루 이틀 네 찰 탓냐?"놈은 할 수 없던지 2_3분 더 달려 병원 입구까지 실어다 주었다.
"더럽게 돈 벌지 마라"한마디 뱉고 총총 걸음으로 입원실로 갔다.
"왔소. 하마트면..."
"저 엄마 강철이요."
"큰 병원 가 우."
아내는 미안하다며 시무륵히 웃기만 하였다.

환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에게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고자질이다. 친구들이 약물반응이라며 처방전과 약병사리를 찾았다. 벌써 호사실은 비여 있고 쓰레기는 수거하여 간 뒤였다. 이윽고 당직 의사가 왔다. 그도 몹시 놀라 당황한 모양세다. 당직기록을 펼쳐 들고 설명하였다. 호전세가 보여 쓰던 약을 계속 썼 단다'
"지금은 정상이요. 심장 박동도 정상이고 정서도 온정 되였고 걸으니 안심하오."
"고맙소. 수고했네요. 혹시 재발하면 어쩌지요?"
"2-3일은 일 없을 거요. 24시간 특급 간호를 부치겠소.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향이 있으시면 대학병원에 이전시켜 줄 수 있소"
"선생님만 믿겠소. 내일 대학병원으로 전이 수속해 주오."
나는 담화를 마치고 병실로 왔다. 그때까지도 놀란가슴을 쓰러 내렸다. 사람들은 떠들었다.
"사람이 괜찮으니 떠들지 맙시다. 빈 약병을 찾아 뭘 하우?  내일 할빈 가기로 했소."
"개는?"
"멍텅구리 여편네야, 개가 더 중하냐! "아내는 혀를 쏙 내 밀며 읏었다. 동네 젊은이들게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할빈 가야겠어, 자네들이 잡아먹게..."
"뭘 요? 사람이 그 상황인데 한 동네 사람끼리..."
보름만에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고 치료하고 개선장군 마냥 우리 부처는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개가 펄쩍펄쩍 솟으며 반긴다. 왕왕 짖다 간 뒤로 돌아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개의 인정표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개 앞으로 갔다. 개가 낑낑거린다. 두 팔을 내밀자 냉큼 뛰여 올랐다. 아내 팔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나도 그 놈의 늘씬한 허리를 두드렸다. 그 놈의 말간 눈이 눈물에 젖은 듯 더 반작인다. 평시에 눈에 눈곱이 끼면 닦아줄 뿐 오늘처럼 오래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먹이를 줄게..."
아내는 가져온 소시지 빵을 썰어 양재기에 담아 내왔다.
"집 보랴 혼났다?"눈물을 글썽인다.
먹다 간 꼬리를 젖으며 아내의 손을 핥다가 또 먹는다. 정신없이 처다 보던 나도 아내와 개가 나누는 교감에 감염 되여 코허리가 찡 했다. 마르기 시작하던 아내는 지난 해 2월에 잡아들면서 병이 도졌다.
"또 아파요."
요즘 아내가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잦았다. 별루 많지 않은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입지 않는 옷 뒤 골 안 줄 가요?"
며칠 전에는 아직 입을 만한 옷들을 젊은 각시들 주자고 하였다.
"도씨陶氏 색시 주자요."
"당신 옷이니 맘대로 하구려."
 뒤늦게 먼 길 떠날 준비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북경 딸애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예약하여도 빨라야 달 반 걸려."
"얘, 그럼 안되지. 상해는?"
"아빠, 시간 낭비 마. 알아보니 마찬가지야."
 "별수 없지 오빠에게 알려라. 항공 티켓도 끊어라."
3월5일자 티켓이 예약 되였다. 서둘러야 하였다. 올때까지 개를 맡아 달라고 청 들였지만 거절이 였다. 자주 타던 택시기사에게 청을 들였더니 먹여주겠단 답이 왔다
그 기사가 첫 새벽에 왔다. 나는 수고비로 돈을 건너려 하였다. 그는 손사례를 치며 뒤 걸음질이다
 "우리 사이 돈이 뭐 요?"
 "내가 미안 해!" 거래는 확실하게 하여야 하는데 뒤끝이 꺼림직 하였다. 나는 별 수 없이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절대 술추렴 개가 되면 안 되우."
"마음 놓소."
나는 김빠진 소리를 남기며 대문 밖까지 개의 목줄을 잡고 나갔다. 개는 5_6분 후의 제 신세도 모르고 꼬리 젖는다. 목줄을 잡고 끌고 갈 수 없다며 자루에 넣어 달라고 한다. 아내의 도움으로 자루를 씌우고 자루아가리를 졸라매니 개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가슴을 긁었다. 얼굴이 백지장이 된 아내는 머리를 떨구고 비출비출 거렸다.    

개를 보내고 방에 올라와 보던 책을 드니 웬 돈이 떨어졌다.

우리는 이튿날 태평공항에서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 일년이 어느 새 훌쩍 넘었구나? 먼 하늘 저 너머 멍멍이의 우렁찬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멍멍아, 잘 있느냐? 인정 없는 악한 주인을 잊어다오.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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