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족 같은 소

 옛날에는 한 집에 머슴이나 하인 또는 종과 함께 살았다. 이들을 생구生口라고 불렀는데 소도 생구에 포함하였다. 이처럼 소는 한 가족같이 사람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소를 가축으로서보다 사람에 가깝게 대해 왔다. 그 예로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는 어미 소가 새끼를 낳았을 때는 쇠죽에다 미역국을 말아주기도 하고 송아지가 태어나면 사람이 아기를 낳을 때처럼 부정을 타지 말라고 대문에 금줄을 치주기도 했다.

소는 우리나라의 농경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뛰어넘었다. 가정에서의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노동력일 뿐 아니라 운송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의 역할까지 하였다. 소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동물 중 하나다. 소는 우직하나 성실하고 온순하고 끈질기며 힘이 세나 사납지 않고 순종한다. 이러한 소의 속성이 우리의 정서에 녹아들어 여러 가지 관념과 풍속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는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소가 그리 흔치 않았다. 논이나 밭갈 때 사람이 소를 대신해서 쟁기를 끌었다. 그리고 일이 많거나 일손이 부족할 때는 소가 있는 집에서 빌려서 부렸다. 소를 빌리는 값은 사람 품값의 보통 다섯 배였다. 이런 소는 여러 가지로 사람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고기와 우유를 제공해 주며 타작마당의 끌매와 달구지 혹은 수레를 끄는 가축인 것이다. 수송아지와 암송아지는 제물로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것을 팔아 대학 등록금도 마련했고 시집 장가를 가는 결혼자금으로도 사용했다. 소를 농사에 직접 이용한 것은 꽤 오래되었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신라시대가 최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의 안악 고분벽화에는 바퀴가 달린 가마와 여물을 먹고 있는 소 그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에서는 소를 순장殉葬했다고 한다.

2. 12 지지地支

간지干支 표기는 천간天干이 먼저이고 지지地支가 나중이다. 천간天干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로 10개이며 지지地支는 자子(쥐), 축丑(소), 인寅(호랑이), 묘卯(토끼),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로 12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지은 우경牛耕의 출발은 신라 지증왕智證王 3년(502)이었다. 당시 지증왕은 각주의 군주들에게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고, 처음으로 소를 밭가는 데 사용하였다. 우경은 농업기술상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다. 우선 축력을 이용함으로써 작업의 능률성이 높아졌고, 사람의 육체적 피로는 그만큼 감소하였으며, 논밭을 깊게 갈 수 있어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또한 소의 오물은 거름의 주원료가 되어 이 또한 생산량 증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는 이와 같이 농사에 이용되는 외에도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를 이용해서 수레를 끄는 우차법이 일찍이 사용되었고, 젖과 고기가 식용에 쓰이며, 가죽과 뼈 또한 긴요하게 이용된다. 그리고 소의 담석인 우황은 약효가 뛰어난 '우황청심환'의 주원료이기도 하다. 소가 갖는 재산적 가치는 더욱 컸다. 송아지를 낳으면 온 집안의 경사였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짓는 시골 출신들은 정성껏 키운 소를 팔아서 대학가고 시집 장가도 갔다. 우리네와 삶의 애환을 같이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날의 추억 역시 소 풀 먹이며 개구리 잡으며 뛰어 놀던 내川가 흐르는 고향에 있기도 한 것이다.

전해오는 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아득한 옛날에, 부처님이 뭇짐승들에게 ‘정월 초하룻날 아침 나한테 세배하러 와라. 제일 먼저 오는 짐승에게 1등상을 주는 것은 물론 다음 11등까지 상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을 들은 뭇짐승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소는 힘쓰는 일이라면 몰라도 달리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말이나 호랑이 개에게는 물론 심지어 토끼나 돼지에게도 이길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소는 자기는 다른 짐승들 보다 워낙 느리니까 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는 다른 짐승들이 다 잠든 그믐날 밤에 길을 떠났다. 이때 눈치 빠른 쥐가 이를 알아차리고 잽싸게 소의 등에 올라탔다. 드디어 소는 동이 틀 무렵에 부처님이 계시는 집 앞에 도착했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쥐가 날쌔게 한 발 앞으로 뛰어 내려 소보다 먼저 문안에 들어가서 넙죽 세배를 하였다. 쥐가 소를 제치고 1등이 되었다. 그래서 소는 2등이 되었고 한 걸음에 천릿길을 달린다는 호랑이가 3등이 되었다. 달리기에 자신이 있던 토끼도 도중에 낮잠을 자는 바람에 4등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용. 뱀.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차례로 골인했다. 그게 유교황제설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12지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석가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 모든 동물들을 다 불렀는데 열 두 동물만이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석가는 동물들이 도착한 순서에 따라 그들의 이름을 각 해(년)마다 붙여 주었다. 쥐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다음에 소가 왔다. 그리고 뒤이어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가 각각 도착하였다. 이것이 석가유래설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편에 있는 지혜의 문을 관장하는 보살이다. 하루는 석가가 대세지보살을 불러 천국으로 통하는 12개 문의 수문장을 지상의 동물 중에서 선정하여 1년씩 돌아가면서 당직을 세우도록 명 했다. 이에 대세지보살은 12동물을 선정하고 그들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 모두 불러 모았다. 12동물 중 고양이는 모든 동물의 무술 스승이므로 제일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나머지는 무술 실력 순으로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돼지. 개를 앉혔다. 이렇게 12동물의 서열을 정한 후 대세지보살은 석가여래에게 훈계를 청하려고 맞이하러 나갔다. 이 때 석가를 기다리던 고양이가 갑자기 뒤가 마려워 참다 참다 못 참고 뒤를 보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공교롭게도 이 때 석가가 왕림하셨다. 석가가 소집된 동물들을 살펴보니 한 동물이 부족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고양이를 따라 구경 온 생쥐가 쪼르르 달려 나와 석가에게 말했다. 자신은 고양이 친구인데 고양이는 수문장의 일이 힘들고 번거로워서 수문장을 하기 싫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노라 며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석가는 쥐에게 어쩔 수 없으니 네가 고양이 대신 수문장을 맡으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쥐를 포함한 12동물이 천국의 수문장이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고양이는 간교한 쥐에게 원한을 품고 쥐를 잡으러 온 세상을 찾아 다녔다. 이때부터 고양이와 쥐는 천적사이가 되었고 한다. 이것이 도교장설이다.

그 외에도 신체결함설이 있다.
명나라 ‘초목자草木子’에 이르기를 “쥐子는 어금니가 없고, 소丑는 윗니가 없고, 범寅은 목이 없고, 토끼卯는 입술이 없고, 용辰은 귀가 없고, 뱀巳은 다리가 없고, 말午은 담이 없고, 양未은 눈동자가 없고, 원숭이申는 엉덩이가 없고, 닭酉은 생식기가 없고, 개戌는 위가 없고, 돼지亥는 근육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에 한 가지씩 부족한 동물들이 자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는 설이다.

12지의 순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래되기도 했지만, 음양오행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음양오행은 발가락 수를 통해 12지의 순서를 배치했는데, 세상 동물 중 한 몸에 다른 발가락 수를 갖고 있는 동물은 쥐밖에 없다. 쥐의 앞발은 4개로 음의 수이고 뒷발은 5개로 양의 수다. 그렇기 때문에 음과 양이 변하는 순간에 놓일 수 있는 동물인 쥐를 먼저 택했고, 그 다음에 음양이 순서대로 오도록 동물을 배치했다. 즉 쥐를 선두로 소(4), 호랑이(5), 토끼(4), 용(5), 뱀(0), 말(7), 양(4), 원숭이(5), 닭(4), 개(5), 돼지(4)의 순이다. 이 순서를 살펴보면 발가락의 숫자가 홀수와 짝수로 서로 교차하여 배열됐음을 알 수 있다. 이 12지는 시간신과 방위신의 역할을 하여 그 시간과 그 방향에서 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12지 중의 하나인 소는 우직하고 인내력이 많으며 성실한 동물로 상징되어 왔다. 그만큼 소는 우리 역사 속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역할을 해 왔다.

고대에 있어서 소 사육의 가장 큰 목적은 희생犧牲을 위한 것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는 "나라에 군사軍事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이고 합쳐져 있으면 길한 징조로 점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소가 그만큼 신성하고 믿음직스러운 동물로 받아 들어졌음을 나타내 주는 기록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농신農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소를 바쳐 제사를 올렸다. 이 제단을 선농단先農壇이라 하였는데, 해마다 풍년을 빌기 위하여 경칩 후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선농제에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헌시 가운데에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선농제에서는 반드시 소를 희생의 제물로 하고, 이것을 탕으로 하여 많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띠 해는 여유와 평화의 해이다. 소띠 해는 을축乙丑→정축丁丑→신축辛丑→계축癸丑의 순으로 60 갑자에서 순환한다. 12지 중의 소는 방향으로는 동북, 시간적으로는 새벽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12월을 지키는 방향신方向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여기에 소를 배정한 것은 소의 발톱이 두 개로 갈라져서 음陰을 상징한다는 것과 그 성질이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아서, 씨앗이 땅 속에서 싹터 봄을 기다리는 모양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는 참고 복종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 찬 기운이 스스로 굴복하기 시작한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소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과연 소를 닮았을까? 우리 속담 중에 ‘천천히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끈기 있게 꾸준히 노력하여 결국 성공을 한다는 가르침인데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소띠 태생이 많다. 그것은 바로 소띠들의 공통점이 근면과 성실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단점도 있다. 대개 소띠의 경우는 고집이 대단해서 황소고집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페이스로 밀고 나가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인내와 투지력으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소띠들이다.

3. 소에 얽힌 이야기들

선산 문수산 아래에서 김기년이란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김기년을 위협했다. 이때 주인의 위급함을 목격한 소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뿔을 앞세워 호랑이에게 돌진하였다. 피 튀기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호랑이가 소의 뿔에 받혀 주검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기년이 병들어 죽자 소도 따라 죽었다. 관부官府에서 죽은 소를 칭송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렇게 주인을 구하고 죽은 소의 무덤을 의우총 義牛塚이라고 칭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 넣었다.

人亡牛斃 인망우폐 / 주인이 죽자 소도 죽었다

 起年耕田 / 기년이 밭을 갈다
 虎搏起年 / 호랑이가 기년에게 달려들다
 虎搏起年 / 소가 호랑이를 들이받다
 牛た躍觸其虎 / 소가 호랑이를 들이받다 
 虎釋起年而走 / 호랑이가 달아나다
 人病牛役 / 기년은 병들어 누웠으나 소는 일을 계속하다
 人亡牛斃 /  기년이 죽자 소도 따라 죽다

이 외에도 소에 관련한 고려시대의 이야기로 함경도 단천의 마천령을 다른 이름으로 이판령伊板嶺이라 부르는 유래가 있다. 그 시절 여진 사람들은 소를 '이판'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산 아래 동네 사람에게 송아지를 팔았는데,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아 이 고개를 넘어갔다. 그래서 소 주인이 소가 간 곳을 추적해 이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길이 생겨났다. 이 산 고개를 이판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는 전설이다.
또한 조선 후기 이야기로 한 노파가 소를 길렀는데, 노파가 사망하니 소를 개령 지역 사람에게 팔았다. 그런데 팔려간 소가 옛 주인을 못 잊어 계속 울다가 노파의 장례 날에 우리를 뛰쳐나와 30리 길을 달려 노파의 장례 하는 곳에 와서 뒤뚱거리면서 울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관부에 보고하고 묻어 주었다. 그래서 선산에는 두 소의 무덤이 전한다는 전설이다.

뿐만 아니라 ‘황희 정승과 소’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불언장단’ (不言長短 :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음)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젊은 날의 황희가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들판에서는 노인이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가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장, 그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 "
그러자 농부는 밭가의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소가 들리지 않도록 귀에 대고 귀엣말을 하였다.
  "누런 소가 검은 소보다는 훨씬 일을 잘 합니다. "
  "노인장, 어느 소가 일을 잘하던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귀엣말을 하십니까? "
황희의 말을 들은 농부는
  "젊은 선비, 모르는 말씀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오 "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얼굴이 화끈했다. 비록 그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잘한다, 못한다’ 하고 흉보는 일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저 노인은 비록 농사를 짓고 있으나 학덕이 높은 선비인 것 같구나. 오늘 나는 저 노인에게  아주 값진 교훈을 받았으니 평생 잊지 말아야지.-
황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때부터 다시는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소 때문에 얻은 참으로 큰 교훈을 얻은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시인 백석의 ‘절간의 소’ 이야기가 유명하다.

 시인 백석은 ‘점술황제님이신 지운선가님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병은 바로 근처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멀리서 약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가 더 영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백석이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서 치유할 수 있는 약이나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덕을 쌓지 않고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실력을 쌓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쌓는 일이다. 덕을 쌓고 실력을 쌓으면 모든 세상의 일은 잘 풀리리라고 본다. 소가 인간보다 영하다는 말은 옛날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잡아 시인 백석은 시에 이렇게 소개하였다.

절간의 소 이야기/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소 풀을 뜯는 소가 인간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낳게 할 약藥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선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칠십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
                                                *추었다 : 추슬렀다

위 시는 백석의 시 중에서 소라고 하는 동물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이다. 백석은 첫 시집의 중간 제목에 ‘얼럭소의 영각’이라는 표현을 달 정도로 소를 좋아했고 한다.
백석의 이런 모습은 화가 이중섭에게도 이어졌다. 백석과 친했던 이중섭이 백석의 시를 읽고 소에 관심을 잦았다는 것은 몽우화백의 말이기도 하다.
 
4. 화가와 시인의 소

천재 화가 이중섭을 흔히 ‘소의 화가’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중섭 작품 중심에는 우리네 자화상 같은  ‘소’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소’의 모습 속에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다.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서글픈 역사, 작가 자신이 작품을 하면서 안아야 했던 고통과 슬픔, 평생을 그리워 한 고향에 대한 감회 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소’. 그는 분노한 소를 통해 압박받는 민족의 모습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하며 한 시대, 한 민족, 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굵고 힘찬 터치에서 날카로운 선묘에 이르기까지 소의 격렬한 동세를 단숨에 파악해 들어간 이중섭의 소. 그것은 소의 생태, 소의 해부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 한 것이었다. 특히 이중섭은 그의 작품에서 색보다는 선을 중요시 했다. 정확하고 힘차며 유연하고 경쾌한 선을 구사한 그의 표현력은 그림 속에 율동, 역동성의 생명력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관념이 아닌 예리한 관찰의 결과로 돌진하고 있지만 비극적인 내면을 담고 있는 소의 표정을 읽어 나가는 이중섭의 소 그림은 그의 자화상인 동시에 민족의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이중섭의 소에 관한 대표작품으로는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등이 있다. 시인들은 이중섭과 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소의 말/이중섭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
아름답도다 

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히 헤치다

*  위 시는 천상 화가인 이중섭이 51년 피난지 서귀포의 방벽에 덕지덕지 써 붙여놓았다는 그의 유일한 시 '소의 말'이다. 그가 쓴 딱 한 편의 시다. 이중섭의 조카 이영진이 암송하여 전했다고 한다.

5.  소싸움

두 마리의 소를 싸우게 하여 즐기는 놀이인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주로 농촌에서 농한기 때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싸움은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소싸움은 소가 한 곳에 모여 풀을 뜯다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게 되고, 소의 주인도 자기네 소가 이기도록 응원하였다. 이때의 소싸움은 부락단위 또는 씨족단위로 번져 서로의 명예를 걸고 가세家勢 또는 족세族勢 과시의 장으로 이용 되었다. 주로 추석놀이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협동과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아 부활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농사일을 쉬는 동안 살이 오른 수소들이 맞붙어 맹렬히 싸우는데 더러는 죽는 수도 있다. 경상남도 일대의 소싸움에서는 싸움 전에 소에게 소주를 먹여 사나워지게 만든다. 싸울 장소에는 모래를 깔고 새끼줄을 둘러 싸움판을 마련하고, 싸움을 할 소 사이에는 포장으로 가리는데, 포장을 치우면 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뿔을 맞대고 상대방을 떠받고 밀게 된다. 이때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면 지게 된다. 여러 마리의 소에게 싸움을 시킬 경우에는 시간을 제한하고, 단판치기로 싸움을 시킬 때에는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 싸움을 붙인다. 이때 농악대가 흥을 돋우게 된다.

최근 90년부터 영남 소싸움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3.1절 기념행사로 자계서원 앞 넓은 서원 천변에서 개최되는 소싸움이 해마다 규모가 커지게 되어 이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전국 소싸움 대회는 청도(국제 소싸움 대회 3월초) 진주(주말 대회 및  5월 논개제 10월 개천예술제 부속 행사로 치러짐) 창원(6월 창원시 대산면) 김해(11월 김해 단감제 부속 행사) 창영(10월 부곡 온천제 부속 행사) 완주(정확히 정해진 기간이 없음) 정읍(정확히 정해진 기간이 없음) 함안(4월 아라제 부속 행사) 의령(의령 4월 의병제 부속 행사 부산 벡스코 대회) 대구(달구벌 행사) 합천(대보름맞이 행사)등이 있다 대부분 축제 부속 행사로써 진행되어지고 있어 이를 국가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로 성장시켜야 될 것으로 보인다.

6. 광우병

광우병은 소에게 발생하는 전염성 뇌질환의 일종으로. 쉽게 말해서 소가 미치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4∼5세의 소에서 주로 발생하는 폐사성 신경질환이다. 소의 뇌조직이 해면처럼 구멍이 뚫리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이 병에 걸린 소는 갑자기 미친 듯이 포악해지고 정신이상 및 난동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며 근육이 위축되어 아무 데나 들이받고, 잘 걷거나 서지 못한다. 1996년 초 영국에서 발생하여 영국 경제의 엄청난 손실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공포를 주기도 하였다.

광우병이 문제가 되고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인간들이 소에게 양의 내장과 뼈를 가루로 만들어 사료에 섞어 먹임으로써, 초식동물인 소에게 초식동물을 먹인 비 자연적인 현상의 결과이다. 그 이전까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광우병이 초식동물에서 육식동물로만 전염되었기 때문에 그 전염의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러나 동물성 사료를 대량으로 공급하였기에 '프리온'의 전염이 매우 빨라졌다. 동물성 사료는 가축의 성장을 매우 빠르게 만들어줘 목축업자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유혹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인간 광우병'은 동물성 사료를 쓰지만 않는다면 발생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환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프리온'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일으키는 광우병은 어떤 병인가? '프리온'은 변형된 형태의 단백질로서 생명이 없으므로 죽일 수가 없다. 대부분 병원체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그 병원체의 생명력을 없애는 방법과 번식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프리온'의 경우는 그러한 방법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그것은 변형된 단백질로서 매우 안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학적, 물리적으로 그 형질의 변형 즉, 감염성 및 병원체로서의 성질을 없애는 일이 쉽지가 않다. 열에 강해서 섭씨 300~400도 정도의 열에 의해서 변성이 된다고 한다. 웬만한 화학물질에는 별로 반응을 하지 않으며 락스나 가성소다에 하룻밤 정도 담가놓으면 변성이 일어난다고 한다.

즉, 광우병에 걸렸을 경우 소든 사람이든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리온'에 감염된 소나 사람의 경우 일단 침범 받는 곳이 뇌신경이다. 뇌신경을 변형시키면서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뇌의 어떤 부위가 먼저 침범되는가에 따라 증상이 다양해질 수 있겠으나, 인간 광우병의 경우 치매에 가까운 증상이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보면 된다. 초기증상으로는 자기 무시, 무감동, 안절부절, 쉽게 피로가 오고, 과다수면 혹은 불면 등의 수면 장애와 방향감각 상실, 간대성 경련, 기억력 감퇴와 감각 부조화, 평형감각 둔화 등 뇌기능의 장애와 관련된 거의 전부가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감염이 된 후에 증상이 나타나는 시간이 길고, 또,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증상들이 대체로 치매와 비슷한 형태로 오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 광우병'인지를 모르고 지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들에게서 올 경우가 많은 반면 그 경우에 그저 치매의 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지나갈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많은 '인간 광우병' 환자가 밝혀지지 않고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미국산 쇠고기가 문제가 되는가? 예전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던 곳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지만, 영국은 그 이후로 동물성 사료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파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에서는 여전히 대량의 동물성 사료를 사용하고 있다. 또, 미국에서는 소를 키운다기보다 대량 생산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식물성 사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동물성 사료는 값싸면서도 효과가 그만이다. 동물성 사료라고 값비싼 살코기가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것이다. 내장, 뼈 등을 말려서 갈아 식물성 사료와 섞어 쓴다. '프리온'이 침범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곳이 뇌신경이지만, 그 곳만 가는 것은 아니다. 뇌 다음으로 분포가 많은 곳이 뼈와 내장이고 흔히 살코기로 불리는 근육에도 분포할 수가 있다. 그런데 분포가 많은 뼈와 내장을 서양에서는 먹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광우병은 인간에게도 전염될 수 있으며 현재까지는 치료방법이 없다고 한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불평이 없는 소에게 부끄러운 사람들은 소의 선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소를 잃고 난 후에도 외양간은 고쳐져야 하며 소의 맑고 큰 눈을 오래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기축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소를 알면 기축년이 보인다.

‧ 프리온Prion : 단백질(Protein)과 비리온(Vrion=바이러스입자)의 합성어로 바이러스처럼 전염력을 가진 단백질 입자라는 뜻. 
                
▶ 참고 : 위 글의 일부는 편집되었음.

• 저서 : 시집 공든 탑 외. 동시집 첫꽃 외. 동화 폐암 걸린 호랑이 등 다수•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역임• 현) 전주비전대학교 운영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현) 향촌문학회장. 사/미래다문화발전협회장. 고글출판사상임이사• 동북아신문 전주지사장
• 저서 : 시집 공든 탑 외. 동시집 첫꽃 외. 동화 폐암 걸린 호랑이 등 다수•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역임• 현) 전주비전대학교 운영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현) 향촌문학회장. 사/미래다문화발전협회장. 고글출판사상임이사• 동북아신문 전주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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