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동근 (부경대학교)

예동근 부경대 중국학과 교수/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장
예동근 부경대 중국학과 교수/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장

1. 나와 노신의 「나래주의」

  30년 전이다. 중학생 시절이었고 정확한 학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당시 나의 중국 한족친구의 교과서에는 「나래주의」란 글이 있었다. 제법 가까운 친구라 숙제도 꽤 대신 잘해주었는데, 그날은 친구 도와 독후감을 써주기로 했다. 그 시절 나는 삼국지, 수호전을 읽기 위해 『신화사전』을 옆에 두고 살았을 만큼 한자를 꽤 많이 익혀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 글은 도무지 읽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홧김에 「나래주의」를 비판하는 독후감으로 써주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도둑질한 것에 대한 궤변”이라고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친구는 선생님한테 불려갔고 돌아와서는 나한테 화풀이하였다. “너는 감옥 갈 놈이야! 감히 노신을...”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노신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노신의 다른 글들은 별로 열심히 읽어본 적 없었다. 교과서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좋아서 찾아 읽었다기보다 시험 준비를 위해 읽었을 뿐, 그것도 별로 기억에 남는 글이 없었다. 그래도 대학 졸업할 때엔 내 서재에는 노신의 『납함(呐喊)』, 『방황(彷徨)』 ,『조화석습(朝花夕拾)』, 『야초(野草)』 등 책들이 시리즈로 꽂혀 있었다. 하지만 번체자였고 내리 읽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어서 얼마 읽지 않고 이내 포기해버렸다. 그들은 나에게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했고 ‘신’으로서 모셔진 것뿐이다.

  그러다가 2018년쯤이겠다. 중국 광저우에 있는 광동외국어무역대학의 지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일본 제3대 노신연구전문가인 후지이 쇼조(藤井省三)를 알게 되었고 이튿날 그의 특강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연구방법론과 접근시각에 그만 깊이 매료되었다. 20분 동안의 짧은 발표였지만, 「고향」의 작중 주인공 ‘윤토’로부터 시작하여 노신연구의 동아시아적 의미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보고 나는 그가 참으로 대가란 생각이 들었으며 그의 책을 꼭 한번 탐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 「나래주의(拿來主義)」 방식으로

  대가를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나래주의(拿來主義)」이란 글로부터 조선족 “신문예, 신문학”의 길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1차 자료는 후지이 쇼조(藤井省三)의 책에서 “나래(拿來)”하였지만 나의 아이디어와 구상에 맞추어 새롭게 배열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노신은 「나래주의(拿來主義)」의 탁월한 실천자였다.

  노신은 「나래주의(拿來主義)」의 말미에 실천자에 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침착하고 용맹하며, 판별력이 있고 이기적이지 않아야 한다(首先要这人沉着,勇猛,有辨别,不自私). 가져온 것이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문예도 스스로 새로운 문예가 될 수 없다(没有拿来的,人不能自成为新人,没有拿来的,文艺不能自成为新文艺).”

  노신은 실로 용맹하고 판별력이 있는 “나래주의”자였다. 1902년(21세)부터 1909년(28)까지 7년 동안 노신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보내면서 세계의 문학발전의 흐름을 예리하게 읽어냈고 책 번역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유학 1년차였던 1903년에 프랑스 작가인 쥘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여행(月界旅行)』이란 책을 번역하였고 1908년에는 『역외소설집』을 번역•출판하였다. 이런 소설들의 번역은 노신이 중국 신소설의 대표자이자 백화문운동의 거장으로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노신은 적어도 소설에서의 “나래주의”를 통해 부단히 창조적인 모방과 새로운 혁신을 하였고, 문예가 스스로 신문예로 발전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노신은 여전히 번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문학 대가들의 저서 또는 당시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는 저서들을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 수준 또한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21년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龙之介, 1892-1927)의 『코(鼻子)』, 『라쇼몬(羅生門)』을 번역하여 북경조간신문에서 연재하였는데, 1923년에 아쿠타가와가 중국을 여행하던 중 이 번역문을 보고 노신의 번역 수준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일본소설의 중국번역(日本小說的中國飜譯)”이란 글을 써서 다시 한 번 노신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노신의 글이 일본에 소개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1919년에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의 『어느 청년의 꿈(一個靑年的夢)』을 번역하면서였다. 답례인지는 모르지만 1927년 10월에 무샤노코지 또한 일본에서 처음으로 노신의 『고향』을 번역하여 『大和諧』란 월간지에 실어주었는데, 이것이 시작점이 되어 노신의 글이 일본에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2) 「나래주의(拿來主義)」는 하나의 문학생태 사이클을 만들 수 있다.

  1절에서는 “나래주의”적인 쌍방향 교류를 통한 개인적 성장을 강조하였다면, 2절에서는 원형적 사이클을 형성할 수 있는 문학의 힘에 대하여 간략하게 전개하고자 한다.

  후지이 쇼조(藤井省三)에 따르면, 노신은 단순히 중국 대륙에서만 양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1936년을 기준으로 노신의 영향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그의 사상과 전통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1935-)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树, 1949-)에 계승되어 동아시아적으로 순환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처럼 일본에서 출현한 노신 2세대들은 다시 중국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莫言) 등에 영향을 주면서 부단히 생성되고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유기석, 신언준, 이육사 등에 의해 노신이 소개되었는데 분단 이후에도 이영희 등 중국연구자들에 의해 발전되면서 노신의 사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로 확장되었다고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신 사후의 문학사상은 타국의 문화인들에 의한 나래주의 원료로 변화되었고 본의 아니게 “송출주의”가 되었다. 후지이 쇼조(藤井省三)는 노신이 말한 “아Q정신”이 식민지 반식민지 지배에 놓인 한국, 그리고 미국 치하에 유사 식민경험을 겪은 전후 일본, 독재 통치하에 있는 대만과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던 싱가포르 등 많은 국가들에 영향을 끼치면서 거대한 동아시아 사이클을 형성하였다고 주장했다.

3. 조선족 신문학발전에 주는 시사점

1) 번역을 통한 “신문학” 발전 가능성 모색

2) “시대적 연결고리”의 활용

  일본에서 첫 번째로 번역•소개된 노신 작품은 1927년에 10월에 출판된 『고향』이지만, 이는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번역된 외국저서는 아니다. 그것은 일본보다 두 달 앞당겨 번역되어 발간한 『광인일기』이며 역자는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유기석(유수인, 1905-1980)이다. 당시 역자는 자신의 이름마저 주수인의 이름을 따랐을 정도로 노신에 대한 큰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국권을 상실한 한반도의 재중 조선유학생들 속에는 탁월한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중국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던 파금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노신 등 유명한 문인학자들을 접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노신을 직접 방문하면서 활발한 교류를 통해 그의 사상 등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초기 중국에서 유학한 조선인유학생들의 사상, 문학태도, 활동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중국 주류 문인계층으로 개입하고 연대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은 한반도의 신문예 발전에 새로운 힘과 바람을 넣었다고 볼 수 있겠다.

3) 패러다임을 바꾸다.

  노신은 신소설의 개척자이기도 하고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긴 하지만 신소설이 20~30년 발전한 뒤에는 그보다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이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동시대를 살았던 노신의 동생 주작인의 글재간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신의 글이 오늘날까지도 훨씬 높게 평가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노신이 신문화운동에서 소설의 양식, 언어와 표기법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노신은 신문화운동에서 전현동 등이 표준화시킨 문법과 표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단음절 어휘로 형성된 소설에 쌍음절 어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는 구두어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중국의 옛 문장들은 선인들이 자주 사용했던 전장(典章)들을 많이 이용하였는데 이에 반해 노신은 화려하여도 불필요한 양식들은 과감하게 버렸고 통속적인 언어로써 스토리를 풀어냈기 때문에 중국 소설의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노신이 유학시절 수많은 소설들을 읽고 외국소설들을 번역하면서 축적된 노하우와 소설의 발전 전망에 대한 정확한 판별력이 있었기에 “신문학”의 개척이 가능할 수 있었다.

4. 마무리 하면서

  지금 조선족 지위와 영향으로 볼 때 당시 국가를 잃은 한반도 문인들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문학도들이 세계각지에서 문학을 전공하였고 전문화된 문학, 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형식으로 거대한 동아시아 물결, 나아가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사상•문화를 가져와야 하는가? 어떤 저서들이 조선족의 문화발전에 가장 절실할까? 지금이 그런 변별력과 용맹함이 필요할 때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족문학에 대한 자리매김과 현재까지도 형성되고 있는 조선족문학을 어떻게 나래주의로 창조적 모방과 혁신을 도모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마디로 중국에서 조선족문학이 오랫동안 정체되면서 형성된 문제점을 과감히 정리하고, 판별력 있게, 그리고 주체적으로 새로운 영양분을 수입해야 “새 사람, 새 문예”가 형성될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10월 18일 '재한동포문학포럼'에서 저자가 발표한 발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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