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사경화(寫經畵)의 거장인 무행 (無行) 김길두 화백이 고 신효근 여사의 초상화를 전각한 돌그림
사경화(寫經畵)의 거장인 무행 (無行) 김길두 화백이 고 신효근 여사의 초상화를 전각한 돌그림

세밑인 지난 30일 지인으로 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사경화(寫經畵)의 거장인 무행 (無行) 김길두 화백이 돌아가신 어머니 신효근 여사의 초상화를 전각한 돌그림을 만들어 준 것이다. 비취색이 은은하게 감도는 요녕석 바탕에 새겨진 어머니는 내게 '힘내라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내 어머니는 일제시대 태어나 해방과 6.25동란, 산업화의 시대를 살다 가셨다. 충청도 가난한 농가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국민학교 2학년 중퇴 후 생업에 뛰어들어 부모님을 봉양했다. 결혼 후에도 가난을 면치 못했고, 채소장사 등 온갖 궂은 일을 하시면서 우리 6남매를 반듯하게 키워내셨다.

그 시절 다른 어머니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제와 산업화 시기에 대다수 여성들은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힘없는 존재였다. 남자들 처럼 공부하기도 어려웠고, 변변한 일자리를 얻기도 힘들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굴레는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삶을 옥죄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하고 식구들이 먹다 남긴 밥을 홀로 먹기 일쑤였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생업을 해서 가정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항상 남편과 자식의 뒷자리에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오늘의 경제강국 대한민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풍요와 번영의 가장 큰 원동력은 그런 어머니들이었다.

사경화의 대가인 김길두 화백(왼쪽)과 함께 어머니 서각화 작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한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사경화의 대가인 김길두 화백(왼쪽)과 함께 어머니 서각화 작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한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세대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IMF와 금융위기도 힘들었고, 독재시대를 넘어서는 것도 힘겨웠지만,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생명과 경제' 두 가지 모두 위협받는 중첩된 고통이라는 점에서 더욱 힘이 든다. 세밑에 가족과 친지, 친구도 만나지 못하니 고립감과 우울감도 심각해진다. 이럴 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최고의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어머니가 없어진 시대인 듯 하다. 온갖 고통속에서 고귀한 생명인 자식을 키우고 가르쳤던 어머니, 출세하는 사람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가르쳤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 어머니는 우리의 추억과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다. 그러다 가끔 눈물어린 회상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존재가 되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또다른 고통과 병리를 불러온다. 어머니는 없고, '엄마'와 '맘(mom)'만 보일 뿐이다. 그저 내 자식 좋은 대학 보내 출세시키고, 내 자식만을 위해 살아가는 엄마들이 극성인 세상이다. 자식 교육을 위해 학습 매니저를 자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스펙 조작까지 하는 지경이니 말해 무엇하랴. '정유라 사건'과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 '정경심 교수 사건' 등은 모두 내 자식을 위해 반칙도 서슴지 않는 엄마들의 비뚤어진 모습에 다름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엄마가 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세태이다.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거나, 아예 결혼도 하지 않는 젊은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가르치는 것이 힘들다 보니 이를 회피하는 것이다. 정부가 각종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지만,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져 한국은 이미 OECD국가 중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방 소멸과 지방대 폐교, 국방인력 부족, 산업 경쟁력 약화, 다문화 등 숱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다.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어머니가 되어 보지 못하고, 심지어 '극성 엄마'도 되어 보지 못한 여성들이 활보하는 세상은 삭막하기만 하다. 마치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걷는 것 처럼 힘겹고 위태롭기만 하다. 어머니는 우리 삶의 오아시스이자 생명수였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따스한 밥을 먹으면 어떤 상처든 치유가 되었다. 어머니가 거친 손으로 등을 두드리시면서 "다 잘 될거야"라고 하시면 두려운 마음은 눈녹듯 사라졌다.

코로나19 사태로 고통받는 시대에 최고의 명약은 무엇일까? 그 구하기 힘들다는 백신일까? 아니면 치료제일까? 적어도 내겐 그것 보다 더 좋은 약은 어머니의 존재, 그 미소라는 생각이 든다. 요녕석 돌판에 새겨진 어머니는 내게 말하고 있다. "아들아 힘 내라. 코로나 그거 암것도 아녀"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을 거쳐 영남매일신문 회장과 2018평창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양대 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현립대 초빙교수, 중국 외교부 초청 칭화대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중국 흑룡강신문 한국자문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