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칼럼니스트

이남철 경제학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 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 경제학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 교육과학부 자문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음력 1월1일), 설이 곧 다가온다. 고향, 나라를 떠나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한 이들은 명절에 더욱더 그리움이 클 것이다. 설을 생각하면 설탕같은 하얀 눈이 연상된다. 설 즈음에 어릴 적 필자의 고향은 눈이 많이 내렸다. 그 당시에는 눈이 내리면 아버지는 마당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눈을 쓸도록 엄명이 내려져 거역할 수 있는 입장이라 낭만적인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작년 말 적설량이 정읍에 29.2㎝를 기록하더니 몇 일전 폭설 특보가 내려져 전라북도 전역에 최대 20㎝에 달하는 많은 눈이 와서 교통이 두절되고 농사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런 눈을 생각하면서 조선 정조와 순조 때를 살다간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시집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린 야설(野雪)과 필자의 작은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도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함부로 어지럽게 가지 말자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오늘 아침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작은어머니가 하얀 설원(雪原)에서 후손들에게 맑은 영혼으로 인생항로를 인도하는 것 같다. 작은 어머니는 1919년에 태어나서 만 100년을 사시고 2019년 돌아가셨다. 본인보다 큰 아들과 큰딸을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셨다.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을 천붕지괴(天崩地壞: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짐)에 비유하고, 자식의 죽음을 단장지애(斷腸之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라 한다. 필자는 큰아들을 잃은 작은어머니께 “얼마나 가슴 아프시냐고” 물었다. “하느님 곁으로 가서 그렇게 슬프지 않다”는 말씀에 울컥하고 눈물을 흘렸다. 작은집 큰형은 새벽기도에 가셨다가 심장문제로 6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나셨다. 

세월이 흘러 설 풍습과 사람들의 행동도 많이 변했지만 조상 섬기고 친척들과 우애를 가지는 일들은 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아버지는 4남2녀 중 장남이셨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작은어머니는 1933년 작은 아버지와 결혼 후 몸이 계속 아프셨다고 한다. “시숙(남편의 형 호칭) 교회에 다니면 몸이 좋아질 것 같아 가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허락을 하셨고 작은 어머니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셨다. 그 당시에는 사시는 집 근방에 교회가 없어 먼 거리를 다니시면서 몸이 좋아지셨다고 한다. 풍요롭지도 않은 살림에 동네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헌납하셔 많은 지역 주민들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셨다. 아마도 작은어머니 아들 4명 중 3명이 교회장로인 것으로 알고 있다(혹시 막내아들이 장로면 전부). 요즈음 교회든 성당이든 절이든 습관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하다.
 
필자는 작은어머니를 특별히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은 시대적으로 어려운 일제치하, 6.25 전쟁을 거치는 시기에 모범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형제간의 우애, 자식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부지런함과 절약정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도 작은집 형제들이 행복하게 교류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적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작은어머니는 가진 재산이 없으셨기도 했지만 형제간에 재산 다툼이 없도록 하셨고 아들 교육에 있어서도 평등교육을 실천하셨다. 학업 성취도의 평등이 아니라 상급학교 진학에 거의 동일 수준에 투자하셨다. 옛날 어른들은 장남 우선주의를 철저하게 이행하는 세대였지만 작은어머니는 그러하지 않으셨다. 물론 작은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재산 분배(사실 나눌 재산도 별로 없었지만)와 인적자본 투자 문제로 부모와 자식 간, 형제 간 우애가 깨지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보면 작은어머니는 선각자적 정신을 가지셨다.  

구정 날 새벽, 작은어머니는 작은아버지와 함께 자식들을 대동하고 해가 뜨기 전 큰집인 필자의 아버지께 세배를 오셨다. 이뿐 아니라 작은 집 식구들 먹을 음식을 마련하시면 자주 큰집인 우리집에 가지고 오시곤 하셨다. 필자가 작은집에 가서 식사라도 하는 날이면 작은어머니는 조카에게 묻지도 않고 물을 부으셨다. 이유인즉 밥을 남기지 말고 배불리 먹으라는 무언의 말씀이시다. 60년대에는 호남지방에 대부분 빈농인 사람들은 심한 가뭄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다. 어릴 적에는 작은어머니가 하시는 일들에 깊은 감사를 느끼지 못했지만 나이 60을 지나니 너무나도 본받고 싶은 모습이다.  

2주 지나면 설날이 찾아온다. 배들 벌판(정읍시 이평면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에 횐 눈이 많이 내려 논과 밭을 식별하지 못했던 어릴 적 추억과 함께 설날 작은어머니 모습이 선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필자에게 쌀밥에 물을 부어주시던 모습과 아무도 가지 않은 하얀 눈길을 가시던 아름다운 발자국이 그립다. 섣달그믐(음력 12월말일) 즈음에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을 생각하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깊게 고민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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