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산 아래 작은 방 : 한 꼭지>

 

길에 대한 단상

 

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끈이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오간다는 것은 길이라는 끈이 있기 때문이다. 길은 비어 있어서 길 위에 서 있는 동안 누구나 주인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길 위에서 저마다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끝은 모두 같다. 그 끝은 죽음이다. 누구는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났는가 하면 누구는 반환점을 돌고 누구는 종점을 향해 가고 있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삶을 외면할 수 없다. 사라졌으면 하는 것은 남아서 칼이 되어 가슴을 긋고, 남았으면 하는 것은 모두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워할수록 저만큼 달아나 더 그립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일상은 캄캄해서 슬프다. 길 위에서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고 멀리 보이는 만남을 향해 천천히 앞으로 나가야 한다. 길 위에서 길에게 길을 물어도, 결국 길은 내 안에 있다.

 

<건지산 아래 작은 방 : 두 꼭지>

 

아버지론

 

 

이탈리아 심리학자 ‘루이지조야Luigi Zoja’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윤리적인 올바름의 신봉자여야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들은 이러한 도덕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위태로움을 경험한다’고 했다. 이것을 ‘부성의 패러독스Paradox’라고 한다. 훌륭한 아버지는 자식들과 소통하고 긴밀하게 교감하는 아버지다. 그런가하면 이웃과 사회와 상호작용을 매끄럽게 하는 아버지다.

 

잘난 아버지도 못난 아버지도 아버지는 모두 내 아버지다. 외로움(獨苦)과 가난(貧苦)과 병마(病苦)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이름도 찬란한 ‘아버지!’. 한 가정에서 가장 늙은 머슴인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사슬에 묶여 힘들고 지쳐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견딘다. 아버지는 크나큰 나무여서 자식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고 있지만 그의 가슴은 이 순간에도 가을 낙엽 아니면 겨울 저녁이다.

 

이 세상에는 나쁜 아버지는 없다. 다만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모를 뿐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보고 싶은 남자 ‘아버지’. 나는 어떤 아버지인가?

 

 

<건지산 아래 작은 방 : 세 꼭지>

 

한 줄의 고백

 

흔히 사랑은 주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줘야 하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기준이 없어 포괄적이다. 사랑의 대상도 사람을 비롯해서 애완견 ․ 미술품 ․ 자연 등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감정과 이성으로 마음과 마음이 포개져 하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기쁨은 사랑의 맹세를 낳고 사랑의 맹세는 또 다른 기쁨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명예도 버리고 출세도 마다하는가 하면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바치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랑을 수없이 해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는 불행한 사람도 있다. 사랑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고 게거품을 무는 사람이 있다. 그까짓 사랑 없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은 몸짓이다. 떨림과 기쁨이 사랑이다. 사랑이 몸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나누고 싶어한다. 잡은 손은 놓고 싶지 않고, 보고 또 봐도 더 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심장에 불을 붙인다. ‘사랑합니다!’ 한 줄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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