훠궈뷔페 원조 김순희 사장

글 곽미란 특약기자

복만루 훠궈뷔페 1호점
복만루 훠궈뷔페 1호점

"주머니 사정 땜에 가격을 따져가면서 식사를 하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너무 돈에 전전긍긍하며 음식을 먹다 보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돼요……그래서 저는 음식점을 차리게 되자 제일 먼저 생각한 게 가격 부담 없이 음식을 먹게 하자는 거였어요. 마음 편하게 먹다보면 음식이 더 맛있지 않을까요?"

무한리필 훠궈 뷔페를 차리게 된 계기에 대해 김순희 사장(46세, 목단강)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꺼내듯 기억을 더듬었다. 김 사장은 한국에서 첫사람으로 중국훠궈 뷔페를 시작했다. 대학생들을 타깃으로 하여 시작한 훠궈뷔페는 연령층에 상관없이 고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은 2호점, 3호점까지 확장되어 건대양꼬치거리 상권을 삼각형으로 에워싸고 손님을 끌고 있지만 그 시작은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복만루 훠궈뷔페 김순희 사장 (46세)
복만루 훠궈뷔페 김순희 사장 (46세)

파란만장 한국생활
지난 2월 20일 오후 필자는 복만루 무한리필 훠궈 3호점에서 김순희 사장을 만나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20대 초반인 1996년, 돈을 벌어서 고향에 미용실을 차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으로 왔다. 춘천 옥구슬 공장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대구에 섬유공장이 많고 취직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대구로 떠났다. 미싱이불공장에 취직해 하루에 열 시간을 일하고 월급 50만원을 받았다. 월 8만원의 지하 단칸방에서 지내며 그녀는 한푼두푼 돈을 모았다. 

"회사를 바꾸면 월세방도 회사 부근으로 바꿔야 하니 이사를 다니는 게 싫어서 웬만하면 한 회사에서 오래 일했어요. 5년이 지나니 월급이 75만원으로 올랐어요."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임신 막달까지도 주간과 야간 투타임을 뛰었다. 친정어머니가 한국에 와서 애를 봐주셨다. 곧 이어 둘째가 태어났다. 한낱 노동자의 월급에 매달려서는 평생 애초에 원했던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둘째까지 낳고 나니까 엄마가 그러더라구요. 너 꿈이 먼저다, 엄마는 돈을 안 벌어도 된다. 애는 내가 봐줄 테니 젊은 사람은 꿈을 펼쳐라. 이제부터라도 니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어머니의 말에 힘을 얻은 그녀는 다시 미용사의 꿈에 불씨를 지폈다. 2003년 그녀는 미용학원에 생도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조로 들어갔지만 모든 것이 처음 시작하는 일이었기에 바닥을 쓰는 일부터 시작했고 월급은 고작 40만원이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녀는 악착같이 일을 배웠다. 원래 헤어손질에 솜씨가 있었고 그만큼 간절했기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빠른 시간 내에 중등미용사 자격, 디자이너 자격증을 땄다. 

2005년 그녀는 대구에서 미용실을 오픈했다. 의자 세 개를 놓고 시작한 미용실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장벽은 여전히 그녀를 가로막았다. 2009년 그녀의 가족은 서울 대림동으로 이사를 왔다. 대림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했으나 서울에 친구도 없고 인맥도 없다보니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결국 10개월을 버티다 문을 닫았다. 여행사 가이드, 변호사 사무실 통역상담,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꿈보다는 생계가 우선이었다. 50만원의 월세를 아끼기 위해 그녀의 다섯 식구는 여동생네 집에 2년 동안 얹혀살았다. 

건대양꼬치거리에 입주
건대양꼬치거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그녀의 이모가 중국음식점을 차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2010년 10월 10일, 그녀는 동생에게 1억5천원을 빌려 중국식당을 시작했다. 식당 역시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남편이 주방을 맡고 제가 홀서빙을 했는데 엄청 많이 다퉜어요. 저는 직접 손님을 상대하다보니 서비스 하나라도 더 올려드리고 싶었는데 남편은 주방에서 일손이 딸리니까 짜증부터 내고, 무엇보다도 돈을 빌려서 식당 차렸는데 장사는 잘 안되지, 돈은 맨날 쪼들리지, 마지막엔 보따리 싸들고 떠난다고 할 지경이었어요."

남편과의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는 와중에 그녀는 2층까지 임대해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룸을 만들고 노래방기계도 들여오면 단체손님들을 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외벽이다보니 노래방 기계는 사용할 수 없었고 룸은 추워서 손님들도 꺼려했다. 사람들의 온기가 없는 2층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한국의 해물뷔페가 많은 체인점을 운영하며 인기몰이인 것을 알게 됐다. 거기서 힌트를 받고 중국훠궈 뷔페를 하면 되겠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백이면 백 다 말렸어요, 밑진다며. 남편도 반대했고요. 그래도 제 생각은 확고했어요."

2층에 달랑 고기냉장고 하나 들여놓고 훠궈뷔페를 시작했다. 야채 몇 종류에 양고기, 그리고 소스가 전부였다. 가격은 인당 12,000원, 2012년 3월초였다. 개학을 맞은 건국대학교의 학생들이며 유학생들이 조금씩 찾아들기 시작했다.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졌는지 4월이 되면서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으나 이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개학을 하면 매출이 올라가고 방학을 하면 매출이 떨어졌다. 그렇게 1년을 유지하며 쿠폰도 팔고 다양한 행사를 했다. 1년이 지나니 학생손님들이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정보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볶음요리를 하던 1층 중국식당도 다시 인테리어를 해 훠궈 뷔페로 바꿨다. 월매출도 1,000만원에서 많이 팔릴 때는 4천만원에 달했다. 그랬지만 여전히 점심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저녁에 한 타임으로 끝나는 정도였다. 그러던 그녀에게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KBS에서 전국의 무한리필 식당들을 찾아서 방송을 하던 중 복만루를 찾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14년 8월 20일, 첫 방송을 탔던 그날을. KBS "생생정보"에서 복만루 무한리필 훠궈가 방송되고 있었고 거의 동시에 문밖에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같은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줄을 서서 먹는 진풍경은 오늘까지 이어졌다. 

박리다매 운영철학으로 2년 정도 묵묵히 훠궈뷔페를 운영하며 그녀는 권리금과 동생한테서 빌린 돈을 갚았다. 자금도 없이 초창기에 너무 크게 벌려서 마음고생이 심했기에 그녀는 가게 하나로 만족했다. 셋째딸도 태어났고 그녀는 가정과 가게에 충실하면서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의 의미를 그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19년 건대상인협회 송년회
2019년 건대상인협회 송년회

2021년 2월 23일

 

동북아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1 동북아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ong01118@naver.com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