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1949년에 태어났다.

작년에도 말했는데

나이가 너무 많지만 않다면

면허를 따러 갈 것이다.

그렇다. 엄마는 반평생 동안

나에게 바쁘고 힘들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그녀는 위풍당당하게 살았다

평범하고 충실했으며

캐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인생의 의미에

스스로 장중한 가치를 지니게 됐다

 

평범한 생활은

성공학 이념처럼

상상조차 없을 만큼

엉망이지 않았다

이른바 중산층이

우려했던 계층 추락은

사실은 가득 넘쳤다,

편협한 우월감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초조함으로.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지 않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시행착오와 오류를 허용하고, 그들이 길을 잃고 갈림길에 놓이는 것을 허용해야 하며,

그들에게 생명의 리듬과 내면의 부름에 이끌린 느린 성장을 허용해야 한다.

글/후앙떵(黄灯)

필자는 학자,다큐멘터리 작가이다. 대표작으로는 <대지 위의 친인(大地上的亲人)>, <나의 2차 모집 대학군 학생(我的二本学生)>등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삶을 인정하게 된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을 볼수록 그들의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개념·이론과 씨름할수록 부모님의 인생자세가 얼마나 생생하고 생명력이 넘치는지를 깨닫게 된다.

보통 사람인 나의 부모는 후난 미뤄(湖南 汨罗) 북쪽의 어느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 왔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이고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어머니는 19세에 아버지에게 시집왔다. 외할머니는 아이 6명을 낳았으며 또 1명을 입양해 아들 5명을 두었는데 어머니가 유일한 딸이었다. 그 시절, 비록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어떤 여성보다 홀대는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심지어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나보다 훨씬 글씨를 잘 쓰고, 어떤 문학작품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단지 그녀는 한평생 너무 바빠서, 내내 여유로운 심정과 안일한 정취를 가질 수 없었다. 결코 편안하게 앉아서 차 한 잔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었고, 연애하면서 아름다운 풍월을 보내며 한 번쯤 낭만적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뼛속 깊이 자리잡은 문학청년 경향에 대해 유일하게 인식했던 적은 70년대 말, 우리 네 자매가 아주 어린 나이일 때 그녀가 단호하게 몇 명의 아이를 떨쳐버리고 꿋꿋하게 자전거를 타고 옆 마을에 가서 영화를 보려 했던 모습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그때 아직 서른도 안 되셨고 한창 젊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26살에 벌써 아이 넷을 낳으셨다. 평생 가장 눈에 띄는 그녀의 생각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계획 출산 전에 너희 넷을 낳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그토록 아이를 사랑했고 작은 생명을 사랑했다. 비록 그녀가 우릴 낳기 전까진 아이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깨닫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수없이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그녀의 인생에서 최대의 자랑거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어머니의 이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은 어렸을 때부터 나로 하여금 존재감으로 충만하도록 했다. 비록 집안의 셋째 딸이지만, 마을 노인들도 차마 볼 수 없어하면서 어머니의 사나운 팔자를 동정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자신이 천덕꾸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가정에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네 남매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다툼이 잦았고, 많이 맞기도 했지만, 때리고 나서도 그래도 사는 게 재미있어 눈물을 닦기도 전에 맛있게 밥을 먹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여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주동적으로 어머니에게 향촌위생원(乡村卫生院)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렇다. 부모님들이 계획 출산 정책 전에 낳아주신 건데, 설사 셋째 딸이라고 해도 무사히 세상에 나와서 안 좋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일찍 결혼해서 그들께 감사했다. 만약 몇 년 더 놀다가 24살 이후로 결혼을 미루었다면 내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셨던 일을 나는 대충 계산해 보았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우리 넷(나만 두 살 때부터 11살까지 외할머니 집에 얹혀 살았다)을 키웠고, 숙모가 26살 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아무런 불 평없이 두 가정의 짐을 짊어진 채 동시에 어린 조카 둘을 키웠는데, 그 중 한 명은 3, 한 명은 7개월이었다. 이런 관계는 줄곧 형제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후 외지로 가서 일할 때까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지속되었다. 현재, 나의 두 사촌 동생은 어머니에게 매우 잘 해준다. 우리들보다 더 잘 해준다. , 나의 큰외삼촌, 외할머니의 아들, 나의 작은 고모, 나의 먼 외숙들은 모두 각각 자신의 아이들을 길거나 짧게 우리 집에 맡겨두고 키웠는데 가장 길게는 5, 6년이 된다. 집안의 상황을 보면 나는 외갓집에 맡겨졌고, 다른 아이들은 우리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선생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많이 지도할 수 있고, 또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 더 많은 선생님들께 부탁하여 아이들에게 관심을 돌리며, 심지어 그들이 순조롭게 중학교까지 잘 올라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거의 불평한 적이 없었고, 친척들이 요청한데다가 모두 자신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그녀도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일찍 결혼해서 우리 넷을 키운 뒤 그녀는 45세 때 외할머니가 되었고, 이어서 다음 세대가 태어나면서 그녀는 자녀들을 따라 5명의 손자들을 키웠다.

가정에 식구가 많아서 밥 짓는 작업량이 컸다. 그녀는 평생 동안의 생각과 시간을 주로 각양각색의 음식을 준비하는데 사용했는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어머니가 훌륭한 요리 솜씨를 갖게 했다. 어머니는 요리를 좋아하셨다. 그녀는 밥 짓는 것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설사 가끔씩 밥 한번 지으면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그녀처럼 50년 동안 계속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다면 나라면 이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친구가 많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동료를 집에 데리고 놀러 오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의 학생도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의 동창, 남동생의 동창, 두 언니의 동창들은 모두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모든 손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정말 손님접대를 잘 하시고, 또 우리집에 오신 손님도 좋아하며,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바로 그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밥짓는 속도가 아주 빨라서 2시간이면 스무 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다. 그녀는 늘 말하기를 밥짓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지금은 압력솥,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이전처럼 장작도 피우고, 연기로 그을리고 불로 태우면서 할 필요가 없고, 시간만 잘 맞추면 지금 밥하는 것은 이전보다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평생 만드셨던 음식을 기차의 차체로 끌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하니 단지 이 점만으로도 부끄러워 진땀이 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요리에 포함된 것은 그녀가 만든 각종 탄쯔요리(坛子菜), 절임, 미펀(米粉), 두부, 고구마피(红薯皮)와 츠바(糍粑)등이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손재주를 갖고 계신다. 1987년 이전까지 그녀는 농사를 짓고 모든 농사일을 감당하는 외에 주요 직업은 봉제 일이었다. 그녀는 우리 마을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재봉사로서, 드물게 큰 옷깃(大衣襟)을 만드는 전통 사부였다. 우리의 어릴 적 옷은 모두 엄마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7년 이후엔 잡화점을 열기도 했다. 잡화점을 여는 동시에 그녀는 아침 식사를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즉 바오쯔(包子), 만터우(馒头)를 찌는 법을 터득한 그녀는 기초기술을 습득한 후 자신의 탄쯔요리(坛子菜)를 만드는 장점을 살려 남북 특색이 잘 어우러진 튀김 만두(油饺子)와 튀김 바오쯔(油炸包)를 만들어 냈다. 이 음식들은 깨끗하고 맛있으며 배고픔을 달래주어 오랫동안 줄곧 우리 시골 중학교 아이들의 공통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장사와 함께 그녀는 밭을 도급 받아 큰 가시나무 수박을 심었고, 수박이 익으면 지인들에게 연락하여 함께 장사(长沙)거리로 나와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농업, 공업, 상업, 수공업 등 주요 직종에서 어머니는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그녀는 1949년생으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너무 나이가 많지 않으면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혀 결심을 하고 시험을 보아 운전면허증을 땄다.

그렇다. 어머니는 반평생 동안 나에게 바쁘고 힘들다는 인상을 주셨지만, 그녀는 위풍당당하게 사셨으며 평범하고 또 충실하여 삶의 의미를 물을 필요도 없이 장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 같았다.

다시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많은 곳에서, 그를 거론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시골 중학교 교사인데 그는 1968년 사범대를 수료한 뒤 당시의 정책에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 공공기관의 교사가 됐다. 그는 한평생 자기가 업종을 잘못 선택했다고 했는데 마땅히 건축이나 천문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천문에 매우 관심이 많아 고교 입시 때 원래 난징기상학교(南京气象学校)에 다녔지만 할아버지가 시름을 놓지 않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들을 자신의 곁에 두려고 웨양사범학교(岳阳师范学校)에 보냈다. 하지만 수년 동안 그의 천문을 좋아하는 정서는 시종 변함이 없었으며 그가 60세가 될 때까지 그의 동기들 중 난징기상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건축업도 좋아하셨는데 사방 2백 킬로미터 이내의 다리를 건설할 때마다 다리가 건설될 때면 매번 가서 지켜보았다. 1995~1999년 사이에 나는 웨양의 한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마침 그 시간대에 동정호대교(洞庭湖大桥)를 수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동안이 지날 때마다 고향에서 웨양으로 오셔서 나더러 그와 함께 다리 수리의 진척을 보러 가자 하셨다. 우리 진()의 집들 중에서 좀 그럴듯한 건물은 거의 모두가 그의 설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며칠 동안 바쁘게 지내지면서 매번 담배 몇 갑밖에 얻을 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매우 기뻐하셨다.

물론 아버지가 업종을 잘못 선택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교사직이 매우 잘 어울렸다. 그는 중학교의 수학 핵심 교사이다. 중학교에서 그는 나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교수 특징은 바로 가장 적은 시간으로 학생들에게 수학의 정수를 이해시키고 개념의 명료함을 강조하면서 결코 많은 양의 문제를 연습하도록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두루뭉술하게 문제풀이만 하는 행위를 가장 싫어했다. 그는 기초 교사들의 자질을 매우 걱정하면서 시골에는 합당한 선생님이 그리 많지 않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그가 아이를 좋아하는 방식은 교편을 잡는 과정에 있어서 그 어떠한 전도유망한 학생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에 고등학교 담임교사를 한 기 맡았는데 반에 29명의 학생이 있었다. 졸업할 때 23명의 학생이 농업 분야를 이탈하여 대학 입학 시험·재수·군입대 등의 경로를 통해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으며 집안 전체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는 이 기간 동안 최대한 학비·책값·생활비를 모두 충족시키려고 애썼다. 그의 소박한 인식 속에서 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가성비가 높은 일이었다. 90년대에 그는 줄곧 진에서 돈을 많이 번 동네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돈을 버는 동시에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쓰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때 그의 매달 임금은 겨우 이삼백 위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업을 하는 친구들은 모두 수십 수백 만 위안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 이런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고, 항상 그가 쓸데없는 곳에 신경쓴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의 원대한 식견은 완전히 옳았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가정들은 금방 재산을 날렸으며, 아들의 마약 투약 때문에 가정은 다시 곤경에 빠져들었다. 교육에 대한 나의 직관적인 이해는 완전히 아버지의 교육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좋은 선생님이 아니어서 말투가 강직하였고,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상장을 받지 못하셨고, 어떤 공식적인 영예도 받지 못하셨다. 심지어 학교의 위생 검사 중에서도 문에 붙은 라벨은 비교적 청결이었다. 그는 마치 남의 평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자신의 흥미와 본심에 따라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독서를 즐겼는데 시골의 중학교에서 줄곧 수호믈린스키의 저서를 꾸준히 읽었고, 또한 적지 않은 수학 방면의 이론 책을 읽었다. 그는 심지어 문학작품을 즐겼는데 <경화연(镜花缘)><红楼梦(홍루몽)>을 즐겨 읽었다. 부모님은 평생 동안 매우 바쁜 환경에서 생활해 왔으며, 집안에 식구가 많은데다가 스트레스가 매우 심하였는데 일년 내내 빚을 진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한번도 비관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책임졌다. 그들은 한 번도 개인적인 공간과 생활을 누릴 수 없었고, 평생 타오르고 내어주는 상태로 아이·부모·친지·학생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어렸을 때부터 운명을 바꾸는 책을 읽으라는 요구도 안 받았고, 출세를 꿈도 꾸지 않았으며, 부모님들이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관리가 소홀하여 오히려 생명의 자유와 즐거움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전문대학에 합격하였다. 친한 친구가 나와 성적이 비슷한데 그녀는 북경대학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였더라면 적어도 후난대학(湖南大学)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년 동안 재수를 하려고 했다. 부모님은 다른 측면을 보았다. 마을에 한 아가씨가 있었는데 몇 년 동안 재수했으나 합격하지 못한 나머지 나중에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아름다운 한 소녀가 순식간에 집안의 부담이 되는 것은 그들이 원치 않는 현실이었다. 그들의 딸이 영원히 미쳐 버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그런 걱정 때문에 나는 재수할 생각을 접고 즐겁게 그 전문대학을 다녔다. 대학교에 가니 압력이 아주 적어서 주로 남는 시간에는 카드놀이, 스케이트, 바비큐를 먹고 당연히 연애도 하며 놀았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나태함에 대해서 아쉬움은 없지만, 그 후로는 거의 빈둥거릴 틈이 없어서 나는 학교 다닐 때 빈둥거린 것에 대해서 후회하게 됐다.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심지어 이모든 것들을 은연중에 다행으로 여겼다. 청춘 시절 나는 곤혹과 미망 속에서도 자신의 흥미를 지킬 수 있었고, 낭비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생명의 열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확신하였고, 마음속에서는 열망과 즐거운 상태를 찾았으며 요즘 아이들처럼 어릴 적부터 빡빡하게 빈틈없이 갇혀 지내면서, 다양한 외부 기준에 쫓기면서 피동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잃어 버린 기회는 다시 찾을 수 있고, 벌지 못한 돈은 다른 방법으로도 만회할 수 있지만, 지나간 청춘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젊은 시절은 단지 피 터지게 싸우는 경쟁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여유와 침착함, 어리석음과 풋풋함이 있어야 한다.

199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갔다가 1998년에 실직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친구의 광고회사의 4평방미터짜리 작은 방에서 7개월간의 시험준비를 마치고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우한대학(武汉大学)에 신기하게 입학했다. 이런 극적인 결과는 마치 운명이 항상 어두운 곳에 서서 수시로 나의 대학입시에 대한 아쉬움을 보상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학교까지 동년배에 비해서 나는 사회에서 한 바퀴 더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어서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광둥 F학원에서 교직을 담당했다.

일을 시작한 후, 창작이 매력적이기보다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학생들과의 교류는 나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되었다. 현재 학계는 늘 플랫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학교의 등급을 강조하면서 학술 분위기가 개인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단지 6년동안 더 공부했을 뿐인데 내가 가진 직장은 대학 졸업 후의 공장 생활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대학의 교직에 대해서 이미 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마음가짐은 부모님들과 같다. 나는 안심하고 학생들을 대하는데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그녀의 옆에 있는 아이를 안심하고 대하듯이, 아버지가 그의 수업중의 소년을 편하게 대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가정에서 물들고 습득한 데서 온 평상심이다.

평범한 생활은 성공학 이념에서 상상하듯 엉망이 아니다. 중산층의 추락을 우려하는 것은 사실 편협한 우월감과 의미 없는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평생 일해왔는데 한 가지 일을 틀어쥐면 그 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가 채소를 심으면 온 정원의 콩꼬투리, 가지, 수세미, 고추를 볼 수 있었고, 그녀가 닭과 오리를 키우면 닭과 오리가 떼를 지어 기뻐서 깡충깡충 뛰면서 시끌벅적하게 떠들썩한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녀가 밥을 지으면 가족들은 온 집안에 풍기는 향긋한 음식 향기와 맛있는 음식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고, 아이를 키우면 아이들 하나하나가 혈기왕성하게 자라나서 자연스럽게 사회에 융합되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는 온천하의 평범한 주부들처럼 모든 시간을 땀과 고단함으로 가득 채웠지만 매 순간 생존의 질감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녀의 생명은 이렇게 태어나고 정신은 이렇게 간단하고 청결하며, 그녀는 지금까지 어떠한 개념도 가지고 실행한 적이 없으며, 단 한 건의 기회를 틈타 사리사욕을 취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평범하면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나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초석을 떠받들었고, 그들은 비록 잠자코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부모들이 이처럼 태연하게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은 병과 재난이 없고, 근면하고 능력 있는 것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노동이 보상받고, 노동의 힘으로 네 명의 아이를 키울 수 있었으며, 평등한 교육을 받게 하여 계획경제 시대의 진학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젊을 때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제멋대로 낭비하면서 경솔하게 시행착오를 겪은 것은 출발선 상에서 질 수 없다종교이념이 아직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많은 빈틈을 갖고 있으면서 생활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동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노동자들의 착실한 노력을 인정하는 것, 즉 마음 편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온 힘을 다해서 교육의 극단적 공리화를 타파한 후 아이들의 생명이 잔혹하게 경쟁의 희생물이 되는 운명을 타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시행착오와 오류를 허용하고, 그들이 길을 잃고, 갈림길에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며, 그들이 생명의 리듬과 내면의 이끌림에 따라서 천천히 성장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 과정은 멀고 힘들 수밖에 없고 모두가 치러야 하는 과정이지만 일단 이뤄지면 평범하고 존엄 있는 생활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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