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평범한 일이며 평소에 의식을 하고 사는 부분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은 200여 만 명에게 있어서 숨을 쉰다는 것은 절망에 이를 만큼 사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코로나 사태가 하루 빨리 종식되어 세계적인 질서가 다시 회복되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 사람들이 자연을 경외하고 평범함을 소중히 여기며 건강과 가족과 자유의 중요성을 배웠기를 바란다.

 

평범함의 전제는 자유롭게 숨을 쉬는 것이다

우리는 생사의 문턱을 넘을 때 비로소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어쨌거나 이 ‘가죽옷’은 정신을 담는 용기이다. 그래서 평범함을 논하려면 우선 우리의 나약함과 쉽게 무너지며 신기한 육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글/쉬저민(余泽民)

글쓴이는 여행작가, 번역가이며 베이징제2외국어대학 유럽학원 특별초빙강좌 교수이다.

 

‘격리’는 지난 1년 동안 키워드로 부상한 단어이다. 물론 앞으로도 1년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유럽의 크고 작은 나라들에서는 제각각 일파만파 코로나가 퍼지고 있으며 이 긴장의 고삐가 풀렸다가 다시 느슨해지고를 반복하고 있으며 격리-격리-재격리가 생활의 주조가 되고 있다. 코로19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외로움에 익숙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통령이나 거지나,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권세와 몸값을 보고 있지 않으며 누구든 오장육부가 건전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쥐띠 해에 인류는 하루아침에 심연에 빠졌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것이 희망사항이 되어버렸다. 머스크가 뇌 인터페이스를 연구하고 보스턴 파워로봇이 춤을 출 수 있는 시대지만 인간의 확장된 경계를 되돌아보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이들이 많다. 폴란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어 보면 저자의 진의를 읽을 수 있다.

지구가 찢어지고 사람은 함께 모일 수 없으며 수많은 가족들이 생이별한 코로나 사태는 ‘세계대전’과 다름없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첫 번째로 코로나19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시인 정치가인 수치 게이조다. 그와는 20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 그의 시집을 번역한 적이 있다. 헝가리에서 문화장관과 총리 수석고문을 지낸 수치는 오르반 총리로부터 ‘지적 멘토이자 장군’으로 불리며 존경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입원 사실을 알고 걱정했지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자신처럼 ‘칵테일 요법’을 즐길 수 있다고 주장했고 헝가리 정부는 어떻게든 수지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치의 호흡기는 불과 5일 만에 사명을 다 하였으며 수많은 포부와 계획, 그리고 쓰고 싶었던 책들이 그의 육신을 따라 날아간 게 사실이 되었다. 그 뒤 나의 한 헝가리 동료도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년 전 관직에서 은퇴한 가정주부였고 증상 발현부터 숨지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는 정신적인 존재가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뿐 육체의 존재가 정신적인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우리는 생사의 문턱을 넘을 때 비로소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 ‘가죽옷’은 정신을 담는 용기이다. 그래서 평범함을 논하려면 우선 우리의 나약함과 쉽게 무너지며 신기한 육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30여 년 전 내가 베이징의과대학에 지원했을 때의 동기는 맹목적인 것이었다. 그때 나는 ‘백의천사’들의 신성함에 대한 동경 때문에 지원한 것이었으며 생명 자체에 대한 인식이 깊지 않았다. 처음 죽은 사람을 경험해 본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해부학 수업에서 학생 한 팀당 한 구의 시체가 나뉘어졌고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나뉘어져 앉았다. 우리 팀은 뱃살이 없고 쪼그라든 성기가 가운데손가락보다 긴 장년 남자 시체를 받았다. 기증자의 얼굴을 알아볼까 봐 눈꺼풀과 입술, 콧날개 살만 잘라냈는데 죽은 사람의 모습은 끔찍했지만 포르말린의 코를 찌르는 냄새와 탄력이 떨어진 고무피질감 때문에 아무리 위아래를 반대로 자르고 벗겨도 교구로만 취급되었고 생명의식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또 한번은 해부선생이 시체저장소로 데려가 숨을 죽이고 있다가 가볍게 들리는 물 소리에 선생님이 이곳에 해방 전 것도 있는데…” 하고 말하였을 때 그는 과연 누구일까, 어쩌면 청나라의 유신이나 적의 스파이일 수도 있다는 해괴한 생각이 들었다. 3학년 때 숙소에서 병리실로 불려가 처음으로 병리해부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 옆 대학 운동회에서 갑자기 트랙에 쓰러졌다고 하는 비슷한 또래의 남학생이 시멘트 테라스에 누워 있었는데,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나와 그의 차이는 그저 숨만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10년 후,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서 마지막 몇 일 동안 죽을 때까지 줄곧 호흡으로 몸부림쳤다. 어느 날 밤, 나는 병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마치 악마처럼 주먹을 휘둘러 내 머리를 때리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아버지는 몸에 감긴 비닐을 벗겨 달라고 애원하며 몸에서 필사적으로 비닐 막을 찢어냈다. 나는 아버지가 흉수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아버지를 위해 숨을 쉬고 산소관을 아버지의 폐부에 직접 집어넣고 싶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간 아버지의 얼굴은 물에 빠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버지가 들이마시지 못했던 그 숨에 비하면 일생의 영예나 어려움은 비교할 것도 아니었다.

호흡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적이지만 전 세계 200여만 명의 코로나19로 사망한 불행한 사람들은 염증 폭풍으로 인한 폐섬유화와 폐수종, 그리고 작은 기도와 폐포를 채우는 점액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게 호흡은 절망적인 사치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9초마다 1명이 코로나로 사망한다고 한다. 코로나의 공격으로 인류는 희망의 선을 ‘살아있음’으로 낮추었고 아무리 평범하게 살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엊그제 후각이 둔해졌다는 친구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10초만 숨을 참을 수 있는가그 친구에게 물어보며 매일 안부를 확인했다. 비록 이 ‘자가 검진’ 방법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어도 즉각적인 위로는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이 재앙을 넘기기 전에 평범함을 논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숨을 쉰다는 것이 우선이다. 그 이유는 자유로운 호흡은 평범한 생존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자유호흡>은 내가 2020년에 낸 첫 번역 서적으로 헝가리 작가 나두쉬 페테르의 <평행이야기> 3부작 마지막 책으로 50만 자 분량이다. 이 책은 전 두 편 서적의 총합으로 나는 발송을 클릭한 후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책을 5년 동안 노력해 번역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유럽의 슬프고 답답한 20세기의 모습을 백만 자에 걸쳐 그린 것으로 결국에는 폭주를 통해 독자들이 숨을 자유롭게 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우한은 아직 봉쇄 전이었으며 나는 쥐띠해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발생될 재난에 대해 예방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먼저 국내 상황을 걱정하자 곧 유럽도 긴 격리를 시작했고, ‘봉국’, ‘휴장’, ‘통행금지’, ‘인터넷 강의’, ‘홈 오피스’, ‘소셜 격리’ 등 온갖 수동적 방어조치는 사람들의 삶을 최소한의 공간으로 통제했다. 이는 가장 외로운 상태와 가장 기본적인 수준이다. 도시에 살더라도 황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하루아침에 위험체로 변한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에서 떨어져서 홀로 있게 된 것이 심리질환, 사교장애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뇌 해마체의 치상회(齿状回)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번역자나 작가들에겐 ‘격리’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다. 나는 늘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행정명령으로 인해 모든 불필요한 출입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독서 시간을 더 늘일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자유호흡>, <유조프 아틸라 시선>, 산토의 단편소설집 <1945>와 마라이의 <침묵하고 싶었다>를 번역했고 페퇴르피 게르게이(Péterfy Gergely)의 작품인 <페퇴피가 5번지><판다의 포옹>에 대한 번역을 완료했으며 5년 전 출간된 말로이 자서전 <한 시민의 자백>에 대한 보완 번역을 완료해 1935년 말 사절판(删节版)이 다시 원래 모습을 회복하게 하였다. 또 십여 편의 칼럼을 썼고 지디마가와 멜의 헝가리어판 시집 두 권을 교정했고 맨부커상 수상 작가인 크라스나호르카이의 또 다른 대작 <저항의 우울>의 번역에 착수했다. 그래서 격리기간이 길어도 허전하지 않았고 거의 고독의 매 분 매 초를 문자로 바꿔 남겼다. 코로나를 겪는 기간은 나에게 개체기록을 남기는 시간들이었다. 구체적으로 나에게 평범함을 논하는 것은 문학을 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번역자와 작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책상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평범함, 어찌 보면 문학은 정신적 자유의 숨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일종의 신앙과 생활방식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흑색으로 얼룩졌던 쥐띠 해에 문학이 구원이었고 치유로 다가왔다. 우한의 ‘팡창(方舱,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병원)’에서 취재진에 찍혔던 그 ‘독서하는 형’을 기억하는가? 이는 책이 주는 여유와 용기를 담은 사진이었다. 이 책은 작가 푸산(福山)이 팡창병원에 있는 그에게 특별히 사인을 해 보내준 책이라고 한다. 이는 독서인의 정신에 대한 격려의 의미이기도 하다. 3월 하순, 부다페스트가 처음 멈춰서면서 서쪽 기차역 건너편의 알렉산드리아 서점 앞에 이 어려운 시기에 책은 당신에게 이 세상 사는 즐거움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신의 건강은 적어도 신체의 건강만큼 중요하다. 잊지 마시라. 당신은 지금 세계로 나갈 수 없지만, 세상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이라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베이징제2외대 헝가리아어학과 학생들에게 첫 온라인 수업을 했을 때, 나는 ‘외출금지명령’이 발효되기 하루 전 올드 타운을 질주하며 일련의 안내문을 찍었는데 외출금지 지역에는 은행, 약국, 마트도 있었다.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참 많은 메시지를 담은 잘 쓰인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소 같으면 ‘쓸모 없는 광고’로 여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코로나가 전체 도시를 엄습해 온 시점에서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독서의 의미와 정신력을 전달했다. 전 세계의 도서전을 멈추게 하고 모든 서점의 문을 닫게 하는 바이러스지만 사람들의 책과 펜을 빼앗을 수는 없고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여러 친구들이 1년 동안 사서 책꽂이에 넣어 두었던 책을 읽으며 감개무량해하는 소리를 들었다. 평범함을 논하려면 독서를 논해야 한다. 독서는 평범함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의 일상을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이해하는 평범함은 개체의 근본을 돌려주는 것이며 건강한 육신에 재미있는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부다페스트의 안드라시 대로변에 살았는데 길 어귀에 리스트의 생가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부터 안드라시 거리나 크고 작은 둘레길은 전등이 나무에 휘감겨 있었다. 겨울에는 오후 5시가 되기도 전에 밤이 깊어지면서 다뉴브강 양안의 시내가 수정처럼 투명하고 차체에 색등을 단 ‘크리스마스 전차’가 거리를 누빈다. 내가 산책을 하려면 반드시 6시 전에 집을 나서서 8시 전에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정부가 내린 통행금지령때문인데 만약 이를 위반하면 모든 사람들은 2만 포린트의 벌금을 내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빛나는 옛 길을 따라 강변으로 가든지, 사슬다리를 건너 어부의 요새로 가든지, 아니면 엘리자베스교를 건너 성 갤럴트산을 오르든지, 어쨌든 어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빙하와 불빛으로 드리운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이때는 마침내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고, 마치 ‘베를린 상공의 창공’에 서 있는 대천사처럼 외롭고 애련한 느낌이 들면서 힘껏 숨을 쉬었다. 이럴 때 항공기가 웅웅거리며 높은 곳을 맴도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공성(空城)을 촬영하는 것은 이미 유행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한적하던 풍경은 확실히 마음을 뒤흔드는 역사적인 느낌과 비장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사람들과 차가 많이 다니는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더 그리워졌다.

내 이웃에 사는 구순 할아버지가 평생 세 차례 야간통행금지를 경험했다고 한다. 처음은 2차대전 말이었는데 1944년 성탄절부터 시작된 공습경보가 계속되어 지하실에 숨어있었다고 했다. 그 다음은 1956년 가을에 소련군이 침입하여 시가전이 격렬하여 탱크의 무한궤도에 대지가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때 부다페스트는 폐허가 되지는 않았지만 생기가 돌지 않았다. 현관에서 노인과 인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몇 미터씩 거리를 두었고, 멀리 베이징에 계시는 어머니도 더 그리워졌다. 격리기간이 1년동안 지속되면서 귀국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최근 2년 동안 어머니의 알츠하이머병은 갈수록 심해져서 자신이 메스를 들었던 기억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나이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분도 어린아이처럼 심플해졌다. 다행히 음악이 구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악보를 외우고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갑자기 나에게 너 어디 있니?”라고 묻기도 한다. “왜 그렇게 낯이 익지? 당신이 나이가 많은가, 내가 더 나이가 많은가? 언제 나를 보러 올 수 있나?…” 지금 쥐띠해가 가고 새해가 오면서 나는 진심으로 코로나 사태가 빨리 끝나서 세상이 빨리 질서를 회복하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는 인류가 자연을 경외하고, 평범함을 소중히 하고 건강과 가정과 자유를 중요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배웠기를 바란다. 이때, 나는 중부 유럽 고성의 한 창가에 앉아 평범함과 가족애를, 먼 곳에 있는 내 집을 그리워한다. 빨리 귀성해서 어머니를 찾아 뵙고 싶다. 어머니가 아들을 못 알아보더라도 나를 형, 동생, 혹은 오래된 남편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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