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물일곱 살 때 넉 달 동안 <장자>를 통독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노력하고 정진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 자체가 비범한 것이다.

글/즈옌(止庵)

작자계(作者系) 작가, 저우줘런(周作人) 장아이링(张爱玲) 연구자. 대표작 <시베(惜别)>, <저우줘런(周作人)>

 

평범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글쓰기가 부실할까 봐 걱정된다. 나는 <웬수(远书)>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그 외 다른 편지들은 모두 산실되었다. 누구에게 편지를 쓰든지 간에 항상 진실한 사람을 향해서 구체적인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지금 쓰려고 하는 ‘평범’이라는 글은 또 세상 누구의 이야기일까? 내가 글을 쓸 때 비록 견해가 아주 평범할지라도, 사실에 입각하여 공론을 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이번에도 할 말이 없으면서 억지로 말을 지어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평범함을 가져라’는 것은 분명히 저자가 평범함 밖에 있음을 자처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갑자기 나를 깨워 묻는다면 몽롱한 가운데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제목을 ‘평범하지 않다’로 바꿔야 내가 쓰고자 하는 글에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인(凡人)의 영역을 벗어나 성인의 경지로 들어간 사람을 만나도 그의 덕을 부러워할 뿐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는 않으며 이 때문에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스스로 비범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호자위지(好自为之, 잘 먹고 자알 살아라’라고 비아냥 거리는 말)’라고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다시 ‘서로 평범을 논하다’라고 바꿔서 구정 기간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평범한 사람끼리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문장 구조를 신경 쓸 필요 없이 말하고 싶은 말을 나누면 될 것 같다.

스스로 어떻게 평범한지에 대해서는 사실 할 말이 없으나, 어떻게 평범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할말들이 많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범함을 넘어 신성한 경지를 논하자면 다른 단어들, 예를 들면 부동범속(不同凡俗, 범속하지 않음), 비동범향(非同凡响, 탁월함), 거지부범(举止不凡, 행동거지가 비범함), 심지어는 범부속자(凡夫俗子, 평범한 사람), 범태탁골(凡胎浊骨, 평범한 사람), 범재천식(凡才浅识, 재능이 평범함), 습범도고(袭凡蹈故, 평범함을 답습함) 등 단어들이 생각나는데 얼마나 큰 잘못인지 말하지 않아도 평범함을 낮게 보는 경우는 없다. 자명불범(自命不凡, 자기 스스로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함)은 원래 평범한 사람에 대한 풍자였다.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에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혼동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의사, 기자, 세일즈맨, 편집인, 작가를 거쳤으며 지금 나이를 먹고는 더 이상 새로운 직업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앞의 몇 가지를 얘기해 보자면 평범하지 않게 하기는 어려운 일들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각광을 받는 직업이긴 하지만 은퇴할 때까지 일해도 해당 분야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고 불멸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도 거의 어려운 일이다. 기타 몇 가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체로 9시에 출근해서 5시까지 일하는 일이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글쓰기는 예외적인 것 같고 비범함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분야이다. 그래서 루쉰(鲁迅)은 유언에 특별히 아이가 커서 재능이 없으면 작은 일을 찾아서 살아야지, 절대 공학자나 미술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죽음>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한 작가나 한 작품이 평범한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 그리고 누구와 비교되는지는 봐야 한다. 평판도 자주 바뀌고 작가도 매몰돼 있다가 뒤에 불멸로 추앙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물론 그 반대로 건재하다가 한쪽으로 밀려난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글쓰기도 그렇고 자기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 결국 한 사람은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아무 일도 못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에는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별로 없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모파상은 <물 위>에서 선장 베르너에 대해 주방의 놋그릇에 물이 조금이라도 묻어도 바로 닦는 희귀한 선원이었다고 말했다.

몇 년 후, 부닌은 죽기 1년 전에 쓴 ‘베르너’라는 글에서 베르너가 이 물방울을 보자마자 갉아먹었더라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바로 갉아먹었다. 그는 왜 갉아먹으려 했을까. 왜 갉아먹으려 하는 거지? 하나님은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창조물이 ‘아주 좋은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썼다. 자신이 살아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베르너를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가 좋은 선원이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을 적었다.

부닌은 이어 “내가 생을 마감할 때 베르너가 임종할 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예술가로서도 얻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나는 도쿠다 슈세이가 쓴 장편소설 <축도> 중역본 번역후기를 연상하며 도쿠다 씨는 평생 근면하게 여러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스타일이 엄격해 한 글자도 소홀히 하지 않을 정도였다. 말년에 기억력이 쇠퇴해 밤늦게 글을 쓸 때마다 획을 그은 한자를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절대로 다른 단어로 대체하지 않았고 늙은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 잠든 아이를 깨워 제대로 물어보았다고 적었다. 노년의 도쿠다 슈세이는 선장 베르너처럼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깨끗하게 처리했다. 이를 ‘정익구정(精益求精, 훌륭한데도 더 훌륭하게 하려 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정()’자는 자기만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보아낼 수도 없는 것이며 두 번째 ‘정()’자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여러 기연들이 한 데 모인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언어, 인물, 장면, 디테일, 줄거리, 구성까지 모두 그랬다. 부닌과 도쿠다 슈세이 모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나는 일본 가나자와에 위치한 도쿠다 슈세이 문학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곳은 그의 서재를 복원하였으며 그가 서재에서 집필을 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축도>는 미완성 작품이라 아쉬움이 있지만 일본 문학사에서 천의무봉(天衣无缝), 통체투명(通体透明)”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도쿄의 헌책방에서 색종이를 한 장 샀는데, 그가 친필로 쓴 하이쿠 青梅の肌薄しろし葉かくれに”(청매의 표피가 희끄무레하여 잎사귀 사이에 숨겨져 있음)이 씌어 있었다. 이 하이쿠를 액자에 넣어 서재에 걸어 놓은 것도 이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일본 여행을 할 때, 어느 한번 나는 한 국수집 앞에 긴 줄이 늘어선 것을 보게 되었는데 점원이 걸어 나와 인원수를 확인해보고 면의 양이 정해져 있어 어느 사람부터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공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각색한 <신참>에서 아베 히로시가 연기한 주인공 카가는 카스텔라와 같은 간식을 좋아하지만 줄을 설 때마다 매진이 적힌 팻말을 앞에 세운 점원에게 물려받는 장면이 나온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카스텔라를 만드는 장인이 매출을 늘리기 위해 더 많이 만들어서는 안 되는가. 장인은 양과 질 둘 다를 가질 수 없으니 많이 만들지 않고 품질 관리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집에서 만든 음식도 다른 집 음식과 다를 바 없고 줄 서 있던 사람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했던 ‘장인정신’의 한 단면이 여기에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장인들 대부분은 솜씨를 발휘하는 이들은 각자 맡은 일을 훌륭히 해내려고 노력하고 처음과 끝이 늘 한결같다. 비록 남들은 그 직업이 미미하다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부닌의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창조물이 ‘매우 잘 나왔을 때’ 그것을 보면 기뻐한다. 따라서 그들이 세운 기준은 변경할 수 없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베르너와 도쿠다 슈세이의 행동은 모두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되돌아가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구별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실 이 주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자기 요구나 자기 만족에 관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차이점은 무시할 수 없다.

평범함은 일상이고 보통이다. 평범은 범용일 수도 있다. 범용도 본래 평상이지만 고명하지 못하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서로 연관된 단어로는 용속, 용록(庸碌), 용비(庸鄙), 용천(庸浅) 등이 있다. 이렇게 보면 평범함과 평용(平庸)은 구별된다. 위에서 말한 모든 다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평범하지만 용속하지 않다.

<장자> ‘양생주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소 잡는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때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휙휙 울리는 뼈 발라내는 소리, 칼로 가르는 소리가 절도에 모두 맞았다. 포정의 몸놀림은 상림의 무악에도 조화되며 칼을 움직이는 소리는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이를 본 문혜군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소 잡는 기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즐기는 바는 ‘도’입니다. ‘도’는 기술보다 우월합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 보이는 건 소밖에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에 이르러서 저는 신명(神明)으로 만나되 감각과 지각작용은 멈춰지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명의 움직이려 함에 천리(天理)에 따라 마음의 눈에 따라 손을 놀립니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 따라 뼈와 힘줄 사이 틈새를 열어 제치고 골절 사이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의 생긴 그대로 따르는지라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뼈와 살이 연결된 곳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솜씨 좋은 소잡이가 일 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소잡이가 다달이 칼을 교체하는 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칼은 19년을 줄곧 사용했고, 소 수천 마리를 잘랐어도 칼날이 지금 막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골절 사이는 비어 있으나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 없는 칼로써 벌어져 있는 뼈마디 사이에 삽입하므로 공간이 널찍해서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이 되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서 갈아낸 듯합니다. 하지만 칼날이 근육과 골반이 연결된 곳에 이를 때마다 어려움을 절감합니다. 저는 두려운 듯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눈길을 고정시키고 손놀림을 천천히 느리게 합니다. 칼을 매우 세심하게 움직이게 되면 어느 결에 풀어져 확연하게 갈라져 소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게 살이 뼈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칼을 든 채 일어나서 사방 둘레를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으스대며 만족한 기분으로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말했다. “훌륭하구나!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하였도다.”

포정도 장인이라 말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만난 장인들은 자기 편의에 만족했을 뿐, 장자가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높고 깊이 있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포정이 말한 소 잡는 기술과 도() 사이의 관계이다. 도에 대한 긍정이란 기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 기술을 완벽하게 갖추었을 때, 단지 기술에 그치지 않고 기의 모든 공리적인 목적인 ‘무위이위(无为而为)’를 넘어 기능자 자신을 넘어 ‘망아’의 의미일 수도 있다. 기술자에게 있어서 그는 이러한 행위 속에서 자신을 더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다. <장자>에는 또 몇 가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천도편에 윤편착륜(轮扁斲轮, 바퀴가 납작한 수레바퀴), 구루자가 매미 잡는 고사, 나루터 사람이 배를 귀신같이 조정한 고사, 장부가 물을 밟으며 건너간 고사, ‘달생(达生)’편에 재경삭목이거(梓庆削木为鐻, 재경이 나무를 베어 악기를 만든 고사), ‘지북유(知北游)’편에 대마지추구자(大马之捶钩者捶钩, 추구자가 병기를 만든 고사) 등이다. 포정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도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하는 사람도 높은 지위를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가지 일을 잘 해내서 도를 얻은 경우를 장자는 가장 칭송하였다.

내가 스물일곱 살 때 넉 달 동안 <장자>를 통독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노력하고 정진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 자체가 비범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설령 필생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일을 반드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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