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간장

 

꼬불탕꼬불탕 긴 고랑을 살았던 콩
간간이 빛 빨간 고추
녹아든 간장독

마알간 하늘에 비치는
동동 뜨는
밭고랑 이야기

따가운 볕낫질로 상념들은 잘리고 
또 잘리고

장단지 열어보면
단단한 액만 남아

깊게 고인 생명의 빛
머금은 빛살이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바람에 말린 흔적이 바삭거린다


색연필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나의 책상
깨끗하게 정리해놓으면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대가 들어온다
어젯밤처럼

정성껏 색연필을 깎고
꽃그림을 그렸다
깊은 밤까지 그려
색으로 향기가 가득하였다

그 사람은 그랬나보다
사각사각 밤을 깎아
꽃을 그리고 다듬는 동안
내 손을 놓은 적이 없었나보다


담쟁이

 

높다란 벽을 타며 더듬거리는 흐릿한 촉수
또 한 번의 두터운 외투를 벗으며 외치는 연약한 갈망
고리를 걸지 못해 애태우다가
닳은 구두 굽에 겨우 올라서서 
날세

땡볕아래서 부르기만 하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
주인 없는 고향집에는 객들만 머물고 있겠지
돌아올 날을 기다리겠지

잎맥 갈라져가는 낡고 시든 손바닥에
드문드문 어제의 일들이 한 장 한 장 새겨져
하늘 아래 뒤늦게 흔들리는 길손이 있어 
바로 날세


 

색을 잃은 볼
두꺼운 소설을 다 읽어가는구나
마지막 몇 장을 넘기고 있구나
두근거렸던 가슴은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고
낡은 몸은 밤이 이슥하도록 스러져 스러져
까만 밤이 다 가도록

지나온 여운인가
알 수 없는 손길이 볼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눈물지으며 지나가고 있다
그러면 숨겨왔던 안이 꿈틀거리고
마지막 바람이 스치나 하고
볼이 밖으로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역사

 

여기 있던 사람들
뒤로 넘긴다
한 장씩 포개간다

침 튀기던 그곳
뒷길 깊이 묻혔다가
깊이만큼 어느 세월에 쓸려 쓸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면
뭉뚝하게 일어나 입을 열 것이다

뛰엄 뛰엄 아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하며
마른 입 컬컬하게 흠흠
녹 부스러기 떨어지는 어제를 말할 것이다

시인 유형
시인 유형

 

 

 

 

 

■ 프로필 ■ 

‧ 지필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수상 : 탐미문학상 수상
‧ 저서 : 시집『月幕』외 6권
‧ 현) 아태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신문예문학회 지도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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