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39.나는 돈끼호떼                               


억대우같은 사나이가 코흘리개 아이들과 싱갱이질하자니 좀 싱거운 감이 들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중등사범학교를 졸업하여서부터 머리가 다 회여빠진 이 날 이때까지도 이 자리를 못 뜨고 있다.

나는 워낙 그 코흘리개들이 좋았다. 그 거짓 없이 제멋대로 뛰노는 그 천진성이 말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 성은 어른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에게서 감염되어서인지 나도 언녕 <코흘리개>로 변해버린 듯싶다. 새해를 맞을 때면 그 애송이들의 엽서 한 장에 가슴을 들먹이며 밤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교문을 나서면 어떤 친구들이 나를 <코흘리개 친구> 하고 부르기도 한다. 안 해도 내가 언제면 어른이 되겠느냐고 웃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코흘리개들 멋에 살아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코흘리개들의 배반을 받는 것 같아 괴로움을 느낀다.

아니, 그 코흘리개들이 변해가고 있다. 내가 볼라치면 코를 흘쩍 들이빨며 언제 코를 흘렸는가 싶게 너도나도 곱게 보이려 한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어색했다. 그것이 애처롭기도 하여 나는 남모르는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번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은근하고 깜찍한 것들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깨알같이 박아 쓴 엽서 인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일부터 휴식이건만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그 엽서는 감감무소식이다.

나는 일종 말할 수 없는 잡친 기분으로 터벅터벅 퇴근길에 올랐다.

이때 문득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반 반장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선생님, 이건 새해 인사예요. 우리 반 전페 동무들이 선생님께 드리는 새해 예물이에요.>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반장 녀석이 붉은 종이에 싼 그 무엇을 나한테 불쑥 내밀었다.

나는 무슨 감투 끈인가 하고 그 붉은 종이봉투를 풀어헤쳤다. 아, 순간 나는 놀람과 더불어 온몸이 전율을 느꼈다. 백 원짜리 몇 장이 드러났다.

반장 녀석은 <선생님, 어때요?>하고 말하듯이 대견스레 히쭉 웃고 있다.

<에게 뭐냐?>

나는 자기도 모르게 꽥 고함을 질렀다.

<선생님, 왜 그래요?>

반장도 놀라서 펄쩍 뛰면서 눈이 동그래진다.

<왜 그러긴 왜 그래? 냉큼 이걸 가져다 동무들한테 되돌려주란 말이오.>

<선생님, 이건 우리 전반 동무들이 토의하고 결정한 것인데요.>

<알만하오. 동무들이 정말 나한테 새해 인사를 드리려거든 엽서 한 장을 주오. 알만하오?>

<선생님, 그까짓 엽서 한 장이 몇 푼 간다고.>

<뭐라오, 동무….>

나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코흘리개를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게 되었다. 나의 학생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나는 일종 모욕감을 느꼈다. 순결한 감정의 오아시스가 짓밟히는 아픔을 느꼈다. 아니, 나는 분명 미의 훼멸을 보았다.

<아이들을 구원하라!>

신 선생의 말이, 아니 외침이 새삼스럽게 들려옴은 무엇 때문인가?

나의 눈에는 이슬기가 축축해졌다. 나는 얼굴을 싸쥐고 돌아섰다.

터벅터벅….

                            

40. 범조각상에 쓴다

「9.3」대축제를 계기로 연길시범조각상 하나가 보란 듯이 일떠섰다. 그리 웅장하지도 그리 사나운 표정의 조각상도 아니건만 나는 어쩐지 그것에 위압감을 느끼며 거부적 반응이 일어나고 만다.

범은 워낙 우리와 너무 멀어져 있었다. 멀어지다 못해 생소해 있었다.

옛날 옛적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사람이 되고파 환웅 신에게 빌었다 한다. 그런데 곰은 신의 말을 잘 들어 사람이 되었고 범은 신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한다. 그때 곰은 여자 몸으로 화했는데 아이 낳기가 소원이어서 신단수 밑에 정화수 떠놓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한다. 이에 환웅 신은 그 정성이 지극함에 감동되어 그 원을 풀어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웅녀는 달덩이 같은 아들-단군을 낳았는데 이 단군이 바로 우리 조선사람들의 시조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핏줄에는 곰의 피가 흘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곰처럼 느리고 한곳에서 맴돌기를 좋아했으며 동면하기를 좋아했다. 또 곰처럼 아둔하기도 했다. 우리의 이 고성은 언젠가 분명 우리에게 있었던 그 호랑이 같은 날파람, 진공설, 예지를 마멸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조상들이 살던 때는 그렇게 많았다던 이마빼기에 임금 ‘王’자를 박은 동북 범이 그래 지금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래 지금은 다 멸종에 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것을 영원한 조각으로 다듬어 연길시 입구에 세워놓고 그 혼을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리의 조상들은 산중 왕 호랑이가 우리의 시조가 못된 원을 풀어주노라고 그와 같이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산신으로 추대하며 그 기상을 길렀다. 그리고 우리의 혁명 선배들은 그 호랑이 같은 기상과 용맹을 떨쳐 중화 대지에 자기의 찬연한 기념비를 떳떳이 내세웠다. 그럴진대 호랑이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생소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호랑이에 일종 친절감까지 느낀다. 하여 우리는 오늘 그 호랑이를 우리의 시표(市標)로까지 내세우지 않았는가? 우리는 땅 위의 호랑이뿐만 아니라 하늘 위의 독수리도 내세웠다. 호랑이는 이미 포효하고 독수리는 이미 날고 있다. ‘곰’이 맴돌기 좋던, 동면하기 좋던 ‘분지‘의 연길시는 바야흐로 골 등 품으로 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연길시 중심의 엄지손가락조각상은 춤출 것이다.


  
41. 눈물 젖은 노가다
                             

한국의 고층 빌딩은 ‘막노동’에 의해 일떠섰다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노가다’하면 그것은 어쩐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노가다‘ 자신들도 자조 섞인 ‘노가다’ 소리를 많이 한다. ‘노가다’라는 말이 언제부터 어떻게 되어서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사전적인 학문적 정의는 거저 막연히 막판 노동 혹은 그 일군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것의 민간적인 풀이를 들여다보면 차마 거저 넘길 수 없는 애환이 들어 있다. ‘노가다’에는 워낙 눈물 젖은 사연들이 많다.

 ‘노가다’는 일제 식민지 막노동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가면서 막노동판을 지칭하던 말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조선에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영어에서의 부정의 ‘N0‘와 일어에서의 틀 혹은 격식을 나타내는 ‘かた‘가 결합되어 격식을 갖추지 못한 막노동판을 지칭했다. 바로 이 ‘N0かた‘판에 일제 식민지통치하에 파산된 농민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때그때 노동력을 팔아 겨우 하루살이를 하였다. 이 ‘N0かた‘는 원래 주로 토목건축 판에만 국한되었다가 후에 탄광, 금광 같은 채굴판에까지 뻗쳐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N0かた‘판은 실로 무지막지한 판인지라 내일은 고사하고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움 속에 목숨을 앗기우는 수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N0かた‘는 갈 그곳이 못 된다 하여 영어 뜻 ‘NO’ 에다 일본어 발음 ‘かた‘롤 그대로 살려 조선어 갈지자(之) 동사형 ‘가다’로 둔갑시켜 ‘NO가다‘가 되다 보니 우리의 부녀자들이 굶어 죽어도 좋으니 절대 그 죽을 판으로는 가지 말라고 남정네들의 옷깃을 잡으며 애원했다. 

 ‘노가다’의 비극은 일제가 망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광복된 후 미 군정이 들어섰는데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어 이 거리 저 거리 헤매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 죽음의 ‘노가다’ 판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나마 일자리가 차례지기를 바라 조금이라도 앞에 서려고 이른 새벽부터 부랴부랴 달려와 튕겨 놓은 줄 뒤로 줄을 서서 채용을 기다렸다. 주린 창자를 붙안고 날이 새도록 기다리노라면 일군 채용 측 사람이 게트름에 거들먹거리며 나타나 줄 서 있는 일군들 앞으로 와서는 채용할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 튕겨 놓은 줄 안쪽으로 들여보낸다. 그러다가 채용할 사람 수가 다 차면 ‘노타치’ 하며 그 튕겨 놓은 줄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노타치‘라는 말을 들은 제일 앞에 선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오늘 재수가 없다는 식의 아연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어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선 사람들도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기가 일쑤였다. 그럼 ‘노타치’가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그렇게 실망케 하는 것인가? 그것은 <NO+touch>, 다치지 말아라는 말이다. 오늘 채용은 다 끝났으니 그 줄을 넘어올 생각은 아예 말고 그 줄조차도 다치지 말라는 것이다. 영어에서 ‘touch’의 발음이 곧 ‘터치‘이다. 그 당시는 미 군정 때라 일 시키는 사람들도 모두 미국 스타일 일색인지라 잘 안 되는 영어지만 쩍 하면 영어를 입에 올렸다. 당시 ‘NO touch‘는 순 영어 단어조합으로서 일종 일일 노동자들의 애환을 나타내는 적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노타치’가 언제부터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노다지’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지금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노다지 타령‘의 그런 ‘노다지’로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사회가 개화 발전하고 한국 사람들이 세련되고 순화되면서 된소리, 거센소리 발음을 기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발음변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삭막한 막노동판이 ‘노다지‘로 탈바꿈한 데는 막노동자들의 처지개선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노동존중, 생명존중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막노동판의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맺힌 얼음덩이가 녹기 시작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환경의 개선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노동력 가치에 전례 없는 대우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노다지’판이라 하지만 그 노다지가 쉽게 캐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피와 땀, 내지는 생명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하여 한 시기 반짝이던 그 빛깔 좋던 ‘노다지’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피와 땀의 원색이 그대로 내 돋는 원 ‘노가다’로 돌아갔다. 기피(즉 힘든 일, 위험한 일, 더러운 일)업종의 대명사로 ‘노가다’가 되었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로부터 먹고살 만하게 된 한국 사람들은 ‘노가다’를 기피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한국보다 못산다는 나라의 외국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밀려들어 ‘노가다’로 충당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우리 조선족들이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당일당일 결재가 된다는 가장 흔하고 찾기 좋은 ‘노가다’로 나가 한몫 잡고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 사람들로부터 ‘교포, 교포‘하며 빛 좋은 개살구 대접을 받기는 하나 실제 ‘노가다‘에 나가 보면 한국 사람들보다 보통 수당이 낮게 책정된다. 현재 한국에서 본국 인들이 실업에 허덕이며 아우성치고 있지만 불법체류 신분의 조선족이 취직, 아니 일할 수 있는 것은 굴욕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 낮은 수당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노가다’의 고된 육체적 고통 외에 차별대우의 정신적 고통이 뒤따른다. 조선족은 이중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은 독립투사들의 후예인지라 워낙 반항 정신이 강하기는 어디서나 매한가지다. 한국에서 조선족 ‘노가다’들은 그것이 불법이든 말든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여 한국인 신분으로 ‘노다가‘로 나간다. 정당한 노동 대우를 받기 위해서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위조는 쉬우나 일거일동에서 완벽한 한국인 행세를 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같은 민족이라 하여 언어 장애는 별로 없을 줄로 알고 있겠지만 조선족 언어와 한국어는 억양, 단어사용 등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특히 ‘노가다’판 같은 경우는 왜정 때와 미 군정 때의 ‘세례’를 겪은 판인지라 이곳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거의 다 일본어, 영어와 같은 외래어투성이다. 이제 그것을 좀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다(しだ), 데모도(てもど), 도래바(とれば), 샤시(sashee), 폼(form), 스딜(steel)··· 일본어나 영어깨나 한다는 사람들도 이런 외래어를 얼핏 접해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판인데 글공부를 그리 하지 않은 조선족 불법체류 ‘노가다‘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으로 가장하고 ‘노가다‘로 나간 조선족들은 처음 대개 다 이런 언어 ‘시험‘에 걸려 그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내가 한국에 한가하게 있을 때 한 번은 동생벌되는 조선족불법체류자가 찾아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 바람으로 ‘형, 노가다 말 좀 배워주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잘난  ‘노가다‘ 말을 몰라 쫓겨났다는 것이다. 물론 ‘노가다‘ 말은 특히 시간을 내어 배울 것까지는 없다. 거지 같은 조선족 대우를 받아가면서 ‘노가다’판에서 얼마간 뒹구노라면 자연히 그 말들은 몸에 와 배인다. 나는 한국에서 나오기 전에 많은 조선족 ‘노가다’ 친구들을 만났었다. 그들 가운데는 한국 사람 뺨칠 정도로 ‘노가다’ 말을 잘 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어느새 그럴듯하게 백 분의 백의 한국 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장해 보였다. 합법인가 불법인가하는 도덕적, 법적인 논의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 거창한 이야기가 되어 놔서 그런지 몸에 와 잘 닿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이 어쩌면 한 사람의 정당한 요구, 권리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노가다‘,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눈물 젖은 ‘노가다‘··· ‘노가다‘, 어쩐지 자꾸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온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필경 흘러간 옛 노래로 되었다. 그럴진대 눈물 젖은 ‘노가다‘도 하루빨리 흘러간 옛 노래가 되기를 기원하여 이 글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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