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42. 눈물 젖은 한바


내가 빛 좋은 개살구 교환교수 신분으로 한국에 가 있을 때다. 주는 돈이나 타 먹고 자료수집이요, 논문이요 뭐요 하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걸고 빈둥거릴 때다. 매일 매일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처숙 뭔지 뭔지 하는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서 나의 생활도 개망태기로 전락. 

처숙모는 환갑이 다 된 나이 지긋한 안노인. 중국에서 이미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음. 그런데 자식들 대학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시집 보내자니 손에 돈이 없어 속이 바질바질 탔음. 그래서 친지 방문인지 위장 결혼인지 뭔지 해서 돈 많다는 한국에 돈벌이로 입국. 처숙모 잘 돌봐 주라는 우리 각시님의 최고지시가 계셔서 마중에서부터 모든 일은 내가 도맡아 하기. 

먼저 일 구하기. 벼룩시장인지 교차론지 하는 돈 안 내는 신문을 가득 가져다 일일이 전화하기.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대개 식당에서 일한 다니 식당부터 알아보기. 60 난 노인은 일절 사절. 반반한 처녀면 모르겠는데… 맹랑했다. 점점 사그러지는 희망이나마 안고 한바라는 식당에 잔화. 나이는 먹었 어도 어떻게 어떻게 일해 먹도록 든든하게 생겼다는 나의 감언이설에 흥취 가짐. 사실 처숙모는 든든하게 생겼다. 거저 흰 머리칼이 좀 있어서 그렇지. 그럼 처숙모 데리고 한바로 직행. 

알고 보니 한바는 어느 한 식당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한 부류의 식당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공사장의 일군들에게 밥을 해대는 식당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니 나름대로 식당 이름을 갖고 있음. 우리가 찾아간 식당도 분명 무슨 이름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껏 거저 한바로 외우고 있다. 한바라는 이름이 묘해서다. 가만히 따져보니 추울 寒에 영어 술집 ba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이름. 이름이 좀 초라했다. 따뜻할 溫이 아니고 하필이면 왜 추울 寒인가? 한지의 술집, 이상했다. 추운 데서 어떻게 술을 마신 단 말인가? 추우니 술을 마시는 법. 이렇게 이해하니 이해가 갔다. 한바는 공사장에 딸려 있는 식당이다.

그러니 공사가 끝나면 한바도 철거하기 마련. 그러니 한바를 고급 요정처럼 요란하게 꾸밀 필요가 없음. 식사나 하고 간단히 한잔할 수 있을 정도로 거저 실용적으로 꾸리면 된다. 여기에 와서 식사하고 한잔하는 사람도 넥타이에 화이트칼라계층이 아니라 대개 투박한 옷을 입은 막노동하는 노가다들이다. 이들 노가다들은 전형적인 이른바 3D, 누구나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최하층 품팔이군이다. 하루하루를 벌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니 추운 겨울 날씨도 날씨겠지만 이들 노가다들의 마음도 항상 춥다. 寒하다.

그러니 될 데로 되라는 식에 뼈빠지게 번 하루 돈 그날로 주색에 탕진하기 쉬움. 안 그래도 왜정 때만 해도 노가다들과 이런 한바 식당의 여자들 사이에 치정 관계가 많았다 한다. 이런 갈래판을 더듬고 보니 한바라는 이름이 더 없이 적중하게 안겨 왔음. 누가 지었는지 잘 지었다 말이야! 한국어 전문가인 내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

처숙모는 한바에서 일하게 되었다. 워낙 한바 일이라는 것도 식당 업종에서는 3D 일이라 반반한 아가씨들 기피. 그래서 한바는 항상 일손이 딸리는 곳. 처숙모는 설거지에 채소 다듬는 단순한 일 하기. 월급 한국 돈 백만 원. 중국 돈으로 환산해 보니 대학교수 내 1년 노임. 만세!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환성은 잠깐. 한바 일은 워낙 고달팠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준비. 아침 식사 끝나면 오전 중참 준비. 오전 중참 끝나면 점심 식사 준비. 점심 식사 끝나면 오후 중참 준비. 오후 중참 끝나면 저녁 식사 준비. 저녁 식사 끝나면 술군들 술안주 장만. 그것도 한두 명의 몫이 아니라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백 명. 처숙모가 일하는 한바에서는 한 30~40명 일군들 식사책임. 24시간 쉴 참이 없는 것이 한바 일. 그러니 60 환갑이 다 된 노인인 처숙모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심심하면 관심조로 처숙모가 일하는 한바에 가보 군 했다.

내가 갈 때마다 처숙모는 머리를 수걱하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 아니면 채소 더미 앞에 앉아 내가 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다. 일이 고되어 항상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흰머리도 더 넌 거 같았다. 보기에 안쓰러웠다. 저 나이면 뜨뜻한 구들에 앉아 모심을 받아야 되는데… 참, 돈이 뭔데. 개도 안 먹는다는 돈인데. 돈이 원수지. 나는 눈물이 핑 돌아 서로 얼굴을 대하면 어색해질 것 같아 그대로 돌아 나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은 벌어졌다. 처숙모가 일을 하다가 갑자기 까무러쳐 병원에 실려 갔다. 내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처숙모는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로 링거 주사를 맞고 있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너무 피곤해서 그러니 집에서 며칠 정양하면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한숨이 놓였다. 나는 처숙모를 내가 들고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나는 처숙모에게 한바 일을 그만두도록 권했다.

한바 사장의 의향도 그랬다. 그러자 처숙모는 펄쩍 뛰었다. 아무 문제없으니 아무런 걱정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곧바로 일하러 가겠단다. 막무가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처숙모보고 집에서 며칠 쉬라고 하고 한바로 달려갔다. 사장한테 사정 얘기를 하고 내가 처숙모 대신 며칠 일을 하도록 했다. 나는 KBS TV에서 내보내는 명인들의 삶의 체험이나 하는 양 그리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때는 한여름. 주방에 선풍기가 돌아가나 열기가 확확 풍김. 수돗물이 나오는 설거지 세척장에 붙어 서서 일을 시작. 더운 여름날에 찬물에 손을 넣는다고 생각하니 시원한 감이 났음. 고무장갑을 끼니 답답해나 벗어 버렸음. 손에 끈적끈적 기름기가 묻어났다.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현대인간들 기름기 잘 안 먹는 단 데 왜 이렇게 많이 처먹지? 슬그머니 벨이 꼬임. 세척제를 쓰는데도 잘 씻기지 않는다. 닦고 문대고 반복. 보드러웠던 손은 어느새 갈라 터짐. 갈라 터진 짬으로 세척물이 들어가니 손이 아려남. 손목도 시큰. 등줄기는 벌써 땀에 흠뻑. 그래도 참자. 견지하면 곧 승리. 끝내 승리.

그런데 허리를 펴는 순간 이번에는 허리가 시큰둥. 허리를 두드리며 이번에는 채소 무지 앞의 쪽걸상에 가 앉는다. 쪽걸상이나마 앉아서 일한다고 생각하니 이맛살이 쭉 펴진다. 칼로 무 다듬기. 무 대가리 부분 베여 내고 꼬지 부분 잔 털(뿌리) 제거. 일 간단. 실장갑을 끼고 하니 아려 나던 손이 괜찮아 짐. 허리는 계속 시큰시큰 해남. 비지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참을 만함. 일에 좀 익숙해지니 속도도 붙음. 그런데 아차~하는 순간 무 대가리 끝부분이 베여 나감과 거의 동시에 내 왼손 중지 끝부분도 베여 나갔다.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드는 순간 손끝에서는 삽시에 피가 뿜어져 나오고 실장갑은 어느새 피칠감이 되었다. 그놈의 칼 잘도 든다. 무를 다듬는데 무슨 칼을 저렇게 잘 들게 한단 말이냐? 분명 사람 잡자고 한 노릇이지. 나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니, 내 절로 피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 까지야 아니지만 그래도 소독에 약 바르고 붕대 감고 파상병 예방주사 맞고 의사 선생 수고 많이 시켰다. 일은 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엄혹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해고. 처숙모도 자연 해고. 

나는 그날로 처숙모 월급에 내 일당까지 결재 받았다. 사장은 마음이 좋았다. 사실 처숙모는 약 20일가량, 나는 한 한나절 일 했는데 사장은 처숙모는 한 달 월급, 나는 하루 일당으로 결재해 주었다. 자본주의 사장 사람을 착취한다던데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돈을 톡톡히 받았으니 좋게 될 기분이어야 하겠는데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깨가 축 처져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처숙모 보기가 미안했다. 그날 자리에 누우니 온몸이 쑤셔 났다. 손이 잘 베여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그 지겨운 한바 노동 개조가 계속될 걸. 나는 지금도 내 왼손 중지 끝부분을 볼 때면 허구픈 웃음이 나옴. 어쩌다 하는 일도 못 하다니… 참. 내 같은 놈, 일은 못 해 먹을 놈. 눈물 젖은 한바, 빠이빠이~. 나쁜 놈.


43. 눈물 젖은 「부대찌개」들

 

찌개 하는 소리를 우리는 심심찮게 들어본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두부찌개… 그것은 워낙 불고기, 전골, 전과 같이 불에 의해 요리되는 전통적인 요리의 하나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찌개를 참 좋아해 왔다. 밥맛이 안 당길 때에도 찌개, 한잔하여 땡 할 때에도 찌개, 이러구러 찌개… 그런데 찌개 하면 좀 꺼림 직한 감이 든다. 찌개, 찌개… 어쩐지 찌꺼기하고 자꾸 연계된다. 음식 찌꺼기들을 한데 모아 놓고 냅다 끓인 것이 찌개인 듯하다. 

한국의 「부대찌개」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부대찌개」를 풀어 말하면 부대에서 나오는 찌꺼기라는 말이다. 부대에서 나오는 찌꺼기가 어떻게 한국의 맛 좋은 음식으로 승화했는가 하는 데는 눈물겨운 사연들이 있다.

'8.15광복'이 되고 남에서 미 군정이 시작되고 미군이 곳곳에 주둔하던 시기다. 때는 하루하루 때 식 걱정을 하며 살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서 항상 배고프기만 한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미군부대 주둔지 주위로 옮기게 되였다. 거기는 그래도 먹을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내다 버리는 쓰레기-거기에 먹을 것이 섞여 나왔던 것이다. 미군들이 배불러 혹은 먹기 싫어 버린 먹다 남은 소시지, 고기붙이, 과일…그 당시 아이들이 이런 먹을 것을 찾아 파리떼처럼 그 쓰레기를 뒤지는 정경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실로 너무나 기특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주린 창자를 안고서도 어쩌다 먹을 것이 나지면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잘 챙겨서 집으로 가져 가군 했다. 어린것이 그래도 집사람들을 생각할 줄 알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주어오는 쓰레기 음식, 이것은 당시 가난한 서민들의 주된 먹을거리 내원의 하나였다. 아이들이 어쩌다 고기붙이라도 붙어있는 깡통을 주어오는 날이면 그날은 온 집안이 축제분위기에 휘감겨 들게 된다.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오래 먹기 위해서는 그런 소세지나 고기붙이들에 물을 부어서 시래기 같은 다른 먹을거리를 가득 넣고 끓이는 것이 제격인 것이다. 그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이른바 「부대찌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홀짝해졌던 배도 절로 불러난다. 그런데 모자라는 음식이 남는다고 온 집 식구가 이 「부대찌개」를 몇 날 며칠을 먹어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소시지나 고기붙이 같은 것을 서로 먹으라고 양보하며 국물만 훌쩍훌쩍 떠먹으니 그것은 그대로 남아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다시 물을 부어 끓여 몇내 며칠이고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배고프고 허기 차서 먹는 음식인지라 그것은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로 「부대찌개」는 한 시기 한국 서민의 때시걱 및 애환을 달래 준 전형적인 음식문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때시걱 걱정없이 살만 하게 되자 이 눈물겨운 「부대찌개」는 일종 떨어버릴 수 없는 향수 음식으로 되였다. 그래서 한국의 일반 가정에서나 식당의 주메뉴의 하나가 되고 물론 지금의 「부대찌개」는 그 더러운 쥐꼬리만 한 고기붙이에 시시껄렁한 먹을거리들을 가득 넣고 마구 끓인 것은 아니다. 지금은 주로 소시지에 떡국, 배추 그리고 거기에 라면 한 덩어리를 넣고 맛내기와 같은 여러 조미료를 가미하여 정갈스럽게 만든 것이다.

「부대찌개」는 가난할 때 생긴 음식이다. 못 살 때는 먹을거리 하나하나가 귀하다. 귀한 만큼 먹을거리도 많이 창출되는 것 같다. 

명태, 나는 언젠가 조선요리관련잡지에서 명태관련 요리법 소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그 잘난 명태를 가지고 백여 가지 요리법을 개발했다고 하니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족(漢族)들은 전통적으로 명태를 영양가 없는 물고기라 하여 그리 잘 안 먹는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한다. 그 담백한 맛을 주는 고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밸, 뼈, 알… 참 그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속속들이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되었던 것이다. 실오리같이 가늘어 손질하기 힘들어 별로 먹을 것 같지도 않은 밸을 창란으로, 입에 걸려 넘어가지도 않을 뼈를 짓이긴 뼈장… 그 어느 것이나 다 우리의 입맛을 돋군다. 이것은 그 어느 한 시기는 그렇게 쉽게 많이 잡혀 흔했다는 명태도 우리에게는 귀한 것으로 되어 값진 식원(食源)의 구실을 한 눈물겨운 역사를 말해준다. 

우리에게는 이런 눈물 젖은 먹을거리들이 많은 것 같다. 「부대찌개」에 들어갔던 시래기, 쓰레기 발음과 비슷한 시래기··· 참, 이것도 눈물겹도록 코마루가 찡해 난다. 겨울에 김장철이 되면 덧잎을 뜯어내고 배추를 깔끔하게 손질하는데 이런 덧잎이 잘 사는 부자집들에서는 못 먹을 쓰레기로 치부되어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못 사는 서민들 집에서는 못 먹을 덧잎이나마 먹기 위하여 새끼줄로 하나하나 매여 처마 밑에 달아매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겨울 먹을 것이 다 떨어질 때가 되면 그 달아맨 배춧잎들은 물기가 싹 증발해버리고 다치면 부서질 정도로 바싹 마른다. 이 바싹 마른 배춧잎들이 바로 시래기인 것이다. 한겨울 된장 한술에 이 시래기를 부셔 넣고 물을 부어 끓이면 구수한 시래기국 혹은 된장국이 되는 것이다. 눈서리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 하며 바싹 마른 시래기는 그 나름대로 별미가 있다. 하여 오늘날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셔 머리가 땡 해나도 이 시래기국을 찾는다. 오늘날 이 시래기음식은 역시 향수음식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은 호텔의 특별메뉴로 부상되어 새로운 현대미각(味覺)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연길 부르하통하 기슭에 우뚝 솟은 송기호텔 지하식당은 바로 이 시래기메뉴로 하여 사람들이 북적인다. 시래기국과 시래기갈비, 별미였다. 필자는 얼마전에 일부러 한번 들러 보았다. 옛날 우리 할머니 끓여주던 그 맛이 살아나는 시래기국, 나는 구미가 부쩍 동해 그 무슨 보신탕이나 먹듯이 연속 두 그릇을 제꼈다. 그런데 옥에 든 티라 할까 좀 더 텁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현대인간들의 구미에 맞추느라고 그런지 우리 할머니 시래기국보다는 좀 깔끔한 맛이 가미되어 있다. 아마도 자연적인 시래기보다도 인공적인 시래기재료 탓인가 보다. 시래기갈비는 아마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송기호텔에서 특별히 개발한 듯하다. 말 그대로 시래기갈비는 갈비 위에 시래기를 놓고 푹 쪄 시래기 그 자체에도 갈비맛이 나게 했다. 서민들의 하찮은 시래기와 양반들의 존귀한 갈비의 만남이었다. 그것은 서민음식과 양반음식의 결합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시래기갈비의 묘미는 어디까지나 시래기 그 자체에 있다. 시래기 그 자체의 맛은 제쳐 두고라도, 시래기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향수 그 자체만으로도 시래기갈비는 사람들을 충분히 갈무리할 수 있다. 실로 눈물겹게만 안겨오던 시래기가 어느새 정겨운 향수음식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향수음식의 개발, 멋진 아이디어의 창출이다. 몇 년 전 북경에 하향 지식청년 집체호식당이 섰다 한다. 이 식당은 전문 하향 지식청년들이 이른바 광활한 천지 농촌에 가 있을 때 먹던 음식들을 취급했다 한다. 그러니 전국의 하향 지식청년들이 우연히 혹은 일부러 그 식당으로 모여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 그 때를 느껴보려고 한 번씩은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식당은 개업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객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송기호텔의 시래기국과 시래기갈비를 비롯하여 우리 연길시 내에도 심심찮게 이런 향수음식들이 선보이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우연히 우체국 부근에 있는 어느 한 스낵식당에 들어갔다.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라 그 맛갈진 음식들도 나의 구미를 당기지는 못하고 그저 그랬다. 그런데 그 노오란 옥수수가루떡(窩窩頭)이 눈에 와 닿는 순간 나의 식욕은 발동되었다. 참, 이상야릇한 노릇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이 옥수수가루떡에 그만 질려버려 보기만 해도 그것이 노아란 똥같이 안겨와 구역질이 나군 했었다. 하루 세끼 이 옥수수가루떡으로 배를 채우니 말이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옥수수떡을 먹어야 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고육지책으로 그 옥수수떡을 항상 까맣게 태워 그 쓰거운 탄 맛에 겨우 넘기곤 하였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암 유발할 수 있다는 탄 음식물을 내가 마구 먹었으니 말이다. 그 후 나는 쌀밥을 먹게 되면서부터 똥 같은 노아란 옥수수떡은 절대 보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나는 노아란 옥수수떡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릇에 마구 주어 담아 입이 미여 터지도록 쑤셔 넣었다. 무슨 맛인지 똑똑히 모르겠지만 여하튼 맛있었다. 그날 나는 그저 이 옥수수떡으로 만포식했다. 먹으면서 자꾸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변덕 많고 주책 못하고 얄궂은 나 자신, 아니 인간들을 웃었다. 사람들은 변덕 많고 주책 못하고 얄궂다. 그런 만큼 그 식성도 변덕 많고 주책 못하고 얄궂다. 그렇지만 인간들에게는 또 변하지 않는 끈끈한 옛것에로의 회귀본능이 있다. 식성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주 그 때 그 맛을 외운다. 그 때 그 맛에로의 향수-그것이 바로 「부대찌개」들이다. 그래서 「부대찌개」들은 인간 심성 깊이에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식성을 불러일으키며 뽕도 따고 님도 보는 일석이조의 새로운 음식문화의 창출로 된다. 
        

44. 동 년

 

기억컨대 아마 내가 대여섯 살 나던 때 일 것이다. 나는 그때 마을에서 싸움질 잘 하고 욕 잘 하는 ‘부랑배‘로 이름났다. 내 또래들과 싸움을 하면 언제나 내가 이겼던 것이다. 아마도 무엇에서나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강한 승벽심과 내 또래보다 돼지같이 실한 몸집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그러던 어느날 내가 골목길을 빈둥빈둥 돌아다니는데 골목길에 나와 한담하던 할머니들이 얼굴에 발린 노여움을 띠고 ‘후레자식‘같으니라구, ‘주어 온 자식‘같으니라구 뭐니 하며 나를 놀려주었다. 그때 나는 ‘후레자식‘이요 뭐요 하는 것은 나를 골려주는 욕하는 말인지는 알았지만 그것이 구경 무슨 뜻인지는 똑똑히 몰랐기 때문에 그리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어 온 자식‘이란 말은 얼마나 귀에 거슬리며 내 비위를 상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단방에 ‘할망탕구‘요, ‘개×ב요, 뭐니 하며 내가 제일 잘 하는 걸진 욕들을 연주포처럼 숨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대었다. 나는 이 ‘할망탕구‘들을 밑천도 못 찾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할머니들은 정말로 노발대발하여 하나 둘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신을 벗어 들고 나한테 달려들었다. 이에 나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다가는 몸을 휙 돌려 다리야 날 살리라고 집으로 냅다 뛰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한창 돼지죽을 끓이고 있는 어머니 뒤로 몸을 숨겼다. 어머니는 ‘이애, 와 그래?‘라고 머리를 돌리며 맞갖지 않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것에는 이미 단련이 되었는지라 관계하지 않고 거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눈이 휘둥그레 어머니 뒤에 몸을 숨긴 채 문 쪽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 ‘할망탕구‘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나의 긴장과 두려움은 공연했다. 그 ‘할망탕구‘들은 거저 나를 놀라게 해주려는데 불과했던 것이다. (아마 이리하여 나는 더욱더 ‘단련‘되어 밸도 더 커져 싸움도 더 잘 하고 욕도 더 잘 하는 ‘영웅‘으로 커 갔을 것이다.) 방망이질하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자 이번에는 또 그 ‘주어 온 아이‘라는 맞갑잖은 끈덕지가 짓궂게 머리를 쳐들며 나의 뇌리에서 메아리 쳤다. (내가 주어 온 아이라…) 나는 불쾌한 마음을 도무지 달랠길 없어서 ‘엄마, 나는 어디서 났나? ‘라고 밤에 홍두깨 내밀 듯 어머니한테 물었다. 이에 어머니는 우습다는 듯이 피씩 웃으시며 ‘이애, 그런 걸 갑자기 와 물어? ‘라고 심드렁해하였다. ‘그저‘나도 심드렁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어쩐지 자꾸만 그 ‘주어 온 아이‘라는 것이 께름직한지라 ‘저 할망구들이 나보구 주어온 아이래‘라고 볼 부은 소리를 하였다. 이에 어머니는 이번에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시며 (여자로서는 좀 지나칠 정도로…) 돼지죽을 들여다보던 몸을 나한테로 돌리고 부지깽이를 내 코앞에 흔들어 대며 ‘옳아, 너는 주어온 아이야! 알만하니? 니 애비가 말이다, 추운 겨울에 니가 솜뭉치에 싸여 어느 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을 주어 왔단 말이야. 이젠 알 만하지? ‘라고 정색해서 맺고 끊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래진 나는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가 나중에는 ‘아니야, 아니야…‘하며 눈물이 글썽해졌다. ‘주어 왔다‘는 말이 얼마나 듣기 싫은 지 몰랐다. 그 ‘할망탕구‘들이 그 말을 할 때도 나는 얼마나 밸이 났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내가 제일 믿던 어머니까지 거기에 맞장구를 치니 나는 밸이 나다 못해 막 서러워 났다. ‘아니야, 아이야…‘나는 몸부림치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쳐댔다. 어머니는 그것이 보기 좋다는 듯이 두 팔을 옆구리에 척 끼고는 ‘넌, 말이야, 주어 왔어, 넌, …말이야, 주…‘라고 자꾸만 나를 골렸다. 나는 애가 달아 눈물을 찔끔찔끔 짜며 이번에는 ‘엄마, 주어왔어, 엄마, 주어 왔…‘라고 항변하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대려고 손까지 냈다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하이, 이 자식, 바라, 옳게 대주니 일타, 이…이 코바라‘라고 히물히물 웃으시며 나를 끌어당기더니 그 때가 시커멓게 앉은 행주치마로 줄줄 흘리는 눈물과 벌렁이는 코를 쓱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는 ‘야, 머슴애라는 것이 이렇게 빌빌 잘 짜 어디다 써겠…? 그래 내가 주어왔다, 됐니? ‘라고 나를 달래는 것이었다. 나는 서러움 속에서 차차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튿날 나는 일종 풀 수 없는 의문과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나와 제일 잘 노는 애순이란 계집아이를 찾아갔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물었다. ‘야, 너…너는 어디서 났는지 아니? ‘, ‘몰라‘ 애순이는 새까만 눈동자를 발씬 드러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주어 왔어. 아니? 너는 주어 왔단 말이야! ‘, ‘아니야, 아니야…‘애순이는 안이 달아 죄꼬만 입을 부지런히 놀렸다. 나는 그것이 재미나서 ‘너는, 말이야… 니 아버지가 말이야…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단 말이야! ‘라고 전지전능의 어른의 티를 내며 느릿느릿 내 좋은 소리를 쳐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애순이가 ‘아이야, 아니야…‘라는 부정에 뒤이어 불쑥 ‘네가 주어왔다, 네가 주어 왔다‘라고 새된 소리를 쳤다. 뭐, 내가 주… 항상 내가 보호하는 대상으로 여긴 쪼꼬만 애순이로부터 딱 요해처를 찔리우자 나는 속이 섬뜩해 나다가 괘씸한 생각이 불씬 치밀어 애순이를 콱 밀어 놓았다. 그러자 애순이는 뒤로 벌렁 나가자빠져 엉엉 울음보를 터쳤다.

그래도 입만은 살아 ‘네가 주어 왔어, 네가…‘하며 발버둥쳐댔다. 나는 탁 한번 더 차 놓을까 하다가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인지라 다짜고짜로 두 손을 부르쥐고 집으로 냅다 뛰었다. 기실 나는 그때 ‘삼십육계‘가 뭔 지 몰랐다.

그 이튿날 나와 애순이는 어제 언제 그런 불유쾌한 일이 있었는가 싶게 또 다정스레 만났다. 애순이는 손가락 끝을 잘금잘금 빨면서 약간 억울함이 썩인 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말이야, 난 사왔대, 병원에서 말이야‘, ‘엉? ‘나는 놀람을 금할 수 없음과 동시에 버쩍 구미가 동해 ‘정말? ‘라고 미심쩍어 하며 다잡아 물었다. ‘그럼,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뭐, 내 거짓말하면…‘애순이는 식지를 목으로 가져다 쓱 그으며 정색을 했다. 나는 피끗 그 어떤 야릇한 생각이 들며 그것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었다.

애순이는 곱다. 얼굴이 포동포동한 게 돈 주고 사왔으니, 그것도 제일 고운 걸 골라. 나는 밉다. 주어 왔으니. 저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돌덩이처럼. 그러니깐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지. 엄마, 아버지도 쩍하면 욕하고 때리지 않는가? 원래 이런 영문이었구나! 그 어떤 미지의 세계를 깨친 것 같은 통쾌감 속에서도 자꾸만 갈마드는 자비감과 서러움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남자는 계집애들 앞에서 울지 않는다는 쓸데없는 ‘남자대장부‘ 자존의식을 갖고 있었듯 하다. 그런데 갈마들다 못해 이젠 막 북받치는 서러움은 정녕 참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데로 그것을 그대로 내리 누르고 누르다 나니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 의하여 거기에 영 반대되는 반발의식-강자의 진노가 불컥 솟아났다. 죄꼬만 너는 사왔다. 나는 주어왔다. 에익, 돼먹지 못하게스리. ‘야, 너는 주어왔어. 아니? ‘라고 나는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치며 두 주먹을 불끈 히스테리적으로 애순이의 코앞에 냅다 흔들어 보였다. 나의 ‘주어온 아이‘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하였다. 애순이는 벌떡 놀라 멍하니 한참 있더니 제정신이 들었는지 ‘아니야, 나는 사왔어. 우리 엄마가 글던데 뭐…‘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몸부림을 치며 자기 변명을 하였다. ‘아니야, 너는, 주어…‘나는 너무 지나친 괘씸으로 하여 말도 제대로 번지지 못하다가 또 그를 콱 밀쳤다. 그러자 그는 또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그녀의 눈물이 겁났다. 집으로 냅다 뛰었다. 정말 여자의 눈물은 강한 무기인가봐. 

그런데 요번 일이 좀 크게 번져갔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마실을 나가고 형님은 아랫방에서 공부를 하고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웃방에서 동생과 함께 싱갱이질 하며 놀고 있었다. ‘달수어머니, 계십니까? ‘라는 중년여자의 청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삐걱 문여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순간 나의 뇌신경은 팽팽해지고 말았다. ‘오, 빨리와, 빨리와‘어머니의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애순이 어머니가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덜컹 겁이 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남의 집 ‘사온‘ 고운 딸을 연속 두 번이나 그렇게 탁 밀쳐 놓았으니 말이다. 나는 인차 이불장의 이불을 꺼내 아랫목에 벌렁 나가자빠지며 뒤집어썼다. ‘아이구, 애순이도…‘남자들같은 목소리이면서도 아양을 떠는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 뒤이어 ‘이모,…‘하며 말끝을 흐리는 애순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는 더욱 겁이 더럭 났다. 이젠 큰일났구나 조것이 다 고잘질했구나… 우리 두 집은 언젠부터인지는 모르나 애순이가 우리 엄마보구 이모라하고 내가 애순이 엄마보구 이모하는 자별한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들 잘 다녔다. 여느 때면 애순이랑 애순이 어머니랑 오면 그것은 그 어느 명절보다도 더 재미나고 기뻤다. 그러나 오늘 저녁만은 딱 거북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이불을 불끈 여몄다. 그런데 그 개코도 모르는 동생이 이불을 펴놓은 것을 보자 좋아라고 엉기적엉기적 기여 올라왔다. 나는 답답하고 황황한 속에 자기도 모르게 동생을 콱 밀쳤다. 그러자 동생은 한쪽으로 나가자빠지며 죽는다고 지지러지게 울어 댔다. 나는 정말 간이 콩알만 해졌다. 이에 애순이 어머니를 집안으로 모시던 어머니가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며 ‘에구, 저놈이 언제 사람 될지, 데리고 놀라 했더니 고새에 또 울기구…쯔…‘라고 푸념질했다. 그리고는 내가 이불을 뒤집어쓴 것을 보자 ‘초저녁에 이불은 무슨 놈의 이불이야. 빨리 일어나. 쯔쯔…‘라고 혀를 다시며 방으로 올라와서는 이불을 확 제꼈다. 그리고는 훌훌 개였다. 그러면서 또 뭐라고 푸념. 나의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잇따라 들어온 애순이, 애순이 어머니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뾰로통해서 힐끔힐끔 애순이 어머니만 쳐다보았다. 당금 무슨 벼락이라도 내릴듯 싶었다. 애순이 어머니는 우는 동생을 안고서 ‘어, 어…‘하며 달래였다. 애순이는 제 엄마 옆구리를 꼭 잡고 옆에 착 붙어서 선 그저 나를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이윽고 동생의 우는 소리가 뜸해지자 애순이 어머니는 나를 보고 상글상글 웃으시더니 ‘달수야, 골 내지 말아라, 너는 주어온 아이가 아니야, 사온 아이야, 이…‘라고 정색해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가뜩이나 뾰로통해 있던 차라 일종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며 단말마적으로 웨쳤다. ‘애순이가 주어 온 아이야, 너네, 애순이가! ‘이에 질겁한 애순이는 제 엄마한테 아예 매여 달리다시피 하며 바싹 다가 붙었다. 어머니는 ‘이놈, 이놈이 와 그래? 미쳤나? ‘라고 하며 두리번 두리번 무엇을 찾는 듯했다. 방비자루던가 무엇인가 찾아 또 나를 때리려는 것 같다.

애순이 어머니는 여성다운 상냥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더니 ‘달수야. 너넨 다 어머니의 아들이고 딸이지 어디서 주어오고 사왔겠니? 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낳아 기른거지, 어데서 너네 같은 좋은 아이 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날 저녁 포근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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