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춘식 수필가

김춘식 수필가
김춘식 수필가

해마다 세밑이면 은행이나 약국 같은 데서 달력을 마련해두고 손님들에게 가져가게 하는데 아내는 단골 약국에서, 나는 은행에서 각각 달력을 하나씩 얻어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것을 각기 침실과 서재에 걸어 놓는데 이 달력들로 한 해의 대소사와 모든 약속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물론 맨 먼저 온 가족 생일날을 찾아서 동그라미를 친다. 기실 달력에 적는 것 대부분 사소한 신변잡기이다. 쌀은 언제 샀고 이발은 언제 했고 염색은 언제 했으며 어느 날에 누구 네 결혼잔치고 생일이며 어느 날 어떤 모임이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지난 해는 코로나 19로 모임을 자제하다 보니 이런 기록이 많이 적었다. 평년에는 보통 한달에 두 세번은 이런 저런 모임에 참가했는데 지난 해에는 년초를 내놓고는 거의 이런 모임이 없었다… 설사 있다 해도 가지 않았다. 꼭 참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 웬 달력 타령이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에 기념일 하나를 설정하고 1년 혹은 매달, 매주 ‘반복’만 누르면 간단하게 저장된다. 하지만 효율이 삶의 리듬이나 가치에 못 미칠 때가 있다. 매력적인 건 달력 밑에 적혀 있는 문구다. 소설이나 시, 영화 등에 나오는 인생살이에 관한 좋을 글귀들이 같이 쓰여져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흔하고 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큼직한 수자 밑에 음력이 표시된 달력이다. 음력이 나오고 십이간지 동물이 그려져 있고 입춘이니 우수니 하는 절기가 인쇄된, 오로지 달력의 기능에만 충실한 달력 말이다. 나 뿐이 아닌 연세 든 노인들 거개가 실내장식 필수품으로 반드시 달력을 벽에 걸어 놓는다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림 좋은 달력을 골라서 거실에 하나 그리고 내 방에 하나, 하면서 달력을 거는 것이 연말 연시의 주요행사다. 60이 넘으면 날짜를 헷갈려 하기 일쑤다. 이런 불가피한 이유로 달력을, 그것도 글자가 큰 달력을 필수 장식품으로 여기는 그것을 가지고 젊은이들은 웃어 댄다. 자기네들이 웃거나 말거나 달력은 나의, 그리고 우리 모든 노년들의 필수품이다.

 

종이로 인쇄된 달력 외에 다이어리도 사람들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무엇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로지 나의 이야기를 담는 다이어리. 동, 서양 모두 일상이나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을 기록한 ‘일기’가 산문의 한 양식으로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수첩 형식의 다이어리가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 온 후 나는 줄곧 다이어리도 사용해왔다. 일력을 쓰지 않는 만큼 모든 일기를 다이어리에 적어 넣었다. 자질구레한 일상 생활기록 만이 아닌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 텔레비전이나 모바일에서 본 뉴스나 드라마에 대한 감상, 독후감 등으로 매일마다 한 장 한 장씩 꼭꼭 채워 넣었다. 거기에다 매일마다 메모장에서 뜯어낸 메모지도 한 두 장씩 덧붙여 놓으면서… 작가인 나에게 있어서 여기에 적힌 모든 것이 그토록 소중한 글감이기도 하다.

 

한국에 온 후로 줄곧 달력을 써온 나지만 그래도 전에 쓰던 큼지막한 날짜로 종이 한 면을 꽉 채운 ‘일력’을 더 좋아한다. 탁상 우에 놓여 있거나 벽에 걸려있는 얄팍한 종이의 찢는 그 일력 말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종이를 뜯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 일력 우에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것 말이다. 일력은 뜯을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간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시계로 치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초침인 셈이다.

 

전에 중국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일력을 두 개씩 사용하였다. 매일 책상 우에 두고 일기장처럼 사용할 수 있게 그날의 날자, 요일, 일진 따위를 각각 한 장에 적어 매일 한 장씩 떼거나 젖혀 보도록 만든 일력을 집의 서재와 학교의 내 사무실에 하나씩 두었다. 물론 집의 것은 내가 산 것이고 학교의 것은 학교에서 내준 것이다. 그렇게 매일의 날짜가 기록된 일력은 메모장, 일기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날마다 일력에 그날에 해야 할 일, 있은 일과 느낀 점을 적거나 자투리시간에 신문이나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들을 적었는데 어떤 날은 앞뒤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박아 적었다. 나는 날자마다 관련 일러스트와 좋은 글귀를 함께 담은 일력을 편애했는데 거기에는 <논어>, <사기>, <맹자>, <한시> 등 중국고전 속 빛나는 구절들이 한 장 한 장 다르게 들어가 있어 말 그대로 이는 일력이자 또한 한권의 아름다운 고전 문선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일력이었기에 나는 일력을 조만해서는 찢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데 이런 일력은 보통1~2년, 지어는 5~6년씩 건사하기도 하면서 필요할 때나 심심할 때나 틈나는 대로 뒤져서 읽어 보기도 했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런 일력은 다시 읽을 때마다 감개가 무량하다.

 

일력의 번거로움이자 재미는 하루가 지나면 종이 한 장을 찢거나 번지는 데 있다. 일년 간 책상 앞에 두고 매일 보면 누구든 일력의 매력을 확실히 알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손으로 느끼고 만질 수 있어서 좋다. 또한 매일 만나는 좋은 글귀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주고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일력을 번지거나 뜯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지는 기분이 든다.

 

옛날생각이 난다. 일력은 하루 한 장씩이기 때문에 보통 얇은 습자지로 만드는데 종이가 귀했던 시절, 일력은 공책과 메모지를 대신했고 어른들의 엽초 마는 담배지를 대신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든 일력을 휴지 대신 쓰기도 했다. 때론 누군가 무슨 일로 급해서 미리 찢어 쓸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은 알게 모르게 숱한 욕을 먹게 된다. 일력의 사용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듣자니 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쓰니 달력 주문은 줄고 있지만 일력은 수요가 몇 년째 꾸준하다 한다. 특히 출판사 민음사에서 해마다 년말이면 펴내는 ‘인생 일력’은 출판하기 바쁘게 부리나케 팔린다고 한다. 민음사에서 펴낸2021년 인생 일력에는 <논어>, <사기>, <맹자>, <한국 산문선> 등 동양 고전 80여권 속 구절이 한 장 한 장 다르게 일력의 한 해에 알차게 담겨 들어갔다 한다. 이처럼 아침마다 한 장씩 넘기며 마음을 다잡는 효과가 있어서. 매일 뜯어 쓰는 일력이 인테리어용으로 부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년부터는 이 인생 일력을 사야 겠다.

 

어쩌면 요즘 많은 젊은 세대에게는 일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한 장에 일주일을 엮은 주력(周)이나 일력도 달력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달력보다 일년 동안의 날짜를 적은 책을 의미하는 책력(册历)이라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더 정확한 것 같기도 하다.

 

조선시대엔 달력이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책력이라고 하였다. 요즘의 달력과 비슷하지만 절기와 주요 기념일 정도만 표시되어 있는 달력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절기는 물론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별자리, 오행, 일진, 심지어 밀물과 썰물의 시간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것은 토정비결까지 들어 있어 한 해의 운수를 점쳐볼 수도 있었다. 농사와 생활에 유용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보니 책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책력 한권을 마련했다면 한 해를 날 준비가 되여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책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농사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로, 이십사절기는 물론 기상의 변화를 예측해서 적어 두었다. 하늘과 자연의 뜻을 전달하는 창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말은 행동이 따르지 못하고/뜻은 실천으로 채우지 못하여/나이 마흔이 되도록/단지 불효만 하였을 뿐이다.//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선행으로 스스로를 돕는다면/신이 들어주고 받아주어서/허물과 재앙을 면하게 되리라//”

 

–리식의 《택당집》중 <책력에 쓴 글>에서

 

옛사람들은 정초에 책력을 구입하면 그 여백에 한 해의 목표나 바람, 또는 새해를 맞는 감회를 적곤 했다. 요즘으로 치면 다이어리(일기장)를 구입해 분기별, 월별로 한해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 리식(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호는 택당)의 글도 그 중의 하나다. 올 한 해에는 허물없이 살아가겠다는 다짐, 불혹의 나이를 앞둔 이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가 돋보이는 글이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여내고/새 달력을 준비하며/조용히 말하렵니다/‘가라, 옛날이여’/‘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고마운 시간들이여”

 

이는 이해인 수녀(시인)가 쓴 시 <12월의 엽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새해의 달력장(일력장)을 펼치며 많은 이들이 지난 온 한 해를 비춰 되돌아보며 다사다난이란 얘기를 많이 했다. 다사다난이란 게 뭣 이던가? 여러가지 많은 일과 그 많이 벌어진 일들 중에서 많고 많은 어려움들이 끼여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새해로 바뀌었으나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시대적 사회 상황이 많은 이들을 울리고 아프고 힘겹게 해, 울분을 토하며 아우성치고 하소연한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당장 생계 난에 빠져들고 있다. 한달에 열흘, 반달, 스무 날씩 출근하며 그럭저럭 일년간 버텨오던 회사가 입춘을 닷새 앞두고 전원 반년 휴직상태에 들어갔다. 빨리 일을 회복했으면, 제발 회사가 부도만 나지 않았으면 하고 속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이 내 소원대로 될까? 1월달 달력장 29란 수자에 붉은 색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밑에 ‘휴직 시작’이란 글을 적었으니 어느 달 달력장 어느 수자에 또 동그라미를 치고 밑에 ‘출근 시작’이란 글을 적을 수 있을까?

 

이 한 해 우리의 일력장이나 달력장에 더는 불운의 날이, 울분의 날이, 아픈 날이 찍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이들의 기대처럼 빠른 시일 내에 모두 좌절과 실의에서 벗어나고 어둠에서 헤어 나오기를. 그리고 달력장이나 일력장에 그 기쁨의 하루 하루를, 그 하나 하나의 감격을 적으며 축하할 수 있기를.

 

출처: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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