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기 전에 비치는 햇살과 시내로 내려가는 주황빛 불빛,

이것은 모넴바시아의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글, 사진 중국신문주간 리징(李靜) 기자

 

아테네에서 자동차로 서쪽으로 가다 콜린스 운하를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과철마(金戈鐵馬)로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서게 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 황금의 나라 미케네 문명 유적은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트리폴리, 모이라, 그리고 철과 피로 역사에 남았던 천년 묵은 스파르타를 지나 86번 도로가 미르토안해, 모넴바시아 해로 휘어지자 바다 속에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기원전 30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진으로 대륙과 단절된 이 곳은 해안에서 불과 수백미터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게 되었다. 또 몇백 년이 지난 6세기 말 기원 583년 무렵에는 스파르타인들이 슬라브족과 아와르족의 침입을 막아 내기 위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바위섬 뒷면에 견고한 보루와 성을 쌓았으며 거대한 바위는 천연의 차폐가 되어 적의 공격을 피하도록 도왔다. 기원 10세기 이후, 이 도시는 발전을 이루었고 세퐁베르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서쪽으로 지중해를 오가는 무역상들에게 중요한 해상터미널이 되었다. 원래 모넴바시아까지 가는 유일한 길은 배로 가는 방법이었는데 1071년 사람들이 다리를 만들었으며 보루 입구를 라코냐 해안으로 연결시켰다.

육지에 올라 어느 모로 보나 모넴바시아는 해안가의 우뚝 솟은 바위에 불과했고 보루와 도시는 시야 밖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이것 또한 바로 이 곳의 기이한 점이다.

긴 나룻다리를 따라 거대한 바위에 올라 산을 끼고 만든 황량한 도로를 걸으며 헐벗은 돌산을 올려다보면 옛 보루의 전설이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길 끝에 있는 굴곡진 동굴을 지나서 동굴 입구 반대편에 가면 마치 토끼 굴에 뛰어든 앨리스마냥 눈앞이 환히 보이는 이 기묘한 세계에 의아함을 금치 못한다.

마치 몇 백 년을 거꾸로 흘러온 듯 이곳은 아스팔트도, 차량도 없이 딱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자갈길이 눈에 들어오며 전선이나 전화선도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 겹겹이 올라간 돌로 된 작은 집들은 보통 검붉고 어두운 녹색의 나무창살로 꾸며져 있고 일부는 재건되고 보수되었지만 12세기 무렵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민박집을 안내한 그리스 아가씨는이 곳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꾸준히 살아왔던 옛 보루라며그러나 지금 마을에는 10명의 영주권자만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소도시로 들어가는 동굴 입구를 돌아보면 마치 시공(時空)의 문처럼 모넴바시아의 출입구는 이곳 하나뿐이다. 이 곳의 이름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모넴바시아는 그리스어로 ‘유일한 문’이란 뜻이다.

아홉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리스의 시인 야니스 릿소스(Yannis Ritsos)는 고향 모넴바시아를 ‘돌배’로 묘사했다.

독특한 역사를 지닌 이 ‘돌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세 이래 천년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10세기 때 모넴바시아는 지역 해운과 무역의 허브로 발전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작은 성은 비잔티움 제국, 로마 교황, 베네치아 공국의 영지가 됐다. 1540년 베네치아는 이를 오스만 터키 제국에 할양했다. 이후 베네치아가 10년이 채 안 된 시간에 두 차례 짧은 귀환을 한 것을 제외하면 모넴바시아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17세기에는 인구가 4만명에 달했다가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의 건물들은 대부분 12세기 비잔틴 시기에 세워졌고, 1679년 베네치아인들이 도시의 일부 가옥과 성벽을 개축했다. 자갈 깔린 오솔길을 걷다 고개를 살짝 들면 겹겹이 쌓인 나무 창살과 그 위에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모퉁이마다 돌 아치형 문틀이 바다를 뒤덮고 푸른 넝쿨이 기와지붕을 오르는 독특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올라갈수록 그 돌집과 땅 위로 드러난 바위를 발견하기 어렵다.

모넴바시아는 폭 300m, 길이 1km로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앙 조약돌 거리가 주요 상업지역을 이루었으며, 작은 술집과 카페, 기념품과 전통상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중심부의 작은 광장인 자미오스 광장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박물관으로 터키 통치 시절 모스크였던 모넴바시아의 고고학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다. 한쪽은 기원 6세기에 건축한 크리스토 에코메노스 성당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특색을 가장 잘 대변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광장은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있고, 날씨가 좋을 때는 햇볕이 잘 들어온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작은 마을의 공공 애완고양이들도 이곳에 와서 사람들과 어울려 논다. 광장 아래는 절벽이고 파도가 울퉁불퉁한 돌담에 부딪친다.

산 아래쪽의 번화한 도시는 항상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데, 사실 모넴바시아에는 절벽 위에 세워진 산도시가 있었다. 읍내에서 올라오려면 굽이굽이 돌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야 오래된 아크로폴리스가 나온다. 천 년 동안 닳고 햇볕이 내리쬐어 길에 있는 돌멩이가 빛을 내던지듯 미끄러졌다. 나는 그렇게 비틀거리다가 길가의 돌담과 손발을 꼭 잡고 암산 꼭대기를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정상에는 절벽에 자리한 소피아 성당이 남아 미르토안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이 맑을 때 교회 밖 평대에 서면 크레타 섬을 볼 수 있다. 백발의 문지기들은 이른 봄 비수기인데도 관광객들이 교회를 찾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햇빛을 쬐고 졸고 있는 상태에서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11세기에 지어진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을 본떠 지어진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비잔틴식 성당 중 하나다. 그 ‘자매’의 경력과 비슷한 운명의 소피아 성당도 오스만제국 시절 한때 모스크로 바뀌기도 했다. 베니스 공화국 통치 시절에는 가톨릭 성모 카미니 수도원이 되기도 했다. 1821년에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정교회가 부활하였다. 문지기들은 과거 모넴바시아에는 40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고 지금도 15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소피아 성당 주변 상성은 원래 모넴바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옛 부자들의 거주지였다. 1821년 도시는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 후 다수의 가옥은 폐기되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곳에는 돌담만 남았을 뿐 원래의 가옥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섬의 폐가는 함부로 복구할 수 없다. 그리스 문화부는 80년대부터 기존 가옥과 유적의 원형을 바꾸는 것을 금지했고 현대 건축과 과잉 개발을 불허해왔다. 복원허가를 받으려면 집의 원형 도면이나 사진을 제공해 원래의 모양대로 복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넴바시아는 조용히 안정을 취하게 되었고 80년대 말부터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현재 섬의 숙박지는 민박이 대부분이며 외관이나 인테리어는 물론 섬의 본연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소피아 성당 주변 상성터 옆에 서서 해가 지기 전 볕이 내리쬐는 주황빛 불빛을 보는 것이 모넴바시아에서 보내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거대한 바위에 안긴 도시는 고즈넉한 해만(海灣)을 내려다보고 있고 천 년 동안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루어졌던 ‘도시의 변화’가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날 모넴바시아는 그리스의 조용하고 작은 밀월명소가 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 한 구석에 누워 역사의 먼지를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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