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마중을 나오지 않아도           
어제는 살구꽃이 피었지
오늘은 영산홍이 불을 질렀어
개구리가 놀라 뛰어 나왔고
지렁이들이 땅 위를 막 돌아다니데
눈이 번쩍 뜨이더군
온 몸이 달아오르는데 
발을 치우라며
채송화가 나를 밀어서
몸이 기우뚱 했지 
확 열 받았지
머리에서 땀이 나더라구 
쏟아 붓는 햇살에 젖을 대로 젖어 
숨이 막히더라고
햇살은 마당에서 서성거리는데
내겐 봄마저 더디 오더군   


봄비  
 

지난밤 내내 가는비가 오시더니
여염집 새아씨처럼 
조분조분 오시더니 
그 발자국 따라 손님이 오셨더이다 
환하게 훨훨 가볍게 와서는 
이방인처럼 낯선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뜰로 난 문을 톡톡 두드리더니
평생 감추어 둔 
작은 문하나
그 문턱을 넘어 오셨더이다
초원을 건너 오셨더이다
여염집
새악씨 걸음으로 오셨더이다
 
 

부처님 미소가 자란 날

                                  
 축! 메리 초파일

아랫녘 교회에서 보내 온 양란꽃등燈

연등보다 먼저 공양올렸습니다

귀신사 도량이 어느 때보다 환해졌습니다 

느티나무는 혼자 웃다가 수염이 한치 길어났습니다

천사백년 걸려 온 달도 조심스레 빛을 공양올립니다

끄덕끄덕 부처님 미소가 자랐습니다


오월
 

퍼렇게 날선 이파리의 기세에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푸른 오월

수많은 꿈들 쓰러진 도청광장에서
햇살은 벌떼처럼 쏟아지고
낡은 더듬이로 흔적을 더듬거리는
남은 꽃잎들
고딕체의 열매를 
봄의 숭고함이라 했던가 
잃어버린 자, 찾으려는 자
떠도는 넋일 뿐
쓰러진 우리의 소망이 흩어진 지금
이른 봄 피었던
꽃들, 와르르 무너져 내린
널부러진 오월은 슬픈 눈이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8)
 -덕진연꽃
                          

봄 그늘 속으로 소리들이 모여들었다

물짐승 몸짓에 그늘이 출렁인다 
물무늬가 봄날을 넓게 폈다 

절정으로 봄을 밝혔던 꽃들이 
조등을 켜고 덕진연못에 잠기었다

계절이 두꺼워져간다
가장자리에 쌓인 침묵이 붉어졌다

사람과 사람, 꿈과 꿈이 파동으로 이어져
여름 우체통에 이승의 소망 등(燈)이 켜지고

입닫고 눈감은 어느 무인도의 마음이 건너와   
허공에 뿌리박고 진흙에 둥지를 튼 해탈꽃

함지박만한 귀로 소리란 소리 다 받쳐 든 
심청이 되돌아오는 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시인 김현조
시인 김현조

 

 

 

 

 

■ 프로필 ■

․1991년 <문학세계>로 등단
․저서 : 시집 『사막풀』『당나귀를 만난 목화밭』외 『고려인 이주사』『고려인의 노래』          외   번역집 『이슬람의 현자 나스레진』
․현)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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