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 교육문화부 정책자문관)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농민들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일본과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려고 했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다.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이후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정부는 2019년 2월 19일(화) 국무회의에서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다. SBS는 2019년 4월 26일부터 7월 13일까지 48부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 속에서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워야 했던 이복형제와 여거상의 파란만장한 휴먼스토리를 그린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정읍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광활한 호남평야 농촌마을에서 살았다.

호남평야는 전라북도의 서반부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이다. 동쪽과 남쪽은 노령산맥, 북쪽은 금강, 서쪽은 황해와 접한다. 동서의 폭이 약 125리, 남북의 길이가 대략 160리에 이른다. 행정구역으로는 정읍·전주·익산·군산·김제 등 5개시와 부안·완주·고창 등 3개 군이 포함된다. 흔히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평야를 김제평야, 만경강 유역에 펼쳐진 평야를 만경평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진강은 정읍시 신태인읍 서쪽 1.5㎞ 내장산에서 발원하는 정읍천과 합류, 이평(梨坪, 배들)의 넓은 충적평야를 흐른 뒤, 호남평야 남부에서 김제시와 부안군의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때 동진강은 하운(河運)에는 별로 이용되지 않았으나 이평면 배들 평야까지는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배들평야 농민은 정읍천 아래에 보(예동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만석보(萬石洑)라 하였다. 만석보의 남는 흔적은 신태인에서 이평으로 가는 가까운 지점에서, 정읍천과 동진강 건너는 다리 옆에 있다. 필자는 이 길을 중학교 다닐 때 3년 동안 매일 그곳을 바라보면서 다녔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롭게 보를 쌓았다. 이 때문에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이 피해를 입었다. 조병갑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두말, 나쁜 논에는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은 봉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시 전봉준은 배들평야를 중심으로 인근 10여 부락의 풍물을 동원하여 그 중심지가 되는 말목장터에 사람을 모아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필자는 말목장터에 있는 이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집에서 2km 정도 황토길 거리에 그 학교가 있다. 말목은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이다. 1894년 1월 10일 밤 동학농민군(고부 농민봉기)이 예동 마을(이평면 소재)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전봉준 등 수천 명이 모여 합세한 곳이다.

당시에 군(郡)내의 중심지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농산물 거래시장이 섰다고 하는데 그 장은 일제 강점기까지 내려오다 없어졌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 곳 말목장터에 모였을 때 전봉준이 감나무 아래에 서서 당시 고부구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을 설명하고 고부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초등학교 다닐 때 이 감나무 밑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도 하면서 즐겁게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하였다. 전봉준은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호가 생겼다. 키가 아주 작으면서도 녹두처럼 야무졌다. 그는 나이 40에도 키가 1미터 50센티 정도였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 접주이며 세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한때 그는 말목에서 서당 훈장으로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한약방을 하기도 했다. 전봉준이 서당 훈장을 했던 곳에 이평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1927년 이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2020년 2월 7일까지 졸업생(89회) 총 9천523명을 배출했다. 1960년대 말 이 학교는 학생 수가 많아 콩나물 교실이었고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하였다. 학생수가 2천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같은 면에 몇 개의 분교가 있었으나 지금의 학교 교실에는 학생 수가 적어 적막감이드는 시골 농촌학교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교직원 25명(교무실 15명, 행정실 10명)과 학생 27명(유치원생 11명 미포함)인 초미니 학교이다. 녹두장군이 단명하지 않고 살았다면 그 자손들은 이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이 평면 지역에는 동학혁명기념탑, 황토현전적비, 전봉준 장군 고택, 고부 관아터 등이 있다. 역사적인 마을인 고향에 갈 때면 여기저기를 방문하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전봉준 장군 고택으로 필자의 집이 있는 창전 부락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조소리라는 마을이다. 황토현은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에 위치한 해발 33.5m의 황토로 덮인 조그마하고 붉은 언덕이다.

황토현 전적은 동학 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로 대한민국 사적 제295호이다. 황토재에는 그날을 기리는 기념비가 1963년에 세워졌다. 이름하여 ‘갑오동학혁명비’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황토현 전적지에 다녀갔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황토현에 누가 온다고 하면 학교 전체는 난리 법석이었다. 며칠 전부터 환경미화, 나무로 된 교실 바닥에 초를 칠하고 걸레질해서 뻔쩍뻔쩍하게 만들고, 화단을 정리하도록 전교생이 동원되었다. 이쯤에 장학사들이 학교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지만 교장보다 힘이 센 사람정도로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노동의 대가인지 이런 날에는 앙꼬(단팥)가 있는 빵을 한 두 개 씩 나누어 주었다. 일 년에 한번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학교에서 황토현까지 1km 정도나 될까! 몇 번 교실에서 황토현에 헬리콥터가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버스도 보기도 어려운 시기에 헬리콥터를 본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마 그 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청소하고 빵 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대통령이 갑자기 학교를 방문할까봐 그랬던 것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박 대통령이 교육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황토현 전적비가 친일 작가 작품이라는 지적으로 전봉준 장군 동상이 철거되고 재 건립될 예정이다. 갑오농민전쟁은 일찍부터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왔지만 그만큼 정권에 의해 왜곡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농민전쟁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곳마다 독재 정권이 세운 조형물들을 만나게 된다. 기념관 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에 ‘황토현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서 있다. 뒷면을 보면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큰 싸움터였던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다는 비문의 ‘전두환 대통령’이란 글자가 적힌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요즈음 언론에 전씨가 광주에 재판받으러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자과감이 든다. 사실 필자는 동학혁명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지만 몇 해 전부터 차분하게 동학혁명과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기술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 역사를 사실에 근거로 정확하게 기술되어야 하는데 사가(史家)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학자도 개인적으로는 결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로 인해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곧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 이해되고, 동시에 현재는 과거에 비추어 좀 더 분명히 이해된다. 이를 통해 역사는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켜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개구쟁이 막내아들 앞에서 가끔 이 노래를 불렀다. 어린 아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따라 불렀지만 음이 어딘지 모르게 좀 슬픈 노래인 것을 느끼곤 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새야 새야 파랑새야/댓잎 솔산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냐/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새야 새야 파랑새야/꽃 향기 맡고서 우리님이 오시면/너랑 나랑 둘이서 마중 나가자!"

지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가사와 곡조가 약간씩 다르게 불리지만, 127년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가 민초들 가운데서 끊어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어른들이 부르던 곡조가 가장 구슬픈 것 같았다. 어머니들의 자장가 소리가 알고 보니 이 노래였다는 술회도 있다. 이 노래는 만가(輓歌)란다. 만가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輓) 노래(歌)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동학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인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중들은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다.

전봉준은 어린 시절 키가 녹두콩 만큼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동학군의 대장이 됐을 때도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군대, '청포 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필자에게 이 노래도 자주 불러 주곤 하였다. 이 노래는 동학군들이 진군할 때 불렀다고 한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중략 이 노래는 갑오년(1894년)에 모든 것을 해치우자는 외침이다. 미적이다가 때를 놓쳐 을미년(1895년)을 흘려보면 병신년(1896년)이 돼 혁명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을미년 이후 신식무기를 앞세워 개입한 일본군에 밀려 농민군이 패배하고 만 게 못내 안타까워 농민들은 그렇게 ‘가보세(甲午歲; 갑오세)’를 외쳤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식에게 이런 노래를 자주 불렀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도 전봉준 장군과 함께 동학에 참여했다고 하였다.

최근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 전봉준 장군 동상을 찾았다.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전봉준 장군은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다. 누군가 이 동상 옆에 소주 한잔을 놓고 추모를 한 모습을 보면서 애잔한 생각이 들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말목에서 빈곤한 농군의 아들로 서당 훈장이었다. 가난했지만 당당했고, 불의를 보면 누구보다도 제일 앞장선 정의로운 사나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옛 부하였던 아전 출신의 밀고로 붙잡혀 나이 40세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요즈음 국제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와 갈등, 국내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어려움과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극심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127년 전 동학혁명 봉기에 참여했던 선조들을 생각하면 계절의 여왕 5월에 슬픈 마음이 크다. 풍운아처럼 전라도 지방, 아니 전국 산천을 떠돌며 순진한 백성들의 삶을 녹두장군은 지켜보았다.

태양 같은 가슴은 뜨겁게 활활 불탔고 부리부리한 눈이 샛별처럼 빛났던 전봉준 녹두장군이 살아있다면 현 시국을 보고 무어라고 외치고 있을까!

사리사욕에 갇혀있는 정치가와 기업가, 올바른 판단력이 부족한 사회 지도층 인사, 의식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불호령하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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