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최학림 선임기자] 담백한 언어로 차곡히 담은 ‘삶의 굴곡과 마디’
조성래 시인 일곱 번째 시집 ‘쪽배’

조성래 : 195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1984년 무크 <지평>, 1989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국에 대하여』, 『카인 별곡』, 『바퀴 위에서 잠자기』, 『두만강 여울목』,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 『목단강 목단강』, 『쪽배』가 있다. 최계락 문학상, 김민부 문학상을 수상했다. casscho@hanmail.net

 

삼월
 

바닷가 언덕에 황사가 찾아온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오리들 떼죽음하고 
학대받는 어린아이 야산에 버려진다 은밀히 
봄을 앞질러 항공모함 정박하면 
해안을 마취시키는 바다안개 
때 맞추어 절벽에선 동백꽃이 투신한다 
먼 황야에서 자살폭탄 피어나듯 
재선충 꽃 피우는 외로운 해송들
원로시인 두엇 꽃샘바람 속에 
지팡이 짚고 외길 떠난 뒤 
종달새 한 마리 마침내 하늘 꿰뚫는다
이틀 밤낮 비가 내리고 
목련처럼 영혼에 불을 켤 수 없어 
길게 휘어진 부둣가 철로
 


눈부시다
 

밀양 단장면 창마마을 
냇가 산책하다가 기이한 느티나무 만난다 
중턱이 꺾여 몸통은 거의 사라지고 
거죽만 조금 남아, 거기서 돋아난 가지에 새순 달고 
하늘하늘 생의 환희 노래하는 고목

그 곁에 가만 서본다 
꺼멓게 잔해가 된 고목의 몸 안
얼마나 많은 결이 있었는지, 그 결마다 
숨겨둔 곡절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많은 시간, 인근 주민들의 한가로운 낮잠
개구리 저녁 울음이 고여 있었겠지
봄날 허공에서 뛰어내린 빗방울들의 발자국 
그 맑은 감촉도 아롱져 있었을 거야
재잘재잘, 푸른 새소리도 그 안에 자라고 
오랜 계절 참으로 행복했겠지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먹구름 찢은 번개의 칼날이 
느티나무 몸을 세로로 쪼겠을 거야
그 충격으로 몸통의 ⅔는 죽고
⅓만 남아, 깊이깊이 신음했겠지
가물거리는 어둠의 긴 터널 지난 뒤
이윽고, 발바닥 간질이는 맑은 물소리에 깨어나
따뜻한 햇볕과 바람에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났을 거야

일생의 기록무늬 다 지우고
큰 고통 속에서도 다음 생을 마련한 느티나무,
초록 새순 내민 허공으로 
봄날이 눈부시다

 


물고기와 은행나무
 

중앙동 백년어서원 가면 나무에서 탄생한 물고기들이 천장을 헤엄쳐 다닌다 물고기들은 벽에서도 튀어나오고 쌓인 책들 속에서도 푸른 얼굴 내민다 가끔 주인이 외출하고 없으면 물고기들은 몰래 문 밖으로 나와 근처 인쇄소 거리 천천히 벗어난다 붕어빵 굽는 구멍가게 지나 찻집 많은 샛길을 자유로이 유영한다 이윽고 바다로 열린 대청로 입구 나서다가 차량 행렬에 막혀, 골목 안 은행나무 잎 속으로 은밀히 숨어든다 물고기들은, 그 잎들의 그늘에서 짝짓기한 뒤 나무 겨드랑이에 자잘한 알을 깐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둘씩, 셋씩, 다시 백년어서원으로 돌아간다



합천 영암사지에서
 

더 갈 데 없어
찾아온 폐사지

그래도 몰락은 없네 
돌조각처럼 깨진 사랑도 
땅속 금동불로 환생하든지 
하늘벼랑에 도라지꽃으로 피어나네 
모든 것 묻혀서 편안한 잔디밭
느티나무 한 그루 한낮 지키고 
초록 뻐꾸기 울음 그 안에 솟아나네
절터 안쪽 걸어 들어가면
돌거북 두 마리 허공 짊어지고 
앞산 넘으려고 앞발 쳐드는 몸짓!
나도 바위산 품고 때를 기다리며 
삼층석탑 추녀 끝에
푸른 기도 하나 매달고 싶네

아, 저 환한 
쌍사자석등!


하늘거울, 쪽배
 

우포늪 맑은 물에 쪽배 한 척 잠겨 있다
세월 놓치고 뒷전으로 밀려나 천천히 
물 아래 가라앉는 생의 한 부분 보여주고 있다
무엇으로 채우려던 욕심 비운 지 오래 
수초와 펄을 헤집던 삿대도 잃은 지 아득 
삭은 관절 편안히 수면에 내맡기고 있다
생각하면 지난날들 모두 뜬구름
한 몸 고요히 해체하여 물로 돌아가는 것을
고물에 달라붙는 왕성한 물풀
생이가래도 이젠 생광스러울 뿐이다 
한랭전선 떠메고 올 철새 기다리며 
시린 물낯의 하늘거울에 담긴, 환하게 굴절된 
잎 진 나무들 물구나무선 그림자 
쪽배 빈 가슴에 또 다른 풍경 매단다 

……이쪽 언덕에서 유심히 지켜보면
쪽배가 가라앉는 속도만큼, 기척 없이
저문 산이 저쪽으로 자리를 비켜 앉는다
 


이 몸, 낙타
―새벽녘 눈 뜨면 나는 사막에 누워 있다
 

새날이 밝았다
모래 털고 일어나
또 오늘 하루를 건너가자
등엔 혹보다 무거운 짐
그 위에 맹렬한 태양
운명적으로 그어진 지평선 가로질러
딸랑딸랑, 대상 행렬 만들어 
저 너머 한 세상 꿈꾸며 가자

꾸르륵, 꾸르륵 
길은 뱃속에서 삐져나온다
한 번 걷기 시작하면
지친 몸 가도 가도 하염없는 모래,
속눈썹 콧구멍에도 모래는 서걱댄다
터덜터덜 언덕 하나 넘으면
다시 펼쳐지는 끝없는 사막,
제 그림자 밟고 허기 참고
뜨거운 길 위에 숱한 발자국 찍어도
몸 둘 곳 언제나 지상 끄트머리

그래도 저물녘 
저 너머 어디쯤 오아시스 만나
짐 부리고 퍼질러 물 마실 때까지 
빵 먹을 때까지
가자, 이 몸 낙타야
목마른 시간 너머 팍팍한 능선 너머 
오늘 하루 또 살아내야 하는 
나를 견디며 걷자
 


팔만대장경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어느 날 눈 속을 걸어 
해인사 장경판전에 닿기까지
거기 닿아, 지친 몸 내려놓고 시린 마음으로
경판의 문구 하나 돋을새김하기까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눈 내리는 소리에 귀 열고
내가 누구인지 생사의 너머 어디인지
몸 바뀐 글자들 경판에서 더듬다가
문득, 내 안의 큰 고요 대면하기까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아아 부처님 가피로 나라 지키려 했던
고려인들 발원으로 세워진 법보
저 얼마나 장엄한 바다인가
무량한 눈밭인가
아승기겁의 인연 밟고 오시어
위없는 깨달음 얻으신 이의, 그 가르침의
아함경 방등경 반야계율 법화열반
화엄부 낱낱이 판각되어 있도다
설해도 듣지 못하고 직지해도 그림자만 보는
우리 망상 부수려고 저 많은 방편들
밭이랑에 씨 뿌리듯 새겨 두셨도다 
우리가 어느 날 눈 속을 걸어
가야산 해인사 장경판전에 닿기까지
거기 닿아, 경판의 말씀 하나 씨앗 받아 품기까지
내 안의 보물은 만날 수 없다


감전
 

어디서 날아왔을까
오줌 누는 화장실 창밖 
고목에 붙은 큰 오색딱다구리 
검고 흰 바탕에 화려한 주황색 
나무에 세로로 달라붙어 콕콕콕 
콕콕콕콕 
먹이활동 한창이다
마음만 먹으면 저놈
생나무 구멍도 시원히 뚫는다는데
고목에 붙어 콕콕 쪼는 일
아무 일도 아니다 
콕콕콕 콕콕콕콕
그저 신명난 부리 공이질 
방아타령보다 절창이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한 구멍도 제대로 못 뚫은 나
괜히 민망하다

시선 빼앗겨 
숨죽여 얼어붙은 듯 
황홀한 순간,
어느새 내 방뇨도   
감전되고 만다

 


대기초등학교 

 

황매산 아래
교원이 부족한 벽지학교
육중한 바위산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임 없이 넘기는 한 학기 
배고픈 오후 시간을
앞산 뻐꾸기가 달래 주었다
부잣집 아이 몇은 파랑새 찾아
일찌감치 도시학교로 전학
가난 속에 남은 동급생들만
농사 배우며 구슬치기로 세월 보냈다 
머리는 기계총 까까머리
무논 개구리보다 천덕꾸러기였다
여름이면 육성회장집 보리 베기 
겨울이면 난로 땔감 찾아 야산 누비며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맣게 끼었다
우리도 어서 어른 되어 
먼 도시로 나가자고 콧물을 훌쩍
바람개비 돌리며 운동장 마구 달렸다
간혹 어른들은, 천황재 넘어온 산사람들
가회 지서 습격하던 무서운 얘기 했지만
아이들은 충효사상과 반공교육 속
바위산 바라보며 야물어갔다 

나도 그 아이 중 하나로 자라났다 
 


하늘통신
 -아내에게
 

헬레나
그대 사는 하늘 편안한가
흘러가는 가랑잎 따라 계절은 서쪽 강 건너고
푸른 달빛 자주 아파트 유리창 적신다
그대 이별하고 지상의 빈방에 갇힌 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우리 손때 묻은 성경과 묵주 
여전히 책상 위에 모셔져 있건만
집 안의 모든 시계 멈춰버렸다
그대 아끼던 화초들도 몸 둘 바 몰라 
시름시름 앓다가 시들고 말았다 
하늘이 맺어준 것 사람이 끊지 못하리라
그 말씀 받들며 살려 했는데 우리 사랑 이미
행성 저쪽으로 빗금 긋고 사라졌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창밖엔 겨울바람 나뭇가지에 매달려 울어도
나는 도무지 무관해서
밤늦도록 눈물 없이 홀로 앉아 있다
독한 술 마시며 

 

담백한 언어로 차곡히 담은 ‘삶의 굴곡과 마디’
조성래 시인 일곱 번째 시집 ‘쪽배’

 

“시 언어들은 비워야 하고

말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

쉽게 읽히는 시 쓰기 정진

근년의 아픔 담담히 풀어

조성래(62)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쪽배>(산지니)는 아주 담백하고 슬픈 시집이다. 요즘 어렵게 시를 쓴다고 야단들이지만 그는 쉽게 읽히는 시를 쓴다. 하지만 그 언어들이 가볍지 않은 것은 삶의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시 언어들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야 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태도가 읽힌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일어난다. 시인은 근년 아픔을 겪었다. ‘허공’이란 시를 보면 요양병원에서 ‘외동딸이 자기를 데리러 온다고/ 눈 내리는 허공만 하염없이 가리킨다’는 노파가 나오고, ‘오래 투병해온 노파의 딸도 또한/ 병 깊어 하루하루 여위어간다’(61쪽)고 했는데 노파와 외동딸은 그의 장모와 부인이다. 시인과 같이 살던 두 사람은 모두 근년에 세상을 떠났다.

투병하던 아내 옆을 지키는 일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운명에 설정된 장치가 무엇인지/ 암호가 무엇인지/ 왜 갑자기 세상은 흑백필름으로 흐려져/ 나를 먹먹하게 하는지/ 어찌하여 지상의 자물쇠는 나를 병동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지’(‘덫’ 중에서). 그 아내가 흔적도 없이 훌쩍 떠나간 것이다. ‘나에게 구원 요청하다가/ 어느 아침, 흔적도 없이 잘려나간 그녀/ 내 사랑 벚꽃나무’(‘비가’ 중에서).

조 시인은 1984년 무크 <지평>, 1989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고교 국어교사로 34년간 봉직한 학교에서 올 초 정년 1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다. 그는 대금을 멋들어지게 잘 불고,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남 합천 출생으로 불경을 줄줄 외는 천주교 신자다. ‘텅 빈 마음으로 대금 불기 좋지/ 굴곡 많은 인생살이 말 못할 사연 많아’(‘대금’ 중에서). 그는 젊은 시절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가 힘들어 곧바로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어느 날 눈 속을 걸어/ 해인사 장경판전에 닿기까지/ 거기 닿아, 지친 몸 내려놓고 시린 마음으로/ 경판의 문구 하나 돋을새김하기까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눈 내리는 소리에 귀 열고/ 내가 누구인지 생사의 너머 어디인지/ 몸 바뀐 글자들 경판에서 더듬다가/ 문득, 내 안의 큰 고요 대면하기까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팔만대장경’ 중에서).

‘내 안의 큰 고요’는 우리가 떠나온 고향, 마침내 이르러야 할 안식처일 것이다. 그곳을 향해 가는 것이 삶의 길이다. ‘아무리 애써도 단숨에 넘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장고개 (중략) // 세상 길 가도 가도 아슬한 고개’. 문현동과 우암동 사이에 ‘장고개’가 있는데 그런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가자, 이 몸 낙타야/ 목마른 시간 너머 팍팍한 능선 너머/ 오늘 하루 또 살아내야 하는/ 나를 견디며 걷자’(‘이 몸, 낙타’ 중에서). 아, 우리는 사막을 걷는 낙타인 것이다. 그 험로에서 ‘집도 어찌 그리 가난하던지/ 이 골짝에 시집 와서 참 많이 굶었니라/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묵을 거는 없고’로 이어지는 ‘나무실 합천이씨’라는 그의 ‘어머니 경전’을 새기고는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홀로다. ‘그대 이별하고 지상의 빈방에 갇힌 나’(‘하늘통신’ 중에서) 혹은 ‘천천히 물 아래 가라앉는’(‘하늘거울, 쪽배’ 중에서) 늪에 잠겨 있는 쪽배 같은 신세다. 눈물 없이 독한 술도 마시면서 그는 말한다. ‘먼저/ 천상으로 올라간 그대/ 잠시 내려와/ 숲에서 한나절 놀다 가면 안 될까,/ 노랑부리 지저귀는/ 우리 새끼들 함께!’(‘가족’ 중에서). 고향과 도회지 사이, 합천 언저리에 폐사지인 영암사지가 있다. ‘나, 한 그루 은행나무로 물들어/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온몸 황홀하게 물들어/ 그대 마음 어귀에 놓일 수 있다면/ 가을저녁 폐사지에서 깊은 적막/ 홀로 밝혀도 좋으리’(‘폐사지에서’ 중에서). 그는 지금 아내가 떠나고 없는 삶의 폐사지에서 시로 수행 중이다.

시인은 최계락문학상, 김민부문학상을 수상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출처 :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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