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새순

 

-정성수鄭城守-

 

봄 햇살이 따끈해서 앞마당에 나왔는데

화단 여기저기서 새순이 뾰죽뾰죽 올라온다

작설雀舌이다

그러니까 저것은 참새 혀 같은 것인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니

재잘거리던 참새소리 들린다

귀 열고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늘

참새 혀 같은 새순을 보니

함부로 입을 놀리며 한 세상을 살지 않았나

뉘우침 같은 것이 정수리를 쿡~

쥐어박고 간다

참새 앞정강이도 베껴 먹는다는 칼 품은 세상에서

세치의 혀 다독이면

내 혀도 두꺼운 삶의 껍질을 밀어 올릴 수 있을까

작설 같은 새순처럼

생각하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나

혹 모를까

 

□ 시작노트 □

 

작설은 새의 혓바닥이라는 뜻입니다. 작설차雀舌茶는 차의 잎이 참새 혀만큼 자란 곡우穀雨 전후로 채취하여 만든 것입니다. 진각국사께서 송광사의 보조국사 영정을 모신 방장실에서 어린 시자를 시켜 눈을 퍼다 가 소반 가득히 쌓아놓고 요천을 만들어 고인 설수를 끓여 작설차를 달여 마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만하여도 눈 내리는 골목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를 안주 삼아 정종 대포 한잔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참새구이는커녕 그 많던 참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기가 쉽지않습니다. 그것은 농약이 나오고 그 농약이 참새들의 먹잇감인 풀벌레를 죽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참새 앞정강이도 베껴 먹는다는 칼 품은 세상에서 가끔 참새대가리가 되어 골치 아픈 세상을 잊고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인지 참새에게 묻습니다.

 

 

잔소리

 

-정성수鄭城守-

 

당신

그 놈의 술 좀 그만 먹어요. 담배도 작작 피고

뱃살도 좀 빼고

눠서 뒹굴기만 하지 말고 운동 좀 하세요

일찍 좀 들어와서 애들하고 놀아주면 어디가 덧나요?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

 

여보, 제발

가끔 우리 친정에도 전화하고 아버님께도 자주 찾아뵙시다

그리고 운전할 때는 살살해요 무서워 죽겠어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외식하고 영화 한 편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바가지가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바가지를 살살 긁는다

 

아내가 친정에 갔다

아흐~

오늘은 살 것 같다

 

□ 시작노트 □

 

횟집 수족관에 횟감으로 사용될 물고기들이 많습니다. 물고기들 사이에서 상어 한 마리가 물고기들을 쫓아다니는 광경을 보셨습니까? 이는 물고기가 오래 살도록 긴장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물고기들이 상어한테 먹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피해 다녀야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수족관 내에서 일찍 죽는 것은 태만하고 긴장이 풀어져 제 맘대로 놀다 보니 운동량이 떨어져 일찍 죽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있으면 항상 움직여야 하고 긴장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남편이 아내 앞에서 긴장하지 않습니까? 아내를 가진 남자는 평생을 긴장하며 항상 움직일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나태해질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들은 오래 삽니다. 통계를 보면 혼자 사는 남자 보다 아내와 함께 사는 남편의 수명이 길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내들은 게으르고, 잔소리조차 싫어하는 남편들을 가만두지 않는 수족관의 상어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아내란 이름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나오던 그 순간에 받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 여자를 만났는데

 

-정성수鄭城守-

 

세월이 가도 변치 않는 것이 사랑이다. 너는 말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다

세월이 가도 변치 않는 것은 그리움이다

 

그 여자를 만났다

몽매에도 그리운 여자를 만났다. 통유리창가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찻잔을 잡은 손등에 검버섯이 피었다

 

나는 그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그 여자는 쓸쓸히 웃고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내 맘 속에서 사무치던 여자. 그 여자를 만났는데

왜, 나는 울고 싶은가

 

□ 시작노트 □

 

‘첫사랑!’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그것은 환절기에 걸리는 감기처럼, 은근히 와서 오래토록 힘들게 하는 플라토닉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품은 채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랑. 감수성 예민한 여성들이야 말로는 다할 수 없겠지만 남성들의 첫사랑도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번뿐인 인생에서 모든 걸 내던져 버릴 정도의 강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플라토닉한 사랑은 그 순수한 만큼이나 여운이 깁니다. 영원히 가슴 한켠에 감춰두고 조금씩 삭혀내는 그런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애틋한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이 남자가 첫사랑이기를 바라고 남자에게는 이 여자가 나의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닐는지? ‘내 첫사랑은 바로 당신이야’ 이 말 한 마디가 세상의 모든 죄업을 덮습니다.

 


발 한 짝

 

-정성수鄭城守-

 

열심히 걸어왔을 것이다. 이 신발

한 때는 발바닥 불나게 뛰기도 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신발 한 짝은

버림을 받고 어디선가 질질 짜고 있거나

아니면 한 짝을 제 발로 차고는 가슴을 치고 있겠지

저 신발 한 짝

 

보아하니 쇠푼이나 먹은 것 같다

등판에 붙은 상표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부잣집 노랑머리가 잠시 폼을 잡은 것인지

가난한 집 큰아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세상의 길을 끌고 다닌 것인지

지금은 다만 쓰레기통에서 서러운

 

한 몸이었던 짝과 이별을 하고 속창아리까지 보여주고 있는

반쪽이다

알고 있다. 생이 끝났다는 것도

발바닥 찍었던 길 또한 다 지워졌다는 것도

 

□ 시작노트 □

 

1960년대 신발은 검정고무신입니다. 친구들의 신발이 전부 검정고무신이기 때문에 새 신발을 사고 신발에 표시를 하지 않으면 내 신발인지 친구들 신발인지 구분이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신발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신발들 중에서도 내 신발을 용케도 찾아 신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발을 사주면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든가,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 방으로 들어갈 때 신발코를 마당 쪽으로 돌려놓는다든가, 발이 커서 큰 신발을 신는 사람을 도둑놈 발이라던가’ 속설은 많습니다, 이런 속설은 맞는다는 생각보다 주의하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큰 것입니다. '제2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편안하고 기능적인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구두를 살 때는 발이 가장 길고 넓어지는 저녁 시간을 택해야 합니다. 또 구두 뒷부분의 밑창과 뒷굽은 딱딱해야 체중이 고루 실려 통증이 없습니다. 신발 한 켤레를 사는 데도 과학이 필요합니다. 젓가락이 두 짝이 있어야 젓가락이듯이 신발도 두 짝이 있어야 신발입니다. ‘댁의 짝은 안녕하신가요?’

 

 

겨울밤의 별

 

-정성수鄭城守-

 

호수에 밤하늘이 쏟아져 캄캄하게 얼었다

얼음 위에 박힌 별들이

수정처럼 빛난다

길을 가다가

눈은 내리지 않고

호수가 쩡쩡 소리 내어 울 때

겨울밤의 별들은 그대의 가슴속에 떠 있었다

 

사는 일은 겨울밤을 건너가는 일이냐고

묻는 그대에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양심을 팔아먹는 일이었다

가난의 끝은 걸어왔던 길보다 더 먼

길 위에 있다고

가끔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한다

밤새도록 휘파람을 부는

겨울밤의 별들은 그대의 가슴속에서 더 가난하다

 

□ 시작노트 □

 

밤하늘 별들도 시리도록 푸른빛을 품고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봅니다. 헐벗은 나무는 스치는 바람을 붙잡고 삶이 서러워 꺼억 꺼억 웁니다. 찬바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 와 뼛속 깊은 곳 까지 스멀스멀 파고듭니다. 호롱불마저 졸고 있는 이 밤. 별이 얼어 마당에 떨어지고 윗목에 떠 놓은 한 사발의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작은 거울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별을 안고 잠들고 외양간의 황소는 눈만 껌뻑이며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멀리 개 짖는 소리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룹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이면 별똥별 떨어지는 소리, 간간히 몰아치는 바람소리, 뒷산에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소리 소리들. 인연의 끈을 끊고 한숨 짖는 소리 천지간에 진동 합니다. 이렇듯 당신이 그리운 밤에는 밤하늘 별을 봅니다. 겨울밤 총총 별이 하나같이 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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