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미국은 1776년 13개 주州가 연합하여 독립한 나라이다. 건국 초기에 미국사회의 지배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man is born equal.”고 말하였다. 자유를 강조하는 나라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 때 대통령이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한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년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의 인권을 주장하다가 흉탄에 쓰러졌다. 35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나의 전 세계 친구들이여, 미국이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말고 우리가 다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라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 사상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오늘 날처럼 개인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자유시장경제로 발전할 수 있을까?

박동운 교수님은 우리나라 대학에서 시장경제 강의를 처음으로 개설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실천적 측면인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나라를 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이라고 줄기차가 강연이나 언론을 통해 주장하였다.

2010년 말경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유무역·자유시장으로 잘 사는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박 교수님은 한미 FTA를 반대한 장 교수의 반시장적·좌파적 주장에 자유 시장 경제 주의자로서 많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했다. 장 교수의 책을 읽은 후 한 달 10일 만에 ‘장하준 식 경제학 비판-그가 잘못 말한 23가지’라는 390쪽짜리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문화교통관광부의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박 교수님은 30권 이상의 저서와 많은 논문과 칼럼을 통해 자유시장경제의 중요성과 좋은 정책인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믿을 가졌다. 경제학자의 책 한권이 정권 변화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경제학도로서 올바른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깨우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튼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를 읽고 자유시장주의가 되었으며 어둠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 느낌이었다고 한다.

박 교수님은 젊은 20대 초반 헤밍웨이, 바이런 등을 읽으면서 문학도 꿈꾸었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 후 어느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으나 그 대학의 비리를 규탄하는 모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2학년을 마치고 퇴학당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모교 대학신문사 일을 하였다. 그 무렵 그는 한국 현대사와 발전경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항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周知의 事實이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미국 오클라호마 한인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이민자가 처음 공항에 도착해서 누가 픽업하느냐에 따라 처음 사업 종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세탁소 하는 사람이 픽업하면 초기 이민자는 세탁소, 그로서리를 하면 그로서리를 활 확률이 무척 높다는 것이다. 박 교수님은 1966년 6월 말경, 한글과 한자 이름이 같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만났다. 만남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가정교사를 두고 새뮤얼슨의 『경제학 3판』을 공부하신다네.” 그 논설위원의 말 한마디가 문학도를 꿈꾸던 본인을 경제학도로 바꿨다고 했다.

어느 전자 상품 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고 했지만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 것이다. 전남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1969년 미국연방정부 장학금을 받고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가 있는 하와이대학교에 유학해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문학을 공부한 박 교수님은 수학을 많이 공부해야 하는 미국식 경제학을 공부하느라 코피를 흘리고 잠을 줄여가면서 힘들게 공부해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북으로 간 큰형 관련 연좌제緣坐制와 처음 입학한 대학에서의 비리 규탄 경력이 미국 유학을 접어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이 그를 도왔다.

필자의 대학 은사님으로서 40년 가까이 박 교수님과 많은 학문적인 토론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다. 큰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정이 많으신 교수님은 눈시울을 붉히곤 하여 슬픈 마음이 컸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7년 큰형은 20살의 나이에 혁명가의 꿈을 품고 북으로 갔다. 18세 때부터 큰형은 만주 벌판을 휘졌고 다니기도 하였다.

박 교수님이 20살이던 해 어머니는 큰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다. 몇 년 전 박 교수님은 큰 형의 핏줄을 제3국에서 만났는데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조카의 비참한 삶을 통해 남쪽에서 태어나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즐기던 테니스를 2013년 까지 정기적으로 했다. 필자에게 테니스를 하는 것이 체력 증진은 물론 눈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종종 이야기를 하였다. 테니스 할 때 빠른 공에 대처하기 위해서 눈을 많이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나이가 들어도 안경을 끼지 않고 시력이 젊은 사람과 같다고 자랑하였다. 항상 낙천적이고 건강하신 교수님께서 2012년 12월 초 테니스를 마치고 샤워하면서 목 부위에 두 개의 몽우리를 발견하였다. 그 후 전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셨다. 몇 년 동안 악성림프종이라는 암으로 고생하시다 2020년 11월 27일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에게 항암 치료 후 5년이 지나서 완쾌됐다고 좋아하시면서 환한 웃음을 보여주셨는데.

필자는 2020년! 학문적으로 만남과 토론을 가장 많이 한 박 동운교수님과 사회생활에 방향등 역할을 해 주신 곽 상만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자유주의 정신을 심어 주신 분과 올바른 삶의 이정표를 만들어 주신 분들이었기에 슬픈 마음이 무척 컸고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어머니, 2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옛날에는 친구와 지인들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다.

그러나 요즈음은 친구들이 일찍 세상과 하직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다. 파라과이에서 정부 자문관을 할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했다. 서울에서 파라과이 거리가 18,504 km, 4만 6,260리이다. 비행기 탑승 시간만 30시간 이상이 먼 거리이다. 파라과이에 사는 동안 나와 가깝게 교류하는 사람들 중 집안 식구들은 평생 성실하게 살았으니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있겠지”? 친구들은 “남철이가 오늘 이 술자리에 있었으면 좋을 텐데”! 친척들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 “남철이가 잘 살겠지”?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죽음에 있어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게 없을 것이다. 다만 살아있으니 언제라도 전화나 문자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 말고는.

박 동운 교수님은 암 수술 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깊게 했다. “나는 내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걱정을 버리고, 남을 칭찬하고,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자고. 그러나 반나절도 가지 못하고 있다고 .”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필자가 700쪽에 달하는 단행본 『국제이주와 외국인 노동정책』을 발간했을 때 코로나가 잠잠하면 제자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사준다고 약속하셨다. 집필하던 책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좋아하셨는데 원고가 컴퓨터 파일에 주인과 함께 영면하고 있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대한민국 가꾸기』책을 암 투병 중에 섰다. 이 책 서문에 “후속편도 고려하고 있다. 쉼 없이 발전해 가는 대한민국.” 숨을 거두시기 며칠 전까지 마지막 내용을 컴퓨터 자판과 씨름하셨는데!

인간에게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정된 삶이 오늘 하루뿐이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면서 성실하게 살자고 다짐해 본다.

자주 만나 식사를 위해 만났던 교대역 마트 파라솔 앞을 지날 때는 금방이라도 ‘이 박사 빨리 와, 뭐 먹을까. 오늘은 내가 살게라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실 것 같아 슬픔 마음이 엄습해 온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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