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섬

 

울타리가 넓게 쳐진 섬이 보인다. 울타리 너머 파도가 넘실거리는 경계의 공간을 탈출하려면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같은 절박함이 필요해 보인다. 인권이나 생명의 존중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섬은 숲으로 쌓여 모든 사물이 가려진 채 밖에서는 그곳 실상을 알 수 없다. 마치 어둠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과 공간마저 사라져 버린 듯하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섬에 갇힌 사람들의 억울한 상흔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한센인을 강제 이주시켜 격리 수용한 섬은 울타리가 견고하다. 육지에서 떨어져 그들만의 기억이 정지된 채 물 위에 정박해 있다.

눈썹이 없고 녹내장 탓에 흰 눈동자만 남은 한 사내가 나를 시험 하려는 듯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가락은 피부 궤양으로 검지 한 마디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와 악수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악수한 손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마음은 손을 빨리 씻고 싶은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이곳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감금·체벌로 삶을 짓밟힌 한센인의 터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평생 치료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호접몽(胡蝶夢)을 꾸던 곳이기도 하다. 육신조차 안식처를 찾지 못했던 검시실 위 불빛의 긴장감이 내 목을 조여 왔다. 극심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며 영혼의 밑바닥에서 고독과 절망을 끌어안고 단종대(斷棕臺)에 누웠을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둠의 혼령을 앞세워 지옥 같은 빗장이 걸린 쪽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벽돌의 담장으로 쌓인 감금실은 폐허처럼 쓸쓸하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배가 지나가면 파도가 일 듯 자신의 상흔에 한탄이 일었다. 감시원의 예리한 눈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멈추고 그들 내면에 쌓인 슬픔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극한의 환경에서 자유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혹한 현실에 무기력하게 길들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에워쌀 때 감독관의 폭언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눈물의 섬은 삶의 욕망을 꺾어 모은 곳이다. 그들이라고 왜 자신의 삶을 부정하며 인생을 새롭게 고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원한의 굴레를 눈물의 회한으로 말끔히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봄꽃이 만개하듯, 억압된 환경에서 차단의 울타리를 건너 자유를 찾고 싶은 간절함은 허상의 세월이 되었다.

오래된 교도소 철문은 굳게 잠겨있다. 섬을 탈출하다 걸리면 섬 안의 작은 교도소에 더 단단히 가두었다. 햇살이 비치는 쇠창살로 덧대어진 문이 열리며 감독관이 아침의 정적을 열었을 것 같다. 인간의 힘으로 하릴없는 운명의 사슬에 포박된 채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 빨간 벽돌 건물 교도소 마당 양쪽은 철조망이 이중으로 막고 있다. 교도소 정문 아치(arch)에는 ‘희망의 마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글귀의 허탈감은 목숨을 담보로 쇠창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음에 포기하고 만다. 인권을 유린당한 그들의 희망은 이미 허공으로 사라졌다. 창살 틈새로 눈부신 구원의 햇살이 사발 만한 크기로 비친다. 삭막한 섬에 도착한 바람이 교도소 벽을 어루만지며 슬프게 운다. 해변 한쪽 허름한 건물은 그들이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장소, 화장터다.

모든 육체는 신이 빚어낸 걸작이다. 조물주는 왜 한센병이라는 것을 만들어 고통 받게 하는 걸까. 삶을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신은 그저 묵고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람의 고초를 만들어 무엇을 남기고 그것으로 무엇을 깨 달게 하려 했던 걸까?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한센인의 삶이 꺾여 고통의 시간은 먼지처럼 쌓였다. 한센병을 원망하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잠 못 들었을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의미 없는 하루의 삶도 견뎌야 한다고 철문 안으로 들어온 어둠이 속삭인다. 신이 있다면 분명 나를 이곳에서 구원할 거라는 희망으로 꿈을 꾸며 드린 기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빵 한 조각 보다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말 한마디가 더 소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감시의 눈초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에 하늘을 본다. 나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더 견뎌야 그들의 어깨 위에 얹힌 먼지를 품을 수 있을까.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도 사랑을 나눠 가진 그들은 내 깨달음의 경지다.

우리는 자라면서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웠을까! 정작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나’만을 위한 원리를 배운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본다. 상생을 배운 것이 아닌 승자만을 위한 교육이었음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살아 볼만한 세상’은 가슴으로 안고 손으로 잡는 것이다.

소록도 곳곳, 그들의 상처가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형체는 고통의 발원지이나 마음은 곱고 순진하며 눈은 숭고한 정신을 배웠던 소록도. 그곳은 제힘으로 존재 가치를 섬기며 인생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까. 용서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평생 마음의 수련이 필요함을 마음으로 새긴다.

 

혼주와 상주

 

사람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고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결혼하면 모두가 축하하고 죽음을 맞으면 조의를 한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모이는 대부분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 친구 아들 결혼식 모바일 청첩장이 도착했다. 경조사는 참석해서 축하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 코로나19 후의 새로운 문화는 과도기 상태다. 코로나19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대면 시대가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기에 사회 체계나 문화도 이에 맞춰 바꿔야 할 것 같다.

대표적인 게 경조사(慶弔事)에 부고 문자와 결혼식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면서 계좌번호를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코로나19의 상황을 고려해 참석하지 못하면 마음이라도 전하라고 경조사에 계좌번호를 찍어서 보낸다. 경조사의 계좌번호는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위한 혼주나 상주의 배려다. 반면에 어떤 이는 “청첩장이나 부고장에 계좌번호를 찍는 것은 속 보이는 행동이며 부고의 안타까움이 계좌번호를 보는 순간 사라진다.”라며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코로나19를 고려해 계좌번호 보내기는 상대방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가장 현실적 방법이 아닐까. 어쩌면 굳이 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직접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다.

2020년 11월에는 거리두기 1.5단계라 마스크를 하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12월에는 2.5 단계로 조정되어 대전에 사는 사촌 동생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집합 금지 기간이라 송금 후 전화로 축하하고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했다.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는 혼주와 상주를 만나게 되면 미안해지기 마련이다. ‘어때, 코로나로 생긴 문화인데 그냥 송금해도 이해하겠지.’라는 생각은 새로운 문화의 정착 과정이다.

장례식에는 가족들과 친인척 외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분위기다. 고인의 운명(殞命)에 마땅히 명복을 빌어야 하지만, 새로운 문화에 맞게 조의금만 송금하는 이의 마음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참석하지 못하고 조의금만 송금하는 마음에는 미안함과 애도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정상 참석할 수 없는 축하객과 조문객은 “봉투만 보내면 이익이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혼주와 상주는 이익을 위해 경조사를 알리는 것은 아니다. 펜데믹 시대에 우리는 현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 참석하지 않고 송금만 하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올해 1·2월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600~1,000여 명 넘게 발생했다. 혼주는 예식을 미룰 수 없어서 예정된 날짜에 청첩장을 보낼 수밖에 없다. 결혼식에 참석하자니 코로나가 불안하고 불참하자니 지인이 섭섭해할까 걱정이다. 혼주와 상주는 경조사에 참석하면 아군이라 생각하고 불참하면 서운함을 감출 수 없다. 당연히 예식에 참석할 줄 알았던 지인에게서 불참 의사를 밝히면 혼주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혼주는 ‘당연히 참석하겠지.’라고 믿었기에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나.’라는 미묘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혼인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축하를 받는 것이 먼저인지 축하하러 오지 않더라도 축의금을 받겠다는 것이 먼저인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코로나19로 사회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꼭 참석해서 봉투를 전달해야 하는 고정관념과 예의나 도리를 꼭 지켜야 하는 관습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코로나19의 변수에 참석할 수 없다면 전화해서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면 혼주와 상주는 이해해 줄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서로 불편하지 않게 새로운 분위기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코로나19 전파 장소가 되면 혼주와 상주는 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계좌번호 보내기는 혼주·상주·하객·조문객 모두 부담 없는 방법이 아닐까. 며칠 전 상주 본인이 모임방에 “코로나19가 극성이니 조문은 오지 말라.”라고 글을 올렸다. 배려해서 통지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조문하지 못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 친구 참 쓸쓸하겠다.

 

수필가 손민준
수필가 손민준

 

 

 

 

 

 

 

 

 

 

‧ 등단 : 공무원 문학 신인상 
‧ 수상 : 인창문학대상 최우수상 외
‧ 저서 : 수필집 흰 눈 속에 꽃이 있다 외
‧ 전) 구리시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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