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야기


노란꽃 머리에 꽂고 뛰어다니던 밭고랑 아낙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어제는 뒤집기를 했으니 여린 씨눈 걸어 나올까

그저 둥글둥글 굴러가고 있어 보이지만
줄무늬는 아무렇게나 그어지는 게 아니다

온밤을 지새우며 배꼽을 지키는 탯줄의 힘으로 
졸리는 눈꺼풀을 뒤집으며 
빤질거리는 야행의 길을 걷고 걸어서
익어 가는 씨들

흐리게 우는 날은 죽어야 된다는 
밤공기 서늘한 수박 안은
붉은 핏물이 온몸을 적시는 고행의 현장
그제서야 빠져나오는 까만 줄무늬

무수한 볕날 사이를 맨발로 달리고 달리던
각을 세우고 살아온 지난여름
가마득히 땡볕 하늘을 지나야 단맛 수박이 열린다


늦깎이 2


넘실대는 바다 아래
물고기도 해초도 없는 내 방
굼벵이 한 마리가 긴다
벌거벗고 꾸물거려도
매듭 하나를 꼭 물고
별을 새며 가는 곳

은은히 돌고 돌아
미끄러지듯 빨려 드는 
별이 가득한
은하수 나라

떨어지던가 해도
어딘가에 걸려
바동거리고 있던가 해도
별이 늘 반짝였다


독버섯의 향기


독버섯이 솟아오른다
올라오는 연한 것
소리도 없이 올라오는 것
순식간에 몸을 키울 것이다

쪼개 보면 안다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감성곳
깊은 수면 위로 맑은 방울 떨어지는 소리

질기게 올라오는
멀쑥이 맨머리로 치고 올라오는
버섯의 생각이 옳았다 
죽어라고 올라오는 버섯이 옳았다
버섯의 꼭대기에서 오히려 내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떨어지는 고백 
척추에서 시작한 논리적인 뼈 마디마디가 
틀린 거였다


붉은 가방


떠돌이 게는
끊임없이 거품 물고 밀려드는 파도 
덮어쓰고 하얗게 덮어쓰고
마침내 뒤집어져 
새 세상 하늘바라기

점점 빠져드는 모래 숲
오돌오돌 속삭이며 달라붙는 모래알
푸른 땀에 끈적거리는 가슴팍아
돌아올 수 없는 길아

던져 버린 생 가운데로 가방 하나 메고 간다
번쩍이는 보석함 높이 들고
붉은 다리 성큼성큼 걸어간다


여름밤 산길


이슥한 여름밤
벌레들이 치열하게 울고 있으니
더운 영혼 메고 가는 소리

짧은 다리보다 더 길게 어디로 가려는 걸까
딱딱거리며 달아오르는
늦게 질러대는 소리

가시 돋친 솔잎
입천장을 찌르고 지나가면
질겅질겅 씹고 있는 것이고

솔향기 머무는 시간
산이 삐거덕거리도록
홀로 밤 산길을 걷는 것이고

시인 유형
시인 유형

 

 

 

 

 

 

 

 

 

□ 프로필 □

‧ 등단 : 지필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저서 : 시집 月幕 외 다수
‧ 현) 한국신문예문학회 지도위원,
      서초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아시아태평양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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