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서복>(ソボク)은 인간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이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떠났던 서복徐福의 이름을 가진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역)은 영생永生을 상징하고,

암으로 여생이 반년이라 선고받아 시한부가 된 전직 요원 기헌(공유 역)은 죽음을 상징한다.

영화에서는 생生과 사死라는 삶의 본질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1.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깨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잠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다시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죽음을 알기 때문에 오늘을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삶은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용주 감독은 ‘영원한 삶’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가지는 순간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욕망만 남게 될 것이며 그 욕망은 인간을 파멸에로 이끌 것이라는 우려를 보여주고 있다.

 

2.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인류를 파멸에로 이끈다.

사람의 생사를 관할하는 것은 신神의 영역이다. 그런데 연구소의 김천오 회장은 그 생사권을 자기가 가지려 함으로써 신의 영역에 도전하였다.

그는 연구소를 배 안에 설립하고 ‘방주’라고 부른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하느님은 타락하고 탐욕에 찬 인류를 훼멸毁滅시키기 위해서 홍수를 일으키면서 노아에게만은 살길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배 안의 연구소는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는 ‘방주’일 것이다.

하지만 김천오는 다 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누구를 살릴지 누구를 살리지 않을지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한다. 김천오 회장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신의 제시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인 서복의 손에, 그것도 서복의 초능력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게 된다.

인간이 무언가를 가지고 싶고 보다 잘 살고 싶고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본능적인 욕망일 것이다. 이런 욕망이 인류의 발전을 추진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욕망이 무한대로 발전해서 억제할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른다면 인류는 공제할 수 없는 그 결과물에 의해서 파멸될 것이다.

 

3.인류의 희망은 인성의 회복에 있다.

서복은 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이지만 실험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궁 안에서 7달 자란 ‘엄마’가 있는 ‘아이’이다. 때문에 그에게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으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사유능력-의식이 있다.

그런데 그를 만들어낸 과학자 신학선은 그를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아 줄기 세포를 추출해낼 수 있는 ‘돼지’같은 존재-실험체라고 보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근본적인 구별점은 인간이 사유를 하고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신학선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복은 이미 의식을 가지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간’인데 신학선은 그를 단지 심험체로만 인식하고 서복의 인간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서복의 분노를 자아냈고 서복이 내뿜는 분노의 파장波長에 의해 죽게 된다.

정보국의 안부장은 소위 ‘나라’와 ‘법’의 대표인으로서 역시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인성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다. 표면적으로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는 사람을 서슴없이 죽이는 냉혹한 인물이며 그래서 서복을 미국인들에게 넘기려 하였고 그 계획이 실패하자 서복을 죽이려고 한다. 그 역시 강력한 서복의 염력念力의 힘에 죽임을 당했다.

결국 돈의 노예인 김천오 회장, 과학의 노예인 신학선, 그리고 나라와 법의 노예인 안부장은 이 세상의 주축을 이루는 인간들이면서도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들이다.

이용주 감독은 그런 인간들을 부정하고 인성의 회복을 주인공 기헌에게 기탁하였다. 뇌종양으로 이미 죽을 운명인 기헌은 죽음의 변두리에 이르러서야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살아보려고 한다. “내가 살고 싶은 건지, 죽는 게 무서운 건지” 그렇게 헷갈리면서도 그는 삶을 선택했고 그래서 서복을 지키려고 한다.

처음에 기헌은 “민기헌 씨는 왜 나를 지키려고 합니까? 내가 당신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라는 서복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복이를 알아가면서 기헌은 서복이를 실험체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한다. 그런 기헌을 보면서 서복이는 ‘민기헌 씨’란 호칭을 ‘형’이라 바꾸는데 이는 자신도 기헌이도 같은 종의 인간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기헌이도 서복이를 단순한 실험체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실험에 분노하여 실험을 정지시키고 서복을 구하려 한다.

결국 인성을 상실한 모든 존재는 인성을 가지게 된 서복이의 힘에 의해 다 소멸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쓸어버린 노아의 홍수같이 기헌만 남기고 전부 파괴해 버리었다.

노아의 방주는 연구소선船이 아니라 인성을 잃지 않은 기헌이었다.

서복은 자신이 인류를 죽음과 질병에서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인류를 욕망의 전쟁속에 밀어 넣을 화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서복은 자신의 실존적 의미가 지금의 인류에게는 구원이 되지 못함을 알았기에 기헌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부탁한다.

기헌 역시 하나의 생명체인 서복이를 죽이라는 국정원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지만 서복이 인류 파멸의 원인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복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실존적 가치를 잃은 서복에게 일종의 구원이었다.

결국 영생의 희망이었던 서복이는 죽었지만 죽음의 상징이었던 기헌이는 혼자 살아남았다. 이용주 감독은 기헌이를 살림으로써 그에게 노아의 방주가 되어 인류 구원의 희망인 즉 인성의 회복을 위해 살 것을 바랐을 것이다.

영원한 삶을 가지고 태어난 서복은 줄곧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왔고 “저도 무언가 되고 싶어요” 하고 실존적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연구소를 파괴하고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인류멸망의 화근이 될 수 있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인류를 구하고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실현하였다.

 

4.삶과 죽음의 의미

엔딩 장면에서 서복이 초능력으로 만든 돌무덤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나오는데 생명의 근원지인 바다와 죽음의 귀소歸巢인 무덤으로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돌무덤은 원래 동료를 살해하는 계획에 조력하고 묵인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파하는 기헌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서복이가 염력念力으로 만들어준 무덤이다. 바다에 가라앉은 동료의 넋이 묻힐 곳을 만들어 줌으로써 무력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하는 기헌이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이다. 동료를 살해하라 지시하고 동료의 죽음에 무신경한 안부장과는 달리 아직 인간성을 잃지 않은 기헌이를 형으로 인정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서복이는 죽었고 암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상징하던 기헌이는 살았다. 이용주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생리적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인류를 멸망에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정치 경제의 발전에서 인성의 상실은 인류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인성의 회복이며 인간이 인간 답게 사는 것일 것이다.

기헌의 삶에서 그의 실존적 가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소복을 통해서 깨달은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것이 숙명이라면 인간에게 하루하루는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한 오늘을 인간 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영화 「서복」이 제기한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사진 출처: 映画.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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