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시계


숲을 열고 나온 나무

선명한 무늬로 커피숍 조명 아래 있다

생의 여정을 보듯 톱날에 잘린 살갗의 무늬

겉을 벗겨보면 아직 눈물이 남아있을까

초록의 탑이 멈추어버린 나무의 시계

아픔의 면적이 넓다

물을 부어도 푸르게 일어서지 못하고

숲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너는 길게 외로웠을 것이다

탁자와 나의 간격은 가까워지고 스며든다, 너에게

내 마음 같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바닥의 온도로 교감하며 

너의 거처에서 아픔을 어루만진다

차라리 세밀하게 보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모으는 하나의 탁자였을 텐데

너는 끝나지 않은 물음표

과거에서 먼, 흙이 부른다

 

계절이 체크인한다


묘목이 해빙의 땅으로 실려간다

흙에 제 숨결을 문지르고 싶었을까
트럭 방향으로 푸른 미래가 울창하다

모종나무뿌리는 땅으로 들어가기 전
햇살 목욕을 하면서 까만 말을 모은다

화풍을 타고 새 계절이 체크인한다

지구의 빈칸을 메우는 어린 나무
묘목 속에는 나이테의 시간이 켜켜이 들어있다

파릇한 영혼을 언제 내밀까 두근거리던 가지에

빛 고리에서 초록을 꺼내
푸르게 진화하는 모종나무

돋아난 잎에서는 호흡을 뱉으며
팽창한 면적이 그늘을 만든다

고요를 깨는 소리를 들으며
잔뿌리가 낯선 영토를 꼭 움켜잡는다

가지의 표정을 갈아 끼우는 잎잎들

나무야, 쓸쓸한 저편에
미친 듯 그늘을 만들어라


물의 천정과 물의 신발


안개의 면적을 강바람이 걷어가면
빈 배의 모습이 수면에 풍경처럼 나타난다

나룻배는 강을 건너가는 신발
친숙한 물 위를 걸어간다, 저편으로

물의 신발을 신고 가는 동안
수몰된 마을을 생각한다

객지로 떠난 바람의 빈 공간에는
물이 찰랑이고
동네를 덮던 산 그림자는
더 이상 땅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물 위에 복사된다

대답 없던 수심에서 물 밖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마을의 눈을 감긴 야생의 물살 속에는
산새 대신 물고기가 날고 
토지는 수중에 물이 되어
밭과 숲은 이제 갈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물의 밑바닥에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긴 그리움이 있다

수몰 전 부락이 상상 속으로 걸어오고

마을의 과거가 물의 천정이 되어
뱃머리에 자꾸 부딪친다


곁에 두고 싶은 맛


친구와 식당에 갔는데,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고 남은 밥을 비닐봉지에 담아왔다

구수한 밥이 되고 싶어 프라이팬에 누룽지를 만든다

흰밥이 그릇을 움켜쥐고
격렬하게 변신하여 바삭하다

흰밥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따뜻한 낱말이 거실에 번진다

눈 내리는 밤
순백의 눈송이와 밥에서 출력된 누룽지를
냄비에 함께 넣고 끓인다

구수하게, 또는 격렬하게

오늘의 주어는 엄마의 누룽지밥
거실에 번져있는 구수한 후각과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혀와 누룽지의 온도가 만나는 깊은 맛

입맛을 부르는 이 짧은 끌림은
곁에 두고 싶은 맛이다


계절 끝에서


우리 다시 만난다면
가을 끝에서 만나지 말아요

들에 수놓은 색들이 지워지는
아픈 계절에 만나지 말아요

시월의 마지막 비가
내게 쌓인 사색을 지우려 할 때

고운 잎들이 아쉬움 되어
떠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가을에서 함께했던 감정들도
붉게 떨어지고 있어요

오색 문양이 이별 위에 흩어지면
마음에 머물던 서정도 우수수 떨어지겠지요

바람의 길에서 우리 다시 만난다면
아픈 계절 끝에서 만나지 말아요

시인 이현경
시인 이현경

 

 

 

 

 

 

■ 프로필 ■

․ 서울 출생
․ 등단 : 시현실 
․ 저서 : 시집 맑게 피어난 사색 외
․ 수상 : 서울시 시민공모전. 우암공모전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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