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 교육과학부 정책자문관)
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 교육과학부 정책자문관)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시작된 농촌개발 및 농촌부흥을 위한 국가 정책적 근대화 사업으로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하였다. 빈곤에서 탈출’하고자 한 국민적 요구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던 정부의지가 결합된 ‘가난퇴치’ 운동은 국가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논자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발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과정을 거쳤다. 

2011년 5월20일 정부는 우리의 성공한 개발경험인 새마을운동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와 자립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개발협력 모델을 만들어 본격 추진키로 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늘면서 새마을운동 관련 교육을 받은 외국인이 급증하고 개발도상국 내 새마을운동 관련 기구가 조직되거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한 농촌개발 정책 전개 등의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2015년 UN 총회와 UN 개발정상회의를 통해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경험이 국제개발협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안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2016년 5월3일 ʻ새마을운동의 국제적 확산방안ʼ을 발표하였다. 5대 중점과제로 새마을운동 ODA 개념 명확화, 국가별 맞춤형 전략 수립, 사업절차와 방식 개선, 추진체계 개선 및 효율적 역할 분담, 개발주체 참여 확대를 통한 파트너십 강화 등을 설정하였다. 

2015년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극심한 빈곤상태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 농촌지역에 경제발전의 첫걸음을 떼는 차원에서 새마을운동이 적합한 해법"이다고 했다. 그는 새천년개발목표를 달성을 위해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된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Millennium Villages Project)’를 컬럼비아 대학교 지구연구소와 유엔개발계획, 비영리 단체인 밀레니엄 프라미스에 의해 계획 및 시행하였다. 

2015년 8월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19세 이상 성인 남녀 800명에게 경제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요인을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이 가장 높은 비율(38.6%)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32.5%), '88 서울올림픽'(15.8%), '2002년 월드컵'(11.4%)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0월9일 경기도 수원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9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해 “오늘의 대한민국 밑바탕에는 새마을운동이 있다”며 “새마을운동의 현대적 의미를 계승해 발전시켜 나가자”고 밝혔다.  

필자는 최근 고려대학교가 주관하는 우즈베키스탄,  페루, 알제리, 우간다, 팔레스타인, 아제르바이잔, 네팔 정부 고위공무원을 대상으로 한국 경제발전 경험에 대해 화상강의를 통한 연수를 하고 있다. 이 많은 개발도상국 나라 공직자들은 한국이 6.25 전쟁 후 폐허된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된 경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많은 질문을 해오고 있다. 강의 내용 중에서 새마을 운동(Saemaul Undong )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연수생들이 많다. 이 운동에 대한 발단부터 지금까지 진행상황과 예산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도 한다. 

1960년도 초반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나라 출산율이 6.3명이었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9달러로 세계 125개국 중 101 번째로 파키스탄, 토고,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등과 더불어 최빈국이었으며 북한은 320달러로 50번째 국가였다. 이 당시 필자의 동네 가구 수가 100여 가구가 되었고 필자와 같은 해에 태어난 마을 남녀 친구들이 15명 정도가 되었다. 그 중에 남자가 60% 정도로 다소 여자보다 많은 수였다. 그러나 하도 살기가 힘든 시기라 우리 마을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텔레비전은 당연히 없었다. 군산 서해방송은 1969년 10월2일에 개국한 군산을 가청권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민영 방송이 있었다. 어떻게 스피커가 설치되고 작동했는지를 모르지만 매일 아침 비가오나 눈이오나 ‘새마을 운동’ 노래가 흘러 나왔다. 노래 작사·작곡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중략,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라고 이어진다.  

이 노래는 초등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불러야하는 ‘애향단’ 활동 전주곡이다. 학생들은 헝겊으로 만든 책보를 등에 메고 3km를 걸으면서 이 노래를 의무적으로 불렀다. 1972년 4월4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문교부가 “새마을운동 지원을 위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1만5천개의 애향단을 조직”하라고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시달’하였다고 한다. 유신이 시작될 즈음에 만들어진 이 ‘애향단’은 자발적인 조직이 아니라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관제 조직이었던 것이다. 이어 “문교부는 새마을 봉사활동의 말단 조직이 되도록 하는 애향단을 지도교사 밑에 두어 봉사단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했다”고 한다. 애향단이 새마을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케 해주는 대목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살았던 시절, 우리들은 학교 강의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했고 교실에서 공부하다 공회당(왜 이런 이름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큰 강당임. 천장 높이가 상당히 높았으며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있음)에서 공부를 했다. 4학년 때 필자는(물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임) 2부에 할당되었다. 오후 반 수업이 있을 때, 긴장을 해야 했다. 특히 비가 내린 날은 시계가 없어 학교에 갈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해가 있는 날은 마루에 해의 도착 지점과 시간을 대충 알아서(해가 문턱에 오면 13시쯤 되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정도) 학교에 갈 시간을 알았다. 필자는 오후반이지만 아침에 등교해서 반나절을 학교에서 할 일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빈둥거리곤 했다. 이 같은 행동은 착각이 아니고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한 어린 소년의 현명한 예방책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필자의 부모님은 많은 3명 아들과 5명 딸을 낳았다. 주위 친척들과 친구 부모님들도 많이 나아 보통 자녀가 5명 이상이었다. 이 당시 출산율은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 평균이 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양호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콘돔(그 당시는 무엇인지를 모름)을 나누어 주면서 부모님에게 갖다 주라고 한 기억이 난다. ‘산아제한 정책’인 것이다. 어린 우리들은 이 하얗고 부드러운 물건에 바람을 불어넣어 풍선을 만들어 재미있게 놀곤 했다. 일반 풍선은 잘 터지는데 이 희한한 물건을 터지는 법이 없었다. 잘 터지게 되었다면 산아제한이 실패했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한창 베이비붐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는 출산율이 연간 평균 6명대를 기록했고, 출생아 수도 90~110만선을 기록하며 인구증가율도 연 3%를 기록했다.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이던 1960년대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에 사활을 걸었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다. “3·3·35 운동”도 벌였다. 3명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세까지 단산하자는 뜻이다. 정부는 ‘아이 적게 낳기 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보건소나 ‘가족계획 지도원’에서는 무료로 불임시술을 해주기까지 했다. 

1970년대 정부의 산아한 정책은 새마을운동과 함께 계속됐다. 산아한 정책은 어떻게 하면 애를 많이 낳는 사람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애를 적게 낳게 하는 운동이 국가의 중요한 역점사업이었다. 물론 그 사업자체도 새마을운동의 중요한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자녀를 적게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아들을 낳기 위해 출산을 계속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표어가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산아정책의 시행으로 출산율이 점차 감소되기 시작하고, 1970년대 중후반 들어 산아제한 정책이 오일쇼크와 겹쳐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면서 출산율이 2명대로 빠른 속도로 진입했다. 1970년대에는 산아제한을 외치는 가족계획 표어로 ‘둘도 많다’며 ‘하나만 낳자’라고 외쳤고 그 후에는 ‘아이 좋아 둘이 좋아’ 캠페인도 벌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대한민국! 온 나라가 난리이고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래에도 암울한 지표, 저출산·고령화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2009년 11월25일 파리에서 개최된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대한민국 가입에 관한 특별회의에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24번째 DAC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됐다. DAC에 가입했다는 것은 단순히 선진 공여국 클럽의 멤버가 된다는 의미를 넘어 DAC 회원국들이 공유하는 국제원조의 가치와 규범, 즉 일정 규모 이상의 원조제공 서약, 파리선언과 아크라 행동계획을 비롯한 원조효과를 높이기 위한 각종 규범 및 가이드라인을 받아들이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진정한 선진 공여국으로서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개발협력을 시행하기 위해서 우리 정부는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ODA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기관과 구성원들은 향후 원조 규모의 증액과 함께 질적 측면인 원조효과성 제고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과 사업의 경우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특정 정권에서 시작되었다고 정부 ODA 사업을 대폭 축소하는 정책은 DAC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새마을운동은 수원국뿐만아니라 우리국민들 거의 40% 정도가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하는 응답을 우리 모두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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