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지향파 新詩革命의 이론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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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이미지 변형으로

能動的 可視化된 象徵의 境地

 

복합상징시론(複合象徵詩論) 연재 【4】

김현순(金賢舜)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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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의 계속)

 

4절 시의 언어

1. 시어(詩語)에 대한 이해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의식 교류의 수단은 말과 언어이다. 언어는 말을 기록해 두는 기호에 속한다.

누구에게나 생각은 있고 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생각과 꿈의 크기와 색채는 한 폭의 예술작품보다 더 황홀하거나 처절할 수도 있다. 그것을 소리로 들려주는 음악과 그림으로 펼쳐 보이는 미술과 언어로 전달하여 형상을 펼치는 문학이 있는데 이것을 예술의 3형태라고 일컬어 왔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세계를 세상에 확실하게 펼쳐 보이는 예술적 기질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로서의 시문학은 언어로 펼쳐 보이는 작업이다.

세상의 언어는 생활용어와 예술언어가 있는데, 시는 예술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이다.

생활용어란 일상에서 사용되는 실용적인, 직설적인 언어를 말하며 예술언어란 형상화된 구상어를 뜻한다.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반드시 예술언어로 승화되어야 하는데 이를 시어라고 한다.

예술이란 현실에 대한 직설적인 캡쳐가 아니고 환각에 입각한 상상의 작업을 거친 상징의 세계임은 더 피력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술로서의 시의 언어는 그래서 모호성과 황당성도 어느 정도 띠게 되는 것이다. 유물론을 앞세우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복합상징시에서의 시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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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21세기 10년대 말 중국 연변대학 김만석(金萬石) 교수를 비롯한 유물론적 비평가들의 주장.

 

서의 움직임을 틀어쥐고 인간의 내면세계의 가상현실을 펼쳐 보이는 유심론적 형이상 각도에서 보면 시의 언어는 무난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매력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시문학 영역에도 리얼리즘과 상징주의 두 갈래가 크게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보기:

 

생활용어

 

눈이

하얗게 내렸구나

 

예술언어

 

하얀 미소가 얼어서

파들파들

깃 펴고 웃는구나

 

위 보기에서 생활용어는 리얼리즘에 속하고 예술언어는 시의 언어로 사용된다.

이 점에 대해선 이쯤 언급하고 시의 언어에 대하여 계속 피력해 보자.

시의 언어는 사전식 외연(外延)적 범위를 초탈한, 주관정서의 산물인 만큼 환각과 변형의 성질을 띠면서도 함축(含蓄)되어야 한다.

시에서의 함축이란 매 단어의 함축이 아니다. 단어는 그냥 기호로서의 언어일 뿐 그 자체의 함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에서 말하는 함축이란 화자 정서의 경지의 순간순간들이 고농도(高濃度)의 함축을 기하는 예술언어의 합리한 집합을 말한다.

여기에서 합리한 집합이란 같은 하나의 상관물에 대한 지나친 수식과 해석의 규정어를 적당선에서 사용하라는 뜻과도 통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화판에 그림을 그릴 때 화폭의 색상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온통 물감투성이로 도배한다면 범벅판이 되어 오히려 시야를 혼잡스럽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시어 사용에서 또 단어 뒤에 따라붙는 조사 사용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조사를 무조건 생략하는 것도 함축의 범주에 속한다.

 

보기:

 

지나친 수식과 해석:

 

어둑어둑 땅거미가 나래 쫘악 펴고

드넓은 들 덮어주는

눈 감은 기억의 꽁다리에서

반뜩반뜩 불빛 깜박이면서

개똥벌레가 시름없이

담배를 피운다

 

적절한 수식과 해석:

 

땅거미가 나래 펴고 들 덮는

기억 꽁다리에서

반뜩반뜩

 

개똥벌레가

담배 태운다

 

이를 두고 복합상징시에서는 골격 추리기라고 말한다. 즉 소리 나는 북은 힘주어 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의 적절한 증명이 되는 사례라고 해야겠다.

또한 복합상징시에서는 화자의 의도적 행위를 제외하고는 시어의 중복 사용을 금칙으로 하고 있다. 제목을 포함하여 시 전문에서 이런 법칙이 관통되고 있는 이유는 같은 노래도 두 번 다시 들으면 싫증난다는 지극히 통속한 이치에 근거한 미학적 견해라 하겠다.

같은 시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표현해야 함은 각이한 성질의 이미지 구성에 더욱 확실한 보장으로 된다.

 

보기:

 

시어 중복 표현의 사례

 

새소리 걷어 싣고 바람 되어 가리라

노을 피는 언덕너머로

휘파람 불며 불며 신나게 가리라

 

시어 단일 표현의 사례

 

새소리 걷어 싣고 바람 되어 가리라

노을 피는 언덕너머로

휘파람 꺾어 불며 춤추며 떠나리라

 

얼핏 보기엔 거기에서 다 거긴 것 같지만 한 수의 시에서 같은 시어의 중복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연속 중복된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야말로 시의 색상을 흐리는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한 수의 시에서 시어의 중복 사용을 피면하지 못함은 어디까지나 화자의 시어 궁핍을 말해 줄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시어의 조합

 

단일명사(單一名辭)는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꽃, 나무, 바람, 지구, 개미, 사랑

단일명사의 추상적 개념을 형상적 이미지로 전화시키려면 반드시 규정어거나 술어와의 결합을 꾀해야 하며 그 결합과정은 일상의 도식화된 법칙을 떠나 환각에 기초한 변형을 기본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절들에서 이미지를 언급할 때 말한 바가 있다.

글자와 단어 그 자체에는 아무런 계급도 사상도 없다. 가령 이라는 글자를 놓고 보자. ‘이라는 글자 자체는 그대로 똥일 뿐이다. 그런데 그 글자가 독자의 의식 속에 들어와 뇌리 속에 잠재된 이미지로 부상되기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뒤에 한 자를 더 붙여 보자. ‘똥똥’, 이러면 맞혀 오는 이미지가 완판 다르게 되지 않는가.

복합상징시에서는 단어와 단어의 조합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합으로 새로운 경지를 만들기 때문에 재래식 시어 자체의 특성과 연속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환각의 변형으로 다시 조합되어야 한다.

 

보기:

 

재래식 표현:

 

물이 흐른다

바람이 분다

마을에 고요 덮이고

뻐꾹새 밤 울어

새벽이 온다

 

환각의 변형:

 

물이 걸어 간다

바람이 갈숲 쓰다듬는다

 

마을은 고요 덮고

잠들고

뻐꾸기 울음에 밤

 

까맣게 얹어 두고

새벽이

눈 비비며 온다

 

위 사례를 분석해 보자. 물은 흐르고 바람은 불기 마련이다. 또한 마을에 고요가 덮이고 뻐꾹새 우는 밤이 지나면 희망의 새벽이 오는 것 역시 상징의 표현으로 되었지만 이런 표현을 그대로 직설한 것이 보기에서의 재래식 표현이다.

그러나 환각의 변형에서는 물이 걸어가고 바람이 갈숲을 쓰다듬는다. 마을은 고요 덮고 잠이 들고, 새벽은 뻐꾸기 울음에 밤을 얹어 두고, 눈 비비며 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표현은 유물론적 각도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형이상적 각도에서는 지극히 무난하게 안겨오는 정서의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재래식 표현보다 환각의 변형에서는 걸어간다. 쓰다듬는다, 잠이 든다, 얹어둔다, 눈 비비며 온다는 등 움직임의 표현으로 능동적 가시화 작업을 통해 화자의 꿈틀거리는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 말한다면 시어의 조합은 재래식 모식에서 벗어나 변형된 환각의 조합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하여 화자의 경지를 펼쳐 보이기에 봉사(奉仕)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아이러니

 

원유의 언어에 대한 환각적 변형 표현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이미지의 모호성과 애매성은 상징의 본질 규명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특성은 또한 아이러니와 역사유로 그 새로운 경지 구축에 더 경이(驚異)롭게 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어들의 조합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아이러니라는 말을 반어(反語), 에두름이라고도 하는데 겉으로 하는 진술과 다른 속뜻을 가진 것을 이루어 말한다.

본래 아이러니라는 개념은 그리스의 연극, 특히 희극(喜劇)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리스의 희극에는 에이론(Eiron)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겉보기에는 나약한 인물 같지만 실은 훨씬 영리하여 오만하고 고집이 센 대방을 꺾어 버리고 승리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서 에이론 같은 인물을 아이러니하다고 한다. 에이론의 이런 수법으로부터 그 사상을 밝혀 낸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그리하여 아이러니를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도 부른다.

아이러니는 상징으로 충만된 복합상징시에서 사용되는 기본기법으로서 외연적 표면에 흐르는 변형된 이미지 외에 내면에 흐르는 화자의 사상과 이념을 은폐시켜 준다.

이러한 기법은 황진이가 지은 조선의 고전시조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에서도 일찍 쓰인 바가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一到) 창해(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 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서는 황진이가 음풍영월(吟諷迎月)을 읊조린 것 같지만 황진이의 애틋한 정을 읊조리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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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말년에는 아테네의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여기에서 벽계수는 장수 벽계수를, 명월은 황진이 자신을 뜻하며 그것을 시조 내면에 은은히 깔아 아이러니하게 보여 준 것이다.

묵향의 복합상징시 하나를 더 예로 들어 보기로 하자.

 

토막난 빗줄기들의 창() 두드리는 반란

땀구멍에 송골, 고개 내미는 자유가

냉커피 마신다

 

오후는

없을 것이라 한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소리들의 연서(戀書)

그러나 플래시와 샤타의 사명은

시간 조각하는 것

 

구름 타고 가는 바람의 두발에

딸깍, 이별 신긴 사랑이

 

무지개로

멍들어 있다

 

묵향의 <존재의 의미> 전문

 

이 시에서는 비 내리는 날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실 때 번개 치고 우레 우는 경상(景象)을 환각적 장면으로 외연을 펼쳐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정한 현실과 그로 인해 상처 입은 화자의 내연을 암시적으로 깔아두어 아이러닉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 두드리는 반란, 냉커피 마시는 자유는 현실에 대한 회의(悔意)의 역설이며 오후는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희망에 대한 갈구의 아이러니한 발설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소리들의 연서(戀書)’는 지나간 무모한 것에 대한 연민을 뜻하며 플래시와 샤타의 사명은 시간 조각하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들을 암시하고 있다.

나중에 화자는 구름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 멍든 삶이지만 그것은 결국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허무라는 미학적 인생관을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깔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복합상징시를 비롯한 상징시 계열의 작품들은 기본상 다 외연과 내연의 두 갈래로 흐르는 것이 기본임을 알 수가 있다. 상징시에서의 핵심은 내연이며 외연은 내연을 도출해 내기 위한 수단으로 되는 변형적 이미지이다.

순 외연에만 그치고 내연의 사상과 이념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상징은 완결무구(完結無垢)한 상징으로 승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외연을 통한 내연에 대한 이해와 해법(解法)은 프리즘을 통한 햇빛처럼 독자들의 세계관과 미학적 관념과 경력에 따라 각자 다른 답안을 골라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징의 애매성과 모호성의 매력이다.

 

 

4. 역행사유(逆行思惟), 변향사유(變向思惟)

 

도식화된 모식에 대한 탈변은 파괴와 변형을 꾀하면서 역행사유 또는 변향사유를 하게 되는데 이는 역설(逆說)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설은 본의와 상반되는 말 또는 언어로써 화자의 뜻을 강조하는 수법에 속하는데 역설을 사용하는 목적은 타자의 주의력 집중, 내용 전달의 취미성 제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 당대 조선족 소설가 권중철의 장편소설 제목은 사랑 앞에 죽으리라는 역설로 되어 있다. 순결무구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 살겠다는 표현의 아이러니한 역설이다.

역설은 아이러니와 많은 면에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흔히는 짧은, 단마디명창식의 언어 조합에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역설로 시작된 상징시의 흐름새에서 역행사유 또는 변향사유를 하는 것을 두고 비뚠 사유라고 농통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비뚠 사유가 인간 본연의 발로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린 시절 작문시간에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고서 떠오르는 생각 가지가지들을 적어서 바쳤던 기억이 난다.

고드름을 꺾어서 할머니께 지팡이 만들어 드리고 싶다거나 담배물주리 만들어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등의 생각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착실하게 살라고 심어 준 의식 하에서 고안해 낸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고드름을 보는 순간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 뾰족하구나. 말쑥하구나였다. 이로부터 엉뚱한 생각이 고개를 제꺽 쳐들었는데 뾰족한 고드름으로 고자질 잘 하는 옆쪽 계집애의 엉덩이를 찔러 주고 싶다는 생각과 고드름 꺾어서 막대기로 휘두르며 동네방네 달아 다니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시 짓기를 포함한 모든 예술 창작에서의 사유는 이렇게 세상이 점지해 준 대로의 고스라니한 사유가 아닌, 나름대로의 엉뚱한 사유를 자유분방하게 펼쳐야 한다. 여기에서 역행사유 내지 변향사유는 화자의 독자적 내심경지를 새롭게 펼쳐 보이는 데 퍽 유조한 것으로서 환각과 변형은 낯선 자극과 감동으로 세상과의 대화를 이룩하는 전제로 된다. 문초의 시 <그대 오시는 날>을 함께 보기로 하자.

 

이슬 꿰어 받쳐 든

봄바람의

속내

 

찢겨진 사막이 낙엽 덮고

일기 쓴다고

 

잘려나간 손톱 발톱

숨 죽여

메아리 씹는다

주름 잡힌 햇살에

연지 곤지 찍어 바르는

거울의 손

 

시간이 그 떨림

꽈악

움켜잡는다

 

제목에서와 같이 그대 오는 날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하지만 세월 속에 사막같이 피폐해진 화자는 그래도 기다림이란 신념 하나로 손톱 발톱깎으며 숙원의 그날을 참고 견디어 왔다. 이제 그대 오시는 날’, 초라해진 안쓰러움을 작품에서는 처절한 환각적 변형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각들은 모두가 자연의 사물, 현상들로써 사람처럼 행동하는 변인화의 처리로 되어 있다.

 

봄바람이 이슬 꿰어 들고 있다.

찢겨진 사막이 낙엽 덮고 일기를 쓴다.

잘려나간 손톱 발톱이 메아리 씹는다.

주름 잡힌 햇살에 연지 곤지 찍어 바른다.

시간이 손 떨림 움켜잡는다.

 

이렇게 다섯 개의 이미지를 열거하여 보면 매 이미지마다 정상적인 사유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황당함을 보아 낼 수 있다. 상관물들 사이의 연관성이 철저히 깨져 버려 있다.

봄바람이 바늘이나 꼬챙이처럼 이슬을 꿰었다는 것이나 수림 없는 사막이 낙엽 덮는다거나 이빨 없는 손톱, 발톱이 보이지도 않는 메아리를 씹는다거나 햇살이 연지곤지 찍어 바른다거나 시간이 떨리는 손을 움켜잡는다거나 죄다 얼토당토않은 정신환자의 넋 나간, 두서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예술로서, 시로서, 상징으로서의 인간의 내면세계는 가상의 현실이기에 상술한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이며 정서의 팽창이 불러오는 환각의 자유이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재현실(實在現實)과의 접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유를 벗어나 역행사유, 변향사유는 이렇게 시어의 역설조합(逆說組合)을 기본으로 재래의 모식에서 탈변되어야 초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5절 화자의 입지

 

화자의 내심세계를 한 폭의 그림 또는 이야기 내지 장면으로 펼쳐 보임에 있어서 화자의 입지가 제기된다.

화자의 입지가 객체일 경우 차분하게, 냉정하게 기성되어 있거나 기성되어 가는 세계를 묘술(描述)함으로써 독자들이 화자가 그려 낸 세계에서 스스로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이고, 화자의 입지가 주체일 경우, 화자가 직접 상관물 속에 들어가 가상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독자들과의 정서 교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객체는 손님의 각도로서 가상현실에 대한 전도사의 역할을 감당하며 가상현실을 직접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라는 구별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객체일 경우에는 화자의 그 어떤 정서 개입이나 감정흐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냥 무엇이 어쩐다라는 식의 교대만 하게 될 뿐이다.

여기에서 그냥 보이는 대로만 무분별하게 새로운 이미지만 골라 적어 놓는다면 초현실주의 상징시의 한 갈래인 하이퍼로 될 것이나 복합상징시는 무질서로 흐르는 환각의 흐름 가운데서 화자의 사상과 관념을 체현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변형하여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조합하는 것이다.

 

보기:

 

아침/ 하이퍼시

 

이슬이 눈 뜨고 풀잎 닦는다

시간 핥는 바람의 혀

사금파리 반뜩임이 꽃그늘아래 잠들어 있다

땅위로 고개 내미는 새싹들의

지렁이 흉내

어둠은 책갈피에 끼여 잠들고

이모콘 버튼이 쟌넬을 삼킨다

방아 찧는 폭포수아래

물안개가 깃을 편다

피리소리가 봄잔등 노크 하고

열린 우주가 별꽃 피우며

세상을 널어놓는다

수탉의 목청 새벽 알리는 뉴스가

라디오 방송에 날개 걸려

파닥 거린다

 

 

아침/ 복합상징시

 

이슬이 눈 뜨고 풀잎 닦는다

시간 핥는 바람의 혀

사금파리 반뜩임이 꽃그늘 펴서 말린다

땅위로 고개 내미는 새싹들의

일광욕(日光浴)

어둠은 책갈피에 끼여 바둥거리고

이모콘 버튼이 쟌넬 눌러 빛을 쌓는다

방아 찧는 폭포수아래

물안개의 무지개 사랑

피리소리가 봄잔등 노크 하고

열린 우주가 별꽃 피우며

세상의 창() 열어 제낀다

수탉의 목청 새벽 알리는 뉴스가

라디오 방송에 날개 걸려

내일에 깍지를 건다

 

둘 다 똑같은 아침의 경상을 읊조린 것 같지만 미세한 차이점으로 하여 완판 다른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하이퍼시의 경우엔 아무런 구애 없이 화자의 영혼 속에 흐르는 무질서한 무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변형시켜 옮겨 놓았음을 쉽게 보아 낼 수 있다. 하지만 복합상징시는 생기와 희망으로 충만된 아침이라는 사상과 관념의 체현을 위하여 똑같은 상관물이지만 그것에 대한 변형의 색채와 모양과 가시화를 달리하였기에 화자의 의도가 뚜렷이 알린다. 즉 화자의 미학적 견해와 세계관, 인생관이 뚜렷이 체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연결고리로 매 상관물들에 대한 의도적 변형을 실행하였으므로 저마다 고립되어 있는 상관물의 자연존재상태에 대한 낯선 세계 생성(生成)으로 의미를 산발하는 하이퍼시와 정체 구성을 위한 구도적 착상의 구별점을 드러내 보인다.

관여 없이, 하이퍼시는 또 무조건 화자의 입지가 객체이기만을 주장한다. 주관정서, 감정 따위를 거세해 버린, 순수 화폭 내지 장면에 대한 묘술로써 무질서하게 나열된 자연회귀의 관념과 질 들뢰즈, 피에르 펠릭스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수목 이분법으로 주장한 이좀의 원칙을 근거로 저마다 독립되어 있는 종속관계가 아닌 병열관계를 주장한다. 이로써 변형된 상관물의 병열나열의 형태인 횡적 구성을 선호하며 머리도, 꼬리도 굳이 상관없는, 그냥 단면(斷面)의 상태론으로 존재의 당위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복합상징시에서는 무질서한 환각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변형된 이미지들의 병열나열의 법칙은 하이퍼시와 똑같지만 나열된 이미지들은 화자의 기성된 정서거나 이념에 걸맞은 표현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하이퍼시와의 근본 구별점이 되면서 각자 나름대로의 미학으로 빛발치고 있다.

하이퍼시와는 달리 복합상징시는 또 화자의 입지가 주체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화자의 입지가 주체일 경우, 화자가 직접 가상현실 속 주인공이 되어 세상과 공감하게 된다. 이는 작품 속에 강열한 서정의 흐름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필연적 결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시인 만큼 서정의 과다 노출은 상징의 깊이와 폭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되므로 극력 자제하거나, 어투 즉 말꼬리 마무리 같은 데서 그 양식을 고양(高揚)해야 한다.

낙엽을 상관물로 쓴 시구에서 그 경우를 살펴본다.

 

보기:

 

화자의 입지가 객체:

 

잎잎의 기억들이 깃 펴고

날아 내린다

점점이 아픔들이 얼굴 붉히며

들을 덮는다

 

화자의 입지가 주체:

 

잎잎의 기억들이여 깃 펴고

날아 내리어라

점점이 아픔들이여 볼 붉혀라

들을 덮어라

 

위 사례에서 객체의 경우는 차분하게 방관자의 각도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세사에 화폭을 그려 보이지만 주체의 경우에는 화자가 가상공간에 직접 들어가서 서정적 주인공이 되어 가상현실을 쥐고 흔드는 것을 확연하게 보아 내게 된다.

우리말에서 탁 해서 다르고 툭 해서 다르다는 것이 바로 이런 데에서 체현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경 객체와 주체의 경우에서 어느 것을 택하여 시 창작에 활용할 것인가는 그래도 시인 자신의 선택에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복합상징시에서는 또 , , 당신, 그대와 같은 호칭적 대명사를 절대 시 본문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대명사를 굳이 쓰지 않고 자신의 내심을 보여 주는 것이 더욱 확실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보기:

 

일반 의 경우:

 

노을 비낀 그늘 속으로 걸어가는

그대 모습 나는 보았네

바람 꺾어 날개 달고 춤추며 가는

승천(昇天)의 모습 나는 보았네

 

복합상징시의 경우:

 

노을 비낀 그늘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 보았네

바람 꺾어 날개 달고 춤추는

승천(昇天)의 그림자

사진 찍어 두었네

 

보기 사례에서 단어의 중복 사용, 조사 사용 절제, 호칭어 대명사의 생략 등 원칙에 근거하여 시어 조합과 시적 구도를 짠 것을 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렇게 하였지만 시 속에 흐르는 화자의 끈끈한 서정의 흐름은 변함없이 그대로, 오히려 더 함축되고 세련되게 안겨 온다.

이것이 복합상징시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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