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원 소설가가 신작 단편 ‘증후군’을 연변문학 8호에 내놓았다. 일찍 ‘인천부두’ 등 중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장편소설 ‘어둠의 유혹’을 출간하면서 그는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의 소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조선족사회 격변기의 생활을 핍진하게 보여준 게 특징이다. 신작 단편 ‘증후군’도 마찬가지다. 단지, 이번 소설은 어떤 경계를 넘어 인물이 겪고 있는 심적 변화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처해 있는, 망가져 가는 경계인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어 더 주목이 간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의 심적 변화는 자신의 인생 자체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다. 탈출이 필요한 때이다. 소설가는 그것을 얘기하고 있다. 앞으로 더 무게 있는 소설을 내놓기를 기대하며, 강호원 소설가의 정진을 빈다.

편집자 주

강호원 (姜虎遠) 약력: 2003-2005년 도문시 작가협회주석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인천부두' 등 중 단편 50여편 발표, 장편소설 ‘어둠의 유혹’ 출간. 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CJ문학상 등 다수 수상. 
강호원 (姜虎遠) 약력: 2003-2005년 도문시 작가협회주석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인천부두' 등 중 단편 50여편 발표, 장편소설 ‘어둠의 유혹’ 출간. 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CJ문학상 등 다수 수상. 

지대 높은 다리 위가 대서 그런지 이제 금방 초가을 접어드는 날씨치고는 꽤나 쌀쌀하다. 멀리 구름사이 어스름한 달빛을 배경으로 뚝방아래 멋진 자세로 낚시대를 휘두르는 밤 낚시꾼들이 모습이 마치 명화백의 붓끝에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바야흐로 더운 여름 막바지를 알리는 듯 뚝 방 버들 숲에서 지친 매미들이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이봐 뭐라도 소식 있나?

—이맘때면 입질할 때도 됐는데 이상하네...

낚시 동료인듯 두사내가 강기슭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솔솔 부는 강바람을 타고 교량안전난간 대를 잡고 멍하니 다리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석호의 귀에까지 띄엄띄엄 들려왔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석호는 취했던 술이 조금씩 깨는 것 같았다.

참 여유있고 행복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몇 년전인가 무슨 바람이 일었던지 낚시질에 열을 올렸던 자신이 문뜩 떠올랐기 때문이다.비싼 낚시도구엔 감히 엄두를 못 내고 동대문시장에서 전문 사구려 낚시도구들만 골라 그런대로 돈이 안드는 공짜 낚시터에 나설수가 있었다. 그 낚시터가 바로 지금 두낚시꾼이 차지하고 있는 저자리다. 하기야 바다건너 돈벌러 왔다는 놈이 허구한날 낚시대나 메고 괜히 폼 잡지않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그냥 재미로하는 낚시니별거아니라고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면서 슬슬 낚시질에 열을 올렸던것이다. 느닷없이낚시에 취미를 가진 계기도 아마 한국 와서 처음 얻은 세 방이 바로 이곳 한강대교 부근이고 그러다 보니 그나마 서울 도심에선 청정지역이라 할수 있는 이곳을 자주 거닐다가 나중엔 알게 모르게 강변 낚시질과도 피치 못할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도그럴것이 차량이 분비고 인구가 밀집한 도심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숲이있다는 자체가 그로선 신비할따름이였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도 산좋고물맑은 오지에 작은 집짓고 낚시하며 살리란 생각도 가끔 해보았다. 실로 그때까지만해도 지칠 줄 모르는 정석호다. 거의 날마다힘든 현장 일을 끝내고도 휴식을 취하기보다 낚시연장들을 챙겨들고 강가로 향할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그때가 그로선 한창 의욕과 정열이 넘칠 때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열정이 점점 식어 감을 의식했다. 그동안 챙겨 모았던 낚시도구들도 언제부터 주인집 다락방에 처박았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물론 하던 짓을 계속하다 보면 지겹고 질려서 그만두는 경우도 있겠지만 낚시뿐 아니라 어쩐지 여러 면으로 의욕을 잃어가는 자신을 그는 의식했다.

가급적이면 휘청거림을 자제하려고 정석호는 난간 대를 잡고 간신히 움직였다. 도대체 집 방향으로 가는 건지 엉뚱한 반대쪽으로 가는건지 그는 관심조차 없었다. 숨 히는 고독 때문일까? 어차피 오늘도 근 십여년간 지겹게 살아온 작은 세방에 기어들어가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온지도 어언간 십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근데 이 길지도 짧지도 않는 십여년을 자신은 도대체 뭘하고 세월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사이열심히 일다니고 돈버는데 열중했을것이다. 그렇다고 그사이 돈벌어 금산은산을 쌓은것도 아니다. 하기야 한국에 입성한 초창기엔 좀 괜찮았는지 모르나 지금은 그냥 하루벌어 하루사는 꼴이다. 게다가 이젠 몸도 망가져 병원신세를져야한다. 헌데 그를더욱 괴롭히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독한 고독이다. 대체 한인생에 몇개의 십년이 들어있는데 마냥 이런 꼴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백세시대라고 떠들어대는데 그로선 참으로 긴세월이 아닐수없다.

정석호는 허무한듯 다시 난간 대를 잡고 다리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잔뜩머금은 강물이 흐느적흐느적 춤을 춘다. 마치 어서 아래로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석호는 난간대에 바짝붙어섰다.

ㅡ어이, 아저씨, 게서 뭘하는겨.

저녁운동을 나왔는지 인행도로 자전거타고 지나가던 웬 중년남자인듯 사내가 자전거를 멈추고 나간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석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ㅡ아, 아닙니다. 밤 낚시구경 좀...

ㅡ사고 안나게 조심하세요.

그제야 사내가 자전거를 다시타고 인행도로를 휙 지나갔다.

어딘가 호령에 가까운 사내 격한 목소리에 정석는 전기에나 닿은듯 흠칫하고 난간 대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희미한 교량조명등에 난간대 새겨진 글들이 시야에들어온다.하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이다리를 오가며 눈에 익혀온 글들이다. 대부분 명인들의 서명으로 된 자살을 막는 권고문들이다.        

졸지에 정석호는 속이 섬뜩해지며 전신에 힘이 쭉빠졌다. 어디든 들어눕고 싶었다. 자기가 왜 이한밤중에 술취해 이 다리 위에서 오락가락 방황하는지 그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봐요. 여기서 이렇게 쉬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심하게 자기 몸을 잡아 흔드는 같아 정석호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흐릿한 시각에 경찰관 두 명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술 많이 드신 것 같은데 대교인행도 가운데서 이렇게 쉬시면 안 되죠. 큰일 납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머리가 금방 빠개질듯 사위가 빙빙 돌아갔다. 마침 가까이 있던 경찰관이 그를 부축해 길바닥에서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이 길바닥에 누워 있은 같은데 날은 아직도 어두운 그대로다.

—근데 왜 이 한밤에 여기에 나오신 거죠?

경찰이 의아한 눈길로 안전난간 쪽을 일별했다.

—아, 그게 아니고…

원래 요즘 자살대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이라 정석호는 경찰의 말뜻을 대뜸 알아들을수가 있었다. 정석호는 급급히 해설을 늘여놓았다.

—저희가 원래 낚시를 좋아하거든요. 지난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헤어진 후…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역시 경찰관답게 시간을 확실히 제시한다.

—아 그래요? 그러니깐 친구들과 헤어진 후 마침 집도 이부근이라 아마 술김에 낚시구경 나온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자리에 퍼진거구요.

—그러시구만. 근데 댁이 이근처라고 하시니 어떠세요, 홀로 댁까지 갈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가고말고요. 여하튼 심려를 끼쳐 미안합니다.

정석호는 급기야 자리를 뜨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경찰관이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냥 공식 사항이라고 생각하세요. 신분증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누가 경찰이 아니랄까 봐.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네 이름이 경찰이니깐.

정석호는 속으로 게두덜거리면서 지갑 속에서 외국인신분증을 꺼내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경찰관은 지체없이 가까운 도로변에 세워둔 경찰차로 다가갔다. 당연히 신분증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 교포 분이시구먼. 근데 참 티 안나게 한국말을 잘 하십니다. 그쪽 분들의 억양은 좀 다르던데.

도대체 칭찬인지 야유인지 경찰관이 이미 확인을 마친 신분증을 정석호에게 넘겨주며 이름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적어도 정석호에겐 그렇게 보였다.

—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어쩌다 이 주제꼴이 됐습니다. 중국놈도 한국놈도 아닌 병신이 돼버린거죠.  

정석호가 신분증을 지갑 속에 집어넣으며 어딘가 시큰둥한 어조로 게두덜거렸다

—참 재미있는 아저씨구먼. 그나저나 조심해 가세요. 심야라지만 다니는 차량들이 많습니다. 횡단보도 건너실때 각별히 신경을 쓰시고요.

—알겠습니다.

석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천천히 집 방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 조심해 건너세요.

뒤에서 경찰관이 시름이 안놓이는듯 다시 한번 주의를 준다.

염병, 어린앤가? 정 시름 안놓이면 집까지 데려다 주던지. 대한민국은 경찰이나 시민이나 참, 친절도하시지...

원래 꼬일대로 꼬인 심기 때문에 정석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성으로 손만 휙내저었다.

석호의 세방이 원래 지대높은 산동네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빌라형주택 옥탑방이라 그는 거의 기다시피 옥탑방까지 간신히 올라왔다. 술취했을 땐 겁없이 금방이곳을 떠난다고 의기양양 했지만 정작 술깨고보면 모든것이 허황하기 짝이없다. 뛰어봤자 벼룩이라 좋으나 궂으나 대한민국에서 정석호가 엉덩이 들이밀 자리는 오로지이곳밖에 없었다.  

석호는 방안에 들어갈 대신 큰 시름이라도 던듯 옥탑방 난간대에 몸을 맡기고 한강야경을 굽어보았다. 얼마전 한강다리 우에서 바라보던 야경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바로 산동네 제일 높은위치에 자리잡은 삼층주택이고 게다가 그꼭대기에 들어앉은 옥탑 방이니 한강다리로부터 금방 자기가 간신히 걸어온 경로를 한눈에 볼수 있었다.

참 멋진 곳이야.

석호는 저도 몰래 감탄했다. 순간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아모순에 빠져들었다.

근데 왜 이방이 싫어지고 이동네가 싫어질까? 비록 산동네라지만 따지고 보면 공기좋고 전망좋고 조용하고 방세싸고… 어느모로 봐도 그의 선에선 괜찮은 방이고 동네다. 근데 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밤공기는 더욱 쌀쌀해졌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들여다보니 바야흐로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공기가 차질수록 흐리멍덩하던 석호의 머리는 점점 냉정을 되찾아갔다.

대개 술 취했던 사람들이 경험이 대부분 그러다시피 일단 술깨면 자기의 지난 어리석은 행위를 꼼꼼히 뒤새겨보고 후회하고 사과하고... 정석호도 예외가아니다. 가끔필름이 끊겼지만 그는 냉정히 자기가 오늘밤, 아니다 자정이 지났으니 지난밤 자기가벌렸던 행각들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만약 어릴 때부터 한고향 한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 김창수의 호출만 아니었어도아마 그는 그모임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 갔을것이다. 왜냐하면 김창수가 아니면 그를 불러줄 사람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김창수는 동기생가운데 유일한 대졸생이기도 했다. 중국쪽 무슨 무역대표로 얼마전 한국에 나와 있는다고 하는데 그가 무슨 무역을 하던 상관이없고 그냥 소시적 친한 사이고 가끔 친구덕에 값비싼 술을얻어먹을때도 좀좀 있었다.   

모임장소가 바로 그가 입국할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조선족타운” 대림동이라고한다. 하기야 정부차원에서 “조선족타운”이라고 공식적으로 내린 공문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지만 매번 명절 연휴는 두말것없고 매주말만 되어도 무슨 축제라도 있는듯 사처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조선족”들이니 궂이 누가 이름을 달아 주지 않아도 대림은 역시 연변조선족들이 “메카”가 틀림없었다. 고향에선 절대 느낄수 없었던 고향사람들의 놀라운 응집력이다.

석호가 고향친구 모임에서 몸을 뺀지도 벌써 삼사 년은 잘되는것같다. 애초 무슨이유 때문에 고향동료들과 사이가 어색해지고 점점 멀어지게 되였는지 그자신도 똑똑히 알수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어떤 이름모를 힘에 동료들 그룹에서점점밀려나고 있음을 그는 관능으로 느끼게되였다...

가끔 김창수와 단둘이 만나 술잔 나눌때가 있었지만 분명 이번만은 김청수 한사람이 아닐거란 예감이들어 몹시 주저했다. 비록 홀로하는 인생이 미치도록 외롭고 쓸쓸했지만 정석호는 이젠 그 외로움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가자니 친구의 호출을 거절할수가 없었다. 김창수는 나름대로 그 자신 스스로가 인정하는 사내고 친구다. 작업현장하고 거리가 꽤 먼 거리라 석호가 모임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술좌석이 시작된 후였다. 홀 코너쪽 큼직한 둥근상에 둘러앉은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이쪽이야

김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호 쪽을 향해 손짓했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김창수가 반색하며 손을 내 밀었다. 헌데 둘러앉은 다른 친구들 거의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 보나마나 반기는 눈치가 아니다. 병호, 영수, 경철이, 칠성이... 전부가 고향 한 시내에서 유치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들이다. 헌데 그를 당혹하게 한건 여러 낯익은 얼굴들 가운데 끼어 앉은 한 여인의 얼굴이다. 기억에서 사라질까하면 다시 등장하는 얼굴, 아니 여인을 탓 할일이 아니다. 정확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재등장 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역시 한동네에서 살던 동갑내기이자 전임마누라였던 인숙이다. 순간 석호는 친구 창수가 얄밉기만 했다. 물론 창수가 일부러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이모임에 불러들인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석호는 이장소가 자기가 올 장소가 아니란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도대체 자기가 세상을 등지려하는지아니면 세상이 자기를 외면하는건지 모를일이지만 석호는 한시라도 이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냥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석호는 손을 들어 고향동료들에게 어수선한 인사를 건넜다. 와중에도 그는 이미 술 몇잔이나 했는지 발갛게 상기된 여인의 얼굴을 일별했다.일부러 보여주려고 그러는건지 여인한테 바짝 붙어앉은 영수, 두 남녀는 새로 나타난정석호를 아예 투명인간취급하고 희락 거리며 뭔가 주거니 받거니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너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다는 그런 상이다. 혹시 지금은 아니지만 지난날 적어도 여인과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부부간이 였으니 아마도 여인이 어색한 대면을 피하려고 일부러 쇼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불쾌감은 여전했다. 게다가영수 역시 한고향 한동네 한 학교 다니던 불알친구다. 하긴 리혼한지도 꽤 세월이 흘렀으니 여자한텐 아무 감정없다 쳐도 별스럽게 곁에 앉은 사내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봐야하나...

완전히 개무시당한 기분이다. 생각 같아서는 앞에 놓인 맥주병으로 사내의 정수리를 내리 까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뿐이다. 그다음부터 알송달송 생각이 잘 떠오르지않는다. 하루 일당이 얼마라고 큰소리 자랑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고향에서 잘나가고 있는 자식자랑... 이미 술이거나해진 동료들의 끼리끼리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곁에 앉은 김창수가 술을 따르며 뭐라고 계속 주절거리는 같았는데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그저 애꿎은 술만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다음은 역시 알쏭달쏭하지만 아마도 술병을 영수 쪽에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를 느끼며 정석호는 술을 거의 깨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자신을 그는 이제야 발견하는듯 했다.       

내가 왜 이럴까...

그제야 으스스 옥상바람을 느낀 정석호는 그냥 상징적으로 걸어놓은 자물쇠를 벗기고 방안에 들어섰다. 하기야 털어봤자 먼지뿐인 싸구려 월세 방이니 욕심난게 있으면 전부다 털어가라는 배짱으로 그는 일 년 내내 거의 집 문을 잠그지않고 나다녔다.

늦은 심야인데도 별안간 주머니에 핸드폰이 울렸다. 김창수다.

—노래방 호프집까지 거치다보니 이제야 끝났다. 너 왜 하지 않던 지랄하고 그래.

—내가 뭘? 근데 왜 그 엿 같은 장소에 날 불렀어.

—병이 빗나갔으니 다행이지 너 오늘 하마터면 큰 사고 칠 번한 걸 기억하나?

보아하니 금방 어렴풋이 떠올랐던 기억이 사실인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일요일이니 만나자. 할 이야기도 있고. 아, 그리고 내가 찾아갈 테니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상대의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김창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역시 김창수의 스타일이다.

지랄, 오면 어쩔건데...

석호는 입속으로 투덜대며 입은 옷 그대로 일 년 내내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이불속으로 기여 들어갔다. 그나마 엉덩이를 들이밀 쪽방이라도 있으니 망정이지 거리에 떠도는 노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잠을 청한다고 이불속에 기여 들었지만 아무래도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는 이불속에서 다시 기여 나와 마치 오토바이엔진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리는 고물냉장고 문을 열고 반병쯤 남은 <참이슬>을 꺼내들었다. 당뇨병종합증이 오기 직전이니 술은 절대 금물이란 의사선생의 경고도 진작 있었건만 잠을 청하기엔 역시 술이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병이 빗나갔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 칠 번했다는 창수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울렸다. 근데 누구도 아니고 하필이면 영수 쪽에 술병을 던졌을까?

실은 정석호가 자정 넘은 이시각 술병을 찾는 데는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어쩌면 맑은 정신보다 흐릿한 정신 속에 지난밤 자기의 실수에 대한 합리한 구실을 찾으려는데 있는것 같았다. 술취하고도 기어이 않취했다고 우겨대는 술주정군들의 동질성이기도했다.     

만약 웬수같은 김영수만 아니였어도 지난밤같은 실수는 없었을것이다. 한동네에서 불알친구로 자랐다지만 그속내를 영원히 알수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정석호가 비몽사몽중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을 땐 해가 이미 중천에 걸렸을 때다.  집 밑에 순대국집에 와 있으니 해장도할겸 내려오라는 김창수의 호출이다.

새벽부터 호들갑이더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거절할수없는 친구의 호령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창수는 지금 그한테 하나밖에 남지않은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수가 동기생가운데 유일한 대졸 생이라고 마구 신종<臣從>하는건 아니지만 김창수는 역시세상물정에 대해 남다른 일가견이 있다는 그나름의 주장에서였다.

냉장고에서 찬생수 한병 꺼내 몇모금 벌컥벌컥 들이마신후 그는 급급히 밖을 나섰다.

<순대국>집에 들어서니 창수가 순대국 두그릇 이미 주문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 낮이고 어제 술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그냥 밥만 먹자.

순대국에 새우젓이요 파요 이것저것 집어넣으며 간을 맞추느라 분주히 서두르는 김창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석호가 입을 열었다.

—집 밑에까지 와 밥사주다니 고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속이 허전할 테니 일단 밥부터 먹자. 당뇨병환자가 굶으면 안되지.

—뭐야? 내가 당뇨환자인 줄 네가 어떻게 알아?

정석호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자기가 당뇨병 환자란걸 그누구에게도 이야기한기억이 없었다.

—세상에 비밀이란게 있냐?

창수는 무척 허기졌는지 뜨거운 국을 훌훌 불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얼마 안되는 밥값이라지만 자기집 문앞에서 친구를 계산하게 할수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석호는 창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카운터에 계산을 마쳤다.

ㅡ자식 급하긴, 뭔 돈이 있다고.

ㅡ아무리 거지같아도 친구한테 순대국 한그릇살 돈은 있다야. 헤헤...

늘 그늘졌던 석호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어렸다. 그들은 식당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씩 뽑아들고 파라솔이 걸쳐있는 식당마당 벤치로 나갔다.

—나 엊저녁 네 행동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실 말이다 어제 널 그 좌석에 부른건 누군가의 부탁 때문이야.

김창수가 슬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 답답하게 폼 그만잡고 본론이나 말씀해보시지. 도대체 누구의 부탁을 받았다는 거지?

—네 전임 마누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여편네가 왜?

정석호는 김창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 나도 곁에서 똑똑히 봤지만 인숙이가 좀 반상적이였지. 아마 널 집적 대하기가 민망해서 일부러 그랬을거야. 네가 당뇨병이 심하다는걸 아마도 네아들한테 들은것 같더구나. 당뇨병은 부자 병이라 하던데 부자도 아닌놈이 무슨놈의 당뇨병... 실은 네 아들이 한화 천만이나 되는 돈을 아버지한테 전달하라고 엄마한테 맡겼다고 하더라. 물론 헤어진지도 오래고 집적 만나서 아들돈 전한다는것도 어색하겠지. 그래서나한테 부탁하더구먼. 가만보자, 이제 보니 이놈 엉뚱한 놈이네. 제 어미 시켜 제아비한테 돈을 전한다. 역시 배운놈 다르군. 너 뭐가 짚이는 데가 없냐? 하긴 좀 어처구니가 없지만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알게 아니냐. 인숙이 말로는 너들이 헤어진 이유라면 헤어져 산 시간이 하도 길어 그냥 헤어진 거라던데 옛날 같으면 어처구니없는 이유겠지. 하지만 요즘은 그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냐. 조석으로 붙어살던 부부간도 별큰 리유가 없이 훌훌 갈라지는 세월이 아니냐. 네가 한국 나온 시간을 십년 잡는다면 인숙이는 어언간 이십년이란 세월을 잡네. 좀 용기를 내면 뭔가 좋은일 생길것 같기도 한데 아들 봐서라도 이친구야, 좀 긍정적으로 살면 안되겠니? 거지처럼 혼자 살지 말고 본처한테 점수를 좀 따려무나...

—나 원, 미친 놈...

김창수의 의도가 뻔했다. 정석호는 그냥 쓴웃음 짓고 말았다. 그제야 얼마전 집에서 인슐린을 주사하려고 한창 배꼽 밑을 까는데 온다는 기별도 없이 여름철 활 열어놓은 집문으로 별안간 들이닥친 아들때문에 와들짝 놀란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까지 나온 아들이 지금 아비가 무슨 주사를 맞는지 모를리가 없었다. 학교 졸업하고 중국 무슨 회산가 취직한 아들이 회사일 때문에 일본출장 가던 도중 한국에 사는 아버지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들렸다는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이 몇 걸음 걸어 마실 다닐 거리도 아닌데 아들은 마치 이웃동네에서 놀러온 듯 말한다. 세상이 작아지길 참 희한한 세월이다. 그때 아들은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다. 집적 자기가 전달해도 무난하겠는데 일부러 제 어미를 통해 돈을 전달하는 아들의 깊은 속내를 지금 김창수가 말하고 있었다. 그냥 어린애로만 알았던 아들이 어느 사이에 저렇게 자랐는지정석호는 그만 짠한마음을 금치못했다.

—천 만 원이면 작은 액수가 아닌데 그 녀석 지금 엄청 잘 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야.

그러면서 김창수는 5 만 원권 한화 한 다발을 석호에게 넘겨주었다.

정석호는 간만에 가슴속 희열을 느꼈다. 물론 돈보다 그동안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한 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말이야 또 딴 문제가 있다. 엊저녁 네가 딴 사람도 아니고 영수 한 사람만 골라서 병을 집어던진 이유에대해 한동안 고민했지.

—뭐긴 뭐야... 그냥 술 취해 그런거겠지...

정곡을 찔린 석호는 창피한 듯 입속으로 얼버무렸다.

—변명할 필요가 없어. 남자라면 너의 입장이 되고보면 대개 다그럴거란 생각이 들었어. 이해한다. 근데 말이다 문제는 영수 그놈이다.

—뭐?

정석호는 친구의 느닷없는 돌변에 깜짝 놀랐다. 당연히 야유와 꾸중을 각오했는데 실로 생각 밖이다.

—너나 나나 영수와 한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가 아니냐? 걔가 아이 적부터 심리상 좀 남다르다는걸 너도 발견했겠지.   

—그런 같기도 한데 도대체 뭐가 다른지 알수없어...

—너 혹시 <뮌하우젠 증후군>란 이야기 들어봤냐? 당연 처음듣는 소리겠지...   

김창수가 뭔가 또 엉뚱한 화제를 끌고 나왔다.

—지랄, 무식한 놈이 옮기기도 힘든 그런 얘길 어디서 들었겠냐?

정석호가 약간 비꼬는 어투로 투덜거렸다.

—하긴 그렇기도 하네. 쉽게말하자면<뮌하우젠>은 19세기 독일의 한귀족의 이름인데 대단한 허풍쟁이란다. 새빨간 거짓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것이 바로 그의 특기기도 했지. 헌데 때론 새빨간 거짓말도 인기몰이할때가 있지않겠나. 누군가 뮌하우젠의 허풍을 이야기로 역어 <뮌하우젠 남작의 놀라운 모험>이란 책을 출판했다고한다. 그후 리쳐드 매셔란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이책에서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하긴 네 말마따나 번지기도 힘든 이름이니 일단 앞에 이름만 빼버고 그냥 <증후군>이라 부르자. 일종 정신질환인데 증상이라면 거짓말 혹은 자해로 딴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는것이 기본이고 심할 경우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조작하거나 꾸며대기도 한단다.

김창수가 또 뜸을 들이며 이미 다식은 커피를 후루룩 들이마셨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행위가 자칫하면 곁에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다는 거다.

마치 대학 강사의 강연 같은 창수의 역설을 석호는 도저히 알아들 수 없었다.

—교수님 무슨 말씀이신지? 나 무식하니 좀 알아듣게 얘기해주시지.

역시 대학물을 먹은 놈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는 아직도 창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쩍하면 자살소동을 일으키던 영수가 생각나? 그래서 그 자식은 늘 선생님의 관심과 우리들의 보호 속에서 놀았지. 근데 그버릇이 어른이 돼서도 고쳐지질 않았다는거지. 얼마 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건데 알고보니 우리친구 영수가 바로 그런 <증후군>환자였어.

—그게 뭔데?

아직도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숭한 정석호다.

—언제부턴가 우리 친구들 사이에 영수가 시간이 얼마 남지않은 불치증 환자란 소문이 떠돌았지. 물론 영수본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설령 그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젠 믿음이 안가. 하도 거짓말이 많은 인간이니깐. 솔직히 말해 개인적으로 영수한테 특별한 편견이 있는건 아니야. 필경 우린 같은해에 태여나서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다니던 죽마고우가 아니냐. 대신 우린 서로 상대방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나와 무슨 상관인데...

정석호가 그만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뮌하우젠 증후군>의 증상의 하나가 자해하여 남들의 동정심을 사는 것이고 또 다른 증상의 하나는 타인을 물어 또 다른 타인의 동정심을 얻는 것이다. 근데 그 두 번째 증상의 피해자가 바로 너란 말이다 이 바보야. 더 궁금하면 인터넷 한번 뒤져봐. 당연 넌 알수 없겠지만 그동안 영수는 친구들 사이에 돌아다니며 너 정석호는 일관적으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악마였고 너들의 이혼이 마치 네 폭력 때문에 생긴 일인듯 전하고 다녔단다. 더 어이가 없는건 자기 이혼도 마치 너와 관계 있는듯 떠들었다니 이게 말이 되나? 뭐 네가 집에 갔을 때 자기 마누라에게 있지도 안은 자기 흉허물을 했다나 뭐라나. 걔 마누라가 집 나간지가 언젠데. 아마 네가 한국에 오기 전 집 나갔을걸. 이건 나도 아는 일이야.  

정석호는 그냥 어이없는 눈길로 김창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물론 너한텐 말이 안 되겠지만 걔한텐 말이 되지. 한마디로 영수는 널 물어서 자신을 피해자 또는 정의감 있는 천사로 분장하고 또 시한부환자로 둔갑하여 친구들의 동정심을 산거지. 얼핏 보면 별거 아닌 작은일 같지만 세치혀가 사람 잡는다고 했다. 그뒤엔 누군가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야만 했겠지. 그 고통을 받아 안은 장본인이 바로 너란 말이다. 네가 취중에 영수한테 술병을 집에 던지건 어떤 직감에서 온 충동이겠지만 영수입장에선 소원성취를 한 셈이지. 걔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거니깐. 마치 봐봐, 내말이 틀리나 얘는 이런 폭력배라니깐. 사실 자기 거짓말을 숱한 사람 앞에서 사실로 입증한 거란 말이다.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이라 했다. 잔머리 굴리는 덴 역시 영수가 천재가 아닐까...

별안간 뭔가 정석호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이 의기소침한 반노숙자로 타락했는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주 빠른 한국생활에서 허구한 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보니 이른바 희로애락이 뭔지 느낄 사이도 없이 세월을 보낸것 같았다. 유일한 즐거움이란 짬짬이 낚시하고 고향친구 만나서 술 한잔 나누며 수다 떠는 것이 전부다. 헌데 언제부턴가 그는 친구들로부터 영문 모를 따돌림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 전화도 잘 통하지 않고 짬만 나면 진행되는 모임에도 불러주질 않는다. 만약 얼마 전 한국에 들어온 창수만 아니었어도 그는 엊저녁 같은 장소에 갈수가없었다. 그나마 즐기던 작은 즐거움마저 사라져버린것이다. 도대체 친구들한테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같이 연락을 끊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속 터지는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끔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자기가 지금 억울함을 당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추측에 불과했다.

—나와 영수는 전에 그 어떤 모순마찰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이건 너도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근데 걔가 왜 날 해꼬지 하는거지?

—그러니깐 환자라는 거야.

정석호는 몇년 묵었던 체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시원치가 않았다.

—근데 한국에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영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아냐? 무슨 증거라도 잡은 거야? 아니면 누구처럼 추측하고 추리한 것인가...

—추측이건 추리건 무슨 상관이냐? 네 억울함만 풀면 되는거지. 안그래? 반증론법으로 봐도 너한테 문제가 없으면 당연히 영수한테 문제가 있는거겠지.

—여하튼 믿어줘서 고맙다.  

사실 정석호는 진심으로 친구 김창수가 고마웠다. 마치 더러운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기분이다. 이제 깨끗한 물에 씻으면 기분이 더욱 홀가분해질 것이다.

—근데 말이야 너 절대 영수 그인간을 찾아가 보복하거나 다른 미련한 짓 하지 말라. 다시한번 말하는데 걔는 환자야. 어떻게 영수가 문제 있는 애라는 걸 알았냐구?간단하지. 한국 나와 우리 불알친구들과 몇 번 모임이 있었는데 매번 너만 빠지는 것이 이상했거든. 애들한테 이유를 물었더니 널 자기 가정과 남의 가정을 파괴한 몹쓸 인간으로 취급하더군. 그래서 내가 네 전처 인숙이를 포함해서 약간 뒷 조사를 해본거야. 영수가 정말 불치증에 걸렸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걔가 너한테 없는 누명을씌운 것만 사실이지. 너에 관한 일들을 영수한테 집적 물었더니 자긴 그런말 한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더구나. 사실 번연한데 더 따질 필요가 있겠나.

—역시 책가방 끈 긴 놈이 다른 긴 다르군.

—당연하지. 여하튼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부터라도 가슴 쭉 펴고 친구모임에랑 다녀. 사실 엊저녁 네가 술좌석에서 나간 후 나는 친구들한테 너에 관한 일들을 전부털어놓았다. 모두 너한테 미안해하더구나. 가뜩이나 힘든 한국생활에서 있지도 않는 루명을 뒤집어썼으니 많이 힘들었겠지. 재미있는건 꽤나 술을 잘 마시던 영수가 약먹을 시간이 됐다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가던데 불치병 환자가 술먹고 약먹고 이게 또 말이 되냐? 흐흐...

—야 창수야, 어디가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할까?

문득 정석호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야가 돌았나. 금방 밥 먹고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

—어차피 쉬는 날인데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한국인들은 밥 먹은 뒤 술 먹더라. 그냥 날 환송하는 셈치고...

—환송이라니?

김창수가 의아한 눈길로 석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기분이 홀가분할 때 고향으로 가야지. 진작 고향으로 가고 싶었는데 늘무거운 짐을 지고 누구한데 쫓겨 가는 기분이 싫었어. 내가 왜 쫓겨가야하나? 이제야이유를 알 것 같다. 네가 그 무거운 짐을 내려 준거지. 넌 역시 좋은 친구야.

—여기 아직 할 일도 많은 같은데 불시에 고향 행이라니 웬 말이냐? 그리고 고향엔 아무도 없잖아?

김창수가 할 일이 많다는 의미가 아마도 석호네 부부간에 일을 두고 하는 얘길 것이다;

—그래 아무도 없지. 근데 아무래도 그쪽이 내 안식처 같다. 시골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채소 가꾸고 낚시하며 살란다.

—시 읊나? 랑만이 넘치네.

—진짜야. 고향엔 산 좋고 물 좋은 오지가 많잖나. 설마 내가 궁뎅이 들이밀 자리가 없겠냐. 대한민국은 살기가 좋은 나란데 마냥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지. 이젠 힘들어. 달릴 수가 없단 말이다.

한동안 정석호를 응시하던 김창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가자, 한잔하러. 환송식은 해야 하지...           

며칠뒤 김창수는 정석호의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ㅡ집에 갈 비행기표 끊었어. 오늘 오후 떠날꺼야. 그리고 말이야 널 못 믿어그런건 아니고 이곳을 떠나기전 나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어. 넌 역시 천재야. 영수 그자식 불치증에 걸렸단건 진짜 새빨간 거짓말이였어.

ㅡ어떻게 알아냈어?

ㅡ나만의 방식대로 흐흐... 무식한놈 무식한방법으로 알아낸거지.

ㅡ너 혹시 허튼수작 한건 아니지? 폭력썼어?

ㅡ폭력은 무슨... 원래 담이 콩알만한 놈이니 몇마디 으름짱으로도 충분하더군 하하...   

            

          2021,5,17  도문에서

단편소설              

증후군

강호원

지대 높은 다리 위가 대서 그런지 이제 금방 초가을 접어드는 날씨치고는 꽤나 쌀쌀하다. 멀리 구름사이 어스름한 달빛을 배경으로 뚝방아래 멋진 자세로 낚시대를 휘두르는 밤 낚시꾼들이 모습이 마치 명화백의 붓끝에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바야흐로 더운 여름 막바지를 알리는 듯 뚝 방 버들 숲에서 지친 매미들이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이봐 뭐라도 소식 있나?

—이맘때면 입질할 때도 됐는데 이상하네...

낚시 동료인듯 두사내가 강기슭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솔솔 부는 강바람을 타고 교량안전난간 대를 잡고 멍하니 다리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석호의 귀에까지 띄엄띄엄 들려왔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석호는 취했던 술이 조금씩 깨는 것 같았다.

참 여유있고 행복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몇 년전인가 무슨 바람이 일었던지 낚시질에 열을 올렸던 자신이 문뜩 떠올랐기 때문이다.비싼 낚시도구엔 감히 엄두를 못 내고 동대문시장에서 전문 사구려 낚시도구들만 골라 그런대로 돈이 안드는 공짜 낚시터에 나설수가 있었다. 그 낚시터가 바로 지금 두낚시꾼이 차지하고 있는 저자리다. 하기야 바다건너 돈벌러 왔다는 놈이 허구한날 낚시대나 메고 괜히 폼 잡지않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그냥 재미로하는 낚시니별거아니라고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면서 슬슬 낚시질에 열을 올렸던것이다. 느닷없이낚시에 취미를 가진 계기도 아마 한국 와서 처음 얻은 세 방이 바로 이곳 한강대교 부근이고 그러다 보니 그나마 서울 도심에선 청정지역이라 할수 있는 이곳을 자주 거닐다가 나중엔 알게 모르게 강변 낚시질과도 피치 못할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도그럴것이 차량이 분비고 인구가 밀집한 도심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숲이있다는 자체가 그로선 신비할따름이였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도 산좋고물맑은 오지에 작은 집짓고 낚시하며 살리란 생각도 가끔 해보았다. 실로 그때까지만해도 지칠 줄 모르는 정석호다. 거의 날마다힘든 현장 일을 끝내고도 휴식을 취하기보다 낚시연장들을 챙겨들고 강가로 향할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그때가 그로선 한창 의욕과 정열이 넘칠 때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열정이 점점 식어 감을 의식했다. 그동안 챙겨 모았던 낚시도구들도 언제부터 주인집 다락방에 처박았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물론 하던 짓을 계속하다 보면 지겹고 질려서 그만두는 경우도 있겠지만 낚시뿐 아니라 어쩐지 여러 면으로 의욕을 잃어가는 자신을 그는 의식했다.

가급적이면 휘청거림을 자제하려고 정석호는 난간 대를 잡고 간신히 움직였다. 도대체 집 방향으로 가는 건지 엉뚱한 반대쪽으로 가는건지 그는 관심조차 없었다. 숨 히는 고독 때문일까? 어차피 오늘도 근 십여년간 지겹게 살아온 작은 세방에 기어들어가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온지도 어언간 십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근데 이 길지도 짧지도 않는 십여년을 자신은 도대체 뭘하고 세월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사이열심히 일다니고 돈버는데 열중했을것이다. 그렇다고 그사이 돈벌어 금산은산을 쌓은것도 아니다. 하기야 한국에 입성한 초창기엔 좀 괜찮았는지 모르나 지금은 그냥 하루벌어 하루사는 꼴이다. 게다가 이젠 몸도 망가져 병원신세를져야한다. 헌데 그를더욱 괴롭히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독한 고독이다. 대체 한인생에 몇개의 십년이 들어있는데 마냥 이런 꼴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백세시대라고 떠들어대는데 그로선 참으로 긴세월이 아닐수없다.

정석호는 허무한듯 다시 난간 대를 잡고 다리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잔뜩머금은 강물이 흐느적흐느적 춤을 춘다. 마치 어서 아래로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석호는 난간대에 바짝붙어섰다.

ㅡ어이, 아저씨, 게서 뭘하는겨.

저녁운동을 나왔는지 인행도로 자전거타고 지나가던 웬 중년남자인듯 사내가 자전거를 멈추고 나간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석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ㅡ아, 아닙니다. 밤 낚시구경 좀...

ㅡ사고 안나게 조심하세요.

그제야 사내가 자전거를 다시타고 인행도로를 휙 지나갔다.

어딘가 호령에 가까운 사내 격한 목소리에 정석는 전기에나 닿은듯 흠칫하고 난간 대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희미한 교량조명등에 난간대 새겨진 글들이 시야에들어온다.하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이다리를 오가며 눈에 익혀온 글들이다. 대부분 명인들의 서명으로 된 자살을 막는 권고문들이다.        

졸지에 정석호는 속이 섬뜩해지며 전신에 힘이 쭉빠졌다. 어디든 들어눕고 싶었다. 자기가 왜 이한밤중에 술취해 이 다리 위에서 오락가락 방황하는지 그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봐요. 여기서 이렇게 쉬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심하게 자기 몸을 잡아 흔드는 같아 정석호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흐릿한 시각에 경찰관 두 명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술 많이 드신 것 같은데 대교인행도 가운데서 이렇게 쉬시면 안 되죠. 큰일 납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머리가 금방 빠개질듯 사위가 빙빙 돌아갔다. 마침 가까이 있던 경찰관이 그를 부축해 길바닥에서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이 길바닥에 누워 있은 같은데 날은 아직도 어두운 그대로다.

—근데 왜 이 한밤에 여기에 나오신 거죠?

경찰이 의아한 눈길로 안전난간 쪽을 일별했다.

—아, 그게 아니고…

원래 요즘 자살대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이라 정석호는 경찰의 말뜻을 대뜸 알아들을수가 있었다. 정석호는 급급히 해설을 늘여놓았다.

—저희가 원래 낚시를 좋아하거든요. 지난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헤어진 후…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역시 경찰관답게 시간을 확실히 제시한다.

—아 그래요? 그러니깐 친구들과 헤어진 후 마침 집도 이부근이라 아마 술김에 낚시구경 나온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자리에 퍼진거구요.

—그러시구만. 근데 댁이 이근처라고 하시니 어떠세요, 홀로 댁까지 갈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가고말고요. 여하튼 심려를 끼쳐 미안합니다.

정석호는 급기야 자리를 뜨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경찰관이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냥 공식 사항이라고 생각하세요. 신분증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누가 경찰이 아니랄까 봐.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네 이름이 경찰이니깐.

정석호는 속으로 게두덜거리면서 지갑 속에서 외국인신분증을 꺼내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경찰관은 지체없이 가까운 도로변에 세워둔 경찰차로 다가갔다. 당연히 신분증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 교포 분이시구먼. 근데 참 티 안나게 한국말을 잘 하십니다. 그쪽 분들의 억양은 좀 다르던데.

도대체 칭찬인지 야유인지 경찰관이 이미 확인을 마친 신분증을 정석호에게 넘겨주며 이름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적어도 정석호에겐 그렇게 보였다.

—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어쩌다 이 주제꼴이 됐습니다. 중국놈도 한국놈도 아닌 병신이 돼버린거죠.  

정석호가 신분증을 지갑 속에 집어넣으며 어딘가 시큰둥한 어조로 게두덜거렸다

—참 재미있는 아저씨구먼. 그나저나 조심해 가세요. 심야라지만 다니는 차량들이 많습니다. 횡단보도 건너실때 각별히 신경을 쓰시고요.

—알겠습니다.

석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천천히 집 방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 조심해 건너세요.

뒤에서 경찰관이 시름이 안놓이는듯 다시 한번 주의를 준다.

염병, 어린앤가? 정 시름 안놓이면 집까지 데려다 주던지. 대한민국은 경찰이나 시민이나 참, 친절도하시지...

원래 꼬일대로 꼬인 심기 때문에 정석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성으로 손만 휙내저었다.

석호의 세방이 원래 지대높은 산동네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빌라형주택 옥탑방이라 그는 거의 기다시피 옥탑방까지 간신히 올라왔다. 술취했을 땐 겁없이 금방이곳을 떠난다고 의기양양 했지만 정작 술깨고보면 모든것이 허황하기 짝이없다. 뛰어봤자 벼룩이라 좋으나 궂으나 대한민국에서 정석호가 엉덩이 들이밀 자리는 오로지이곳밖에 없었다.  

석호는 방안에 들어갈 대신 큰 시름이라도 던듯 옥탑방 난간대에 몸을 맡기고 한강야경을 굽어보았다. 얼마전 한강다리 우에서 바라보던 야경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바로 산동네 제일 높은위치에 자리잡은 삼층주택이고 게다가 그꼭대기에 들어앉은 옥탑 방이니 한강다리로부터 금방 자기가 간신히 걸어온 경로를 한눈에 볼수 있었다.

참 멋진 곳이야.

석호는 저도 몰래 감탄했다. 순간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아모순에 빠져들었다.

근데 왜 이방이 싫어지고 이동네가 싫어질까? 비록 산동네라지만 따지고 보면 공기좋고 전망좋고 조용하고 방세싸고… 어느모로 봐도 그의 선에선 괜찮은 방이고 동네다. 근데 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밤공기는 더욱 쌀쌀해졌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들여다보니 바야흐로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공기가 차질수록 흐리멍덩하던 석호의 머리는 점점 냉정을 되찾아갔다.

대개 술 취했던 사람들이 경험이 대부분 그러다시피 일단 술깨면 자기의 지난 어리석은 행위를 꼼꼼히 뒤새겨보고 후회하고 사과하고... 정석호도 예외가아니다. 가끔필름이 끊겼지만 그는 냉정히 자기가 오늘밤, 아니다 자정이 지났으니 지난밤 자기가벌렸던 행각들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만약 어릴 때부터 한고향 한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 김창수의 호출만 아니었어도아마 그는 그모임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 갔을것이다. 왜냐하면 김창수가 아니면 그를 불러줄 사람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김창수는 동기생가운데 유일한 대졸생이기도 했다. 중국쪽 무슨 무역대표로 얼마전 한국에 나와 있는다고 하는데 그가 무슨 무역을 하던 상관이없고 그냥 소시적 친한 사이고 가끔 친구덕에 값비싼 술을얻어먹을때도 좀좀 있었다.   

모임장소가 바로 그가 입국할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조선족타운” 대림동이라고한다. 하기야 정부차원에서 “조선족타운”이라고 공식적으로 내린 공문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지만 매번 명절 연휴는 두말것없고 매주말만 되어도 무슨 축제라도 있는듯 사처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조선족”들이니 궂이 누가 이름을 달아 주지 않아도 대림은 역시 연변조선족들이 “메카”가 틀림없었다. 고향에선 절대 느낄수 없었던 고향사람들의 놀라운 응집력이다.

석호가 고향친구 모임에서 몸을 뺀지도 벌써 삼사 년은 잘되는것같다. 애초 무슨이유 때문에 고향동료들과 사이가 어색해지고 점점 멀어지게 되였는지 그자신도 똑똑히 알수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어떤 이름모를 힘에 동료들 그룹에서점점밀려나고 있음을 그는 관능으로 느끼게되였다...

가끔 김창수와 단둘이 만나 술잔 나눌때가 있었지만 분명 이번만은 김청수 한사람이 아닐거란 예감이들어 몹시 주저했다. 비록 홀로하는 인생이 미치도록 외롭고 쓸쓸했지만 정석호는 이젠 그 외로움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가자니 친구의 호출을 거절할수가 없었다. 김창수는 나름대로 그 자신 스스로가 인정하는 사내고 친구다. 작업현장하고 거리가 꽤 먼 거리라 석호가 모임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술좌석이 시작된 후였다. 홀 코너쪽 큼직한 둥근상에 둘러앉은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이쪽이야

김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호 쪽을 향해 손짓했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김창수가 반색하며 손을 내 밀었다. 헌데 둘러앉은 다른 친구들 거의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 보나마나 반기는 눈치가 아니다. 병호, 영수, 경철이, 칠성이... 전부가 고향 한 시내에서 유치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들이다. 헌데 그를 당혹하게 한건 여러 낯익은 얼굴들 가운데 끼어 앉은 한 여인의 얼굴이다. 기억에서 사라질까하면 다시 등장하는 얼굴, 아니 여인을 탓 할일이 아니다. 정확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재등장 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역시 한동네에서 살던 동갑내기이자 전임마누라였던 인숙이다. 순간 석호는 친구 창수가 얄밉기만 했다. 물론 창수가 일부러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이모임에 불러들인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석호는 이장소가 자기가 올 장소가 아니란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도대체 자기가 세상을 등지려하는지아니면 세상이 자기를 외면하는건지 모를일이지만 석호는 한시라도 이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냥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석호는 손을 들어 고향동료들에게 어수선한 인사를 건넜다. 와중에도 그는 이미 술 몇잔이나 했는지 발갛게 상기된 여인의 얼굴을 일별했다.일부러 보여주려고 그러는건지 여인한테 바짝 붙어앉은 영수, 두 남녀는 새로 나타난정석호를 아예 투명인간취급하고 희락 거리며 뭔가 주거니 받거니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너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다는 그런 상이다. 혹시 지금은 아니지만 지난날 적어도 여인과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부부간이 였으니 아마도 여인이 어색한 대면을 피하려고 일부러 쇼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불쾌감은 여전했다. 게다가영수 역시 한고향 한동네 한 학교 다니던 불알친구다. 하긴 리혼한지도 꽤 세월이 흘렀으니 여자한텐 아무 감정없다 쳐도 별스럽게 곁에 앉은 사내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봐야하나...

완전히 개무시당한 기분이다. 생각 같아서는 앞에 놓인 맥주병으로 사내의 정수리를 내리 까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뿐이다. 그다음부터 알송달송 생각이 잘 떠오르지않는다. 하루 일당이 얼마라고 큰소리 자랑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고향에서 잘나가고 있는 자식자랑... 이미 술이거나해진 동료들의 끼리끼리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곁에 앉은 김창수가 술을 따르며 뭐라고 계속 주절거리는 같았는데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그저 애꿎은 술만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다음은 역시 알쏭달쏭하지만 아마도 술병을 영수 쪽에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를 느끼며 정석호는 술을 거의 깨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자신을 그는 이제야 발견하는듯 했다.       

내가 왜 이럴까...

그제야 으스스 옥상바람을 느낀 정석호는 그냥 상징적으로 걸어놓은 자물쇠를 벗기고 방안에 들어섰다. 하기야 털어봤자 먼지뿐인 싸구려 월세 방이니 욕심난게 있으면 전부다 털어가라는 배짱으로 그는 일 년 내내 거의 집 문을 잠그지않고 나다녔다.

늦은 심야인데도 별안간 주머니에 핸드폰이 울렸다. 김창수다.

—노래방 호프집까지 거치다보니 이제야 끝났다. 너 왜 하지 않던 지랄하고 그래.

—내가 뭘? 근데 왜 그 엿 같은 장소에 날 불렀어.

—병이 빗나갔으니 다행이지 너 오늘 하마터면 큰 사고 칠 번한 걸 기억하나?

보아하니 금방 어렴풋이 떠올랐던 기억이 사실인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일요일이니 만나자. 할 이야기도 있고. 아, 그리고 내가 찾아갈 테니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상대의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김창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역시 김창수의 스타일이다.

지랄, 오면 어쩔건데...

석호는 입속으로 투덜대며 입은 옷 그대로 일 년 내내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이불속으로 기여 들어갔다. 그나마 엉덩이를 들이밀 쪽방이라도 있으니 망정이지 거리에 떠도는 노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잠을 청한다고 이불속에 기여 들었지만 아무래도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는 이불속에서 다시 기여 나와 마치 오토바이엔진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리는 고물냉장고 문을 열고 반병쯤 남은 <참이슬>을 꺼내들었다. 당뇨병종합증이 오기 직전이니 술은 절대 금물이란 의사선생의 경고도 진작 있었건만 잠을 청하기엔 역시 술이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병이 빗나갔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 칠 번했다는 창수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울렸다. 근데 누구도 아니고 하필이면 영수 쪽에 술병을 던졌을까?

실은 정석호가 자정 넘은 이시각 술병을 찾는 데는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어쩌면 맑은 정신보다 흐릿한 정신 속에 지난밤 자기의 실수에 대한 합리한 구실을 찾으려는데 있는것 같았다. 술취하고도 기어이 않취했다고 우겨대는 술주정군들의 동질성이기도했다.     

만약 웬수같은 김영수만 아니였어도 지난밤같은 실수는 없었을것이다. 한동네에서 불알친구로 자랐다지만 그속내를 영원히 알수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정석호가 비몽사몽중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을 땐 해가 이미 중천에 걸렸을 때다.  집 밑에 순대국집에 와 있으니 해장도할겸 내려오라는 김창수의 호출이다.

새벽부터 호들갑이더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거절할수없는 친구의 호령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창수는 지금 그한테 하나밖에 남지않은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수가 동기생가운데 유일한 대졸 생이라고 마구 신종<臣從>하는건 아니지만 김창수는 역시세상물정에 대해 남다른 일가견이 있다는 그나름의 주장에서였다.

냉장고에서 찬생수 한병 꺼내 몇모금 벌컥벌컥 들이마신후 그는 급급히 밖을 나섰다.

<순대국>집에 들어서니 창수가 순대국 두그릇 이미 주문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 낮이고 어제 술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그냥 밥만 먹자.

순대국에 새우젓이요 파요 이것저것 집어넣으며 간을 맞추느라 분주히 서두르는 김창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석호가 입을 열었다.

—집 밑에까지 와 밥사주다니 고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속이 허전할 테니 일단 밥부터 먹자. 당뇨병환자가 굶으면 안되지.

—뭐야? 내가 당뇨환자인 줄 네가 어떻게 알아?

정석호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자기가 당뇨병 환자란걸 그누구에게도 이야기한기억이 없었다.

—세상에 비밀이란게 있냐?

창수는 무척 허기졌는지 뜨거운 국을 훌훌 불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얼마 안되는 밥값이라지만 자기집 문앞에서 친구를 계산하게 할수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석호는 창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카운터에 계산을 마쳤다.

ㅡ자식 급하긴, 뭔 돈이 있다고.

ㅡ아무리 거지같아도 친구한테 순대국 한그릇살 돈은 있다야. 헤헤...

늘 그늘졌던 석호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어렸다. 그들은 식당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씩 뽑아들고 파라솔이 걸쳐있는 식당마당 벤치로 나갔다.

—나 엊저녁 네 행동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실 말이다 어제 널 그 좌석에 부른건 누군가의 부탁 때문이야.

김창수가 슬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 답답하게 폼 그만잡고 본론이나 말씀해보시지. 도대체 누구의 부탁을 받았다는 거지?

—네 전임 마누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여편네가 왜?

정석호는 김창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 나도 곁에서 똑똑히 봤지만 인숙이가 좀 반상적이였지. 아마 널 집적 대하기가 민망해서 일부러 그랬을거야. 네가 당뇨병이 심하다는걸 아마도 네아들한테 들은것 같더구나. 당뇨병은 부자 병이라 하던데 부자도 아닌놈이 무슨놈의 당뇨병... 실은 네 아들이 한화 천만이나 되는 돈을 아버지한테 전달하라고 엄마한테 맡겼다고 하더라. 물론 헤어진지도 오래고 집적 만나서 아들돈 전한다는것도 어색하겠지. 그래서나한테 부탁하더구먼. 가만보자, 이제 보니 이놈 엉뚱한 놈이네. 제 어미 시켜 제아비한테 돈을 전한다. 역시 배운놈 다르군. 너 뭐가 짚이는 데가 없냐? 하긴 좀 어처구니가 없지만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알게 아니냐. 인숙이 말로는 너들이 헤어진 이유라면 헤어져 산 시간이 하도 길어 그냥 헤어진 거라던데 옛날 같으면 어처구니없는 이유겠지. 하지만 요즘은 그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냐. 조석으로 붙어살던 부부간도 별큰 리유가 없이 훌훌 갈라지는 세월이 아니냐. 네가 한국 나온 시간을 십년 잡는다면 인숙이는 어언간 이십년이란 세월을 잡네. 좀 용기를 내면 뭔가 좋은일 생길것 같기도 한데 아들 봐서라도 이친구야, 좀 긍정적으로 살면 안되겠니? 거지처럼 혼자 살지 말고 본처한테 점수를 좀 따려무나...

—나 원, 미친 놈...

김창수의 의도가 뻔했다. 정석호는 그냥 쓴웃음 짓고 말았다. 그제야 얼마전 집에서 인슐린을 주사하려고 한창 배꼽 밑을 까는데 온다는 기별도 없이 여름철 활 열어놓은 집문으로 별안간 들이닥친 아들때문에 와들짝 놀란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까지 나온 아들이 지금 아비가 무슨 주사를 맞는지 모를리가 없었다. 학교 졸업하고 중국 무슨 회산가 취직한 아들이 회사일 때문에 일본출장 가던 도중 한국에 사는 아버지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들렸다는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이 몇 걸음 걸어 마실 다닐 거리도 아닌데 아들은 마치 이웃동네에서 놀러온 듯 말한다. 세상이 작아지길 참 희한한 세월이다. 그때 아들은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다. 집적 자기가 전달해도 무난하겠는데 일부러 제 어미를 통해 돈을 전달하는 아들의 깊은 속내를 지금 김창수가 말하고 있었다. 그냥 어린애로만 알았던 아들이 어느 사이에 저렇게 자랐는지정석호는 그만 짠한마음을 금치못했다.

—천 만 원이면 작은 액수가 아닌데 그 녀석 지금 엄청 잘 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야.

그러면서 김창수는 5 만 원권 한화 한 다발을 석호에게 넘겨주었다.

정석호는 간만에 가슴속 희열을 느꼈다. 물론 돈보다 그동안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한 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말이야 또 딴 문제가 있다. 엊저녁 네가 딴 사람도 아니고 영수 한 사람만 골라서 병을 집어던진 이유에대해 한동안 고민했지.

—뭐긴 뭐야... 그냥 술 취해 그런거겠지...

정곡을 찔린 석호는 창피한 듯 입속으로 얼버무렸다.

—변명할 필요가 없어. 남자라면 너의 입장이 되고보면 대개 다그럴거란 생각이 들었어. 이해한다. 근데 말이다 문제는 영수 그놈이다.

—뭐?

정석호는 친구의 느닷없는 돌변에 깜짝 놀랐다. 당연히 야유와 꾸중을 각오했는데 실로 생각 밖이다.

—너나 나나 영수와 한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가 아니냐? 걔가 아이 적부터 심리상 좀 남다르다는걸 너도 발견했겠지.   

—그런 같기도 한데 도대체 뭐가 다른지 알수없어...

—너 혹시 <뮌하우젠 증후군>란 이야기 들어봤냐? 당연 처음듣는 소리겠지...   

김창수가 뭔가 또 엉뚱한 화제를 끌고 나왔다.

—지랄, 무식한 놈이 옮기기도 힘든 그런 얘길 어디서 들었겠냐?

정석호가 약간 비꼬는 어투로 투덜거렸다.

—하긴 그렇기도 하네. 쉽게말하자면<뮌하우젠>은 19세기 독일의 한귀족의 이름인데 대단한 허풍쟁이란다. 새빨간 거짓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것이 바로 그의 특기기도 했지. 헌데 때론 새빨간 거짓말도 인기몰이할때가 있지않겠나. 누군가 뮌하우젠의 허풍을 이야기로 역어 <뮌하우젠 남작의 놀라운 모험>이란 책을 출판했다고한다. 그후 리쳐드 매셔란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이책에서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하긴 네 말마따나 번지기도 힘든 이름이니 일단 앞에 이름만 빼버고 그냥 <증후군>이라 부르자. 일종 정신질환인데 증상이라면 거짓말 혹은 자해로 딴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는것이 기본이고 심할 경우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조작하거나 꾸며대기도 한단다.

김창수가 또 뜸을 들이며 이미 다식은 커피를 후루룩 들이마셨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행위가 자칫하면 곁에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다는 거다.

마치 대학 강사의 강연 같은 창수의 역설을 석호는 도저히 알아들 수 없었다.

—교수님 무슨 말씀이신지? 나 무식하니 좀 알아듣게 얘기해주시지.

역시 대학물을 먹은 놈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는 아직도 창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쩍하면 자살소동을 일으키던 영수가 생각나? 그래서 그 자식은 늘 선생님의 관심과 우리들의 보호 속에서 놀았지. 근데 그버릇이 어른이 돼서도 고쳐지질 않았다는거지. 얼마 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건데 알고보니 우리친구 영수가 바로 그런 <증후군>환자였어.

—그게 뭔데?

아직도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숭한 정석호다.

—언제부턴가 우리 친구들 사이에 영수가 시간이 얼마 남지않은 불치증 환자란 소문이 떠돌았지. 물론 영수본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설령 그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젠 믿음이 안가. 하도 거짓말이 많은 인간이니깐. 솔직히 말해 개인적으로 영수한테 특별한 편견이 있는건 아니야. 필경 우린 같은해에 태여나서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다니던 죽마고우가 아니냐. 대신 우린 서로 상대방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나와 무슨 상관인데...

정석호가 그만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뮌하우젠 증후군>의 증상의 하나가 자해하여 남들의 동정심을 사는 것이고 또 다른 증상의 하나는 타인을 물어 또 다른 타인의 동정심을 얻는 것이다. 근데 그 두 번째 증상의 피해자가 바로 너란 말이다 이 바보야. 더 궁금하면 인터넷 한번 뒤져봐. 당연 넌 알수 없겠지만 그동안 영수는 친구들 사이에 돌아다니며 너 정석호는 일관적으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악마였고 너들의 이혼이 마치 네 폭력 때문에 생긴 일인듯 전하고 다녔단다. 더 어이가 없는건 자기 이혼도 마치 너와 관계 있는듯 떠들었다니 이게 말이 되나? 뭐 네가 집에 갔을 때 자기 마누라에게 있지도 안은 자기 흉허물을 했다나 뭐라나. 걔 마누라가 집 나간지가 언젠데. 아마 네가 한국에 오기 전 집 나갔을걸. 이건 나도 아는 일이야.  

정석호는 그냥 어이없는 눈길로 김창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물론 너한텐 말이 안 되겠지만 걔한텐 말이 되지. 한마디로 영수는 널 물어서 자신을 피해자 또는 정의감 있는 천사로 분장하고 또 시한부환자로 둔갑하여 친구들의 동정심을 산거지. 얼핏 보면 별거 아닌 작은일 같지만 세치혀가 사람 잡는다고 했다. 그뒤엔 누군가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야만 했겠지. 그 고통을 받아 안은 장본인이 바로 너란 말이다. 네가 취중에 영수한테 술병을 집에 던지건 어떤 직감에서 온 충동이겠지만 영수입장에선 소원성취를 한 셈이지. 걔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거니깐. 마치 봐봐, 내말이 틀리나 얘는 이런 폭력배라니깐. 사실 자기 거짓말을 숱한 사람 앞에서 사실로 입증한 거란 말이다.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이라 했다. 잔머리 굴리는 덴 역시 영수가 천재가 아닐까...

별안간 뭔가 정석호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이 의기소침한 반노숙자로 타락했는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주 빠른 한국생활에서 허구한 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보니 이른바 희로애락이 뭔지 느낄 사이도 없이 세월을 보낸것 같았다. 유일한 즐거움이란 짬짬이 낚시하고 고향친구 만나서 술 한잔 나누며 수다 떠는 것이 전부다. 헌데 언제부턴가 그는 친구들로부터 영문 모를 따돌림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 전화도 잘 통하지 않고 짬만 나면 진행되는 모임에도 불러주질 않는다. 만약 얼마 전 한국에 들어온 창수만 아니었어도 그는 엊저녁 같은 장소에 갈수가없었다. 그나마 즐기던 작은 즐거움마저 사라져버린것이다. 도대체 친구들한테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같이 연락을 끊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속 터지는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끔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자기가 지금 억울함을 당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추측에 불과했다.

—나와 영수는 전에 그 어떤 모순마찰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이건 너도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근데 걔가 왜 날 해꼬지 하는거지?

—그러니깐 환자라는 거야.

정석호는 몇년 묵었던 체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시원치가 않았다.

—근데 한국에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영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아냐? 무슨 증거라도 잡은 거야? 아니면 누구처럼 추측하고 추리한 것인가...

—추측이건 추리건 무슨 상관이냐? 네 억울함만 풀면 되는거지. 안그래? 반증론법으로 봐도 너한테 문제가 없으면 당연히 영수한테 문제가 있는거겠지.

—여하튼 믿어줘서 고맙다.  

사실 정석호는 진심으로 친구 김창수가 고마웠다. 마치 더러운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기분이다. 이제 깨끗한 물에 씻으면 기분이 더욱 홀가분해질 것이다.

—근데 말이야 너 절대 영수 그인간을 찾아가 보복하거나 다른 미련한 짓 하지 말라. 다시한번 말하는데 걔는 환자야. 어떻게 영수가 문제 있는 애라는 걸 알았냐구?간단하지. 한국 나와 우리 불알친구들과 몇 번 모임이 있었는데 매번 너만 빠지는 것이 이상했거든. 애들한테 이유를 물었더니 널 자기 가정과 남의 가정을 파괴한 몹쓸 인간으로 취급하더군. 그래서 내가 네 전처 인숙이를 포함해서 약간 뒷 조사를 해본거야. 영수가 정말 불치증에 걸렸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걔가 너한테 없는 누명을씌운 것만 사실이지. 너에 관한 일들을 영수한테 집적 물었더니 자긴 그런말 한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더구나. 사실 번연한데 더 따질 필요가 있겠나.

—역시 책가방 끈 긴 놈이 다른 긴 다르군.

—당연하지. 여하튼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부터라도 가슴 쭉 펴고 친구모임에랑 다녀. 사실 엊저녁 네가 술좌석에서 나간 후 나는 친구들한테 너에 관한 일들을 전부털어놓았다. 모두 너한테 미안해하더구나. 가뜩이나 힘든 한국생활에서 있지도 않는 루명을 뒤집어썼으니 많이 힘들었겠지. 재미있는건 꽤나 술을 잘 마시던 영수가 약먹을 시간이 됐다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가던데 불치병 환자가 술먹고 약먹고 이게 또 말이 되냐? 흐흐...

—야 창수야, 어디가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할까?

문득 정석호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야가 돌았나. 금방 밥 먹고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

—어차피 쉬는 날인데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한국인들은 밥 먹은 뒤 술 먹더라. 그냥 날 환송하는 셈치고...

—환송이라니?

김창수가 의아한 눈길로 석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기분이 홀가분할 때 고향으로 가야지. 진작 고향으로 가고 싶었는데 늘무거운 짐을 지고 누구한데 쫓겨 가는 기분이 싫었어. 내가 왜 쫓겨가야하나? 이제야이유를 알 것 같다. 네가 그 무거운 짐을 내려 준거지. 넌 역시 좋은 친구야.

—여기 아직 할 일도 많은 같은데 불시에 고향 행이라니 웬 말이냐? 그리고 고향엔 아무도 없잖아?

김창수가 할 일이 많다는 의미가 아마도 석호네 부부간에 일을 두고 하는 얘길 것이다;

—그래 아무도 없지. 근데 아무래도 그쪽이 내 안식처 같다. 시골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채소 가꾸고 낚시하며 살란다.

—시 읊나? 랑만이 넘치네.

—진짜야. 고향엔 산 좋고 물 좋은 오지가 많잖나. 설마 내가 궁뎅이 들이밀 자리가 없겠냐. 대한민국은 살기가 좋은 나란데 마냥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지. 이젠 힘들어. 달릴 수가 없단 말이다.

한동안 정석호를 응시하던 김창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가자, 한잔하러. 환송식은 해야 하지...           

며칠뒤 김창수는 정석호의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ㅡ집에 갈 비행기표 끊었어. 오늘 오후 떠날꺼야. 그리고 말이야 널 못 믿어그런건 아니고 이곳을 떠나기전 나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어. 넌 역시 천재야. 영수 그자식 불치증에 걸렸단건 진짜 새빨간 거짓말이였어.

ㅡ어떻게 알아냈어?

ㅡ나만의 방식대로 흐흐... 무식한놈 무식한방법으로 알아낸거지.

ㅡ너 혹시 허튼수작 한건 아니지? 폭력썼어?

ㅡ폭력은 무슨... 원래 담이 콩알만한 놈이니 몇마디 으름짱으로도 충분하더군 하하...   

<연변문학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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