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김규봉은 1951년 목단강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8세 어린 나이에 목단강 교구 동승마을 소학교 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발령 받아 10년 간 사업을 하시다가 뜻밖에 급성뇌막염 후유증으로 28년을 휠체어 신세를 지내며 사셨다. 비록 휠체어를 타시고 인생을 마감하셨지만 불공평한 운명에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자식들에게 삶의 디딤돌을 깔아주셨다.

1968년 늦가을, 아버지는 갑자기 독감에 걸려 30일 동안 고열로 혼미상태에 빠졌단다. 깨어난 후 급성 뇌막염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됐는데 그때 나이 38세. 

전 목단강지구 소수민족 선진교육자 대표로 뽑혀 1964년 국경절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 오르기까지 한 영광을 지녔던 아버지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속이 타서 애매한 병신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다 보니 근육 신경 손상으로 인해 조금만 다치면 널판자 보다 더 뻣뻣해진 두 다리가 갑자기 한데 달싹 달라붙어 앉은 채 뒤로 훌렁 넘어 가시곤 했다. 

그때 우리 네 자매 중 오빠가 17살 막내 여동생은 겨우 5살이었다. 애들을 보아서라도 살아야 했다. 멀쩡한 두 손이 있었다. 

며칠 후 오빠가 시내에서 휠체어를 사왔다. 그런데 이러 저리 만져보고 앉아 보시더니 마음에 안 드신다고 아예 오빠더러 목수 도구 몇 가지만 사오라 하시여 손수 휠체어를 만드셨다. 한다면 한다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끝내 전원 장치도 없는, 단지 두 고무 바퀴만 손으로 밀면 잘 굴러갈 수 있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그러나 어떤 의료기 상점에서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수도 없는 특수형 휠체어를 한대 만드셨다. 뱅글뱅글 바퀴에 기름까지 몇 방울 떨궈놓으니 제법 잘 돌아갔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제일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30대 피 끓는 젊은 나이에, 100미터 달리기를 15초 내에 완주할 수 있었던 건강한 사내가 하루아침에 휠체어 신세가 됐으니 억장이 무너져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그이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휠체어를 타실 때부터 아버지는 마음의 자세를 낮추셨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씩 돌면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먼저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외려 이만하면 괜찮으니 편히 대하시라고 부탁을 해왔었다. 아버지는 어르신들이 한어 방송이랑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난점을 헤아려 국제 국내 시사들을 자세히 설명해 드리셨고, 짬만 있으시면 작은 삽을 갖고 다니시며 집 앞의 길을 고루고 닦으셨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마을의 애들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어르신들 마실 다닐 때도 불편했던 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움을 앞세운다.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 해 가을에 마을의 아줌마들이 무우말랭이를 하고 싶은데 칼날이 굵은 채칼 파는 게 없어서 못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밤 도와 채칼 만드는 연습을 하셨다. 처음 우리는 그렇게 세심한 채칼 날을 어떻게 만드냐고, 괜히 헛고생 하시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서서 하는 일이면 몰라도 이건 휠체어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단다. 마치 상급에서 내린 임무라도 맡은 듯이. 언제 어디서 아버지가 채칼 만드는 것을 보신 적도,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이 없으신데 그이는 이튿날 동안 꼬박 휠체어에 앉아 채칼 제작을 고안해 냈다. 집집마다 버리는 유리병 통졸임 철판 뚜껑을 찾아 가위로 잘게 자르고, 또 끝이 뾰족한 집게로 이러 저리 엮어서 시험을 해보니 싹싹 소리 내며 무우 오리가 잘 갈려내렸다. 한입 두 입 건너 동네 아줌마들이 소문을 듣고 채칼 만드는 재료를 들고 왔다. 어떤 분은 돈 주고 산 것보다 곱절 더 좋다며 돈까지 내놓으셨으나 그이는 절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동네 아줌마들은 그 채칼을 너무 잘 썼다고 외우군 했다. 

한 사람의 건강 표준을 신체조건 여하에 따라 논한다면 그건 완전하지 못하다. 아버지는 건강한 사내였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더 받으셨다.    

그날은 엄동설한 한겨울이었다. 강가에 얼음이 유리알 같이 반질거렸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강바람 쐬러 나가셨다가 그만 바퀴가 미끄러져 구멍 내놓은 강판에 푹 빠지게 됐다. 마침 강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청년들이 달려와 아버지를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시고 집까지 모셔 왔으니 말이지, 폰도 없는 세월에 만약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어찌할 뻔 했을까? 그날 저녁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혹시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이 아파하실까 봐 걱정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기색 없이 마냥 유쾌하게 웃으시며 농을 하셨다. 

아버지는 흑룡강신문 애독자이셨다. 신문사에서 조직하는 지식경연 응모에 여러 번 참가한 연고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텔레비죤, 라디오 방송에서 보고 들은 뉴스부터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조리 우리한테 들려 주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밤중이면 부엌에 내려가 손풍구를 돌리며 어머니더러 밤참을 하게 해서 자식들한테 챙겨 주시곤 하셨다. 한번은 아래 집 아주머니가 일부러 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네 집엔 뭔 재미있는 얘기가 그렇게 많니? 너네 집 앞을 지날 때면 일부러 한참씩 듣고 간단다.” 

70년대 농촌에서 한창 군대 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 가정의 세대주나 다름없는 오빠가 감히 신청을 못하자 아버지는 떠밀어 보내다시피 하며 자식을 군대에 보내셨다. 오빠는 군에 6년간 복무하고 돌아왔었다. 

1976년 공농병 대학교 추천 모집이 나오자 아버지는 여자일 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네가 대학생이 되면 우리 김씨 가문의 첫 대학생이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기어이 연변대학으로 떠나 보내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워 이기시려고 다리 병에 좋다는 중약은 다 드셨는데 그 약재를 차에 실으면 아마 한 수레는 될 듯싶다. 그 보기만 해도 쓰고 양이 많은 중약을 언제 한번 얼굴도 찡그리시지 않고 다 드셨다. 마을에 지원 온 해방군 의료대를 찾아 한 뽐이 넘는 침도 수 없이 맞았고 소나무 찜질이 좋다고 해 뜨거운 소나무 찜질도 많이 했었다. 뜸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의사가 정해준 뜸 자리에 손이 닿는 데는 모두 뜸을 뜨셔 팔이며 다리에는 온통 뜸 자리였다. 뜸 자리는 쉬이 아물지 않아 싯누런 진물이 나오곤 했지만 아버지는 “뜸 자리가 덧나야 효과가 좋단다”며 웃으셨다. 아픈 다리는 전혀 낫지 않았고, 밤에는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서 주무시지 못 하셨다. 그래도 우리 앞에서 단 한번의 짜증도, 원망도 없이 혼자 고통을 삼키며 묵묵히 가정의 어려운 일을 담당해 나가셨다. 심지어 자식의 옷 단추까지 달아주시곤 하셨다.  

이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우리 네 남매들은 한치의 구김살이 없이 반듯하게 자라 모두가 가정도 잘 꾸리고 사회 생활도 잘해올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골회함은 아직도 고향 목단강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저번 추석에 형제들은 10여 년 간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한 자책감으로 인터넷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비석을 만들어 술을 부어 드렸다. 눈물이 앞섰다. 평생 당신 이름으로 된 은행 통장 하나 못 만드셨고 다리가 불편해 신분증 사진도 못 찍으신 아버지! 그렇지만 우리 자식들의 마음 속에는 백만장자 아버지보다 더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럽다. 

아, 세월이 갈수록 보고 싶은 아버지! 엊저녁 꿈에 나는 벤츠 자가용을 운전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경박호 관광을 가는 아버지를 봤다. 저 세상에 가셔도 우리 아버지는 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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