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複合象徵詩 감상】

훔쳐온 행복(외 2수) 

□ 권순진

 


빨간 미니스커트 
까만 스타킹
계단 오르내리는 황홀함
졸졸 따라가는 욕망

열렸다 닫혀버리는 무시에 
보기 좋게 부딪혀
코가 납작해진 아쉬움

열린 뚜껑으로 
모락모락 트림하고 있는 
뽀얀 김의 탄식 
복도 벽 핥고 있다

들려 오는 시원한 샤워소리
다시 일어서는 달콤한 신음이
후줄근이 젖어 몸부림친다


시월


빨갛게 익은 손
문풍지 바르고 있다

시린 바람 가슴 허비고
파랗게 질린 하늘
추위에 떨고 있다

가을은
뒷모습만 남기고 
고개 너머 사라지고

짧은 하루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다 


방황과 슬픔


가을 젖은 실비
술 취한 하루를 짚는다
 
실눈의 나그네
입술 깨문 풍경도
비틀 거린다
 
목욕하는 아쉬움
눈물의 줄기 잡고
바스음악 칭얼대는데
 
막차의 이별가
우산속 표정의 진실 감고
아지랑이 날린다 
 
이슬 머금은 창턱 이쁜 꽃
하늘이 내려와
거리바닥 기여다님을
껌 씹으며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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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複合象徵詩 해설】

스토리를 올라 탄 변형 조각들의 행진
권순진시인의 詩의 境地를 진맥해본다

 

중국연변조선족복합상징시동인회 회장 
「시몽」잡지사 발행인, 주간

□ 김현순

 

 

  세상의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까지일까. 복합구성을 이루고 있는 세상은 상징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그 상징은 능동적 가시화를 통한 변형을 거쳐 실천이 이룩된다.
  이러한 복합상징은 주로 세가지 경우로 표현하게 되는데 즉 화폭의 상징, 스토리의 상징, 서정흐름의 상징이다.
  화폭의 상징은 전반 시에서 운용되는 이미지내지 이미지군들이 서로 동떨어지고 고립되고 독단적인 속성과 표상을 가진 것들이 정서팽창의 기초위에서 각자 나름대로 그 정서에 걸맞는 변형을 하여 하나의 정체를 이루어내는 갈래라고 말할수 있다.
  스토리의 상징은 하나의 이야기흐름선을 꼭 틀어쥐고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에 세절마다 최대한 변형을 거쳐 표현하는 것으로 상징의 목적에 도달해내는 갈래라고 말할수 있다.
  서정흐름의 상징은 팽창된 단일한 정서의 고저장단으로 일어나는 음악적 리름을 념두에 두면서, 이미지내지 이미지군들의 변형조합을 실천해가는 갈래라고 말할수 있다.
  요켠대 이 세가지 경향의 복합상징시는 분명한 계선이 모호한바 대체적으로 매개의 갈래의 특성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에 따라 그에 걸맞는 갈래 명명이 붙게 되는 것이다.
  권순진시인의 詩作들은 스토리의 상징으로 엮어진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데서 그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詩 <훔쳐온 행복>을 해부해보도록 하자.

  (詩「훔쳐온 행복」 全文 략함)

  이 시는 한 여인에 대한 짝사랑에 빠진, 사내의 못견디게 안타까운 심정을 펼쳐 보이는 스토리를 꼭 움켜잡고 놓지 않고 있다. 사내는 여인이 층계를 오르는 모습을 훔쳐보며 그림자차럼, 바람처럼 여인의 뒤를 따라 다닌다. 하지만 여인은 사내의 그러한 불타는 심사와는 상관없이 무시해버린다. 여인이 샤워 실에 들어간다. 샤워 하는 여인의 살결 문지르는 소리에 사내는 안타깝고 처절하게 복도 벽에 귀 대고 애꿎은 마음만 잡아 뜯는다. 사내는 지어 여인과의 정사마저 상상하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아이러닉한 환각에 빠져 있다. 
  짝사랑에 빠진 사내들의 가장 원초적인 정감세계를 담대하게, 그러나 그것을 변형을 거쳐 능동적 가시화 처리를 하였다는데서 이 시는 성공된 작품이라고 볽수 있다. 혹자는 상기의 전반 시 내용을 보고, 저속한 변태적 인간심성의 표현이기에 이런 시는 극복할걸 강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노우~!"이다. 
  인간 심성은 가정 원초적인 것일수록 성스럽고 지어 거룩한 것에 가깝다. 남녀교합을 갈망하는 것을 저속하게 보는 것은 세인들의 안광이 그렇게 기형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화, 암수의 교접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우주의 근본이며 세상의 이치임을 우리는 모르는 바가 아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암수의 교합을 정당하게 이어가는데 오직 인간만은 륜리 도덕의 기준을 만들어 성에 대한 추구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을 추구하는 것도 무질서, 무중심이 되면 그에 따르는 인생이 혼란스럽고 란잡해지며 나중에는 괴멸에로 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기에 이성간의 사랑은 전일해야 하며, 화끈하면서도 분명해야 한다. 마누라 외에 일명 혼외련(婚外戀) 또는 애인이라고도 부르는, 다른 여인에 대한 사무친 사랑의 감정에 심취해 있을 때, 가정을 지키면서 다른 이성과 사랑을 나눈다면 우리는 바람을 피운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일지라도 사랑을 나누는 두 외간 남녀의 정감세계는 진실한 것이며 순결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일방적인 짝사랑에 그치고 만다면 그 심적 고통은 더욱 극치에 달할 것이다. 문학은 예술이지 교육학이 아닌 만큼 인성의 보석 같은 싸래기를 집어내어 형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써 그 사명은 충분히 완수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바로 딱, 이 점을 틀어쥐고 스토리를 엮어나가면서 와중에 순간순간 환각의 흐름에 따르는 변형을 시도하였다.
  첫 연에서는 욕망이 졸졸 따라다닌다고 했다. 그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층계를 오르내리는 여인의 빨간 미니스커트와 까만 스타킹에서 온다. 사내는 이로부터 사모의 마음이 생기면서 짝사랑에 갈마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여인에게 무시당한 비참한 현실을 무시가 문을 열었다 닫는다고 의인화 함으로써 "무시"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가시화 처리, 그것도 능동적(能動的)으로 처리하여 형상성을 높여 주었다.
  세 번째 연에서는 실의에 빠진 화자의 비참한 심정을 "열린 뚜껑으로/ 모락모락 트림하고 있는/ 뽀얀 김의 탄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뽀얀 김이 "탄식"한다는 표현도 의인화를 통한 능동적 가시화 처리로 된다. 또한 "탄식"이 "복도 벽 핥고 있"는 것으로 고통의 절절함을 변형시켜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련에서 화자는 또 신음이 몸부림친다고 하였는데 신음자체는 소리로써 표현된다. 하지만 화자는 그 속성을 변형시켜 몸부림친다는 행동으로 안겨오게 표현하였는바 참 잘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변형의 매력, 상징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수 더 보기로 하자.

(시 「시월」 全文 략함)

  이 시에서는 가을 오니 겨울 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경상(卿相)들을 장면으로 펼쳐보인, 장면의 조합을 통한, 이야기흐름의 상징이라고 볼수 있겠다.
  첫 연에서는 집집마다 문풍지를 바르는 경상(卿相)을 "빨갛게 익은 손/ 문풍지 자르고 있다"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손"은 손으로 안겨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로 안겨온다. 그러니 당연 가을이 문풍지를 바르는 것으로 변형되어 안겨오기 마련인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바람이 가슴을 허비고" "하늘이 추위에 떨고 있다"로 변형시켜 능동적 가시화작업을 완성시킨다.
  세 번째 연에서는 "가을은 고개 너머 사라진"다고 인격화 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는 이쯤에서 끝나도 가을의 경상(卿相)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을 수 있겠지만 화자는 한술 더 떠서 마지막 연을 승화시켰다. 
  시에서 보여주는 경지는 화자의 영혼의 경지이다. 영혼의 경지 여하에 의하여 시의 사상의 깊이가 결정된다. 영혼의 정화작업을 거치지 않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영혼의 흐름을 시에 옮겨 적는다면 그 시는 무중심, 무주제, 무중력의 기로에로 빗나갈수 있어 세상과의 공감대가 이룩되기 어렵게 된다. 때문에 시인이라면 자신의 경지를 갈고 닦는 작업이 선차적이다.
  영혼의 경지를 골라잡았다면 그담엔 변형을 통한 상징적 표현인데 이것은 심후한 내공과 직접 정비례를 이룬다. 
  복합상징시에서의 내공이란 바로 능동적 가시화를 통한 변형의 능란한 기술을 말한다. 
  화자는 이 시 마지막 연에서 "짧은 하루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다"라는 말고 간결하게 화자의 경지를 크라이막스로 끌어 올렸다. 화자는 "하루"가 사람처럼 "익숙해지고 있다"는 의인화 표현을 함으로써 형상성을 한결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는 그것이 담고있는 철리적 함의가 깊고 큰데 의의가 심후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을이 오면서 낮이 짧아지기에 흔히들 하루가 짧아졌다고 말들 한다. 인생도 젊음이 가고 나이 들면서, 점점 세월이 짧아짐에 안타까움과 인생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나이 들수로 눈에 거슬려 보이는 것이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현실과 타협하며 여생을 더욱 참답게 살려고 석양을 빨갛게 불태우는 것이 아닌가. 
  화자는 아마 이런 의미에서 짧은 하루가 어둠에 익숙해간다는, 영혼의 깨달음을 펴보이면서 전반 시의 마무리를 무게 있게 지었을 것이다.
  권순진시인의 시를 읽어 보면 거개가 삶에 대한 실의, 고통, 방황, 우수(憂愁)로 충만되어 있다. 한수의 시는 화자의 마음의 발로라고 했다. 마음은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또한 그 영혼은 육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의 조우(遭遇)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복합상징시는 그 육체가 겪는 정서의 팽창위에 꽃피우는 생각, 환각, 환상을 통한 변형의 산물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권순진시인은 일찍 성우(聲優)의 꿈을 가지고 젊음의 열혈가슴을 태우기도 하였고, 그 뒤로는 신문사 편집일도 해보았으며 예술단에서 가수노릇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모두 다 여의치 않으니, 단연 고향을 떠나 중국 내지로 진출하여 창업의 길을 모색해 왔지만 가시덤불의 고행길에 끝은 보이지 않고, 인생은 고달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희망은 잃지 않고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는 멋신 사나이다.
  이러한 경력이 바로 그러한 정서를 담은 시로 탈변하는 것이리라.
  시 「방황과 슬픔」을 더 들어보기로 한다.

  (시 「방황과 슬픔」 全文 략함)

  이 시에서는 현재 화자의 처경을 아주 핍진하게 상징으로 잘 펼쳐보이고 있다. 
  첫 연에서 덧없이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가을 젖은 실비"에 비유하면서 속내 타는 처지를 술로 달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실비"가 "술 취한 하루를 짚는다"는 표현은 처절한 삶에서 오는 환각적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두 번째 연에서는 비에 후줄근히 젖으면서 고통스레 입술 깨물고 울음을 삼키는 것을 "바스음성" 칭얼대는 것으로 형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세 번째 연에서는 막차로 떠나가는 님을 두고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우산으로 덮어 감추는 슬픈 장면, 그러면서도 가는 님을 축복해주는 화자의 찢어지는 정서가 걸죽하게 깔려있다.
  네 번째 연에서 "이슬 머금은 창턱 이쁜 꽃"|은 화자가 갈망하는 이 세상 아름다운것들에 대한 상징이며 "하늘이 내려와 거리바닥 기어다닌다"는 것은 밝고 맑고 청순한 화자의 꿈이 밑바닥을 핥고 있다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토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은 상관없이 비참한 화자에 대해서는 "껌 씹으며 보듯"이 랭담하기만 하다.
  이 시를 읽고나면 가슴이 스르르해나고 눈굽이 축축해나는 것도 누구든 이 시의 경지와 같은 인생 처절함의 경력을 다다소소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 했다 싶이 복합상징시란 정치, 교육학이 아닌, 어디까지나 예술이기 때문에 참인간의 참다운 영혼의 흐름 속에서 진주, 보석들을 골라내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그에 따라 새롭게 표현하여 세상과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명완수로 된다.
  권순진시인은 바로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기에 애썼기에 상기의 작품들처럼 훌륭한 시를 창작해낼 수 있은 것이라고 본다. 
  여직 문학의 울타리 안에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섭렵하다가 비로서 세계적인 신시혁명에 떨쳐 궐기해 나선 복합상징시운동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두각을 드러내는 권순진시인에게 밝은 미래가 활짝 펼쳐지기만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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