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일전에 3박 4일 일정으로 남경대학을 돌아보았다. 이 대학에 한국어학과를 앉힌 것은 2006년, 그때 윤해연과 최창륵이라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출신의 두 박사가 선후로 초빙을 받고 갔는데, 어느새 남경에 둥지를 틀고 학과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자료실만 보아도 국내외 최신 학술도서와 자료들로 꽉 찼다. 7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최신도서는 거의 없는 우리 학과의 자료실이 내심 부끄러웠다. 아무튼 해연씨와 창륵씨가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몇 과목을 가르쳐주고 조금 도와준 적 있을 뿐인데 그 은혜를 갚는다고 일부러 특강자리를 만들어가지고 나를 초청한 것이다. 

첫날은 목단강출신의 리연이라는 대학원생의 안내를 받으며 남경대학 캠퍼스에 있는 박물관을 견학했다. ㄷ자 형으로 된 전시관을 반나마 돌았을 때 번대머리에 강력한 턱을 가진, 그러나 안경 너머의 두 눈만은 유난히 인자해 보이는 웬 노인의 사진과 마주쳤다. 찬찬히 보니 1950년대 길림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 이 대학의 기틀을 잡아놓았고 1963년 남경대학에 자리를 옮겨가지고 두 번이나 당위서기 겸 교장을 역임한 어른이다. 채원배, 호적,마인초 등과 함께 20세기 중국의 10대 대학교장의 반렬에 오르는 저명한 교육가이며 학자인 광아명(匡亚明, 1906-1996)선생이다. 

전시관은 광아명교장의 이력과 그의 업적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여러 사진자료들을 보고서야 나는 길림대학에 광아명선생의 동상과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건물이 있고 남경대학에도 광아명학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전시관만 돌아보아서는 이 어른이 남긴 재미있는 일화와 미담들을 다 알 수 없다. 연변대학의 초대교장 림민호평전을 쓸 때 두루 자료를 찾다가 광아명교장의 방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 남경대학에 가서 광아명교장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였다. 여기서 한두가지 전하고싶다.  

길림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 외부에서 웬 손님이 교무처로 찾아왔다. 그런데 교무처가 텅텅 비여 있는지라 직접 교장집무실로 찾아왔다. 광아명교장은 손님을 보고 
“미안합니다. 오늘 헛걸음을 하셨구만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래일 선생네 단위에 사람을 보낼 터이니 거기서 일을 보십시오.”
하고 말했다. 손님은 물론 주소와 이름을 남기고 돌아갔다. 사무실에 돌아온 광아명교장은 수위를 불러다가 교무처에 걸린 간판을 당장 떼오라고 하였다. 수위는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에 교무처에 돌아온 교무장은 문설주에 매단 간판이 보이지 않는지라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수위가 교장실에 가보라고 했을 때에야 교무장은 아차, 자리를 비워서 화를 자초했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교무장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교장집무실에 들어섰다. 광아명교장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 패쪽은 길림대학의 얼굴이요. 선생은 오늘 길림대학의 얼굴에 먹칠을 했소.” 

이만하면 약과다. 어느날 교원대회에서 광아명교장이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했다. 헌데 중도에 마이크가 벙어리가 될 줄이야! 광아명교장은 사전에 모든 시설에 대한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총무장의 월급을 한급 깎고 마이크를 설치한 전공을 해고시켰다. 그때로부터 광아명교장의 지시는 거침없이 하달되였고 가차없이 집행되였다. 

광아명교장은 대학의 행정인원들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굴었지만 젊고 유능한 교원에 대해서는 파격적으로 진급시켰다. 

평소에 광아명교장은 별로 큰일이 없을 때는 뒷짐을 지고 교실들 사이를 오가기를 좋아했다. 그러다가도 조용히 교실 뒤문으로 들어가 강의를 듣군 했다. 어느 날 웬 젊은 교원의 강의를 들었다. 한동안 잠자코 강의를 듣던 광아명교장은 조용히 집무실에 돌아오자 책상을 치며 좋아했다. 
“이 젊은이가 정말 대단해! 대단하고 말구!” 
하고 되뇌이더니 즉각 이 젊은 교원이 속해있는 학과의 류단암(刘丹岩)학과장을 불렀다. 광아명교장은 이 젊은이가 교수로 될 만한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다. 류단암학과장은 그만 오리무중에 빠져서 한참 멍청하니 서있다가 자격이 된다고 할 수도 있고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고 여쭈었다. 학술수준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자격이 되지만 아직 너무 젊기 때문에 직접 부교수로 진급시키면 규정에 어긋난다고 했다. 그러자 광아명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능력이 있다면 된 거지요. 류선생은 잠자코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하겠으니깐.”

그 무렵 마침 직함을 평의하고 있었다. 광아명교장은 이튿날 그 젊은이더러 신청서를 내게 했다. 하지만 이 일을 두고 적잖은 교원들이 볼이 부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마침내 교원대회가 열렸고 광아명교장은 문을 떼고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두가지 일만 말하겠소. 첫째, 이 젊은이를 부교수로 진급시키는 일은 내가 특별히 비준한 거요. 의견들이 있다면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의론하지 말고 직접 나를 찾아오기 바라오. 둘째, 난 평소에 좀 관료주의적이요. 누가 이 젊은이만한 학술수준이 있는지 잘 모르오. 이 젊은이만한 학술수준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청서를 내기 바라오. 오늘 회의는 이만 합시다.” 

광아명교장 덕분에 파격적으로 부교수가 된 젊은이가 후에 대성해서 중국 철학계의 거물(泰斗)급 학자로 되였다. 그가 바로 고청해(高清海)선생이다. 그의 나이 고작 26살 때의 일이다. 그때로부터 길림대학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뽑는 전통(不拘一格降人才)”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남경대학에 있는 동안 윤해연, 최창륵 등 나의 제자들이 이 “연변의 주성”을 모시느라 무척 땀을 흘렸을 것이다. 윤해연씨는 워낙 맺고 끊을 줄 아는 깔끔한 녀성이요, 최창륵씨도 별로 술을 반기는 친구가 아닌지라 나를 동무해 대작은 하지 않았고 나도 구태여 술을 권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들은 저녁 7, 8시에 술자리를 파하면 나를 호텔까지 안내하고 나서 어김없이 연구실로 올라갔다. 그들만이 저녁에 연구실에 나가는 게 아니라 거의 8, 90%의 교수들이 연구실에 올라간단다. 그래서 자기들도 이젠  습관이 되였단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광아명교장이 만들어낸 비옥한 학문의 풍토, 즉 지식을 숭상하고 교수를 대학의 주체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어찌 골보를 싸매고 공부하지 않을 수 있을가? 작년에도 남경대학의 두 젊은 교원이 과로로 인해 연구실과 교단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교수의 대접을 받고 학문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죽기내기로 공부하는 게 아닐가 생각한다. 
물이 깊어야 큰고기나 노니는 법, 참 부러운 일이다.

                     - 2017년 1월 13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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