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태복 소설평 :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삶의 본연의 의미에 대한 추구



본지는 ‘한중작가 문학특집’으로 채국범의 중편소설 '노크', '섬 속의 섬' 과, 그에 대한 평을 싣는다.

채국범은 최근에 들어 꽤 많은 중편단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조선족 소설문단의 주목을 끌면서 조선족 문단의, 젊은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 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발표한 두 편의 중편소설을 읽노라면 우리는 기존세대 조선족 소설가들과 다른 소설풍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일단 소설의 서사나 묘사 등 소설기법이 자연스럽고 디테일해서 재미있는 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일본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의 방식과 비슷하다. 또, 비교적 엄밀한 구성에 주제를 파고 드는 깊이가 보인다.

김경훈 평론가는 그의 ‘노크’를 평할 때 “(그의 소설은)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와 이어진 소외화 그에 따른 여러가지 고민들을 다루고 있어서 그동안 외면하고 무관심하기 일수였던 그들의 내밀한 아픔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가지도록 만들어 한번 정도는 곰곰히 그 가치를 따지도록 촉구하기도 했다”고 했고,,

리태복 평론가는 그의 중편소설 ‘섬속의 섬’을 평할 때 “작품의 전체적 구조가 탄탄하며 사건 서술의 구도에서 저자의 능란한 솜씨가 돋보인다. 또한 사건의 디테일과 거시적 사회변화의 접목이 자연스럽고 언어감각도 뛰여나다. 무엇보다도 스토리의 전개에서 사실성과 개연성을 잘 융합시켰기에 리얼리티와 취미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저자의 높은 기량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고 말했다.

채국범의 소설가가 더욱 탄탄한 소설들을 내놓기를 바라면서, 이번에 실린 소설들은 중국조선족 문법대로 두고 게재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편집자-

채국범 프로필:
연변대학 일어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2002년《연변문학》 9기에 처녀작 시 <하늘과 바다 사이>를 발표.
2007년 시 <한줄기 향기가>로 제27회《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6년 중국로신문학원 제26기 소수민족문학창작반 수료.
2018년 제8차 전국청년작가창작회의 대표.
2018년 중편소설 <노크>로 제37회 《연변문학》문학상 수상.
그외 소설 <섬속의 섬>, <마지막 퍼즐>, <해나>, <동그라미>, <동행>, <날개 돋친 기린> 등 발표.
현재 연변작가협회에서 근무

 

중편소설

 

                   '섬속의 섬(岛中岛)'

 

 

 

1

 

 노을이다, 노을.

갑자기 고지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게 물든 노을빛이 창가로 비집고 들어와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건물 탓인지 빛은 조금 밖에 비추지 못했고 그는 까치발을 한 채 기어코 얼굴을 바깥 쪽으로 내밀어 애써 노을을 반겼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따라 두눈 깊숙이 무언가 바라보았다.

 “ 아름답구나.

고지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그의 뒤모습이 아름답도록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서일가, 왜 그 모습만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에 서있는 것 같을가? 왜 나는 언제나 어쩔 수없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걸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순환선 야마노데센을 탔다. 구석 쪽에 깊숙히 몸을 실은 채 두눈을 감았다. 기계음처럼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안내방송이 이 순간 더 없이 친절하게 들려왔다.

전차가 시브야역에 도착하자 두눈을 가늘게 뜨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영화배경으로 자주 등장했던 스크램블 교차로가 보였다. 아까도 봤는데, 라고 생각하던 나는 그제서야 야마노데센이 벌써 한바퀴를 다 돌았음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야마노데센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채바퀴처럼 가끔은 나를 혼돈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스크램블 교차로에 서있느라면 그런 느낌이 한결 강렬해진다. 개성 있는 패션을 입은 맞은편의 젊은이는 오늘도 꿈을 위해 어딘가에서 열심히 뛰였을 거고 시대의 변화 속에 샌드위치 신세로 된 중년은 고단한 삶에 쫓기여 피곤한지 선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나도 그럴 때가 많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차에서 두시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며 출근하다 보면 때로는 손잡이에 매달린 쪽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회사에 도착하여 책상 우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와 문건들을 보는 순간 헉! 숨이 막혔다. 다행히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영양드링크 한병씩 사주는 샐러리맨 할아버지가 계셨다. 밤 9시쯤은 잔업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돌아가 가게도 한가하였다. 그는 번마다 오로나민 C를 나에게 사주고는 구석 쪽 카운터에 서서 한참씩 대화를 나누군 하였다.

사이씨는 젊었을 때의 모습이야.

오늘도 잔업이세요?

보다싶이.

퇴직할 나이도 되신 같은데 조심해야죠.

어쩔 없어, 집대출이 아직도 남았거든.

몇년짜리인데요?

30년.

너무 길어요.

길긴 길어, 예전에는 백년짜리도 있었는데.

에이, 할아버지도 참, 백년사는 사람 몇이나 된다고.

롱담 아니야, 진짜 그런 시기가 있었다니까. 허허. 

어이없네요.

그래, 지금 보면 정상이 아니지. 광란이야, 광란!

나는 때론 할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다. 우선은 젊은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가 도중에 아리숭한 경제 쪽으로 돌아 마지막엔 어김없이 현재 정부의 정치에 관해 들먹였다. 할아버지는 정말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을가? 편의점 근무시간이 저녁6시부터  11시까지였지만 그 할아버지는 오면 거의 반시간 수다를 떨다가 갔고 나도 나머지 일을 하고 나면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 날따라 야근을 하는 멤버가 갑작스레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바람에 내가 대신 이튿날 아침까지 연장근무를 해야 했다.

문제는 손님이였다.

손님은 화가 났는지 식지로 어깨를 쿡쿡 찌르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 너 날 무시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바쁘다 보니 그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20분째 계속되는 손님의 욕설에 나는 열번도 넘게 죄송하다는 말만 곱씹었다. 손님은 쉽게 놓아줄 기미가 꼬물 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내고 다른 코너로 건너가자 왜 령수증을 건네 안 주느냐고 따졌다. 달랑 컵라면 하나만 샀는지라 자기 나름 대로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불찰이였다.

일본은 서비스나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편의점도 역시 그 업종에 속했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올 때의 인사법으로부터 시작하여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할 때 반드시 건네야 하는 말들과 주의사항, 계산이 끝나서 비닐주머니와 령수증을 어떻게 손님의 손에 건네야 하는가 등등의 매너공부는 필수적인 부분이였다. 일본이라는 섬나라에 와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니 나는 백화점 판매원이 두무릎을 꿇고 신을 신겨주며 사이즈가 맞냐고 물어볼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시끄러워, 당장 점장 불러!

새벽 3시예요. 전차도 없는데…”

들려? 무조건 불러!

손님은 알아듣지 못했느냐며 손가락으로 한번 어깨를 찔렀다.

날은 회사를 그만둔 날이자 이튿날 아침 녀자친구랑 시즈오카에 온천려행을 떠나기로 약속한 날이였다. 시간이 지체되면 신칸센 고속렬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슬슬 짜증이 났다. 반시간도 넘게 죄송하다고 사과하였으나 그 상이 장상이였다. 가슴 속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것이 내 몸을 펄펄 달구었다.

사람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 날 무시하는 거야?

“…”

들리냐고? 야!

그만해!

! 손님이 세번째로 내 어깨를 찔렀을 때 머리 속에서 끝내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렸다. 피투성이되여 땅에 풀썩 물러앉은 손님을 보는 순간, 달아날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다.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는 건 둘째고 면접을 볼 때 제출했던 리력서에 집과 회사의 주소가 모두 적혀있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급차 불러줘요, 경찰도 부르고.

나는 자신을 애써 진정시키고 나서 일년간 함께 일해온 하야시한테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가게에 들어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에 기대여 서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머리 속은 텅 비였으나 마음은 오히려 후련하였다. 그들이 좀더 빨리 오기를 바랐다. 이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니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케부크로역을 지난 것도 마찬가지였다. 상냥한 안내방송에 따라 전차는 이케부크로를 지나 우에노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큰 역은 도쿄역이였고 그것마저 지나면 처음에 올라탔던 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응당 시브야와 이케부크로 사이에 있는 신오쿠보역에서 내려야 했다. 하지만 나의 몸은 굳어진 쇠덩어리마냥 제자리에 꾹 눌려있었고 드디여 전차는 도쿄역을 지나 처음에 올라탔던 그 곳으로 돌아와 차문을 열었다.

    함께 돌아온 것은 2월의 기억들이였다.

    조용하고 평온한, 모든 것들을 침잠하게 만들었던 기묘한 곳으로 나는 또다시 돌아왔다.

 

2

손님은 목에 보호대를 감은 구급차에 실려갔고 나를 태운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도쿄 미나도구역경찰서로 향하고 있었다. 굽인돌이에서 차는 앞을 가로질러가는 한 무리 인파에 의해 잠간 멈춰섰다.

홀가분했다.

새벽 어둠을 가르는 안에서 나는 그런 심정으로 긴자거리를 내다보았다. 현란한 네온싸인 아래 술에 취한 남자와 그를 부축하는 키모노차림의 술집녀인, 아직 학생으로 짐작되는 메이드 코스프레의상을 입고 가게 홍보에 나선 두명의 소녀, 차 안을 두리번 거리는 아이라인을 그린 남자와 빨간 립스틱을 바른 녀자, 도쿄는 낮에 질서정연하게 잠들고 있다가 어둠이 내려 밤이 깊어갈수록 빨갛게 깨여나 꿈틀거리고 있었다. 차가 다시 출발하자 뒤통수에 남겨진 자지러운 웃음소리가 나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나는 그 어떤 거대한 유혹속에 빠져있는 듯하여 몸을 흠칫 떨었다.

나는 뭐하러 여기에 왔던가?

단지 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였다. 태여나서부터 숨 쉬며 자랐던 그 곳을 어느 날 갑자기 떠나고 싶었다. 비만 오면 질척한 흙탕길이 짜증났고 샤와기가 없는 욕실은 진저리가 났다. 기름기 잔뜩 묻은 가스렌지도 싫었고 너덜너덜한 벽지도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친구들이 뿔뿔이 다 떠나버린 도시에 홀로 남아있노라니 여전히 미래가 뿌연 안개처럼 묘연하였다.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명확한 방향과 확실한 목적과 선명한 리유가 없는 그런 나이였다. 공항에서 가족들과의 리별보다는 곧 그 곳을 벗어난다는 해탈감에 더 흥분했던 것 같았다. 나는 가족들한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였고 그건 분명 작별이라고 생각하였다.

5년만 있고 돌아오겠다던 계획은 뜻밖의 변고로 벌써 2년이나 길어졌다. 토끼꼬리 만한 회사 월급이 눈에 차지 않아 아예 사직하고 현재 일하고 있는 긴자거리의 가게외에도 신쥬크에서 야간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구했다. 고용률의 빙하시기라 취직이 하늘에 별따기인데 도대체 지각이 있느냐고 녀자친구는 매일이다싶이 잔소리를 하였다. 가끔은 전차시간을 놓칠가 봐 역전을 향해 정신없이 뛰여갔던 나는 이젠 귀찮아서 경찰들의 질문에 변명할 마음조차 없었다.

그랬어요?

손님한테 물어요.

다섯시간이 넘는 질문과 사건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녹초가 되였다. 거의 30시간을 못 잔 것 같았다. 조사는 날이 밝아 점심때가 넘어서야 끝났다. 진술서에 싸인하고 사진도 찍고 지문도 남겼다. 나중에 의무실로 이동하여 몸수색까지 받고 나서야 5층에 있는 구치소에 넘겨졌다.

여기가 9호실이예요. 그리고 당신 번호는  2011호예요.

년도와 똑같은 번호였다. 방문 앞에서 경찰이 수쇄를 풀어 줄 때 나는 이상하게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어서 철문 저쪽으로 들어가 한잠 푹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였다. 내가 희열을 느낀 건 귀찮은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였다. 건방진 손님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 사이에 끼워 전차를 타지 않아도 되고 아침에 뭘 먹을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화장실에서 졸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위를 자세히 둘러볼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집도 아닌 낯선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든다는 것은 신경이 예민한 나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였다.

으스스 추워났다. 얼음강판이 꺼지는 바람에 나는 세찬 물살에 휩쓸려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갔다. 찬물이 머리 우로 흘러지나가며 나만 혼자 물 속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얼굴이 바늘에 찔린듯이 아팠다. 주위의 소리는 멀고도 둔하게 들려왔고 입을 벌릴 때마다 목구멍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갔다.

일어나요, 일어나세요.

5살의 그 겨울날처럼 투명한 얼음장 우로 검은 그림자가 언뜰하더니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기억은 일본에 온 후 꿈속에서 나타나는 빈도가 한결 더 잦아졌다. 눈을 떠보니 스무살 쯤 돼보이는 한 소년이 나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1센치 정도 되는 머리카락이 몽땅 꼿꼿하게 일어서있어 똑 마치 고슴도치 같았다.

먹어요. 저녁이예요.

벌써요?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그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방의 한쪽 면은 실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끔 통채로 된 쇠창살이였는데 가운데에 도시락을 들여보낼 정도의 작은 문이 달려있었다. 화장실은 방안 한쪽 구석에 위치하였고 쇠창살 맞은편에 창문이 달려있었다.

얼른 드세요.

고마워요.

소년은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옆에 각각 한 사람씩 더 앉아있었는데 소년은 자기 옆의 사람을 교수라고 불렀다. 마흔살 쯤 되여보이는 그는 네모난 얼굴에 네모난 안경을 걸고 입주변에 수염을 둥그렇게 길렀는데 매너도 좋고 얘기도 차분하게 잘하였다.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중국사람이란 걸 알았다. 워낙 말수가 적은 데다가 성격상으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아 독불장군이란 별명을 갖고있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였다.

어떻게 들어왔어? 그가 물었다.

손님과 싸웠어.

무슨 일로?

령수증 때문에.

구치소에 있는 동안 독불장군 교수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후에 소년한테서 그 사연을 전해듣고 아연실색하였다. 그 만큼 그들은 미나도구치소에서 돋보이는 인물들이였기에 누구도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소년은 작고 가벼운 존재라고 밖에 의식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고지마였다.

 

3

쇠창살 사이로 벽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치소의 취침시간은 밤 10시였는데 2시간 전부터 매 방마다 사람들이 나와 창고에서 이불과 베개를 갖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안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경비원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번호를 불러 인원을 확인하고 나면 곧바로 전등이 꺼졌다. 말이 끈 거지 그저 밝기를 절반 쯤 어둡게 조절하였을 뿐이다. 방안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상! 기상!

아침6시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과 함께 일어나 세수한 후 이내 밥을 먹었다. 도시락은 경비원들이 직접 날라다 주었는데 반찬 세가지에 입쌀밥 두서냥 정도였고 하루 세끼 장국이 있었지만 맛은 슴슴했다. 그래도 영양을 고려해서 억지로 먹어야 하는 게 구치소의 생활이라고 교수 말했다. 8시부터는 활동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천정이 오픈된 장소에 가서 바람도 쏘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이 거기에 담배를 피우러 갔다. 손톱깍개도 있고 수염을 깎는 전동기계도 있어서 나도 이틀에 한번씩 수염을 깍으러 갔다. 고지마는 활동공간에서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한테서 얻어들은 것을 우리에게 곧잘 전해주었다.

사이씨, 키다리경비원이 그러는데 경찰들이 진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대요. 근데 사이씨한테 얻어맞은 손님의 얼굴이 벌둥지가 돼서 겨우 알아봤다나? 박살을 냈다면서요? 덩치는 곰 같다고 하던데 눈언저리도 찢어지고 쇄골도 다 부러졌대요.

뼈가 부러졌다구요?!

놀랄것 없어. 교수 별거 아니라는듯 말했다.

걱정마, 그깟 쇄골 정도 가지고. 크게 상한 거 아니야. 자네는 기껏해야 싸움 정도이니 스무날 쯤 구류하고 나면 법적으로 무조건 풀려나게 돼있어. 벌금을 해봤자30만엔 정도면 될 거야. 

사이씨, 이제 검찰측의 호출을 받으면 변호사부터 구해요. 돈이 있다면 개인변호사를 청할 수도 있지만 큰 사건이 아니기에 국선변호사를 청하는 것이 더 좋을 거예요. 

검사가 참여하거나 피고인이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가 임명한 변호사를 국선변호사 혹은 관선변호사라고 불렀다. 손님과의 교섭은 국선변호사가 대신하여 진행하였고 나의 사건은 담당검사가 인사발령을 받아 고베시로 전근해가기 전의 마지막 사건이였던지라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처음으로 검찰에 소환될 우리 방에서는 나와 고지마가 불리워갔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서너대 전용차량에 나뉘여 압송되였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 검찰청에 도착하자 인원확인이 재차 시작되였다.

(사람만 세다 말겠네.)

우리는 끌신을 신고 한줄로 서서 오리마냥 어정어정 대기실로 걸어들어갔다. 인원확인은 거기에서도 진행이 되였다. 문어구에는 중량급 유도선수를 방불케 하는 덩치가 꽤 큰 경비원이 서있었다. 그는 한 사람씩 지나갈 때마다 가라테선수가 손으로 벽돌장을 내리부수는 동작을 하면서 셈을 세고 있었다. 대기실이 떠나갈듯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면서.

잇찌(하나), 니(둘), 산(셋), 시(넷)

경비원의 팔은 로보트마냥 절주 있게 사람과 사람사이를 오르내렸고 수자세기는 어느덧 열을 넘어 17번째 고지마 차례가 되였다. 일본어로 17의 발음은 쥬우나나였다.

쥬우고(열다섯), 쥬우로끄(열여섯), 쥬우

나나!

뜻밖에 나나 웨친 사람은 경비원이 아니였다. 고지마였다. 왜 저리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옆이마의 피줄이 불끈 튀여나올 정도로 키득키득 웃어댔고 나머지 사람들도 재밌다고 따라서 같이 킬킬거렸다.

뭐하는 짓이야?!

경비원의 고함소리에 고지마는 그래서 어쩔 턴데 하는 식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소리쳤다는 리유만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경비원은 지지벌개진 얼굴로 시끄럽게 굴지 말라며 앞으로 !하고 윽박지르고는 다시 손칼질을 하였다.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고지마의 쇼가 앞에서 가셔지지 않아 혼자서 큭큭 웃었다. 그의 쇼는 이 뿐만 아니였다. 언젠가 한번 아침밥을 먹다가 경비원과 한바탕 시비가 붙었다. 이마살을 찌프리고 고기붙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도시락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식단이 왜 이 따위냐고 책임자를 부르라며 쇠창살을 두드려댔다.

고지마씨, 여긴 구치소예요. 주는 대로 먹어요.

경비대장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고지마는 그의 얼굴 앞에 일회용 저가락을 쳐들어보였다. 그러더니 두손으로 량끝을 쥐고 딱 소리내여 부러뜨리고는 온하루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는 항상 탁구공마냥 어디로 튕길지 모르게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 고지마를 한참씩 마주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그의 어깨 너머로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가 다시 등뒤로 쏙 숨어버리는 것 같았다. 굴레 벗은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나의 사건은 다행이 굴곡이 없었다. 경찰들도 대부분 그 손님을 건방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폭력을 가한 사람이 나였기에 애매한 상황이 되였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였다. 그러나 고지마의 사건은 조금 복잡했다. 그는 강도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한 할머니의 가방을 날치기하였다고 한다. 야구모자에 마스크를 착용하여서 범인이 꼭 고지마라고 확정 짓지는 못했으나 경찰들의 꾸준한 조사에 이런저런 작은 증거들이 나오면서 공방이 몇달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경찰들이 고지마의 사건에 매달리는 데는 그만한 리유가 있었다. 그 할머니가 가방을 지키려고 범인과 밀치락달치락 하다가 땅바닥에 쓰러져 병원에 호송된 후 얼마 안되여 그만 죽었던 것이다. 워낙 심장병이 있긴 하였지만 경찰들은 강도행위가 사망을 초래하게 된 발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고지마는 어릴 때부터 소년원을 들락날락하여 전과가 많았던지라 경찰들도 주의깊게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검사는 자수를 권고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다. 독불장군 말에 의하면 이상 다른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멀지 않아 구치소에서 나가게 거라고 하였다.

나가면 하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집에 가기는 싫은데.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가있어.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안돼, 자칫하면 버릇이 되거든. 그러면…”

교수 무언가 말하려다가 뒤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떻게 이런 것도 버릇이 될 수 있을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점심에 먹었어?

먹긴요? 또 그거죠. 그 전설의 곱페빵!

고지마는 빵을 배달하러 경찰아저씨의 흉내를 내면서 곱페빵데~~스.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떠서 쥬우나나!하고 소리치고는 자기절로도 웃겼던지 혼자서 킬킬거렸다.

대기실에서 그랬어? 교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심심해서요.

자꾸 제멋대로 하지마. 트러블이 생기면 시끄러워.

알겠어요.

사건은 어떻게 됐어?

이젠 풀어주겠죠.

됐네.

잘되긴요, 난 교수님하고 있고 싶은데.

그러다가 같은 처지가 있어.

 

4

나에게는 구치소의 생활이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독불장군 비록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같은 중국사람이라고 평소에 얘기도 자주 건넸다. 교수 고지마도 사법상의 순서와 각종 절차, 주의사항 및 대처방법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시간을 때우기가 힘들 뿐이지 나머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교수 고지마는 바닥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방에 얇은 회색 카페트를 깔았는데 그들은 쪼크리고 앉아 머리카락이나 다슬어서 보풀이 인 실뭉치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화장실에 갖다 버렸다. 창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쇠창살까지 꼼꼼히 훑으려면 둘이서 한두시간은 걸렸다. 반대로 독불장군 종래로 바닥청소를 하지 않았고 한가할 때면 운동만 하였는데 웃몸일으키기(仰卧起坐)와 앉았다 일어나기(深蹲)를 천개씩 하고 나면 반나절이 다 지났다. 나는 가끔 독불장군 따라 운동을 하기도 하고 그것도 하기 싫을 때면 창가쪽에 쪼크리고 앉아 어느샌가 카페트청소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군 하였다.

시끌벅적한 도시 속에 시간이 달팽이마냥 기여가는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여간 행운이 아니였. 구치소는 나에게 있어서 외부의 영향을 최소한 적게 받는, 자신의 시간과 생각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융합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꿈인가? 착각인가? 어떻게 이런 즐거움이 생길 수 있을가? 고지마가 물어보던 것처럼 그건 과연 행복이 맞을가?

적어도 느긋한 오후시간에 해볕쪼임을 하며 책을 읽을 때면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복도에는 높이 한메터, 길이 두메터쯤 되는 책장도 있었다. 거기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몬>>과 F.스콧 피츠재럴드의 <<위대한 캣츠비>>를 골라내 읽었다. 그런 나에게 교수 평소에 즐겨보던 만화 <<킹덤>>을 추천하였다. 작자는 하라야스히사였고 그 제목을 번역하면 <<왕자천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처음 며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눕기만 하면 잠들었다. 때로는 만화책을 손에 든 채로 졸군 하였다. 으스스 추워나며 나는 또다시 세찬 물살에 휩쓸려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갔다. 주위의 소리는 여전히 멀고도 둔하게 들려왔고 입을 벌릴 때마다 목구멍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갔다. 놀랍게도 나는 허우적 거리지 않았다.

2011호!

문뜩 눈을 뜨고도 꿈인줄 알았다. 복도에서 키다리경비원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일어나 창살에 다가가자 나한테 면회신청서를 보여주며 볼펜으로 거기에 적힌 사람의 이름을 짚었다.

알아요? 

.

면회 왔는데요, 만나볼 생각 있으세요?

잠간 말성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녀자친구 히토미였다. 끌신을 신으면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또 뭐라고 잔소리 할 턴데. 뒤통수를 긁적이며 면회실에 들어섰지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입에서 온천얘기가 나올가 봐 자꾸 긴장되였다. 약속을 깬 건 물론 아무 련락도 없이 인간증발을 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딴청을 부리는 척하다가 가만히 히토미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두눈에 벌써 눈물이 글썽하였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미안. 나는 모기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련락 안했어? 신청하면 전화통화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냥.

그냥이라니?

나가면 시즈오카로 놀러 가자, 나는 그 말을 속으로만 하였다. 히토미가 온천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목적지가 생각보다 멀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다그치자 후에 보자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온천이 싫은 것도 아니고 려행이 싫은 것도 아니다. 히토미가 싫은 건 더구나 아니였다. 시즈오카는 괜찮은 려행지였지만 하루에 네댓시간 밖에 못 잔 탓에 피곤이 쌓일 대로 쌓여 그렇게 먼곳까지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면회가 종료될 때까지 나는 말을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히토미앞에 앉아 있자니 무언가 불편하였다. 자리가 불편한 건지 심기가 불편한 건지 딱 짚어 말할 수 없었다. 웬 일인지 면회실이란 공간마저 불편했다.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그 상대와 나 사이에 흐르는 시간들, 그들이 갖고 온 얘기들과 심지어 옷에 묻어 온 냄새마저도 불편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듯 안절부절 못하였다. 면회시간이 종료되자 누군가 나를 붙잡아 제자리에 꾹 눌러앉힐가 봐 부랴부랴 그 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왜서 그런 기분이 들었을가?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걸가?  막히는 출퇴근 전차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재료와 문건들에서, 매일 감았던 태엽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걸가? 그것이 의도적인든 아니든 구치소에 있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그러한 것들에서 완전히 탈리했다고 굳게 믿었다.

두번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탈리했는지 전혀 몰랐다.

 

5

교수 <<킹덤>>을 몇벌인가 반복하여 읽었다. 그 만화는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을 잡지 못한 영정(진시황)과 천하대장군이 되고저 하는 신(리신장군), 그들의 중화통일의 꿈을 그린 력사이야기였다.

만화를 좋아해요? 

력사에는 배울 것이 많아.

례를 들면?

꿈이 있다는 행복한 일이야. 도쿄에 온지 5, 6년 된다고 했지? 느낌이 어때?

모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럴 수도 있지. 도쿄는 욕망과 혼돈의 도시니까. 

교수다운 말투였다.

왜서 그렇게 말해요?

유혹이 많을 수록 혼돈 하기 쉬워. 때로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기도 하지. 마치 잃어버린 10년처럼 말야. 들어봤어?

대충요. 한 할아버지한테서. 언제 때 일이예요?

1990년대를 말해. 

무슨 일이 발생했어요? 구체적으로 얘기해줘요.

,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나의 경험으로 말해주지.

. 나는 올방자를 틀고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일본은 말이야, 제조업이 발달하기에 상품을 외국에 수출해서 돈을 벌어. 미국이 주요시장인 만큼 대부분 딸라를 버는거야. 자, 시시껍절한 요소들은 제외하고 리해하기 쉽게 환률이 1딸라에 100엔이라고 치자구. 그러면 100엔짜리 연필이 미국시장에서 몇딸라일가?

1딸라죠.

그럼 환률이 1딸라에 50엔으로 내려가면 100엔짜리 연필이 몇딸라지?

2딸라?

가격이 배로 오르는 거야, 그럴수록 연필은 팔리지 않아.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같은 큰 제품이라면 더 안 팔려.

환률변동은 정상이 아닌가요?

당연히 정상이지. 근데 짧은 시기내에 급속하게 변동된다면 그건 참 골치 아픈 일이거든.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미국과 합의를 봤어, 1985년에.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말이야.

, 그 할아버지가 말하던 <플라자합의>가 그거였군요.

구체적 내용까지 설명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라. 결과부터 말하면 그 후 2, 3년 사이에 환률이 반토막이 났어. 그 바람에 수출경제가 축이였던 일본은 제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 기둥산업이 흔들리자 도미노현상이 일어난거야.

많이 심각했어요?

어떻게 설명할가? 뭐, 어쨌든 불황이 예상되자 정부는 일단 리식부터 내리웠어. 잇달아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미친듯이 올랐어. 말 그대로 미친듯이 말이야. 어떤 롱담까지 돌았냐 하면 도쿄의 땅을 팔면 미국을 전부 살 수 있다고 했어. 물론 우스개소리였지만 그 정도였어. 자네가 일하러 다녔던 긴자거리는 손수건 한장 만한 면적의 땅값이 억대까지 육박했다니까. 상상이 안 가지? 손수건 한장 크기의 땅이 억이야 억! 그 부동산거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어? 바로 여기야, 우리가 갇혀있는 미나도구역.

? 여기? 지금 우리가 금보다 더 비싼 곳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아있는거예요? 금싸락이라도 붙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후에 어떻게 됐어요?

한동안 해보니 안되겠는지 다시 리식을 올리더군. 그러니까 이번엔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이 곤두박질 했어.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가격이 순식간에 폭락했어.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됐지. 가정도 잃고 목숨도 잃었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미국 탓인가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네와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그건 고정관념이야. 잃어버린 10년은 하루 아침에 생긴 아니거든. 왜냐하면 70년대초부터 환률은 이미 내려가기 시작했으니까. 그것이 <플라자합의>를 통해 예측이상으로 추세가 급속해졌을 뿐이야.

그럼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 내부에서 생겼어. 시대가 바뀌면 빨리 적응해서 경제모식도 바꿔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또한 실책도 많았고.

<플라자합의>는 단지 도화선인가요?

그런 셈이지. 내 말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어. 관념은 엄숙한 문제니까. 자네 앞으로 중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만은 기억해두게.

누구를요?

로버트 라이시저. <플라자합의> 때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직접 일본과 담판한 사람이야. 그의 유도하에 일본의 강철과 자동차수출이 제한됐어. 무역보호주의가 심해.

~

작년에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두번째 경제대국이 됐잖아. 역시나 수출경제를 축으로 하고 많은 상품이 미국에서 팔리고 있어. 경제적으로 그 당시 일본이랑 묘하게 비슷해. 주의하는 게 좋아. 력사는 반복되니까. 미국과의 무역규모가 계속 늘어나면 언젠가는 마찰이 생길 거야. 그건 시간문제라고. 누가 알어, 그 때 되면 또 그 사람이 대표로 나와서 중국과 담판할지.

이름이 뭐라 했죠?

로버트 라이시저. 듣는 소문에 의하면 담판에서 미국은 아주 유혹스런 조건을 내놓았대. 엔을 세계화폐로 만들어준다나? 아니 글쎄 일본을 세계대국으로 부상시켜준대. 그게 말이 돼? 딸라가 있는 한, 미국이 존재하는 한 가능한 일일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지.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은 그 꿈을 꾼거야. 그리고 믿어버렸어. 전쟁이 끝나 일본이 경제면에서 기적을 이룬 건 사실이지만 국제적 지위는 별로였거든. 그래서 더 열망했는 지도 몰라. 이건 꿈이라고 해야 하나 리상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와보면 꿈도 아니고 리상도 아니죠.

그래, 그건 환상이야, 거품같은 환상. 허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시대의 경제보다도 그 속의 인간들이야. 돈을 흥청망청 잘도 썼어. 그 때 일본은 미국의 고정자산을 많이 사들였어. 가만 놔두면 미국을 통채로 먹어버릴 기세였거든. 미쯔비시 지쇼를 봐. 미국의 상징인 록펠러 센터를 사들였다가 나중에 파산되여 결국 다 토해냈잖아. 소박하게만 보였던 서민들도 언제부턴가 누구나 할 것 없이 명품브랜드를 차고 다녔어.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던 거야. 거품처럼 부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지.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남지 않았어.

끔찍하네요.

정말 끔찍한 기억이지.

경험담이라 하지만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는데요?

교수는 벽에 등을 기댄 한숨을 내쉬며 복도의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그의 기억이 째깍째깍 깨여나고 있는듯 싶었다. 그는 습관처럼 끊어진 새끼손가락을 매만지며 쓸쓸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때 투신자살하셨어.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내가 커피 한컵을 갖다 드린 게 마지막이였지. 서재에서 늦게까지 뭔가 하더라구, 오늘도 밤을 새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었는데 새벽에 사이렌소리에 놀라 깨나 보니 경찰차와 구급차가 와있었어. 서재의 한면에는 모두 거기에 관한 자료들로 도배되여있었고. 집에 있는 돈을 싹 끌어모은 것도 모자라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해서 주식에 투자했던 거야. 하루 아침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난 셈이지.

“…”

끔찍한 알려줄가?

뭔데요?

모든 것이 여전히 진행중이야.

시대는 잃어버린 10년 넘어 어느새 20년이 되여버렸고 비관적인 경제학자들은 앞으로 잃어버린 30년 가능하다고 경고하였다. 강산이 두번이나 바뀔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도 일본은 회생(回生)을 위하여 사투를 벌리고 있다.

거품이 주는 환상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거품이였다. 교수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남지 않았다. 하였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가?

 

6

고지마에 관한 기억들을 풀어헤칠 때마다 언제나 여러개의 단어들이 같이 쏟아져나왔다.

    노을과 , 그리고 진실.

    때로는 , 축제, 오시마로 바뀌기도 하였지만 꿈이란 단어는 번마다 나타났다. 독불장군 운동을 때면 고지마도 종종 따라서 같이 했다. 나는 벽에 기대여 앉아 가끔 셈을 세주기도 하였는데 어느 한번 그가 운동하다가 뒤로 넘어져 어깨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근육이 몹시 아파서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걸 보고 경추교정을 해주었다.

사이씨는 교정안마를 어디서 배웠어요?

맹인의사한테서. 안 무서웠어요?

아니요, 저는 왠지 사이씨가 아니키(형)처럼 느껴져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저야 고맙죠.

그니까 저한테 존대말을 쓰지 마세요.

일본에 있으면서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도 아니키라고까지 부르는 사람은 고지마가 처음이였다.

그나저나 나가면 뭐해?

모르겠어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바깥보다 안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요. 성인식(20살)도 한달 전에 여기서 보냈어요.

왠지 어려보인다 했어.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데?

공지에서 일했어요. 노가다나 뛰여 볼가요?

그것도 많이 번다고 하던데.

예전보다 일감이 줄었어요. 나같은 사람들은 안정한 직장을 찾기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평생 아르바이트를 뛸수도 없고.

집에는 안가?

별로 좋은 감정이 없어서. 아빠한테 혼났거든요. 학교에서 하루 건너 싸움만 했으니까.

개구쟁이였구나.

아니예요, 남자라면 녀자를 위해서 그럴수도 있는 거죠.

첫사랑이야? 흐흐.

글쎄요, 소학교 때 일이라 얼굴도 가물가물해요. 그런데 이상하죠. 화장실에서 포르노만화를 볼 때면 그 애 얼굴이 불쑥불쑥 잘 떠올라요. 마스터베이션 할 때도 그래요. 이상하지 않아요? 키스도 해봤는데, 나에겐 첫 키스였죠.

키스를 해본 녀자의 얼굴을 화장실에서, 그것도 야한 만화를 보며 수음중에 떠올린다는 것이 나는 불미스러웠다. 고지마의 기억 속에는 사랑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직 유혹스런 첫 키스만 남아있었다.

기억 ? 키스까지 해봤는데.

몰라요.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나 봐요. 잊고 싶은 건 잊지도 못하면서.

나는 일어나 앉아 고지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1센치 정도의 고슴도치 헤어스타일에 오관은 단정하나 무엇을 참는지 옆이마의 피줄이 항상 불끈 튀여나와있었다.

집가기 싫다면 차라리 어릴 녀자애를 찾아가면 어때? 10년만에 재회 하면 어떤 느낌일가? 신기하겠다. 그 애 이름 뭐지?

“…”

그것도 기억 ? 집은?

...

다른 친구는?

“…”

꼬치꼬치 캐묻는 나의 질문에 옆에서 듣고있던 독불장군 보다 못해 나에게 한마디 했다.

, 너 로맨스를 좋아하냐?

오지랖인가?

근데 알아? 로맨스는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원한 거야. 이봐, 고지마, 너 좋아하는 리상형이라도 있어?

, 요시나가 사유리.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요시나가 사유리는 데뷔해서부터 줄곧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국보급 녀배우였다. 단발머리는 어깨 우까지 흘러내렸고 반달눈에 입술은 도톰하면서도 입꼬리가 살짝 쳐들려있었다. 게다가 조금 커보이는 귀는 관음보살을 련상시켜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요시나가 사유리는 70살이 거의 돼가는 할머니였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중인 AKB48(녀성아이돌그룹)와 같은 귀여운 애들도 많은데.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분이죠.

그런 스타일의 녀자랑 살고 싶어?

누군들 싫어하겠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좋은 집터를 사서 별장을 짓고 온 가족들이 다 모여서 살 거예요. 아빠와 엄마는 1층에서 살고 애들은 2층, 나는 3층. 요시나가 사유리와 같은 안해랑 함께 저녁노을도 보고 밤하늘의 별도 보고 싶어요. 그러면 재미없는 개그프로도 보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너의 꿈이야?

, 집터도 이미 봐두었어요.

그냥 해보는 소리 아니구나, 집터까지 봐둔 걸 보면.

나는 지금 진지하다구요. 집터는  오시마에 있어요. 도쿄의 오시마(大岛, 동경만 남쪽바다에 위치한 작은 ).

구체적인 주소까지 정확히 말하는 그는 어린애마냥 신이 나있었다.

어때요? 근사하죠?

, 행복한 풍경이야.

어떤 것이 행복이예요?

행복은 만족에 있는 거야.

그래서 아니키가 행복해보이는 걸가요? 여기 좋아요?

별로 나쁘진 않아. 사나흘에 한번씩 샤워하는 거 빼고는.

아니키, 머리 이상해진 거 아니죠?

그럴리가. 너의 꿈은 꼭 이루어질 거야.

고지마는 요즘따라 마음이 들떠있었다. 그는 구치소에서 나가면 교통이 편리한 순환선 야마노데센 부근에서 세집을 찾을 거라고 하였다. 일자리는 <<타운워크(아르바이트 잡지)>>보다 매주 월요일마다 발행되는 <<an(아르바이트 잡지)>>을 보면 더 효과적이라고 하였지만 일주일씩 기다리기는 짜증이 난다고 하였다.

나가서 일자리 구하지 못하면 어떡할가요?

나이에 못해?

방도 새로 구해야겠죠?

, 혼자 살기엔 그래도 원룸이 좋지.

낯설은 침대에서 자긴 싫은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아, 습관되면.

그는 나간다는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 약을 자주 먹었는가? 때론 교수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정신안정제라고 하였는데 작고 하얀 알약이였다. 구치소 안에서 약을 먹을 때면 신청이 필요했다. 그는 경비원 앞에서 매번 용량 대로 두알씩 먹는 체하면서 한알은 손안에 움켜쥐고 가만히 숨겼다. 그렇게 감춰둔 약은 며칠씩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먹어버리군 하였다. 하지만 그 약은 자신의 꿈에 관한 얘기를 해주던 그 날 저녁에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7

나는 뒤늦게 전차에서 내렸다. 신오쿠보역을 빠져나와 맞은편 2층에 자리 잡은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히토미가 오늘따라 긴박한 회의가 있어 마중을 오지 못했기에 내가 그녀의 사무소 쪽으로 왔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그날의 고지마를 떠올려보았다. 그는 나에게 교수 독불장군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부터 정서가 이상해졌다. 그 날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서도 검찰에 소환되여간 교수 독불장군 돌아오지 않았다. 둘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고지마는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수 진짜 신분이 뭔지 아세요?

손가락이 끊어졌던데, 혹시 야꾸자(黑社)아냐?

맞아요. 그것도 야마쿠찌!(山口) 조직내에서 서렬은 잘 모르겠지만 사기죄, 협박죄, 폭력죄로 기소를 받고 있어요. 고리대를 했거든요. 살인죄도 검토중이래요. 신문과 티비에서도 보도한 적이 있어요.

경찰들도 섣불리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는 야마쿠찌조직의 성원이니 구치소에서 단연 교수급이 될만하였고 별명의 유래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교수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독불장군이였다. 그는 중국 산동 태생이였는데 16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온 후 국적을 바꾸었다. 그러던 그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한 야꾸자를 알게 되였고 그들이 주는 정보를 리용하여 부자집만 들이쳐서 현금을 훔쳐내는 일을 했다. 그 후 몇차례 더 큰 사건을 일으키던중 어느 날 수익분배를 놓고 의견분기가 생기자 화난 김에 몸에 감추고 다니던 칼을 꺼내 그 야꾸자를 20번이나 찔러서 죽였다.

 독불장군사건도 대단했어요. 10년동안 감옥살이를 했지 뭐예요. 나온지 반년도 안돼서 가브키쵸에 놀러 갔다가 싸움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여기에 들어왔어요. 문제는 그한테 찔려 죽은 야꾸자가 글쎄 당시 교수 관할구역내에 있는 사람이였대요. 야마쿠찌의 성원일지는 모르겠지만.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런 사람이 미나도구치소 9호실에서 만났으니 그야말로 한산에 호랑이 두마리가 살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언젠가 한번 대판 붙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였다.

 교수 판결 받으면 아마 20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예요.

인생 끝났구나.

표현이 좋으면 전에 풀려날 수도 있어요. 뭐 그 때면 할아버지가 될테지만. 교수 어떻게 생각할가요?

그래도 나가고 싶지 않을가? 밖에 나가면 매일 샤와도 할 수 있고 먹고 싶은 소바(메밀국수)도 먹을 수 있잖아. 또 그리운 가족들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잖아.

가족? 보고 싶은 사람? 오늘 몇일이예요?

14일.

어쩌지, 오시마에 가야 하는데...

?

안돼, 거기 가면 안돼.

?

도대체 가고 싶다는 건지 가고 싶다는 건지. 두서없이 던지는 그의 말에 나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지마는 서너메터 밖에 안 되는 쇠창살 앞에서 서성거리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오시마에 가고 싶은 그와 가고 싶지 않은 그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얘기가 끝나자 나는 약간 이상해진 그의 정서를 느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바닥으로부터 한메터 쯤 벽을 쌓았는데 그 우는 전부 강화재료가 섞인 투명유리로 되여있어서 잘 깨지지 않았다.

갑자기 난데없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내다보니 고지마가 가사도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류행가요도 아니고 나이 든 분들이 즐겨듣는 엔가(일본전통가요)도 아니였다. 경비원이 달려와 조용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그는 벽에 기대여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경비원이 돌아가자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세번이나 경고를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화장실에서 나왔다. 제발 그가 무슨 일을 벌리지 말기를 바랬다. 이튿날은 검찰에 소환되여 가는 날인 데다가 운이 좋으면 사건이 종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맨주먹으로 쇠창살을 두드리며 반주까지 맞추었다. 얼굴은 지지벌개 났고 옆이마의 피줄이 더욱 불끈 튀여나와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5층의 분위기는 삽시에 긴장해졌고 사람들의 촉각이 전부 우리 방으로 쏠렸다. 경비원이 수차례 경고를 줘도 소용이 없자 네명이 추가로 우르르 달려왔다. 고지마는 사람이 모여들면 모여들수록 점점 흥분이 되여 목소리도 더욱 높아졌다. 경찰들도 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쳐들어왔다. 한명이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명이 문을 지키고 나머지 세 사람이 그한테 달려들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고지마는 결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한쪽 구석에 서서 달려드는 경찰들에게 주먹을 날리자 그중 한명이 옆구리에 찼던 전기몽둥이를 꺼내더니 마구 내리쳤다. 란투극이 벌어졌다. 거친 몸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지마는 코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발로 경찰의 손을 물어 몽둥이를 빼앗아 휘둘러댔다. 한명이 어깨죽지를 맞고 다른 한명이 머리를 얻어 맞았다. 바닥에 뿌려진 진붉은 피를 보자 나는 그만 얼음이 되여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건 축제야, 축제! 방해하지마!

몽둥이를 휙휙 휘둘러대는 고지마의 모습은 반항보다도 흥이 춤사위를 방불케 했다. 흥분이 아닌 광란에 가까운 축제였다. 소름이 끼쳤다. 그는 광기를 부리며 반항하였으나 경찰 두명이 더 추가되는 바람에 제압당하여 카펫바닥에 구겨박힌 채 꼼짝달싹 못했다. 결국 드는 두손에 수쇄를 차고 어디론가 끌리워갔다.

개떡 같겠다.

구치소에 돌아온 독불장군 절레절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고지마는 구치소나 감옥 안에서 소위 검은 으로 불리우는 곳에 끌리워갔다. 검은 면적이 서너평방메터 밖에 안되고 바닥이 세멘트로 되여있어 딴딴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난방이 없었다. 게다가 작은 공간에 변기통까지 놓여있어 다리를 펴고 누울 수조차 없었다. 

! 쾅! 쾅!

됐어! 차라리 잘됐어!

뭐가 잘됐다는 말인가?

고지마는 발로 사정없이 철문을 걷어찼고 소리는 우리 방에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고지마의 검찰소환은 끝내 무산되였다. 경찰은 새로운 죄로 그를 재차 기소하였다. 나처럼 일을 하다가 손님과 싸운 건 기껏해야 돌발사건에 속했다. 그의 경우도 돌발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래일 검찰에 소환되여가면 풀려날 수도 있다는 걸 몰랐을가? 그럼 알면서도 그랬단 말인가? 정말 불가사의하였다. 솔직히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리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고지마한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한차례 투쟁이라고 정의를 내린 건 썩 후의 일이였다.

고지마는 격리되였다. 밖에서 격리되여 구치소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그 안에서도 한층 더 깊은 곳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격리된 것이 아니라 숨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찾아서 그는 부단히 내부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날 , 구치소에 들어와 매일 죽은 사람처럼 쿨쿨 잤던 나는 온 밤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그 이튿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8

검은  사건은 인과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보다 나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평화로운 오후, 따뜻한 창가에 누워 해볕쪼임을 하다가 별안간 소나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였다.

풀채 밖에 없는 도시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고지마가 검은 들어가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입맛이 없는 것보다 고지마가 없는 것이 더 습관이 안되였다. 특히 교수 독불장군 벽에 기대여 앉아 말없이 마주보고 있을 때면 사람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분위기가 지독하게 불편했다.

그런 불편함은 구치소 곳곳에 숨어있었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만화를 손에 들고 보는 척만 하였고 고지마가 도맡았던 화장실청소도 내 차례가 돌아오자 꺼림직하였다. 무엇보다도 사나흘에 한번씩 하는 샤와 때문에 퀘퀘 묵은 땀냄새가 무척이나 싫었다. 가뜩이나 냄새에 민감하여 히토미한테 개코라고 핀잔을 듣는데.

히토미는 발렌타인데이 이튿날에 내가 일하던 편의점 사장을 모시고 면회를 왔다. 사장은 경찰한테서 사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전해들었다며 나의 행위가 조금은 리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빨리 풀려나와서 가게에 돌아오라고 하였다. 생각 밖이였다. 그녀가 어떻게 설득하여 사장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또 설득하기 위해 나를 대신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풀려나가면 우리 시즈오카로 놀러가자.

내가 먼저 온천얘기를 꺼냈다. 히토미는 그렇잖아도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각오하라는듯 눈을 흘겼다. 이제 풀려나오면 가게사람들한테 페를 끼쳤다고 인사부터 하라며 사장 앞에서 눈치도 주었다.

말이 ? 남자친구 있는 녀자가 련인절 홀로 보냈다는 게.

나는 이젠 그녀의 어떤 투정이나 잔소리도 받아줄 있는 아량이 생겼다. 풀려나가기만 한다면 예전에 마음에 걸렸던 모든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독불장군 경추교정을 해달라고 하였다.

녀자친구가 뭐래?

건강하게 있다가 나오래.

괜찮은 녀자인 같아.

, 넌 녀자친구 있어?

초중 때부터 줄곧 사귀던 애가 있어. 일본에 와서는 먼거리련애를 했고 그러다가 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됐지.

그래서? 헤여졌어?

그애가 나를 기다렸어, 10년 동안이나. 믿기지 않지?

독불장군 엎드려 안마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국적을 바꾼 얼마 안돼서 엄마는 중국으로 돌아갔어. 나는 그 당시 대학에 붙어 건축학과에 다녔고. 그러다가 일을 쳐서 감옥에 간 거야. 짭짤한 돈맛에 욕심이 좀 지나쳤지. 결국 이 꼴이 됐지 뭐야. 엄마는 속이 타다 못해 너무 울어서 눈까지 멀었어. 빛이 있으면 어슴푸레 보기는 하는데 행동이 많이 불편해.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그 애가 아예 우리 집에 들어와서 엄마를 보살피며 같이 살았어.

집에서 뭐라고 안해?

몇번 설득하다가 포기했대. 나도 헤여지자고 했어. 한두번이 아니야. 그런데도 끝까지 기다려준 거야.

대단하구나. 풀려나가게 되면 먼저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녀자친구가 기다리잖아. 왜 가부키쵸에 가서 놀았어?

돌아가기 싫어.

애는 어쩌고?

그래서 답답해죽겠어. 도리 대로라면 중국으로 돌아가 그 애랑 결혼해야 하잖아. 근데 말이야, 난 스무살에 감옥에 들어가서 서른이 돼서야 나온왔어. 10년이란 시간을 안에서 보낸 거지. 가장 아까운  20대를 말야. 난 지난날 잃어버린 시간과 자유를 되찾고 싶어. 교수 고지마를 봤지? 밤중이면 약을 한줌씩 먹는 걸. 나도 한때 그랬거든. 그것도 오래가면 효과가 없어. 내가 왜서 웃몸일으키기를 천개씩이나 할 수 있는지 알겠지? 그렇게 10년을 버텨 감옥에서 나왔는데 이번에 나를 기다린 건 결혼이란 울타리야. 난 정말 싫어, 그애가 싫단 말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싫어.

결혼도 싫어?

아니, 결혼을 한 내가 싫어.

?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니까.

아니야, 그것도 네가 맞아. 관계가 묘할 뿐이야.

무슨 관계?

자유와 결혼.

어떻게 묘한데?

자유를 원하는 너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아. 반면에 결혼을 한 너는 한곳에 매달려 있는 풍경(风铃)과도 같고. 간단하게 말하면 바람으로 살자니 풍경소리가 들리고 풍경으로 살자니 또 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나는거 야. 참 아이러니하지?

무슨 말이야?

그냥 그렇단 얘기, 이제 어떡할 거야?

베트남에 가려고. 전에 알고 지낸 아메리카친구가 있는데 거기서 장사를 한대. 그 애랑 손 잡고 한두건 크게 해서 놀러 다닐 거야. 어쩌다 나왔는데 세상구경도 해야지.

그가 감옥에 있는 10년 동안 밖은 너무나 달라졌다.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월드컵이 세번이나 개최되였고 백년에 한번 일어날가말가하는 세계금융위기(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발생하였으며 그러는 가운데 스마트폰이 화려하게 력사무대에 등장하여 기존의 생활방식을 송두리채 뒤집어 놓았다. 게다가 잃어버린 10년도 어언간 20년이 되였다.

진짜 안가려고? 그래도 돌아가야 하는거 아니야?

그럼 ?

내가 ? 새삼스럽게.

너도 나가는 싫어하잖아.

내가 언제? 난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고 싶어.

, 웃기네. 즐길 때는 언제고? 오후 되면 해볕쪼임을 하면서 책만 읽었잖아, 늘어져서 잘도 자던데? 너 구치소에 들어온 게 맞기나 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제 겨우 보름이 됐는가? 마치 생활체험을 하러 온 사람 같애.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의 비꼬는 말투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게를 찾지 못했다. 그런 핑게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찾을볼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화가 날가? 왜 계속 변명하려는 걸가? 차라리 솔직해지면 안될가? 한심했다. 나절로도 그런 시도들이 어이없고 무의미하게 보였다.

나는 내가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허무하여 온몸이 텅텅 비여가는 느낌이였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몸뚱아리를 채우고 싶었다. 히토미가 보고 싶었다. 날마다 눈치를 보며 하던 일도 그리웠다. 출퇴근시간이면 사람들 사이에 끼워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지하철도 이제 보니 그렇게까지 싫은 것이 아니였다.

면회실에서 도망쳐나왔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야 탈출을 시도하는 걸가? 자신을 둘러싼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건 소극적 의미에서의 탈출이였다. 진정한 탈출이란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해탈이다. 하지만 독립적이고 완정한 자신을 얻으려면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구치소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걸가 아니면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걸가?

 

9

고지마는 검은 들어간 나흘 만에  돌아왔다. 그 날은 세탁일이자 일주일에 두번 밖에 없는 목욕일이였다. 내가 대충 몸을 씻고 나와보니 그가 한창 머리를 깍고 있었다.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인지 출가한 중과도 흡사했다. 며칠 전에 고도로 흥분되였던 고지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방에 돌아와 경비원이 갖다준 세탁물을 정리하였다. 해빛을 못 봐서인지 얼굴은 해쓱해졌고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온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언어자체를 검은 두고 나온 듯하였다. 아니, 몸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죄다 그 곳에 두고 나왔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는 마치 바람이 샌 풍선과도 같았다.

교수 독불장군 검찰에 소환되여갔고 방에는 나와 고지마가 남았다. 낯설은 그의 모습 때문인지 우리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그는 차곡차곡 개인 옷들을 모아서 베개를 만들어 베고 누웠다. 한참 천장을 올려보다보다가 일어나 카펫트청소도 하고 또 벽에 기대여 앉아 두무릎을 세우고 그 우에 이마를 얹기도 하였다.

아니키.

그가 드디여 입을 오후가 거의다 지나갈 무렵이였다. 나는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언제 나가요?

일주일 후에.

나가게 되면 주간잡지 몇개 넣어줘요.

그래. 어떤 걸로 보내줄가?

<<주간현대>>와 <<주간포스트>>, 그리고 <<주간플레이보이>>도 부탁해요.

다른 ?

괜찮다면 포르노만화도 부탁해요. 좀 센 걸로.

알았어.

그는 잠간 허공에 눈길을 고정했다가 다시 물었다.

아니키는 나가면 어디로 가요?

어딜 가긴? 집에 가지.

내가 당연한 물었지.

너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경찰을 때리는 바람에 사건이 복잡해졌어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참고 버텨. 돈 벌어 좋은 집터를 구해서 별장 짓고 산다며? 그것도 3층짜리. 

, 앞에 정원도 만들고 하얀 담장도 쌓을 거예요. 그 주위에 동백나무를 심으면 멋 있을 것 같아요. 대문은 철문으로 할 거구요, 무게감 있게. 마당도 넓으니까 안에서 개도 키우고.

집터가 큰가 보네. 개도 좋아해?

, 시바이누(일본 토종개)는 정말 귀여워요.

강아지만 키우지 말고 애기도 키워야지. 요시나가 사유리처럼 예쁜 안해랑 함께 산다며? 해질녘이면 같이 노을도 보고.

“…”

고지마는 잠간 침묵을 지키더니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살이 비스듬히 비추어 들어오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 나를 등지고 섰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노을이다, 노을!

갑자기 고지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게 물든 노을빛이 창가로 비집고 들어와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건물 탓인지 빛은 조금 밖에 비추지 못했고 그는 까치발을 한 채 기어코 얼굴을 바깥 쪽으로 내밀어 애써 노을을 반겼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따라 두눈 깊숙이 무언가 바라보았다.

 “ 아름답구나.

고지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그의 뒤모습이 아름답도록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서일가, 왜 그 모습만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에 서있는 것 같을가? 왜 나는 언제나 어쩔 수없는 현실과 꿈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걸가?

마지막 일주일이 나에게는 기나긴 사색의 시간이 되였다.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운동도 하지 않았으며 카펫청소도 외면하였다. 그 사이 또 한번 검찰에 소환되여갔다. 대기실에서 손칼질하며 셈을 세는 경비원아저씨와 마주쳤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딸기잼에 곱페빵도 먹었다.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 벽에 기대여 창문만 바라보았다. 눈 앞에 고지마의 뒤모습이 재현되였다.

사실 그날 노을이다.하고 소리칠 고지마는 그다지 높지 않게 웨쳤다. 힘이 쭉 빠진 그의 목소리는 몹시 메말라서 빈 갈대 속을 가로 지나는 가을바람과도 같았다. 무언가를 갈망하듯 체념하고 열망하듯 단념하는 고지마의 목소리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랬다. 정상적인 열망이 아니였다.

그가 창가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던 뒤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몇년이 지난 지금도 구치소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그의 뒤모습이 아니라 메마른 웨침소리였다. 그리고 그 웨침소리는 나의 귀전에 남아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노을이다, 노을.

 

10

사건조사를 끝내기 , 검사는 이번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나는 금후 비슷한 상황에 부딪치면 경찰을 통하거나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지 폭력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울러 이번 사건을 깊은 교훈으로 삼겠다고 태도표시를 하였다. 그는 흡족스러운 표정이였다. 벌금을 고작 10만엔 하고 나왔으니 검사가 많이 봐준 셈이였다.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교수 두번 다시 이런 곳에 오지 말라고 하였고 독불장군 나중에 자기가 나가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 마시자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고지마에게 얼굴을 돌렸다.

풀려나오게 되면 련락해.

고마워요. 잡지를 잊지 마세요, 만화도.

, 까먹을 번 했네. 갖다 줄 때 받는 사람의 이름도 써야 하잖아. 너 이름 어느 한자를 써?

小岛 (고지마)예요.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순환선 야마노데센을 탔다. 구석 쪽에 깊숙히 몸을 실은 채 두눈을 감았다. 기계음처럼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안내방송이 이 순간 더 없이 친절하게 들려왔다.

시브야역에서 스크램블 교차로가 보였지만 더는 숨이 차지 않았고 쇠덩어리마냥 굳어져버렸던 몸도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안내방송에 따라 전차는 처음에 올라탔던 그 곳을 지나 신오쿠보역에 도착하여 차문을 열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두팔을 벌렸고 나는 천천히 플래트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또다시 거대한 도쿄로 돌아왔다.

멀어져가는 전차꼬리에는 2월의 기억들이 조롱조롱 매달려있었다. 스미마센, 문뜩 누군가 나의 발을 밟았다. 그 사람은 급한 일이 있었던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계단을 따라 쪼르르 내려갔다. 나는 따금해나는 발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몇초 지나 그렇구나,하고 생각했다. 이곳이야 말로 제대로 된 세상이구나. 아무리 현실이 싫다고 해도 여기에 있어야 아픔도 진실하게 다가오는 거구나.

구치소에서의 즐거움은 뭐였을가? 똑같은 시간에 자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밥을 먹으며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곳, 그 곳에서 느낀 자유와 행복은 나의 것인 듯하면서도 내 것이 아니였다. 거기에 살아있는 건 오직 죽어가는 시간들 뿐이다. 불현듯 나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 세상이 새로워진 걸가 아니면 내가 새로워진 걸가?

역전 맞은 2층에 자리잡은 커피점으로 들어가 히토미를 기다렸다. 그녀는 커피 한잔을 거의 굽낼 쯤에 앞에 나타났다. 몸에 찰싹 들어붙은 청바지스키니진과 핑크색 하이힐이 그녀의 롱다리를 한결 더 빛내였다. 턱라인까지 내려오는 숏컷에 라이더쟈켓을 맞춰입은 그녀는 깔끔하면서도 력세리했다.

(오랜만이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턱을 괴고 잠시 그녀를 감상하였다. 마지막 커피 한모금을 입에 털어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히토미!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사이쨩!

돌아서서 나를 발견한 그녀는 두팔을 벌린 나에게로 달려왔다. 나도 앞으로 성큼 뛰여가 그녀를 품 속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귓속말을 하듯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다이마.( 다녀왔어요,라는 뜻.)

오카에리.(어서 오세요,라는 뜻.)

인파는 흐르고 시간은 멈췄다. 나는 평온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히토미가 시킨 대로 편의점에 찾아가 그동안 페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인사부터 하였다. 하야시는 무척 반가운 기색이였다.

아침, 저도 구치소에 갔댔어요. 사이씨가 즐겨 마시던 오로나민 C와 자주 보던 경제신문을 사들고 말이예요. 조사가 끝나지 않아서 면회가 안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페를 끼쳤죠?

그런 하지 마세요. 말은 안했지만 사이씨는 저한테 큰 힘이 되였어요.

우린 꽤나 맞는 콤비였죠.

그보다 저는 같이 일하면 마음이 항상 든든했거든요.

고마워요.

우리는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재회했다는 반가움에 몹시 들떠있었다. 히토미도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나는 무언가 귀속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그때로부터였을 것이다. 얼음장에 관한 기억은 더는 꿈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새없이 보내다가 약속 대로 온천려행을 떠났다. 우리의 목적지는 시즈오카의 이즈반도 동남쪽에 자리잡은 이나도리소 료칸이였다. 장소는 히토미가 정했는데 바다와 수평으로 마주한 로천온천이 소문 대로 볼 만하였다. 그 만큼 객실이 전부 오션 뷰로 돼 있어 바다를 한눈에 바라보도록 시야가 확 트였다. 시즈오카 스루가만의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시간은 느적느적 기여가고 있었다.

뜻밖에 출발할 때의 스케줄이 바뀌였다. 원래 일요일 저녁에 돌아가려던 계획은 히토미가 출근하는 사무소의 갑작스런 호출로 그 날 아침에 일찍 떠나야 했다. 전화를 받은 그녀는 꼭두새벽부터 무언가 준비를 하더니 비몽사몽에 빠져있는 나를 두고 혼자서 급급히 역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이게 뭐지? 히토미가 떠나간 후에도 세시간은 더 잤다. 그녀는 어찌나 급했던지 간단한 화장품만 챙기고 나머지는 나에게 맡겼다. 이것저것 짐을 다 챙기고 나서 서랍까지 꼼꼼히 체크하다가 안에서 지도 한장을 발견하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물고 있는 료칸을 찾아내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도로 지도를 접었다. 잠시 후 다시 펼쳤다. 익숙한 지명이 눈에 확 안겨왔다.

오시마?!

여긴 고지마가 별장을 지으려고 봐둔 곳이 아닌가? 이즈반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동쪽바다에 자그마한 섬이 하나 있었다. 행정상으로는 도쿄에 속했지만 지리적 위치는 이즈반도와 더 가까웠다. 료칸 부근의 이나도리항구에서 출발하면 오시마의 모도마찌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번 가볼가? 고지마가 밥 먹듯이 외우던 그 집터, 가족이랑 살고싶어 했던 그 곳, 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렇게 집착했을가?

나는 배를 타고 가는 내내 줄곧 고지마를 생각하였다. 기억은 그가 창가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던 모습에서 정지되였다. 그 앞에도 그 뒤에도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본 고지마는 대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였다.

그에 대한 나의 사색은 여러가지 색상과 모습들을 갖추었다. 대기실에서 나나!하고 소리를 지르던 고지마, 화장실에서 야한 만화를 보며 수음하던 고지마, 나에게 꿈얘기를 들려주며 아이처럼 신나하던 고지마, 쇠창살을 마주하고 축제의 노래를 부르던 고지마, 바람이 샌 풍선마냥 속이 텅 빈 고지마, 창가에 까치발을 한 채 노을을 바라보던 고지마. 하나하나 뜯어보면 진실한 듯했지만 다 합쳐놓으면 또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였다. 마치 진실하다  진실하지 않다 사이에 서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지

 

11

모도마찌항구에서 내리니 섬중앙에 우뚝 솟은 미하라산이 한눈에 안겨왔다.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개인 하늘에 하얀 구름 몇점이 화산구 꼭대기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분화한 것이 25년전(1986)이예요. 저도 그 해에 태여났거든요.

나의 히치하이킹에 응해준 운전수는 미하라산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해변가의 도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활화산이예요?

그래요. 여기 처음 오는가 보죠?

.

축제 보러 왔어요?

무슨 축제요?

여긴 한창 동백꽃축제중이예요. 길옆에 빨간 꽃들이 보이시죠? 도로를 따라 쭈~욱.

그녀는 턱끝으로 차창 밖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쥐여짰다.

이게 동백꽃이예요?

놀랍죠? 이 작은 섬에 동백나무가 300만그루나 있어요. 오시마를 대표하는 꽃이예요. 해마다 2~3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섬을 찾아오거든요. 겨울의 랑만이죠.

~

나는 콧소리를 길게 뽑으며 길옆에 피여진 동백꽃에 눈길을 돌렸다. 빨간 꽃잎에 황금색 꽃술이 잘 조화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까지 더해지자 차창 밖은 한장의 엽서와도 같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말 예쁘네요.

예뻐요? 난 왜 슬플가요?

왜요?

축제가 끝난 뒤의 동백꽃은 그야말로 스산해요. 목이 툭 꺽인 채 떨어진 모습 말이예요.

꽃은 시들기 마련이잖아요.

동백꽃은 꽃잎들을 하나둘씩 떨구지 않아요. 꽃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송이 채로 떨구거든요.

미련일가요?

아니, 시들기를 거부하는 거죠.

언제까지 펴요?

봄이요, 다른 꽃들이 금방 피여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것처럼 입꼬리를 내리드리우더니 이내 미소를 띠였다.

제가 괜한 얘기를 했죠? 놀러 오신 분한테.

덕분에 심심하지 않아요. 워낙 성격이 조용해서.

노래라도 불러 드릴가요? 제가 분위기 하나는 잘 띄워요.

아니, 괜…”

그녀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흥얼흥얼 노래가락을 뽑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노래가 아니였다. 그렇다고 엔가도 아니다. 사투리로 불러서인지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민요예요, 여기 섬노래죠.

, 그렇군요. 무슨 뜻이예요?

 

나는야, 오시마

미하라산 불길속에 태여나

가슴에 연기는 끊길 몰랐지.

 

, 대충 이런 뜻이예요. 들어봤어요?

어디서 들어본 같기도 하고. 줄곧 여기서 살았어요?

, 전에 분화할 때도 우리 가족은 계속 여기에 남았어요. 비록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아직도 저 산 깊은 곳에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어요. 간혹 땅이 조금씩 흔들릴 때면 느낄 수 있거든요.

무서워요?

전에는 무서웠죠. 그럴 때마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하던 일에 집중해요. 그러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거든요. 초조하지도 않구요.

위험하잖아요, 폭발하면.

폭발한다고 오시마가 사라지는 아니예요. 미하라산이 다시 잠들 때까지 가슴 속에 꼭 품고 기다리는 거죠. 그러면서 오시마는 새롭게 태여나요.

새롭게? 낯설지 않을가요?

익숙해져야죠. 아, 다 왔어요. 저기 앞이예요.

출발한지 20분쯤 되여 그녀는 차를 세웠다.

옆길을 따라 걸으면 보일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차가 굽인돌이를 돌아 사라져서야 나는 몸을 돌려 도로 옆구리에서 뻗어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산기슭 쪽으로 뻗은 량켠에는 굵기가 한뼘 남짓이 되는 아담한 동백나무들이 초록색 잎사귀 우에 빨간 꽃들을 가득 틔워놓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와 동떨어진 외딴 곳인 데다가 지나가는 차들도 드물어 아주 고요했다. 저 멀리 바다 우에 떠있는 배들은 유화 속에 머문 것 같았고 바다바람은 꽃향기를 실어다 주며 길옆의 나무잎들을 가볍게 흔들어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들의 날개짓소리에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정지되여,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조용하고 평온한 오시마였다.

나는 마치 누군가의 속에 들어온 같았다.

이런 곳에 별장을 지으려 했을가? 혹시 그녀가 주소를 잘못 알고 데려다 주지 않았나,하고 생각하고 있을 쯤에 고지마가 말한 집터를 발견하였다.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땅이 엄청나게 넓었다. 나는 턱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지마가 평생동안 얼마만한 돈을 벌어야 이 땅을 다 살 수 있을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과연 이 곳이 맞는가? 나는 주소를 몇번인가 반복하여 확인하였다.

틀림 없었다.

거기에는 집을 짓기 좋은 근사하고 훌륭한 빈터가 없었다.

 

12

나는 오시마에서 고지마를 만났다.

 (이 곳이 틀림없는데)

대문 옆에 붙어있는 주소를 재차 확인하고도 오리무중에 빠졌다. 별장대문은 철로 만들어져 무게감이 있었고 그다지 높지 않은 하얀 담장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한바퀴 심어져있었다. 홀연 담장우로 개짖는 소리가 뛰여나왔다. 이윽고 철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스무살 쯤 돼 보이는 소녀가 개 한마리를 끌고 나왔다. 반달눈이 퍽 인상적이였다. 나는 그 소녀를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름이 떠오를듯 말듯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를 찾으세요?

고지마를 찾아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시바이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꼬데 죳또맛떼.(여기서 좀 기다려)하고 일렀다. 시바이누가 쪼크리고 앉자 나한테 다가와 앞길을 따라 잠간 산책하자고 하였다.

히카리()라고 불러요.

큰길에 이르자 그녀가 돌아서며 먼저 인사했다. 붉은색 하프코트에 안에는 얇고 연한 노란색 니트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이예요.

고지마랑 친해요?

아니키예요.

그녀는 두손을 뒤로 잡고 그렀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몇번 끄덕였다.

고지마는 여기에 없어요.

알아요.

그럼 무슨 일로 왔어요?

별장 히카리씨 집이예요? 누가 지은 거예요?

우리 맞아요. 할아버지가 지었어요.

그렇군요.

설마 그게 궁금해서 아니겠죠?

고지마랑 친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아니키라 했던가요?

히카리는 다시한번 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고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산기슭쪽으로 바라보았다. 별장은 여전히 시선 안에 있었다.

보디가드예요. 소학교때 일이죠. 내가 따돌림을 받거나 다른 애들한테 놀리워대면 제일 먼저 달려와 그 애들을 쫓아버렸어요. 그래서 고지마를 저의 보디가드라고 불렀거든요.

어릴 때도 단발머리였죠? 어깨까지.

나는 끝내 그녀를 기억해냈다.

고지마가 그러던가요? 그는 어디에 있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 먹을 걱정, 잘 걱정을 안해도 돼요.

, 그러면 잘 있다는 말이군요. 언제면 돌아온대요? 여기를 떠날 때 그랬거든요. 도쿄에 가서 돈 많이 벌면 돌아온다고. 그러면 자기한테 시집 오라고 했어요. 누가 진짜 시집이라도 갈 것처럼 말이예요. 완전 도둑놈이죠.

도둑놈 맞아요. 입술도 훔쳤잖아요.

그것도 얘기해주던가요? 그래요, 나에겐 첫 키스였어요. 그는 나한테 많은 경험을 주었죠. 남녀 사이 모든 경험 말이예요.

모든 경험? 그녀는 이야기줄거리를 훌쩍 뛰여넘어 단번에 가장 긴요한 대목에 집중하듯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관해서 고지마는 나한테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비밀방얘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비밀방에서요?

, 우리 둘만의 공간이죠. 그는 집에 있기 싫을 때면 도망쳐서 나를 찾아 어요. 아버지한테 줄창 맞았거든요. 술을 마시거나 빠찡고(弹球盘)에서 지는 날이면 아버지가 집에 와서 가족들한테 화풀이를 했었죠.

그의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세요?

예전에는 그래도 점잖은 은행직원이였어요. 좀 고지식하지만요. 문제는 출근하던 은행이 파산된거예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나면서 은행도 그들한테 꿔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던 거예요. 고지마가 유치원에 다닐 때니까 십몇년 전의 일이죠. 은행내부에서 구조조정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감원명단에 오른 거예요. 그러고나서 매일이다싶이 술만 마시고 빠찡고에 다녔죠. 안해가 벌어들이는 돈을 가지고. 그의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나서 스낙크(스낵 바)에서 손님들에게 술을 따랐어요.

그랬군요. 자주 맞았나요?

아버지한테 대들다가도 물매를 맞았고 집을 나와서 길에서 헤매다가 사회불량배와도 싸웠어요. 그러다 보니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죠. 고슴도치처럼 말이예요. 나를 찾아오면 집식구들 몰래 별장 뒤에 있는 비밀방으로 데려갔어요. 약도 발라주고 얘기도 나누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키스했죠. 내가 먼저 했어요. 도둑놈은 나예요. 그 때15살이였던가.

고지마는 히카리씨를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어요.

, 빙산이 녹는 기분이라고 했죠.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다 사라진다고 했어요. 이 세상도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했죠. 그러면서 별장을 가리키며 언젠가 나의 방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안된다고 하니 삐지는 거예요. 그래서 키스해줬죠.

노을을 보고 싶었을 거예요. 비밀방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면서요?

곳은 지하예요. 전쟁 때 사용했던 방공호래요. 폭격기가 뜨는 날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거기에 숨어서 하루하루를 보냈대요. 비록 그 때 옆에 있은 사람이 고지마였지만  그래선지 나도 마음이 든든했어요.

고지마는 어쩌다가 여기를 떠난 거예요?

그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랑 함께 섬을 떠났어요. 아버지는 알콜중독으로 료양원에 들어갔고. 고지마도 그 때 떠난 거예요.

뒤로 본거예요?

도쿄에 몇번 보러 왔어요. 올 때마다 피곤해보여서 호텔에서 휴식하라고 했지만 그는 이상하게 번마다 비밀방을 고집했어요. 전기도 없어 초불만 켜놓고 그것마저 다 타버리면 우리는 온밤 꼭 끌어안고 있었어요. 내가 무서워할가 봐 그는 노래도 불러줬어요. 오시마의 민요를요. 그렇게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거든요. 나는 그의 등을 쓸어주었고 그도 나의 몸을 어루만졌어요. 그러다가  날은 발렌타인데이였어요. 16살이라 뭐가 뭔지도 잘 몰랐어요, 그리고 나서 임신했어요.

뭐라구요?! 그래서요?

락태수술을 했어요. 나는 애가 생겼다는 게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오히려 불안하고 두려웠죠. 어린 나이에 애를 낳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비밀방에서 단둘이 같이 있을 때면 묘하게 야릇한 기분이 들더군요. 왜 그럴가요? 이건 무슨 감정이죠? 사랑이 맞나요? 우린 사랑했을가요?

어떻게 설명할가?

어렵다. 나는 포기하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좋아한 것만은 사실이잖아요. 

그렇긴 해요. 이제 돌아가면 고지마한테 전해줘요. 나,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 누구랑?

우리 가족의 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손자예요. 그 사람은 우리 가족회사의 주주중에서도 일인자예요. 비록 아빠와 엄마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요. 회사는 할아버지가 세운 거구요.전쟁이 끝나서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대요. 어떡하나 살아보려고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는데 10년을 고생한 끝에 돈을 벌어 자그마한 공장을 세웠어요. 그러다가 베트남전쟁을 기회로 수출품을 팔아 부자가 되였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번듯한 별장에서 살 수 있은 거구요. 돈이 기승을 부려 유혹에 혼돈스러울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발목을 잡혔죠. 겨우 회사운영을 이어나가던중 한 투자가가 우리 회사에 자금을 대줬어요. 그 집 손자랑 저는 결혼하게 돼있대요.

앞바다에서 하얀 파도가 밀려오자 그녀는 몸을 돌려 별장을 마주하고 섰다. 

결혼하고 싶으세요? 회사를 지키고 싶은 거죠?

지킬 수만 있다면요. 거기에는 우리 가문의 력사가 깃들어 있어요. 혼도 함께요. 회사가 없다면 가족도 없어요. 그러면 나도 있을 수 없죠. 죄값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태여나서부터 회사운영이 잘 안됐다고 들었어요. 귀신을 업고 태여났다나? 하인이나 친척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닌가 봐요. 근 20년 동안 회사가 계속 저 모양이니 말이예요.

그건 히카리씨 잘못이 아니예요.

탓이 옳든 아니든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핑게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그건 억지예요. 지난 20년간은 히카리씨 가족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가 회생을 위해 사투를 벌려왔어요.

회생? 우리가 회생할 수 있을가요?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을가요?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가요?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비밀방에 가서 혼자 앉아있군 해요. 어둠 속에 숨으면 누구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거든요, 없는 듯이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가끔은 자신한테 물어요, 나에게 아직도 내가 있느냐고?…”

그녀는 어디로 갔을가? 그들의 사랑은 또 어디로 갔을가? 로맨스는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원하다고 했던가? 영원한 것과 이미 끝난 것들, 잃어버린 것과 남겨진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과 잊고 싶은 것들, 그리고 그 틈 사이에 서있는 히카리와 고지마, 그들은 원래 자리에 돌아갈 수 있을가? 설령 돌아간다해도 그들 과연 그들 맞을가? 그들도 역시 회생을 위해 사투를 벌리고 있는 건 아닐가?

히카리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듯 투명한 눈길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고 나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별장을 응시하였다. 철문 앞에는 시바이누가 쪼크리고 앉아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파도는 바다에서 태여나 다시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한가지 전해줄래요?

.

돌아오지 말라고 해요.

“…”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였다. 

히카리는 악수를 나누며 무슨 결심이라도 내린듯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별장을 향해 걸어가더니 철문 앞에 다다르자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녀는 하얀 담장을 따라 촘촘히 심어져 있는 빨간 동백꽃 속에 파묻혔다. 그러나 목은 꺽이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여기에 있을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온다면 무슨 사연으로 올지도 생각해보았다.

 

13

도쿄로 돌아온 그날 ,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오시마에서 만났던 것들이 내 머리 속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 놓았다.

3층짜리 별장과 엽서 같은 차창 밖 풍경, 섬 중앙에 우뚝 솟은 미하라산과 쪼크리고 앉은 시바이누, 빨간 동백꽃과 귀가에 들리던 새소리, 화산구를 흘러지나던 하얀 시간과 나를 스쳐가던 바람, 그리고 두 녀자와의 대화. 나는 그것들이 나타난 시간적 순서와 정확한 위치를 제자리에 맞추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 그 사이 큰 지진도 일어나 온 일본이 공황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교통이 회복된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근무를 나가기 전에 고지마가 부탁한 책들을 사들고 미나도경찰서로 향했다.

책은 넣어두었어. 보고 싶을 때 신청해. 

고마워요.

고지마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침묵을 지켰다. 히카리의 결혼소식과 돌아오지 말라던 전언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꺼낼지 고민되였다.

나한테 말이 있어요?

? 아, 그러니까. 전번에 지진이 일어났잖아.

나는 말길을 돌려 동일본대지진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여긴 난리났어요. 밀페된 공간이라 어디 달아날 데도 없고.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구요.

있다는 행운이지.

우린 방문을 열어달라고 정신없이 쇠창살을 두드렸는데 교수 뭐했는지 알아요? 태연하게 앉아서 책을 보던데요. 죽을 목숨이라면 벌써 죽은지 열번도 넘었겠다면서 나보고 호들갑 떨지 말래요.

 교수 보내? 야꾸자란 게 믿기지 않아.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진짜 교수예요. 대학교에서 력사를 가르쳤거든요.

뜻밖이네. 그래서 력사를 좋아했나?

집에 전문 서재가 있대요. 난 저런게 상상이 안돼요. 우리 집은 먹고살기에 바빴는데. 서재에 아버지가 보는 책과 자료들이 벽을 가득 채웠는데 그걸 볼 때마다 숨이 막혔대요. 아버지는 떠났지만 수없이 날아드는 고지서와 빚군들의 독촉에 견디다 못해 달아났대요. 그리고 나서 야꾸자가 된거죠.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몰라요. 자신을 지키려면 말이죠.

역시 교수답구나.

비밀 하나 알려줄가요?

뭔데?

사실 교수 고의로 여기에 들어왔어요. 조직을 떠나고 싶었대요. 관계를 끊으려고 룰 대로 손가락까지 잘랐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더래요.

고의로? 대가가 너무 큰 거 아니야?

그거야 본인이 알겠죠. 교수 보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들어온 아니겠어요?

무턱대고 그런 결정을 내릴 성격은 아닌데.

아무튼 한편으로 리해는 안되면서도 멋져보이기도 해요. 아무리 제 발로 들어왔다 해도 누가 이런 곳에 오고 싶겠어요. 그래도 밖에서 살고 싶지. 그걸 해낸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자기 마음을 다룬다는 쉬운 일이 아니야.

 교수니까 되는 거지.

너도 있어.

? 될가요?

잊지 , 넌 이미 성인식을 치렀어. 이젠 어른이야.

어른? 웬지 나 같지 않네요.

차차 익숙해질 거야.

그런가요? 다음에 또 언제 와요?

<<킹덤>>이 새것이 나오면 갖고 올게. 잡지와 만화도 함께.

그는 잠간 침묵을 지키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킹덤>>만 부탁해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알았어, 그럼 그 때 보자구나.

두달 새로 나온 <<킹덤>>을 사들고 구치소를 다시 찾았을 때 고지마는 거기에 없었다.

그는 감옥으로 갔다.

날치기범행을 승인하였던 것이다. 추가로 경찰에 대한 습격까지 적용되여 모두 7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싱긋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회가 시작 될 때와 달리 대화는 가볍고 홀가분한 상태로 이어졌다. 고지마는 사뭇 다른 모습이였다. 예전처럼 떠들지 않았고 얘기도 조근조근하여 지극히 조용하고 평온했다. 옆이마의 피줄도 없어져서인지 차분해보이기까지 하였다. 대기실에서 나나 웨치던 그는 어디로 갔을가, 꿈얘기만 하면 아이처럼 신나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가, 축제의 노래를 부르던 그는 또 어디로 갔을가?

경찰서대문을 거의 벗어날 나는 잠간 멈춰서서 고개를 들어 9호실을 올려다보았다. 한줄기 노을빛이 창가에 아름답게 쓰러져있었다.

노을이다, 노을!

하지만 곳에는 이상 고지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섬으로 돌아갔다.

 

2018년 5월 봄 씀

2018년 <연변문학> 제9기 발표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삶의 본연의 의미에 대한 추구

 

  • 2018년 《연변문학》소설작품을 살피다

 

태복

 

지난해 《연변문학》에는 38편의 중, 단편 소설(벽소설 포함, 번역소설 제외)이 발표되였다. 소설문학에서 풍성한 성과를 거둔 한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들을 일일이 모두 분석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찬 작업이라 하겠다. 이에 본고는 이중 특색이 짙고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일부 작품들을 선택하여 해부와 분석 그리고 간단한 평을 행하고저 하다.

우선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을 꼽으라면 필자는 단연 중편소설 <섬 속의 섬>(채국범 작, 2018년 제9호에 게재)을 추천하고 싶다. 엑조티시즘적 특색이 짙은 이 소설은 모든 지리적 배경이 일본으로 되여있다. 사이라고 불리는 소설의 1인칭 서술시점 인물 일본에 돈을 벌러 중국조선족이다. 원래 딱 5년만 일하고 돌아오려고 계획했던 계획보다 2년이 더 지나 7년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히토미라는 일본인 녀자친구와 사귀고 있는 어느 하루 편의점에서 억지를 부리는 진상손님 때문에 마침내 분을 참지 못하고 손님을 심하게 구타하여 결국 구치소에 들어가게 된다.

구치소에서 한방에 수감된 죄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소설의 다른 주인공인 고지마(小岛) 그리고 교수, 독불장군이다. 고지마는 금방 성인(일본에서는 20세에 성인식을 치름)이 된 20세의 소년으로 어느 할머니의 가방을 날치기했는데 워낙 심장병이 있는 그 할머니는 고지마와 밀치락닥치락하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였다가 결국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비슷한 독불장군 중국 산동 태생으로 16살에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온 후 국적을 바꾸었고 스무살이 되던 해에 야꾸자 조직에 들어갔다. 어느 한번 수익분배를 놓고 의견분기가 생겨 칼로 다른 야꾸자 조직원을 20번이나 찔러 살인죄로 10년 복역을 하고 출옥 후 또 싸움을 하여 다시 구치소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이른바 별명이 교수, 역시 야꾸자 조직원이고 중견 간부이다. 그는 경제위기의 여파로 부도가 난 아버지가 자살하고 빚쟁이들의 성화에 못 견뎌 야꾸자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야꾸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그 조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의사를 밝혀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자 자진해서 구치소로 들어왔다. 죄목은 사기죄, 협박죄, 폭력죄 등이다.

소설에 나타난 공간은 크게 세개로 대별된다. 하나는 욕망과 혼돈으로 표상되는 감옥 밖의 현실세계, 하나는 밀페된 감방 안, 또 하나는 고지마가 웨치는 노을이라는 이미지로 상징되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한방에 모인 네 사람은 모두 현실세계 즉 물화(物化)되고 고도로 비인간화된 물적 체제와 이데올로기 체제 및 법률제도에서의 부적응자들이고 부적격자들이다. 결국 그들은 그 현실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로 판명되여 밀페된 공간에서 자유를 잃은 몸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런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디테일에서는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거시적 환경에서 살펴본다면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로 귀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네 사람은 모두 무의식에서는 인신적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의지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구치소의 환경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리유는 교수 말한 욕망과 혼돈 현실 체제에서 벗어날 있는 공간으로 그들이 현실에서 선택할 있는 공간은 감방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감방 공간이 그들이 갈망하는 리상적인 공간은 아니다. 때문에 고지마는 감방의 창문으로 저녁 노을을 볼 때면 노을이다, 노을.하고 웨친다. 그렇다면 이 노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가? 그것은 고시마 죽마고우 히카리 비밀의 에서 꿈꾸었던 장미빛 동산, 동백꽃이 만발하는 오시마섬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손도손 사는 세상, 홍진세계의 욕망과 혼돈이 없는 순수한 세상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출옥 찾아간 오시마섬은 고지마의 환상이 전혀 실현 불가능함을 립증해주고 있다. 축제가 지난 오시마섬에서 동백꽃은 송이 채로 떨어졌고 임신과 락태로 환상의 세계와 결별한 히카리는 리익추구를 위한 현실법칙에 굴복하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섬 속의 섬>, 그러니까 세상을 외면하기 위한 밀페된 공간으로서의 섬-감방은 가능하지만 그 속에서 꿈꾸는 다른 환상의 -고지마가 꿈꾸는 순수한 세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소설은 무겁고도 끈질긴 근원적 질문 하나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대동세계 에덴동산 같은 순수하고 인간적인, 욕망과 혼돈이 제거된 리상적 세계의 복원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요컨대 소설 <섬 속의 섬>은 완성도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하겠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가 탄탄하며 사건 서술의 구도에서 저자의 능란한 솜씨가 돋보인다. 또한 사건의 디테일과 거시적 사회변화의 접목이 자연스럽고 언어감각도 뛰여나다. 무엇보다도 스토리의 전개에서 사실성과 개연성을 잘 융합시켰기에 리얼리티와 취미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저자의 높은 기량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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