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초반에 할머니가 되어서  요즘치고는 좀 이른 편이라 쑥스러울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외손주들이 재롱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매일매일  할머니소리를 들어도 행복하기 그지없다.

                 김경옥 프로필: 흑룡강성 녕안출생.수필 다수 발표. 현재 한국에 거주.
                 김경옥 프로필: 흑룡강성 녕안출생.수필 다수 발표. 현재 한국에 거주.

오늘은 아침부터 둘째 외손주 두돌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우부터  시작해서 없는것 없이  조목조목 다 챙기다보니 상다리가 부러질까 걱정이다. 게다가 친할머니, 큰아빠, 큰엄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엄마, 아빠의  생일선물이 방 천장이 안 보일만큼 높이높이 쌓였다. 요즘 애들은 그야말로 공주이고 왕자이다.  옛날같았으면 엄두도 못냈을텐데 요즘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아기때부터 가지고 싶은거  다 가지고  먹고 싶은거  다 먹으니 말이다.  

요즘 말로 라떼는 아이한테 과자나  놀이감을 사주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일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생일날이 돼서야 겨우 장난감 하나 사주고 간식은 생 무나 마늘장아찌 등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 세대는 아껴쓰고 모으기 바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돈을 별로 많이 모으지도 못했고 고질병만 얻었다.

외손주 생일상을 바라보라니 문득 과거 소녀시절  엄마밖에 모르던  때가 생각났다. 

1976년 그 해 겨울, 내가 열두살때 일이다.

음력설이 지나고 엄마생신이 돌아올 무렵이 되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나는 우리 형제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가진 돈은 없고  동생들 셋과 머리 맞대고 토론 끝에  고물을 주어서 팔기로 했다.  하지만  엄동설한(중국 동북은 영하30도좌우)이라 시골에는 밖에 나가면 온통 흰눈천지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네 집집마다 집옆에 쓰레기 버리는 곳이 있었는데  나는 삽과 꽉지(괭이의 방언)를 들고 동생 (막내동생은 그 당시 네살이었다.)들을 데리고  눈을 파 헤치면서 비닐이나 신발  버린것을 찿았다. 고무신을 신고 따라 나선 막둥이는  뒤뚱거리다가 미끌어 넘어져 눈속에 빠져  절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동생들 얼굴은 얼어서 사과알처럼 빨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 생일선물 사려는 생각에 계속 눈을 파헤쳤다. 내가 파헤치면 동생들은 눈속에서  폐 비닐조각이랑 입을 헤벌린 버려진 고무신발을 찾아 소쿠리에 담았다. 한나절 동네를 다 헤집고 나서야 겨우 고물 한 소쿠리 주었다.

우리는 그 길로 합작사(동네슈퍼)에 가져다 팔았다.슈퍼 아저씨는 기특하다며 저울에 달지도 않고 20전을 주었다. 돈을 받아들고 우리는 다 같이 끌어안고 퐁당퐁당 뛰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처음 벌어 본 돈이었다.

돈을  꼬깃꼬깃 만지작거리면서 슈퍼안을 왔다 갔다가 하다가 나는 결국 꽃감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며칠전 설날에 엄마가 꽃감을 사왔었는데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당신은 꽃감을 안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왠지 엄마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곶감은 벌써 내 목구멍을 넘어간 다음이었다.그래서 엄마 생일선물을 곶감으로 정했다. 우리는 슈퍼 아저씨한테서 20전으로 곶감  세개를  샀다. 

우리 넷은 곶감을 사들고 줄을 서서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시퍼렇게 되었지만 우리는 엄청 신났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동생들 얼굴이 얼도록 밖에서 데리고 놀았다고 맏이인 나를 엄청 나무랐다. 나의 커다란 두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억울한 듯 엄마를 쳐다보며 곶감을 쑥 내밀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곶감을 내려놓고 빨갛게 언 우리 손을 차례로 당신의 겨드랑이에 넣고 녹여줬다. 그때 나는 엄마의 크고 고운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소녀시절 엄마에게 했던 첫 선물이었다. 그때는 어른이 되면  더 많은 선물을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 살기만 급급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정작 많이 못해 드렸다.

어릴때 할아버지,할머니와 중국으로 이주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회복하신 부모님 덕분에  나도 한국에 와서 정착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지금은 어느새 살림이 많이  폈지만 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초심은 잃고 자기 사는데만 혈안이 되어  엄마를 많이 못 챙겨드린것 같다.

늘 고생만 하신 우리 엄마, 늘그막에 난소암 판정을 받으셨지만 나는 항상 내 남편,내 자식,내 손주가 우선이었던것 같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더니  아무래도 이 말은 틀린것 같다. 수십년간 고생한 엄마가 이런 몹쓸병에 걸리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다.

나는 아직 엄마에게 못 해드린것이 많은데 엄마는 점점 기력이 떨어진다. 두번의 대수술과 수차례 항암치료를 반복했는데 언제까지 버티실지 모르겠다. 이제 며칠 지나 정월 열흘이면  엄마의 80세 생신인데 나는 과연 엄마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할 지 모르겠다.

올해는  코로나때문에  팔순잔치도 못하게 되었고 엄마 모시고 형제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오손도손  즐겁게 보낼수 있을지 고민이다. 연로하신 엄마한테는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멍 때리고 있다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외손주 생일상을 차리느라 장만한 음식더미와 생일선물을 바라보던 나는 급기야 반찬통과 보자기를 가져와 바리바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딸래미의 "엄마, 어디가요?"라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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