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피를 물고 울던 새는 어데로 갔나?

권중철

 

1958년 길림성 왕청현 출생.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 명예회장. 중국 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

세계동화문학상, 옹달샘중한아동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등 수상 다수.

장편소설 사랑앞에 죽으리외 작품 다수

 

 

 

  올해는 1월 한 달에 양력설과 음력설이 함께 들어서인지 여느 해보다 봄날씨가 어린애의 얼굴처럼 유난히도 변덕스럽고 각별히 흐리고 추운 날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속여도 철은 못 속인다고 산악인들과 함께 산을 다니며 살펴 볼라니 양력 3월 중순을 넘어서자 양지바른 산언덕들에서는 벌써 억새풀과 같은 풀들이 푸른색을 띠며 겨울잠에서 깨여나고 있는가 하면 골개물이 풀리기 시작한 산골짜기들에서는 어느새 버드나무들이 가지마다 서둘러 그 보들보들한 부드럽고 새하얀 버들개지들을 등에 업느라고 분주하다. 뿐만이 아니다. 양지쪽에 자리 잡은 밭과 들에서는 냉이나물과 같은 이른 봄에 피는 여러 가지 봄나물들이 제법 파아란 잎새를 자랑하며 풀포기 모양을 갖추느라 야단이다. 이런 봄계절 대자연의 움직임은 분명 나에게 알려준다. 나의 기다림의 새해 봄이 끝내 바야흐로 시작된다고

  나는 작년 봄부터 시작하여 지지리하게 거의 1년 동안이나 금년 봄을 기다려왔다. 그렇다. 나는 대자연의 봄계절이 움직임을 읽으며 작년 봄에 서막을 올린 나의 그 기다림의 사연을 담은 현실이 서서히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그러면서 둘 중 하나 현실의 해답을 나는 초조히 안타까이 아니 두렵게 손꼽아 기다려본다. 또한 그러는 사이에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바야흐로 진달래꽃이나 살구꽃과 같은 봄꽃들이 피어나고 그와 더불어 점차 갖가지 나무들에 파란 잎새가 피어난다. 허나 시작처음부터 예감이 좋지 않다. 손에 손을 꼽으며 기다려도 이 잎이 파아랗게 피기 시작한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는 그 새가 울지를 않는다. 아니. 그 새가 그 백양나무로 찾아오지를 않는다. 그 작년 봄 피를 물고 울던 새가 말이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봄철도 점차 다 가고 나의 침실 앞 그 백양나무가지에 잎새들의 푸름이 점점 왕성하게 짙어가며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새들의 소리를 놓고 나같은 인간들이 주제넘게 제나름대로 해석적인 말씀들을 하신 것 같다. 새들이 노래한다고. 새들이 우짖는다고. 새들이 운다고. 새들이 지저귄다고... 허나 사실 새들의 그 소리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깊이를 인간들이 어찌 안다고 할까? 그것도 그렇게 수월히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작년 봄 나의 침실앞 백양나무숲에서 그 새는 정녕 울었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믿는다. 아니. 그것도 그저 운 것이 아니라 슬피 슬피 피터지게 울었다고 나는 믿으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지금에 와서는 더욱더 엄연하게 단정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다.

  몇해전 우리 한 가정은 연길시2중 동쪽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부르하통하 강둑아래 남향으로 앉은 이 아파트는 남북향에 침실 하나씩 달린 집이다. 하여 북쪽에 자리 잡은 나의 침실은 그 강둑위에 백양나무숲과 불과 6-7미터 사이를 두고 있다.

  작년 봄이다.

  나의 침실 앞 그 백양나무들에 잎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백양나무숲속에서는 어느 날부터인가 새가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러 마리 새가 함께 그 백양나무숲을 찾아와서 우는것이 아니라 한 마리 새가 그 백양나무숲을 찾아와서 단 혼자 홀로 외롭게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홀로 홀로 말이다.

  그랬다. 작년 봄 그 새는 말이다. 이른 새벽 내가 잠에서 깨여나기 전부터 나의 침실앞 백양나무숲에 찾아와서 홀로 울고 또 울었다. 아니. 홀로 우는 그 새의 울음소리에 나는 잠을 깨야했다. 그리고 그 새는 말이다. 저녁 늦게 내가 잠들 때까지 그 백양나무숲에서 홀로 울고 또 울었다. 아니. 내가 잠든 후에도 그 백양나무숲에서 그 새는 홀로 울고 또 울었다. 하여 나는 작년 봄 아침저녁으로 잠을 설쳐야했다. 아니. 나는 홀로 울고 우는 그 새의 울음소리에 정말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 ! ! ! !!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새들의 소리는 거개가 너무너무 아름다워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그건 감성이 무딘 나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나는 그 새의 소리만은 울음소리로 받아들여서인지 즐겁지 않았다. 아니 즐겁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새의 소리자체가 아름답지 못하여서? 아니면 그 새가 아침저녁으로 나의 잠을 설쳐놓아서? 아니. 아니. 모두 아니었다. 그럼??. 그렇다. 그 새의 소리에는 어딘가 슬픔과 하소가 너무너무 깊이 서려 있는 듯싶어 도저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밤낮이 따로 없이 15초정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그렇게도 자지러지게 그렇게도 극성스레 그렇게도 처량하게 그렇게도 이악스레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계속 울어대는 그 새... ... 아마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동물도 그 새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만 울어댄다면 지레 울음에 지쳐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새는 말이다. 그렇게 그 소리 그 모양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홀로 울고 또 울었다. 하여 나는 저런 종류의 새들이 모두 저러는 걸까? 하는 의문에 늦은 밤 이른 새벽에 몇 번이나 한낮이면 많은 새들이 그 새의 소리와 똑같은 소리로 우짖고 지저귀대는 나무숲들로 어슬렁어슬렁 찾아가 보았다. 허나 낮에 우짖고 지저귀던 그런 종의 새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나무숲들은 바늘 하나 떨어져도 고요를 깨뜨릴 정도로 조용했고 그 새처럼 울어대는 새소리는 아예 한마디 듣고 죽자해도 없었다. 하다면 그 새만은 왼 일인가? 왜서 딱히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만 홀로 찾아와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피터지게 울어대는 걸까?

  나는 새들이 보통 봄철에 짝짓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짝짓기를 위해 그 새가 짝을 부르느라고 그렇게 울어대는 걸까? 아니. 그러면 그 백양나무숲에서 최저한 두 마리의 새가 서로 주고받는 화답 같은 지저귐 소리로 울어댈 것이다. 그리고 정녕 짝을 찾는 새라면 한낮에 자기와 같은 종의 새들이 많이 모여 있는 다른 나무숲을 찾아가 상대를 부르며 지저귈 것이고 절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딱히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 홀로 찾아와서 울어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새끼를 잃은 불행으로 우는 새일까? 아니. 그럴 수도 없다. 왜냐 하면 그 새가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울기 시작한 이른 봄철에는 새들이 짝짓기를 시작하는 시기로서 알을 품을 둥지조차 마련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천방야담같이 일찍 까 낳은 새끼가 있고 또한 그 새끼를 잃었다면 암수중 한 마리의 새만이 시도 때도 없이 딱히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만 홀로 찾아와서 울어대라는 법도 없고 또한 그렇게 울어댈 수도 없다. 그렇다. 한낮이면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강역 버드나무숲에서는 한창 그 새와 똑같은 종의 새들이 수없이 모여 짝을 찾느라고 우짖으며 법석이지 않은가. 헌데 그 새는?하다면 그 새는 정녕 이성의 사랑하는 짝을 잃은 새란 말인가?! 사랑하는 짝을?!그래서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그렇게도 자지러지게 그렇게도 극성스레 그렇게도 처량하게 그렇게도 이악스레 구슬픈 목청으로 하소연 같은 울음을 터뜨리는 걸까?!

  헌데 어느 하루 문득 그 새는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울음을 끊었다. 아니. 그 날부터 그 새는 아예 그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나는 그 새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울어댈 때의 그 듣그러움과 불편함과 미움보다도 그 어떤 이름 할 수 없는 허수함과 위구심이 나의 여린 가슴을 파고드는 걸 어쩌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혹여나 하는 요행심리의 의뢰심 하나로 이른 새벽부터 저녁 밤늦게까지 사흘 동안이나 은근히 그 새와 그 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려보았다. 허나 현실은 말 그대로 참혹하였다. 그 새는 종시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시간이 감에 따라 나는 점점 나의 여린 가슴에 쌓여지는 불길한 예감으로 하여 종시 가만있을 수 없었다. 하여 나흗날 이른 새벽 나는 나의 침실 앞 그 백양나무가 줄줄이 늘어서있는 강둑께로 나갔다. 그리고 백양나무아래를 몇 번이나 오가며 아기풀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땅바닥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던 차 나는 마침내 한 백양나무아래에서 죽은 새의 시체를 하나 발견하였다. 나는 그 새의 시체를 손에 주어 들었다. 별로 곱지도 않은 새였다. 그 새의 주둥이에는 피가 묻혀있었고 시체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하지만 털만은 무척 부드러운 감각과 따스한 감각으로 나의 손에 와 닿았다. 그 시각 나는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그래 그 새가 정말 나의 불길한 예감처럼 이 백양나무숲에서 피를 물고 울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죽은 새의 시체가 바로 이것이고? 아니. 아니. 천만에 다른 원인으로 죽어도 새들은 완전히 피를 물거나 토하며 죽을 수 있지 않는가? 례를 들면 피를 토할 수 있을 정도로 무엇에 호되게 얻어맞거나 무슨 병으로 피를 물거나 피를 토하며 죽을 경우 말이다. 그리고 이 새의 죽은 시체와 나의 불길한 예감은 우연일치일수가 있지 절대적 일치일수는 없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어떻게 하나 그렇게 생각을 먹으려고 무진 애썼고 나의 그 불길한 예감과 그 새의 죽음을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왜냐 하면 나의 여린 가슴으로는 그런 현실과 불길한 예감을 연관시켜 받아들이기는 너무나도 힘들고 벅차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인가 나는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울던 그 새는 한때 무슨 원인으로 사랑하는 짝을 잃고 그 백양나무숲에 홀로 찾아와 피터지게 울다가 새로운 훌륭한 짝을 만나 그 백양나무숲을 떠나갔다고 믿음을 굳히기에 애를 썼다. 그러면서 내가 주은 그 새의 시체를 그런 종류의 새들이 우짖는 강역 버드나무숲 아래에 고이 묻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금년 봄과 그 새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새봄과 함께 그 새가 꼭 다른 한 짝과 아름다운 한 쌍되어 다시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에 나타나기를 미친 듯이 기대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부부사랑의 정조나 지조를 곧잘 원앙새에 비교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원앙새가 평생을 일부일처제로 한 쌍이 함께 살다 어느 한 짝이 죽으면 살아있는 짝은 다시 다른 짝을 찾지 않거나 지어 정조나 지조를 지켜 함께 죽어버린다고 상식적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일부 조류학자들의 탐색에 의하면 원앙새도 짝을 잃으면 다른 짝을 얻을 뿐만이 아니라 일부일처제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알건대 동물들은 거개가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하지만 얼마전 나는 텔레비에서 이런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았다,

  러시아의 한 조류보호구담수호에 늦가을이 잡아들자 철새들이 남방을 찾아 떠나게 된다. 헌데 한 쌍의 철새만은 자기의 무리와 함께 떠나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 중 수컷 새가 무지한 인간들이 놓은 그물에 걸렸다가 빠져나오느라 몸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로 하여 그 새는 잘날지를 못한다. 그래도 그 수컷 새는 그 새무리와 함께 남방으로 떠나보려고 몇번 날아본다. 허나 그 새는 매번 얼마 날지 못하고 갈숲에 내려앉는다. 그러자 그 수컷 새의 짝인 암컷 새가 안타까이 수컷 새를 인도하여 수차 날아본다. 하지만 그 수컷 새는 번번 얼마 날지 못하고 갈숲에 내려앉으며 실패한다. 그러자 그 암컷 새는 아예 자기도 그 새무리와 함께 남방으로 갈 것을 포기하고 그 수컷 새와 함께 그 담수호에 남는다

  그 다큐멘터리의 해설을 맡은 조류학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한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 한 쌍의 새는 철새이기에 이 담수호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 됩니다.”

  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작년 나의 침실 앞 백양나무숲에서 울던 그 새와 내가 백양나무 밑에서 주었던 새의 시체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인간을 생각해본다. 만날 자기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 지구덩어리에 최고급동물이라고 자랑하는 인간을

  . . 이 봄도 이젠 다 간다. 그리고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헌데 그 피를 물고 울던 새는 오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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