複合象徵詩 감상

꿈 그리고 꽃의 의미(2)/ 황희숙

 

 

날개 돋친 커피향

쪽배 탄 상아(嫦娥) 목에

스카프 둘러주고

 

풍차 돌리는 구름과 샛별의

반짝이는 노랫소리

장미꽃 향기로 시간을 빛내준다

 

잡은 손 놓지 못하는

음양의 사랑싸움에

말라붙은 분수(噴水)의 한()

 

허공 떠도는

종착역 이유 한마디가

무소유(無所有)의 숨을 톺는다

 

 

 

시간도적들

진주보석 반찬에

술 마시고 비틀거려도

 

염불()하는 구멍 난 시간엔

물보라 일고

 

목탁소리가 바다의 잔등에 업혀

대안에 뿌리 내린다

 

노 젓는 인생살이도

비어있는 대나무 숲처럼

휘파람 부는 이유를

 

바람이 대신

들고 다닌다

 

 

지워진 글

 

파도위에 새긴 이름

거품 되어 출렁이고

눈물 닦는 감탄표의 흐느낌

바위로 굳어 있다

잔디 푸른 시간 귀퉁이에

뛰어놀던 그림자는 어느 바로

꼬리 감추었을까

꽃펴나던 순간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어둠도 깜박깜박 불 켜들고

사랑 찾아 떠난다

 

------------------------------------

 

복합상징시 해설

환각의 혼설기에 반짝이는 씨앗의 꿈

황희숙의 詩集 지워진 글씨에 감도는 향기

 

중국 연변조선족복합상징시동인회 회장

詩夢잡지사 사장 · 발행인

□ 김현순

 

 

어찌 보면 우리 사는 세상은 온통 환각으로 엉켜붙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이 이성(理性)을 갖추기까지 환각의 도가니는 식어본 적 없었다. 그것은 또한 생명 본초의식(本初意識)의 산물이기도 하다.

환각에 입각한 상상과 환상은 역사(歷史)의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늘 되어있었다.

영혼의 고차원 향수에 속하는 예술로서의 복합상징시문학은 환각의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음 가상세계의 낯선 세상을 현실에 친근하게 펼쳐 보이는 예술의 한 형태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환각에 대한 의식(意識)과 그에 의한 포착의 지혜는 이차원(異次元) 세상을 열어가는 첩경으로 되기도 한다.

환각의 경지는 기성된 현실의 룰을 벗어나 자유분방한 변형의 세계로서 그 양상(樣相)은 순식간에도 천변만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의 명맥을 틀어쥐고 있는 핵심고리가 바로 화자의 정감세계와 그 팽창의 크기와 세기와 길이와 너비와 높이에 정비례되고 있음을 역점(力點) 찍어둔다.

황희숙 시인의 시 지워진 글씨(2)는 바로 환각의 이변(異變)을 통한 정감표출의 이미지 또는 스토리 또는 이미지와 스토리가 혼용(混用)된 장면의 흐름으로 화자의 경지를 펼쳐 보이는데서 이색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꿈 그리고 꽃의 이미全文 략함)

윗 보기 시는 처음부터 환각의 문을 활짝 열고 환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커피향에 날개 돋쳤다쪽배 탄 상아(嫦娥)그런 상아(嫦娥) 목에 커피향이 스카프 둘러준다.

첫 연 전부가 환각과 환상으로 과장된 변인화의 기법으로 너무나도 생동한 장면을 형상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두 번째 연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구름과 샛별은 그냥 존재 그 자체로서의 물질에 불과하지만 화자는 그것을 변인화 하여 노래 부르는 것으로, 그것도 풍차를 돌리면서 노래 부르는 형상으로 둔갑시켜줌으로써 동화적 친화적인 자극인출에 성공한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구름과 샛별의 부르는 노래는 반짝거리면서 시간을 닦아주는데 그것마저도 장미꽃 향기로 시간을 닦아준다고 하면서 화자의 경지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고 있다.

환각이란 그 사람의 내심정서의 산물이다. 환각의 경지가 어떠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내심세계의 노출이 펼쳐지기도 한다. 황희숙 시인은 바로 이 점에 포인트를 면바로 맞추고 있기에 상술한 효과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상기의 보기사례 시를 더 파보도록 하자.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이치는 적당선에서 스톱정도를 장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두고 절충(折衷)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욕망이라는 이 한계의 유혹에 이끌려 늘 팽창의 과오를 범하게 된다. 이는 필연코 슬픔과 고통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서는 아픔과 참극을 낳는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잡은 손 놓지 못하는

음양의 사랑싸움에

말라붙은 분수(噴水)의 한()

 

화자는 상술한 이치를 바로 이 한 단락의 설명적 이미지로 농축시켜 펼쳐 보이고 있다. “잡은 손 놓지 못하는”, 이 구절은 욕망에 대한 집착을 뜻하며 음양은 좋고 나쁨과 크고 작은 이익의 많고 적음을 상징한다. 그런 것에 대한 사랑싸움은 사욕을 앞세우는 아귀다툼에 대한 해학적이며 역설의 표현이다. 결국 삭막해가는 인간세상을 화자는 말라붙은 분수(噴水)의 한()”이라는 이미지 개념으로 축도를 그려 보인다.

시는 이쯤해도 될듯한데 화자는 그 경지를 기어이 한 차원 더 끌어올렸다. 다시 그 차원 경지의 마지막 연을 돌이켜 보자.

 

허공 떠도는

종착역 이유 한마디가

무소유(無所有)의 숨을 톺는다

 

아주 짧고 간단한 말 같지만 이 속엔 거룩한 철리와 가르침이 깃들어있다.

아무리 옴니암니 따지고 떠들어도 인간은 이 생을 마감할 때엔 누구나 무소유(無所有)의 운명을 회피할수 없다. 그래서 인생무상이란 말도 존재하는 듯싶은 시점이다. 화자는 이 대목에서도 그냥 이념적 역설에 그친 것이 아니라 허공 떠도는”, “숨을 톺는다등 가시화(可視化)된 환각적 영상(影像)으로 이미지 변형을 실현하고 있다. 이 점이 대단히 크게 점수를 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단지 언어를 비탈아 교묘하게 본의(本意)를 상징으로 펼쳐 보이는 기교놀음에 의해서만은 성립될수 없다. 물론 시는 표현의 예술이기에 표현기법은 우선으로 되는 인소로 주목되지만 시속에 녹아 흐르는 사상의 거룩함이 없이는 잰내비가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격과 다를 바 없다.

황희숙 시인의 시 세계는 비움과 수용의 불교적 사상의 흔적도 슴배어 있다. 세상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여유로움과 비움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여유작작 살아가는 자세가 시속에 곱다라니 슴배어 있는 것이 돋보인다.

황희숙 시인의 다른 시 미소에 비낀 이미지와 그 속에 용해된 사상의 경지를 조명해 보기로 하자.

(미소全文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팽창하는 욕망의 올가미에 납작 걸려들어 절충(折衷)의 섭리를 망각하게 된다. 그것이 초래하는 변질된 삶의 양식(樣式)은 기형적인 보응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화자는 드바쁜 일상에서도 짬만 나면 사욕에 머리 굴리는 인간의 근성(根性)시간도적들 진주보석 반찬에 술마신다고 해학적 이미지로 꼬집었으며 그 보응의 결과를 취해서 비틀거리는능동적(能動的) 표현으로 교대해주고 있다.

뒤늦게나마 찾은 깨달음이지만 그것이 가슴에 각인되기까지는 구멍 난 시간에 물보라 일 듯이불안정의 과정이 따르게 되어있음을 형상적 은유로 상징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성숙의 이치를 깨닫는 노력의 과정은 바다가 등에 업고 대안으로 가서 뿌리 내리게 한다. 여기서 바다는 관용과 수용의 대명사가 된다.

 

노 젓는 인생살이도

비어있는 대나무 숲처럼

휘파람 부는 이유를

 

바람이 대신

들고 다닌다

 

이 대목에서는 힘겨운 인생살이에서 이래저래 응어리진 한()을 내리워 놓으면 휘파람 부는여유로운 삶이 된다는, 그게 바로 극락의 경지임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대나무처럼 속을 비워야 휘파람 부는 숲을 이룰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바람처럼 신선처럼 자유로운 삶을 만끽한다는 도리를 이념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인생살이도... 대나무 숲처럼 휘파람 부는”, “바람이 대신 들고 다닌다는 등 환각적 변형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복합상징시란 단일상징의 복합구성을 이루는 것으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징이란 화폭의 상징도 있지만, 스토리를 주선으로 한 장면의 상징, 이념의 상징, 서정흐름의 상징, 외형과 내함의 상징, 소리의 상징등 갈래가 많다. 이런 상징들은 화자의 정감팽창을 바탕으로 인기되는 환각의 변형에 충실해야 하며 여러 갈래의 상징들이 유기적 결합으로 복합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그 어떤 세상이든 단일구조의 세상은 존재불가능으로 된다. 물론 단일구조와 복합구조의 참조치(參照値)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겠지만 그것도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참조치(參照値)에 의하여 규명된 단일구조도 진일보 세분해보면 역시 복합구조의 우주가 깃들어 있음을 세상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황희숙 시인의 시작품들은 바로 이 점을 확실히 지키고 있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낙서와 정서(正書)를 남기게 되는데 낙서한 글씨들은 지워버리기에 애쓴다. 하지만 지워버린 글씨의 흔적은 기억에 그냥 남아 괴로울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삶을 성숙으로 받아들이며 회한(悔恨)에 잠겨 새 출발을 꾀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시의 내함에 대한 분석은 더 펼치지 말고 지워진 글씨를 음미해 보자.

(지워진 글씨全文 략함)

얼핏 보면 그냥 평이로운 언어조합으로 화자의 정감을 펼쳐 보인 서정시 같지만 환각의 변형들로 충만 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다.

파도위에 새긴 이름그 이름이 거품 되어 출렁인다눈물 닦는 감탄표그 감탄표의 흐느낌이 바위로 굳어 있다잔디 푸른 시간시간의 귀퉁이그 귀퉁이에 뛰어놀던 그림자또 그 그림자는 꼬리 감춘다꽃펴나는 순간그 순간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어둠이 불 켜들고 사랑 찾아 떠난다

이렇게 하나씩 각을 뜯어놓고 보니 어느 것 하나가 환각적이 아닌 것이 없다.

복합상징시란 이렇게 환각의 흐름 속에서 장면의 조합을 통하여 화자의 경지를 펼쳐 보이는 시라는 것에 더욱 확신을 가지면서 복합상징시의 행열에서 두각을 내밀고 있는 황희숙 시인 진심 큰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금후 창작에 더욱 알찬 문운이 깃들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