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이번 호에 한영남의 시와 박춘월, 김몽, 허인의 시평을 싣는다.

박춘월은 시평에서 한영남 시인을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가진 몇 안 되는 시인가운데 한 사람”이라며, 그의 시는 “거창한 시어거나 미사려구가 전혀 없다. 마치 치장 안한 맨 얼굴의 녀인 같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매력이 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한 시도 이런 상당한 매력을 가질수 있자면 시인의 느긋하고 여유가 있고 또한 더불어 살 줄 아는 삶의 자세가 받침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고 평했다.

김몽은 한영남이 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영남의 시를 시원하고 활달하고 재미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독자와의 소통이 잘 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있기 때문이다."며 "단순히 순수 전통시라고 하던 리얼리즘이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시기법들이 녹아있는 리얼리즘, 발전된 모더니즘으로”으로 시를 창작하려고 시도한다고 평했다.

허인은 시평에서 “범상찮은 조짐ㅡ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와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ㅡ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 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고 평했다.

아래 시와 시평은 모두 중국조선말 표기법으로 되어 있음을 밝힌다.

-편집자-

한영남 약력 : 1967년 길림성 안도 출생.시,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 300여만자 발표.소설집 , 장시집  등 출간.중국조선족수필상, 중국조선족동시상,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다수 수상.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자유기고인
한영남 약력 : 1967년 길림성 안도 출생.시,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 300여만자 발표.소설집 , 장시집 등 출간.중국조선족수필상, 중국조선족동시상,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다수 수상.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자유기고인

머리를 깎이우며
 

머리가 더부룩했어
목덜미를 자꾸 간질이고
귀를 참월하게 덮어버리고
머리가 불편할 정도로 더부룩했어
미장원에 갔지
이쁘장한 아가씨가 물었어
어떻게 잘라드릴가요
뭐 아무렇게나 보기 좋게 두루
횡설수설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 말들이 잘려나갔어
가볍게 한숨 쉬고
잠자코 들이대고 있었지
근데 말이야
머리를 잘리우는데
아버지 머리카락이 날리겠지
검지는 않고 완전 멋진 은발도 아닌
그냥 희부우연 그런 회색빛 머리카락들이
맥없이 무릎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졌다가 바닥에 뒹굴겠지
평생 스스로 머리 깎으신
내 아버지 허옇게 녹슨 머리카락

 

트럼벳은 불지 않기로 했다
-레핀과 그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에 부쳐
 

사품치는 송화강기슭에서
바이올린의 새된 비명소리도
첼로의 배밑바닥 깊은 흐느낌도
파도의 날카로운 호령에 잠재워졌으니
이제
트럼벳은 불지 않기로 했다
아름다운 미풍에 하느작이는 태양도와
장엄한 파도파도파도파도의 송화강이 그만
서로 사타구니를 틀어박고 누워버린 이 기슭에서
우리는 수채화의 아련한 빛이거나
수묵화의 회색빛 살결은 찾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고 해도
저렇게 하염없는 태양도를 건너다보며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의
그 넉넉하면서도 시커먼
근육의 고함소리에 귀를 맡겨버려야 한다
글쎄 와봐라 파도여
어디 덤벼라 절망이여
아무래도 트럼벳은 불지 않는 것이 좋겠지
드럼으로도 부셔버리지 못하는 이 악장
외로운 하모니카는
<모스크바 교외의 밤>이나 흥얼거리라지
트럼벳은
전설의 트럼벳은
불지 말아야 한다

 

춘삼월
 

춘삼월
따슨 볕 그립다

아직은 긴 그림자
손 내밀면 차거운 아지랑이

달래만치나 싱싱하고
개나리만치나 멀리서 캐득거리는

숨소리가 건방지기 시작한다
아직은 강도 산도 몸이 풀리지 않았다

춘삼월
그대 품을 느낀다

 

 

살아가는 이야기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인가
세월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갑갑답답함을 새기기에는
우리의 술이
우리의 담배가
너무 무색하고 있거늘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과연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인가
황금의 웃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우리들의 일상
부스러진 북어조각만치나
짓뭉개진 시래기먼지만치나
으깨여진 벌레먹은 사과조각만치나
값도 없고 쓰잘 데도 없는 우리들의 찝찔한 일상
소금만치 짜도 소금만치 쓸모는 없는 우리들의 못난 살이
초라한 행색을 서로 비웃으며
우리들이야
우리들에게야
딱 안성맞춤인 이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이냐

 

점적주사를 맞으며
 

 

저 한 방울 링거가
내 몸통속에 들어가서
생명으로 되여줄 수 있을가

아픔의 독소를 몰아내고
건실한 세포로 자리잡을 수 있을가

기침을 발로 차버리고
책상다리를 하는데
힘이 되여줄 수 있을가

한 방울씩 무심한듯 흘러내리는 링거에
생명의 의미를 공손하게 부탁해본다

 

 

어느 날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살다가 살아가다가 혹시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어디서 무얼 했노라 주절거리지 않으리라
살아온 그 굽이굽이 아프던 사연들을 
굳이 떠들어 아픔을 나누지는 않으리라
만약 그래도 자꾸 궁금해한다면
그 친구와 서로 말없이 마주바라보리라
분명 그 친구한테도 깊이 갈앉은 슬픈 사연이
눈물처럼 두런거리리라
거기에 담긴 안타까운 이야기에 
공감은 하더라도 값싼 눈물은 흘리지 않으리라
혹시 그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말인가를 하면
고개를 끄덕여주고 어깨를 내여주리라
그러나 서뿔리 말은 하지 않으리
시시한 위안따위로 
그 친구의 깊은 아픔을 달래줄 아무도 
이 세상에는 없으니
그 친구와 살아온 자초지종을 수런거리지는 않으리
집이나 직장같은것도 주절거리지 않으리
그저 그 맑은 눈동자를 찬히 들여다보다가 
힘주어 손을 꾹 쥐여주고는 돌아서리라
한참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걷다가 
그 친구가 이젠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거든
얼른 뒤를 살펴보고 
그리고 눈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리라
우리는 누구도 서로의 아픔앞에서는 
울 권리도 없으니
혹시 길가에서 어느날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
그 친구한테 계좌번호 따위도 말해주지 않으리
그저 가장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친구를 바라보다가
그 친구의 행복만을 속으로 빌며 돌아서리
그냥 그대로 돌아서서 입술을 깨물리

 


우리가 강아지만할 때

 

어둠을 밀어내며
빨다가 뱉은듯 말숙한 달이
동녘 저쯤 웃는듯 마는듯 걸리면
케이블방송에 실려 커다란 함지를 인
엄마가 돌아오셨다
가시에 스치고 나무그루에 걸리며
볼품없이 해진 엄마의 손에서
밤새도록 우정금, 고비, 닥지싹, 민들레들이
여러 자름자름한 그릇들에 갈려 담기곤 했다
엄마의 때묻은 얼굴이 무척이나 안타까운듯
초불은 더욱 작아지고
먼데 다듬이소리가 한층 높아갔다
-뒤집 분이가 시집갈 준비를 하나보다
엄마의 목소리는 거의 잠겨있었지만
우리의 귀에는 언제든 또렷이 들려왔다
아직 우리가 강아지만할 때였다

 

 

골목이 젖었다

 

P거리를 너무 급하지 않게 지나
L거리에서 약 백미터쯤 건숭건숭 걷다가
오른쪽으로 픽 틀어져 들어가면
허름한 골목 하나가 나진다
어디서라도 쉽게 볼수 있는
흔하디흔한 골목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늘 한적하기만 했던 골목
언젠가 계집애 하나가
강아지에게 쫓겨
내처 들어오다가 다행히 이 골목 젊은이에게
구원된적도 있는 골목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찾아주는 사람도 적지만
어쩌다가 고만고만한 사연들이 모여
매일처럼 시름겨운 이야기를 두런거릴것 같은
P거리를 너무 급하지 않게 지나
L거리에서 약 백미터쯤 건숭건숭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바로 나지는
허름한 골목 하나
오늘 비도 오지 않았는데 그만
흠뻑 젖어버렸다

젖은 골목에
사람 찾는 전단지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뼉다구인생

 

알맞춤하게 넣어진 물과
알맞춤하게 넣어진 우거지와
알맞춤하게 풀어진 된장과
비비고 문대고 제법 들썽이며
국물 들쓴채
며칠이고 우려지다

마침내 어느 오전나절
어느 기름진 손에 의해
멍멍이의 심심풀이로
그 발치에 던져지다

굽이진 곳이며
소용돌이친 곳이며
깊숙이 속으로 패인 구멍까지
얄팍하고 물많은 개의 혀에
이리저리 구석구석 핥이우며
온몸이 흐느적이다

예전에는
기름과 살과 가죽에 싸여
싱싱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뼉다구는
드디여 개에게조차 버려지다

단즙도 없고
살부스러기도 남지 않고
냄새마저 다 빨리운채
나무토막보다 더 담담하게
하얀 속살로 남은
뼉다구

뼉다구에게도 달리던 꿈은 있었다
뼉다구에게도 날고싶던 꿈이 있었다
뼉다구에게도 무지개같은 찬란한 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버려져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는
뼉다구
뼉다구는 긴 세월 
다시 태여날 꿈을 재워야 한다
다시 태여나 어느 살이 되고 피가 될
비상의 꿈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 뼉다구는 누워있다
발길에 툭툭 차이며
뼉다구는 이 아침 
검은 대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본다

 

사월사랑

 

바람이 불고
꽃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사월인데 잔디는 미처 깨나지 못했고
달래만 양지쪽 언덕밑에서 픽픽 웃고있었다

사월이 줄줄 흐르는데
사정없이 눈발 날리고
어느때보다 춥고 추운
오므리고 사는 춘사월

사월이고
달래알이 툭툭 굵어지고
땅속 잔디뿌리들이 끝도 없이 길어지고
모질이도 기다려지는 화사한 봄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살이

 

평생을 살아야겠는데 그 하루 비가 내리고
내 평생이 하루인 것을 하늘은 몰라버려라

다음에 태여나면 
꿀벌처럼 붕붕거리고
나비처럼 팔랑거리고
제비처럼 멋져보리라

다음 생에도 하루살이로 태여나면
그날은 부디 해가 화사하게 웃어주어
그 하루 부서지게 사랑하다 가리라

평생을 살아야겠는데 이 하루 비가 내리고
내 평생이 하루라는 걸 하늘은 잊어버려라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화장실 투항병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나는 투항병이 된다
공손히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배설물의 순조로운 배출을
열심히 기도한다
먹을것 제대로 먹은 날들은
요란한 소리로 시끄럽고
먹을것 제대로 먹지 못한 날들은
잘 나가주지 않아서
입으로 소리를 함부로 낸다
내 소화계통은 왜 나를 
늘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걸가
들쑥날쑥으로 
변기만을 번거롭게 하는 나는
언제 한번 
정식을 대접해보지 못한 죄때문에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종이말이를 백기처럼 들고
투항병이 된다

 

 

바다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는다

 

살다가
지치고 힘 빠지고 맥없을 때
바다를 찾는다
언제라도 너넘실 너넘실 술렁이는 바다
저만치서부터 파도손 쳐들고 반겨주는 바다
멸치 고등어 고래 새우 미역 다시마...들을 다 품어주고도
오히려 넉넉한 바다
바다가에 앉아 바다의 휘파람소리 들으면
바다는 언제나처럼 내게 다가와
그동안 이야기들을 수런거린다
인간세상에서는
서로 만나면 어디서 왔냐고 왜 왔냐고
언제 갈거냐까지 체크하지만
바다는 언제 봐도
내게 어디서 왔냐조차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에 가면 나는
편안한 바다에 누워
바다를 짊어진채 하늘에 풍덩 뛰여든다

 

 

그건 내 눈물이다 마시지 마라

 

마시지 마라
마시지 마라
그건 내 눈물이다

시원하다거나 달콤하다거나 구수하다거나
그런 표현들과는 제법 거리가 먼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나오도록 그렇게
지지리 촌스럽고 투박하고 바보스러운

행여 마음 여린 사람은
안스러워 돌아설것만 같은 

그러나 그것은
내 초라니 인생을 달인 내 눈물

그래도 마시지 마라
그건 별 쓰잘데없는 내 눈물이다

 

 

마른 눈물 한접시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도
소금 한줌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누군가에게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이 아닌
사랑의 이름이 아닌
세월의 이름으로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아프지 아니하도록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

누군가에게 그냥 소금으로 남겠습니다

 

 

내일에 눈길 걸어두고

 

세월 눅눅한데
나 혼자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깨면 꿈인것을

씹어삼킬건
아픔뿐 아닌것을

멀리 하늘에 눈길 걸어두고
헛기침 한번쯤 하며

래일은 어떤 하루일까

기다리지 말아야지
망설이지 말아야지

바람 서늘한데
나 혼자만 기도한다고 슬퍼했다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까

 

기억한다는 것은
용서할수 없다는 것

행여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까

긴 눈물이 휴지말이처럼
끝없이 풀려나와도
아픔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 것

지금, 용서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리
기억이 남아있는 한

 

<부록>

시평

물과 용서와 사랑의 시인 한영남

박춘월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자신만의 색갈과 목소리를 가진 몇 안되는 시인가운데 한영남시인이 있다. 소설, 평론, 수필, 실화,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시인은 다산이기도 해서 해마다 그의 필을 통해 쏟아지는 글들은 조선말 신문과 잡지 곳곳에서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다. 그 많은 글들가운데서 오늘은 한시인의 시 3수만 뽑아들고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자.

 

<용서>

<산길을 걷다가/ 억수로 비뚤게 자란/ 나무 한그루를 만났다/ 그 나무의 휘우듬한 무릎을 만지며/ 그냥 용서해주기로 했다>

우리는 시의 서두에서 먼저 삶의 현장에서 거센 비바람과 폭염과 엄동을 견디느라 억수로 비뚫어진 나무 하나, 목숨 하나를 만난다.

<구불거리며 자랐을 망정/ 푸름을 퍼올리며/ 싱싱한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에 왈칵/ 눈물을 쏟고는/ 그냥 용서해버리기로 하였다>

삶의 매 한굽이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으며 몸부림을 쳐왔을가? 꺾이우지 않으려고 지탱하다가 지탱하다가 휘여졌을 그 무릎을 만져주고 그 모습에 왈칵 눈물을 쏟으며 동참을 해주고 인정을 해주는 화자의 따뜻한 가슴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설사 곁에서 비뚤어지게 굴었을지라도 비뚤게 살수 밖에 없었던 삶에 대한 깊은 리해와 용서를 해주는 높은 경지에 서있는 화자를 시 중간부분에서 만날수 있다.

구불거리면서 자라 추한 모습이 된 그 내면에는 숨은 아픔과 상처가 있다. 푸름을 퍼올리는 생명의 싱싱한 노래, 그 노래를 부르는 자와 노래를 들을수 있는 귀를 가진 시인의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이 아름다운 장면이 독자들을 용서의 세계에로 인도해 준다.

파란만장의 세상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의 가슴속 내밀한 곳에도 상처와 신음소리가 숨겨져 있다. 설사 억수로 비뚤어졌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푸른 생명이고 싱싱한 음악임에 틀림없다. 살아남아 준것에 대해 감사하고 아직도 푸르른 생명의 노래를 불러줄수 있음에 대해 감사하자. 용서는 아름다운것이다. 용서는 더 나아가서 사랑의 경지에 이른다.

<그날은 괜히 연필도 깎지 못하고/ 볼펜으로 못난 친구한테 편지를 썼다>

그렇다. 화자도 우리 독자도 우리는 어쩌면 누구나 다 저 비뚤게 자란 나무일수 있다. 그리고 그런 비뚤어진 우리 매개인은 다 그 누군가의 따뜻한 리해와 용서를 갈망할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어루쓸어주고 뜨겁게 뜨겁게 사랑해줘야 한다...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여기서 우리는 시인 한영남이 얘기하는 물과 그의 상처를 들어보자.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를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는 물은 어떤가? 으깨질줄을 알고 베여질줄을 알고 에돌아갈줄을 아는 유연한 존재다. 으깨지고 베여졌다가 다시 용케도 원형을 회복하는 물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 무슨 상처랴>하고 말이다.

<짐승들은 철버덕거리며 나를 희롱하고/ 자그마한 풀가지마저 내게 칼질하고/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나를 찢고 베이고 갈라놓고... 해도/ 실로 나는 물이다>

여러 상대들이 와서 희롱하고 칼질하고 찢고 벤다 하더라도 실로 나는 물이란다. 물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이였다면 피투성이가 되고 만신창이가 되였을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 물이라서 찢겨졌다가도 다시 합쳐지고 베여졌더라도 또다시 뭉쳐서 흐를수 있다. 이것이 물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지혜이다. 베이지 않은듯 찢기지 않은듯한 여유와 치유력을 지닌것이 또한 물이 아니겠는가?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마라/ 해아래 말리워도 좋다/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

나는 물이기때문에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말라고 한다. 해아래 말리워도 좋고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은 전혀 공격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일 태세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물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물이다/ 아파서 속울음 울어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하는>

뭐든지 다 받아들이고 그러고도 태연한 모습인 물은 사실 속으로 울고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울고있는 물이다. 으깨지고 베여지고 희롱당하고 칼질당하고 말리우고 오물을 뒤집어 썼을 때 물은 자신이 속으로 울고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한다고 말한다. 물은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치유한다. 이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에게는 공격이 없다. 상처를 입으면 가해자가 불편해할가봐 차마 상처를 입지도 못한다. 상처를 입었어도 보여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물을 많이 닮아있는 시인 한영남과 그가 들고온 시 한수. 우리 물의 여유와 지혜에 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삶 자체는 순탄하지 않다. 거기에는 수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다. 그 아픔은 드러내봤자 별 도움이 없다. 시간이라는 생명의 곬, 그 곬을 따라 우리도 물처럼 흘러가보자...

 

<무애비죄>

 

한영남시인의 시는 거창한 시어거나 미사려구가 전혀 없다. 마치 치장 안한 맨 얼굴의 녀인 같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매력이 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한 시도  이런 상당한 매력을 가질수 있자면 시인의 느긋하고 여유가 있고 또한 더불어 살줄 아는 삶의 자세가 받침되여야 하지 않겠나 싶다. 화자는 일찍 돌아가신 애비와 그 애비없는 자식을 애잔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해준다.

<남들앞에서 어깨와 가슴을/ 한번도 시원하게 펴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수많은 보통 애비들처럼/ 평범이상으로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안됐는데 그만 죽어간 애비><그래서 내가 마시는 술은/ 갑자기 물이 되였고/ 나는 그만 애비 없는 놈이 되였지/ 애비가 없다는건/ 어데가서 잘못해도/ 욕을 먹거나 매를 맞을/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고/...사는걸 게을리하거나/ 업무따위를 조금 공빼먹어도/ 전혀 거리낄게 없다는 의미이고/ 설명절이 되여도 굳이/ 술병 사들고 찾아가서 세배하는/ 번거로움이 생략된다는 의미이고...>

누구나 다 마음속 깊이에까지 공감을 할수 있는 감정과 사연을 가지고 우리에게 잔잔하게 다가오는 시인 한영남의 시세계는 읽는 이에게 오래동안의 마음속 파장과 여운을 안겨준다.

읽기 특히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인생의 그 어떤 깊고 깊은 리치를 말하고 싶어하는 시인 한영남과 그의 시는 언제 읽어도 싫지 않다. 거부감이 없이 순하게 읽어내려 갈수 있고 숨겨진 뜻을 알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추상화와 추상화 아닌것이 있다. 한영남 시인의 시는 추상화가 아닌 그림에 속한다. 편안하고 푸근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들 삶의 아픔과 막무가내가 묻어나는 그런 그림이다. 가슴이 뭉클해나는 애비와 애비없는 자식의 그림이다.

청명이면 지랄같이 아버지의 무덤가에는 잔디처럼 애비의 시가 돋아나서 호로자식을 희미하게 웃군 한다는 시 <무애비죄>는 매 독자들의 평범한 삶과 일상과 끈끈히 련결되여 있다. 애비없는 자와 애비있는 자와 그리고 애비된자 어미된자와 모든 자식들에게 화자는 소박한 얘기로 대화를 한다. 그런 시인 한영남을 어느 독자가 싫어하겠는가?

시인 한영남이 계속 좋은 시를 써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촌평을 줄인다.

 

 

읽기와 미적향수

ㅡ한영남의 시를 보며

김몽

 

문학적 대상이란 것이 본디 삶의 낱낱들을 그저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삶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모습들을 언어의 의장을 통해 체계화(혹은 해체)하는 일련의 작업의 소산이라는 점을 삼안 할 때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창조와 이해의 과정을 유도하는 책무를 진 것이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고취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막중한 의의를 가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비평가가 지향하는 시 읽기의 궁극은 어쩌면 시의 생산자와 그 수용자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고 튼튼한  가교의 역할을 창출해 내는 데 있을지 모른다. (박윤우, 서경대 교수,<정통과 균형과 공간 > ,2018[시와 시학]85)

 

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소통과 공감의 문제는 언제나 시단의 해심적문제로 불거져왔다. 시 작품이 진실한 공감을 결여하는 순간 박제되여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시가 시인들만의 리그에 그치거나 자페이  그늘에 빠지거나 시대의 변방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오늘 이 글에서는 한영남의 근작시들을 일별하면서 주로 소통과 공감,그리고 미적향수에 대하여 몇마디 하려고 한다. 시를  상품에 비긴다면 시인은 생산자이고 독자는 소비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소비자가 <>라는 상품을 샀는데 사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실망을 느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 이 경우 두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하나는 그 <상품>이 확실히 좋은데 소비자가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고 두번째는 분명히 <상품>이 좋지 못하여 소비자의 공감을

알으키는 못하는 경우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 독자에게 미적향수를 줄 수가 없다. 미적향수는 소통과 공감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영남의 시들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우선 이 시인의 문학주장을 들어보기로 하자.

 

“문학은 예술의 한 형태이기에 문학은 적어도 독자들한테 미적향수를 느낄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장 더러운것을 가장 써도   그것을 아릅답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리유이다. 문학은 발전하고있다. 그래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줄기차게 내달리고 있다. 그리고 요지음 서방으로부터 수입한 하이퍼시가 나타나고있다. 하이퍼시 역시 그 많은 시 표현방법의 하나일뿐이다. 결국 시는 리얼리즘으로 돌아오게 될것이다. 예전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발전된, 환원하면 21세기에 맞는 리얼리즘으로 돌아오게 될것이다.단순히 순수 전통시라고 하던 리얼리즘이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시기법들이 녹아있는 리얼리즘, 발전된 모더니즘으로 말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이라는 대국적인 사유의 폭에 유럽의 철학(독일고전철학과 러시아미학을포함)을 기저에 깔고 조선이나 한국의 매그러운 우리 말을 특정된 환경속의 특정된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을 발전방향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우리는 중국의주류문학도  아니고 조선이나 한국의  문학도 아니며 그렇다고 유럽의 문학도 아니다. 중ㄱ구조선족이라는 이 명제를 더나면 울의 문학은 설자리가 없게 된다. 언제인가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계층,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다 같이 공감할수 있는 문학을 꼭 하고싶다. 대학교수와 장사군들이 다 같이 좋다고 하는 시를 단 한수라도 더  쓰고싶은것이 꿈이다.<한영남, [나의 문학관]>    

 

  시인의 주장에서 눈박아 보아야 할 부분이 “단순히 순수 전통시라고 하던 리얼리즘이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그트모더니즘 등 현대시기법들이 녹아있는 리얼리즘, 발전된 모더니즘으로 말이다”이다. 이러한 주장을 근저에 세워둔 시인은 최종적으로는 “다양한 계층,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다 같이 공감할수 있는 문학을 꼭 하고싶다. 대학교수와 장사군들이 다 같이 좋다고 하는 시를 단 한수라도 더  쓰고싶은 것이 꿈이다.”라고 선언한다. 예술은 자유이기 때문에 공식이 없으므로 누구나 나름대로의  창각관이나 미학관을 주창할 수 있다. 시인의 시를 보면서 이 시인이 과연 자기의 주장에 걸맞는 시,현대시기법들이 녹이 있는 사실주의시,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쓰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이에 앞서 사실주의시를 간단히  살펴본다. 왜냐하면 사실주의시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약간 오해하고 있기때문이다. 사실주의시는 과학적실증주의 철학을 모체로  하며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주제가 선명하며 진실을 추구한다. 현실을 폭로  비판하면  비판적사실주의가 된다. 현실을 생생하게 진실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사실주의는 자체의 우점을 지니며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있다. 소설의 경우 세계적으로 90프로 이상이 사실주의다. 이런 사실주의가 고리끼에 의해 사회주의사실주의로 되면서 시대를 찬양하고 수령을 우상화하며 영웅인물을 노래하고 로동인민을 노래하는 사실주의로 되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사실은  사회주의사실주의를  뜻한다. 그러므로 사실주의시와 사회주의사실주의시를  혼동하거나 동일시 말아야 한다.  과학적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온것이 이른바 현대시다. 모두가 알고있기에 설명을 피한다. 한영남 시인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 사실주의시를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시에 다가들어가 보자.

 

분명 그 친구한테도 깊이 갈앉은 슬픈 사연이

눈물처럼 두런거리리라

<어느날 그 친구와 만난다면은>

 

시는   친구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을 담담한 침묵으로 있는듯 없는듯  얽어내고 있다.    한영남의 시에는 아픔이 많은 비중울 차지한다. 그의 지나온 삶의 로정이 험악했기 때문이다. 하여 대도시에서 출판사편집이라는 괜찮은 삶을 누리면서도 어린  가슴에 응어리지 아픔의 음영이 하냥  머리 들어 시인을 괴롭힌다. 그는 늘 유머적으로 아이러니적으로 자학하며 거기서 자존의 미소를 찾는다.

 

황금의 웃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우리들의 일상

부스러진 북어조각 만치나

짓뭉개진 시래기먼지 만치나

으깨여진 벌레먹은 사과조각 만치나

값도 없고 쓰잘 데도 없는 우리들의 찝찔한 일상

 

<살아가는 이야기>

사실 시는 근본적으로 시인의 아픔에서 태여난 고통과 고뇌의 자식이다. 아픔이 없으면  시를 포함에 모든 문학이 존재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을 미화하고 행복을 지향하고 진리를 설파하고 세계와 자신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해도 결국은 아픈것이다. 시인이 아픈데 그의 마음과 정신에서 발화한 시가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어느날 그 친구와 만난다면은>는 줄거리가 현실주의 시다. 하지만 주제를 직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현실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 시는 아픔을 다루면서도 그 아픔이 구경 무엇인가를 시종 밝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만 추측으로 아픔을 가늠할 뿐이다. 다음, 상술한 시에서 시인은 현대시중에서 흔히 쓰는 해체주의 수법으로  생신한 이미지를 만듦으로써 자기의 약속-.“단순히 순수 전통시라고 하던 리얼리즘이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그트모더니즘 등 현대시기법들이 녹아있는 리얼리즘, 발전된 모더니즘으로 말이다”를 지키고 있다.  <슬픈 사연이/눈물처럼 두런거리리라>에서 <눈물><두런거리다>는 이질적인 단어들의 결합이다. 이전의 사실주의시에는 이질적인 단어들의 결합이 기본상 없었다. 필자는 2002년도에 발표한 <우리 시단의 모더니즘 경향>[도라지 집지,20025]이라는 글에서 사실주의시와 현대시의  결합으로 된 시를 <준현대파>(準現代派)이라고 명명했고 앞으로 준현대피사가 우세를 점할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은바가 있다.

 한영남의 시에는 이야기식으로 엮은 시들이 많다. 이 것도 이 시인의 특징의 하나이다. <머리를 깎이우며〉는 리발관에 가서 리발하는 과정을 시화하고 있는데 제목 자체가 해학적이다. 마치도 내가 원하지 않는데 누구한데 강박적으로 머리를 깎이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시는 <리발>을 엉뚱하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궤도를 달리한다.

 

머리를 잘리우는데

아버지 머리카락이 날리겠지

검지는 않고 완전 멋진 은발도 아닌

그냥 희부우연 그런 회색빛 머리카락들이

맥없이 무릎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졌다가 바닥에 뒹굴겠지

평생 스스로 머리 깎으신

아버지 허옇게 녹슨 머리카락

 

-<머리를 깎이우며〉

 

머리를 깎는사람은 분명히 나인데 떨져나오는 머리카락은 아버지의 허옇게 녹쓴 머리카락이다. 여기서  작자는 현대시의 의식의 흐름수법을 차용하고 있다. 자신이 머리를 깎는 순간 잠간 잠들수 있고 그 찰나 아버지를 떠 올렸을 수도 있다. .만약 이 시에서 <머릴를 깎는  순간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희부옇는데/늘 혼자서 머리를 깎으시였다>라고 했더라면 이 시는 완전히 사실주의시로 되였을 것이고 음미의 여지가 없었을것이며 더구나 미적향수는 운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머리깎기로부터 효자로서의 모습을 살갑게 담아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론적 바탕을 가득 출렁이게끔 해준다,

 

이번에 발표된 한영남의 거의 모든 시에 사실주의시에다 현대시의 장점을 점목하여 새로은 사실주의 시를 쓴다는 주장이 체현되고있다.

 

장엄한 파도파도파도파도의 송화강이 그만

서로 사타구니를  틀어박고 누워버린 이 기슭에

 

-<트롬베트는 불지 않기로 했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의

  넉넉하면서도 시커먼

근육의 고함소리에 귀를 맡겨버려야 한다

 

-<트롬베트는 불지 않기로 했다>.

 

시인은 송화강을 보면서 볼가강을 떠올리고 있고 레삔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을 떠올리고있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는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무거운 사실주의 걸작이다. 필자는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라는 그림도 보았을뿐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작곡한 노래도 알고있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림을 감상하면 비극이 뭐고 처참함이 뭔지를  진짜로 알게 된다. 이 그림  한폭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짜리정권을 반대하는 혁명에 뛰여들었다고 한다. 예술의 힘은 이처럼 막대하다. 거기다 한영남 시인이 <근육의 고함까지> 합쳐놓으니 그 힘이 더욱더 막강하다.

 

시에서 <송화강이 사타구니를 틀어박고><근육의 고함소리>는  이질적인 단어들로 결합되여 만들어진 생신한 이미지들인데 융융(隆隆)한 사내적기질과 참담한 형상성으로 돋보여진다.  

 

보내버린 그 사람 만치나 사랑했던

그리운 사월은 마침내 가고

오월의 가슴에는

하얀 정향향기가

렴치도 없이 자지러지다

 

 ……(중략)

 

하늘은 억울할 지경으로 푸르고

나무의 까치머리가 파랗게 불타다

 

사월은 가고 오월은 오고 나는 말이 없다

 

< 내 그리운 사월은 가고>일부

 

확실히 사실주의시지만 사상이 직선으로 표현되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그려진다. 이 시는 어떤 이루어지지 못한 애달픈 사랑, 혹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옛 사랑을  쓰지 않았을가고 추측해본다.

 사랑과 죽음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며 산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연인을, 세상을,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며 산다. 하지만 사랑은 파도 치듯 밀물과 썰물 이는 개별성의 마음안에서 늘 존재하며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안타깝고 슬픈 노릇이지만 개인의 감정과 감성의 령역안에 있는 사랑을 ,<사랑>이라는 포괄적인 언어로 이루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이런 리유로 사랑의 끝은 모두 슬프다.(최준)  <내 그리운 사월은 가고>에서 시인은 “사월은 가고 오월은 오고 나는 말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역설로서  할말이 너무 많다는 의미로 다가든다. 우리 말에 “기가 막혀 할말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렇듯 이 시는 사실주의시 성분이 다분하면서도 주제를 들어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또 완전한 사실주의시도 아니다. 다음으로 이 시도 언어를 적당히 파괴하여 감칠맛 나는 이미지를 창조하고있다.

 

오월의 가슴에는

하얀 정향향기가

렴치도 없이 자지러지다

……

하늘은 억울할 지경으로 푸르고

나무의 까치머리가 파랗게 불타다

 

자지러지게 울리는 정향 향기, 억울할 지경으로 푸른 하늘, 파랗게 불타는 나무의 까치머리 등등은 사실은 그리움으로 허기진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이상 례문에 올린 시들은 시인의  창작주장을 실천으로 증명한 시들이라고 보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한영남의 시를 시원하고 활달하고 재미있다고 하는데 그 리유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독자와의 소통이 잘 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시인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거기에 그리고 시 읽기를 통해 어떤 철학적수확을 얻을 때 비로소 미적향수가 이루어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을 아주 오묘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사람을 총명하게 하고 지혜를 주는 학문이 철학이다. 물론   큰 품을 들여 오래동안 사고해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한 시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황금처럼 귀중한 절주 빠른 현대사회에서 시 한수를 가지고 긴 시간을 소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영남의 시가 다 그의 주장처럼  “단순히 순수 전통시라고 하던 리얼리즘이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시기법들이 녹아있는 리얼리즘, 발전된 모더니즘으로 ”된 것은 아니다.  례를 들면 <점적주사를 맞으며〉, < 그대의   그리운 사람이 되여>,  <떠날거라고 했다> 등 시들은 사실주의에 현대시기법이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며 어딘가 단조로운 감을 주는 것 같다.

 

거짓말처럼  하늘 푸르며

그리워하는 그대에가 다가가

그대의 그리운 사람이 되고싶소

 

 <그대의 그리운 사람이  되여> 첫련

 

떠날거라고 했다

시내물이 조약돌 만지다가

아쉬운 손을 놓고 흘러가고

앙상하던 봉숭아 나무가지에

복사꽃이 탁탁 피여나면서

뒤산언덕에  봄이 슬며시 깃들면

<떠날거라고 했다> 첫련

 

상술한 례문들은 언어의 조탁에서 일반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다시 말하면 현대시의 기법들이 제대로 차용되지 못하고있는 것 같다. 현대시에서 가장 근본으로 되고있는 것이 언어의 해체, 이질적인 낱말들의 결합이다. 지나친 언어해체는 삼가해야 하지만 적당한 언어해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한영남 시인이 자기의 미학주장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립증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있는 점이 상찬할만 하다고 여겨진다. 확실히 그는 “대학교수와 장사군들이 다 같이 좋다고 하는” 시를 쓰고있는 것 같다. 금후, (이건 순전히 필자의 생각인데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현대시기법들이 점 더 녹아들어있는 시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다.

 

201975일 연길에서

 

한영남 시인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몸짓 깨어나는 심상

한영남근작시에서 살펴본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탐구정신

허인

 

이니셜 내가 한영남ㅡ해학의 달인 통속언어창출의 놀라운 괴재

 

6, 파겁을 시작한 뭇꽃이 다투어 조잔한 열매를 손에 받아들고 어느새 초하(初夏) 문턱, 높은 담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계절, 필자는 며칠전 할빈에서 이메일로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10수를 앞에 놓고 흥분으로 읽는다. 범상찮은 조짐 ㅡ 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 ㅡ 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

길림성 안도현 태생인 한영남시인은 일찍 , 고중시절부터 벌써 신문잡지에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튝속 발표, 현재까지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우리 서로 얘기 합시다',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 수필, 소설, 평론을 무려 300여만자 발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 중국조선족수필상,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다수 수상, 2006 시집 <하나님 눈을 너무 깊이 감으셨습니다> 출간ㅡ현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편집으로사업중이다 . 필자가 알건대 한영남시인이 오늘날 개성이 뚜렷하고 유망한 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적잖은 아픔과 홀로서기의 나날이 있었던줄로 안다.시를 써야하는 백공한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철없었던 문학도시절 량친부모를 잃고 억이 막혀 혼자 힘마저 없었을때 가슴 따뜻한 긍정적인 한마디 하여준 고마운 선배문인과 인정에 시린 손발을 늘쌍 친동기처럼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던 고마운 동우시인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그리고 늦게야 늙은 총각딱지를 마침내 떼고 늦장가 들어 득남까지 한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늦게나마 행복의 메신저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 뜻 ㅡ어쩌면 요즘처럼 독지층이 얇아져 가는 조선족 시단 읽어볼만한 시가 없기로는 시인이나 독자나 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영남시인의 이번 해학, 독백, 역설을 위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킨 근작시들은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간만에 가슴 설레도록 할것이며 또한 오래도록 긴 여운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게 하리라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럼 아래에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에 보내온 주옥같은 근작시 12수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서와 의식ㅡ무의식속에서 이끌어낸 해학의 즐거운 잔치 한 마당

 

시의 혁신은 곧 사유의 혁신이며 또한 언어의 혁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쓸때 우선 먼저 미학적인 고려를 하여야 하며 또한 감수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라 해야겠다. 일찍 리요다르는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 시대에 오면 하나의 환상이거나 지적인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적이 있다. 총체성에대한 갈망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모순을 하나의 지적인 체계로 종합하려는 그러한 태도를 말하는것이다.그런 갈망이 환상이거나 테러에 지나지않는다고 함은 결국 모든종합주의적 사고가 허구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렇듯 탈구성적인 리념은 형식주의적인 이데올리기의 억압에 대한 미적인 저항이며 또한 구성이 아니라 충동을 강조하는 태도이기도하다. 구성의 파괴가 아닌 구성속의 자연 분만된 여러가지 복잡성, 그리고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겹치기 구조, 이런 태도는 ,소설ㅡ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나의 구속물에 지나지않는다는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해체시의 경우 주체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탈구성 혹은 해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된다.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 중ㅡ 질서와 해학의 즐거운 잔치마당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있는 <간추린소식>부터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발가락 하나 감기 걸렸소

머리카락 한오리 발기불능증이오

귀지 한숟가락 당뇨병이라오

눈썹 한 대 좌골신경통을 앓는다오

이빨 한 대 정신분렬증을 치르오

코털 한 대 페암인 듯 하오

손톱 하나 에이즈와 사귀었다오

배꼽 절반이 알콜중독쯤이라오

자지 가운데가 중풍을 맞았다오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

발가락사이 때 한줌이 배 두드리며 만포식이라오

 

이상 간추린 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

<간추린 소식>전문이다.

 

시는 구조적 통일성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앙상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서 평론에서도 이미 여러번 말한적이 있지만 시는 엄격히 따지면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간추린소식> 읽고나면 시인의 놀라운 재치에 저도몰래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 즉 인체의 각 기관들로 온갖 병적인 현상들을 직결시켜 완성시킨 이 한 수의 시는 읽을수록 쿡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한 기이한 발상에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 와닿아 그야말로 가관이라 해야 할것 같다. 라캉식 행동, 칸트식 발언 , 미셜 푸코식 사유 ㅡ/발가락과 감기/, 머리카락 한오리와 발기불능증/, 귀지 한숟가락과 당뇨병/, /눈썹 한대와 좌골신경통/, 이빨 한대와 정신분렬증/, 코털 한대와 페암/, 손톱 하나와 에이즈/, 배꼽 절반이 올콜중독/, 자지 가운데와 중풍/, /겨드랑이털 서너이랑과 백전풍/, 발가락 사이 때 한줌과 만포식/은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시인의 의도적인 변이, 변형을 통하여 우리 이 사회의 여러가지 병페적인 현상들을 아이러니컬하게 해학적으로ㅡ 유머 있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더우기 시인은 줄곧 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립장에 서서 앵커다운 앵커가 되여 조용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하듯이 패러독스를 펼치고 있지만 그 효과음은 분명 공명이라는 전환 리듬을 타고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둥둥 웅굴진 북소리가 되여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는듯 싶다. 특히 제일 마지막 련ㅡ /이상 간추린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 그런 병적인 현상에는 쉽사리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비추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참된 인간의 성실한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듯 싶다. 필자는 웬만하면 누구를 함부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꼭 한마디 해야 겠다 . 한영남시인은 우리 이 시대의 해학의 달인임이 틀림없으며 통속언어창출의 괴재(怪才)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귀지, 자지, 그리고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라는 표현은 지방적인 방언색채가 다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담판>이라는 익숙하고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럼 아래에 해학의 또다른 작품도 살펴보기로 하자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

눈은 없어도 좋소

다리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가 부러져도 좋소

몸뚱이가 부러져도 좋소

 

밸은 없는게 낫소

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

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

<개구리와 개구리는 오감도를 좆감도처럼 놀고 있소> -이상의 ‘오감도’에 부쳐ㅡ전문이다.

의인화 수법으로 씌여진 이 시속의 주인공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주저앉은 개구리> 형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안일한 삶속의 리유ㅡ 즉 무승자박(无绳自搏) 이라는 단단한 포승에 꽁꽁 묶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상을 마치 두눈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듯 싶다 . 1련에서부터 력설적인 어투로 시작된 이 시는 거의 아무런 휘핑도 없이 오직 헤드라인과 초감각적으로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로 최저한도의 상황제시를 하여놓고서 다시금 제2련에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눈은 없어도 좋소…/ <눈이 없고> < 다리>, <허리>, <몸뚱아리>마저 부려져도 무작정 뛰여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야유적으로 고조시켜놓은듯 싶으며 특히 제3련에서는 아예/밸은 없는게 낫소/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로 한술 더 푸욱 떠서 <> 없고<배꼽> 없어야 어쩌면 살아가는데 적응할수도 있으며 결국 제 4련에서는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부제에서 볼수 있다싶이 <리상에게 부치는> 편지이고보니 아무리 어찌해 보아도 넘을수 없는 장벽같은것을 마주선 인간의 여러가지 형태를 적라라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놓은듯 싶다.  그럼 아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하여 완성시킨 몇수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별이 차마 섬뜩했다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 있었고

언제나 다정한 얼음조각

팔불출이어서 싱거웁다

깊은 재채기는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

끝내 누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

서슬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발정한다

 

/별이 차마 섬뜩했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이 시에서 필자는 마치 파트 타임이 아닌 터닝 포인트, 어쩌면 긴 타월로 철철 흐르고 있는 식은 땀을 홀로 게면쩍게 슬쩍슬쩍 딲고 있는 이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별이 시인에게 주는 섬뜩함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ㅡ시제가 <무제>인것만큼 시인이 말하는 별이 도대체 무엇일가 하는 핀트는 독자 나름대로 설정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제2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에서 포플러ㅡ 즉 백양나무는 모두 다 잘 알다싶이 포플러나무는 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자리에만 서 있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한데도 시인은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하였다/고 재치있게 표현하여 인생의 허다한 막무가내와 그러한 속박에 저항해보려는 역반심리, 즉 어디론가다 툭툭 털어내치고 훨훨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그러한 강한 충동, <구속> 령혼의 가슴 시린 간절한 바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듯 하며 그 다음 자연스럽게 줄 지어 다가서는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는 또한 <다정한 얼음쪼각> <팔불출>이라는 재밌고도 어깨 단단한 이지미를 멋스럽게 견인해 내여 단 한마디 / 싱거웁다/로 현실에 대한 불안, 혹은 그러한 불만정서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듯 하며 특히 제6련에서 /깊은 재채기/는 시인의 세심한 배려와 지성적인 사유끝에 변이, 변형을 통하여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이라는 너무나도 궁색하고 허무한 결과ㅡ 즉 자다가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 초불을 켜들고 찾아 읽고 싶어지도록 간결함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결과마저도 시린 가슴에 포옹으로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각근한 태도에 읽는 이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특히 제 8련에서 10련까지 /끝내 누군가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서슬푸른 하늘이/조용히 발정한다/는 그물에 걸지리 않는 바람처럼 리상적인 자유와 지향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 끊임없는 추구와 변함없는 생명운동을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실천해보려는 시인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암시해주는듯 싶다.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정한 얼음쪼각, 갈대의 웃음파편은 폭력적조합을 이루면서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감이 없어 한영남시인이 언어련금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는지를 아낌없이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질서와 구조속에서 생명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럼 아래에 수학 매트르식이 아닌 속사로 생명구조와 분명한 질서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운동을 마치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 <차들의 사업> 잠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나간다

 

마당에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침이면 버스도 빠져나간다

 

마당에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직도 트럭 차들이 서있다

 

여보게 시작들 합세

 

마당에 차들이 없다

마당에 차들이 없다

 

하루가 도르르 말려 저쪽으로 사라지고

하루일에 지친 차들이 다시 들어온다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잠잔다

 

<차들의 사업> 전문이다

은유에 기대여 직조된 이미지 자체를 통해 많은 자유련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한수의 시는 <>없이도 매일 진행되는 생명과정에 대한 한차례의 미적감수를 경유했다는데서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삶과 분리된 구성물이 아닌 진행속에 있는 구성물, 1련에서 볼수 있다싶이 <곤하게 서 있는 전차, 버스, 트럭, 차들> 바라는 시인의 시선은 정지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인 전차, 버스, , 트럭을 따라 움직이는것,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저절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피창조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속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에 기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곤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하는듯 싶다. 꼼꼼히 살펴보면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자리는 잠시 비게 되며 다음은 버스ㅡ 차들 ㅡ여기서 시인은 분명 원유의 질서를 해체하려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들을 재발견, 차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희노애락을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시의 언어는 의미전달의 언어구조가 아닌 의미형성의 새로운 이미지구조여야 한다. 특히 문체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있는 세부의 기능이기때문에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라고 해야 할것 같다.그럼 아래에 남달리 시각 효과가 뛰여난 <나비><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만 있다면>,<길은 길에 미안하오> 살펴보기로 하자

 

탐미주의적 경향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

 

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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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정조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아픔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심장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령혼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무덤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의미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름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용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버린다

나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버린 나는

내가 모든것을 버려서 비여버린 나는

드디여 한수의 시로 남는다

 

길은 길에 미안하오

 

길은 어디로 어떻게 뚫린거라도 괜찮소

길은 걸어주는것이 도리요

길은 자주 걸어줄수록 길이요

길은 혼자만의 길이 있듯이

길은 여러 사람의 길도 있소

길은 혼자만 걷고 싶은 길임에도

길은 여러 사람이 자꾸 기웃거리오

길은 혼자 걸어도 길이요

길은 여럿이 걸어도 길이요

길은 길이기에 길들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오

길은 아무렇게나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위험하오

길은 저만치 길다운데

길은 길일뿐이오

 

시인이 굳이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단단히 긍정하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전복해보려는 시인의 각근한 노력과도 관계되는상 싶다. 이러한 각근한 노력끝에 한영남시인이 <나비> 바라본 시각현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기 위한 수단인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한가지 측면만 통하여 깊이 료해하고 결정해보려 심리를 폭죽효과로 삶의 공간에 터뜨리려 한것 같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서 < > 어쩌면 바람앞에 흔들리는 <>일수도 있고 또한 <나풀> 줄임자일수도 있으며 무려 500여개의 <훨훨> 마치 수천 수만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을 주어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다음 결속어 <나풀> 시인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열애와 환희를 나타내려 한것 같다. 반복구사법, 겹치기기법, 절충법으로 씌여진 < 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길은 길에 미안하오>역시 같은 실례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로 시작하여 정조, 사랑, 아픔, 행복, 심장 ,령혼 , 무덤, 의미 , 이름 , 용서, 훈민정음ㅡ그리고 무려 13차례나 되는 <버린다>라는 고도로 집중이 되는 비움속에서 평생을 한수의 시로만 남고싶은 시인의 간절한 욕망, 그리고 동업자가 <라이벌>일수도 혹은 <동지>일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을 길로 간결히 표현한 <길은 길에 미안하오> 첫째,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둘째, 군더더기 하나없이 주체의식이 명확하며 셋째, 시의 또다른 가능성마저 제시해주는듯 싶다. 다만 프로의 경우 탐미주의적 경향, 즉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으로 받아들여 지겠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칫하면 문자유희에 빠질 그런 우려가 있음을 모두 류의해야 할것 같다.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 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로 한다 . 무릇 이 시대의 모든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은 지극히 단순한 상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시되며 더 나아가서는 가끔 사회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화현상이 사회현상을 시의 심층 구조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 <물덩이들의 반란> 제목자체에서부터 이미 엿볼수가 있다싶이 지극히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였던것들이 <덩어리> 되여 잘 줴기지고 때론 제법 <골격> 단단해져 간혹 <나를 아프게> 할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상호 의존된 력학관계와 애잔한 관용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듯 싶다. 여기서 <물덩이>, <왈칵왈칵 목구멍을 헤집는다>, <살겠다는듯이>, < 줴기진>,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빨리듯이 들어간다> 표현은 참으로 생신하고 이색적인 아어효과를 창출하고 있는듯 싶다. 한영남시인은 분명히 우리가ㅡ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 실체를 좀 더 찬찬히 따지고 보면 무릇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 있는듯 싶다. 어쩌면 있는것이란 상호 관계 혹은 큰 공간일뿐 ㅡ<인간> 실체가 아닌 관계 혹은 공간으로 인식되여야 한다는 말이라 해야 겠다. 례를 들면 <>라는 말은 절대적인 선험성을 지닐수가 없다. <>라는 말이 의미를 띨수 있는것은 <>라는 말과 관계를 맺을때 뿐이다. 때문에 <>의 존재가 <>의 존재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 <>의 관계가 <>를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길게 설명하자면 인간이라는 실체가 <> <>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관계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물덩이들의 반란> 필자로서는 관용을 미학으로 풀이한 좋은 시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연속에서 얻은 령감, 손발을 톡톡 털고 어깨 흔들며 깨여나는 추억 한장

 

가을이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솨아 세월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길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가을꽃들이

모처럼 생글거리고있었다

금잔화 한송이는

어느날 떠나간 친구의

뒤잔등을 떠올려주리만치 아린 빛이였고

하늘은 넌지시 높아만 갔다

가을빛이 서두름 없이

짙어가는 가운데

훠이 생각이 깃을 치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명상은 고요로이 침묵을 씹고 =있었다

여보게 가도 가시게

눈물은 흔적없이 말라버리고

가을빛은 모질이도 모질이도 짙어갔다

뒤모습이 서글펐던 떠나간 친구를 떠올려주는 금잔화 한송이가 피여난 끝나가는 가을께에

 

<가을소묘 서너점> <가을이 끝날무렵 우리는 금잔화 한송이로 떠나간 친구의 뒤모습을 그려보았다> 전문이다. 칸트에 의해 처음 미학적 토대를 형성한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창조적 상상력의 절대적 능력을 토대로 하였다. 이번 한영남시인의 대부분 시작중 텍스트로 설정된 <> <자연>, 그리고 특정된 <> 의 어느 한 장면을 주축으로 이룬것이 특징이며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가을이라는 풍만한 감오속에서 또한 조금 낯설면서도 왠지 너무나도 익숙한 <금잔화>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나게 되며 시인과 더불어 떠나간 친구의 뒤모습을 머리속에 아련히 떠올리게 된다. <가을이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솨아 세월 흐르는 소리> , <오랜만에 보는 가을꽃들이 모처럼 생글거리고있었다>, <뒤잔등을 떠올려주리만치 아린 > 영원히 다슬지 않을 한장의 투명한 기억속에 멀리로 훌쩍 떠나가버린 친구를 담고서도 여운이 남아 있을만큼 실감나게 어루만져 주고 있는듯 싶다. /가을이라고/가을앓이 한다고/가을너머에서 깊어가네/가을하늘 만지다/퍼렇게 물든 /알고있니/너를 만져 나마저/ 푸르게 물들고 싶은 마음/가을이라고/가을앓이 한다고/가을너머 숨어도 소용이 없네/ <가을앓이> 전문이다. /가을을 만지다/퍼렇게 물든 /알고있니/너를 만져 나마저/ 푸르게 들고싶은 이마음/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는 명구절이라고 해야 겠다. 이외에도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중에는 <가을 막바지>, <가을 장독대>,<가을 하루길> 여러수가 있지만 여기서는 일일히 짚고 넘어가려 하지 않겠다. 끝으로 우리 함께 시인의 아련한 추억이 손에 뚝뚝 묻어나는 <가을 스케치> 함께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가을이 오는체 한다

들국화며 코스모스들이 신나서

환하게 웃는다

 

가을이 가는체 한다

그토록 씩씩하던 해바라기들

머리통 푸욱 떨구고 꿀꺽꿀꺽 울음을 삼킨다

 

<가을 스케치>전문이다

 

착각이 낳은 짧고 훌륭한 좋은 시라고 해야 겠다. <가을이 오는체> 할리 만무하고, <가을이 가는체> 할리 만무하지만 시인의 느낌속에는 분명히 <들국화며 코스모스들이 신나서환하게> 웃고 <씩씩하던 해바라기들 머리통 푸욱 떨구고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고> 있다. 시인의 지극히 지성적이고 여린 심성과 고운 심상을 엿볼수가 있어 감화력이 높은듯 싶다.

 

마무리하면서

내가 한영남시인은 보수적이 아니라 언제나 능동적이였다. 시인은 시어를 통해 <자아> 확립하는것이 아니라 <자아> 위치를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것이다. 한영남시인은조선족시단에서 전렬에 있는 젊은 시인이시다 . 한영남시인의 이러한 시적인 실험은 어쩌면 모험일수도 있으며 또한 여직껏 쌓아온 자신의 이미지에 약간의 손상을 줄수 있다.그러나 시인이라면 누구나 오늘에 안일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하는 만큼 독자들의 심미(审美)수준도 높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영남시인의 많은 실험시들을 필자는 높이 평가한다. 옛날 고대 희랍사람들은 델포이 아폴로신전의 하얀 대리석벽에다 < 자신을 알라! ghthisea-utoh> 글을 새겨넣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또한 행동의 지표로 여겼다고 한다. 끝으로 한영남시인이 화려한 기교적인 추구보다는 내실을 더욱 튼튼히 다져 자신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에서 독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차원 더욱높고 좋은 시들을 많이 써내길 충심으로 기원하며 응원의 박수를 뜨겁게 다시 한번 보내 드린다.

2014527 심양에서

 

 

평론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으려는 시

한영남근작시에서 살펴본 관념적 의식의 새로운 탈출

허인

 

  • [ 시인으로서의 인격이 있고 또한 독특한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인의 인격은 시에서 주로 튼튼한 골격을 이루며 남달리 독특한 개성은 또한 피와 살과도 같은 시적인 언어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일찍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에서 <인문적 사실주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지식에 대해 깨여있는 불안한 의식이다>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우리 이 시대의 시인들은 <위대한 무당>들임이 틀림없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자신의 은밀한 아픔마저도 가끔 시대적인 아픔으로, 영위되여 가고 있는 삶의 지혜와 그러한 끊임없는 모험, 자아해탈과 자아 모순속에서도 악착스레 갈구해가는 영구불멸적인 정신적 해탈, 어쩌면 한낱 허무와 공허의 불안함, 그러한 요소마저도 시인자체의것만이 아닌 시대적인 것으로 가끔 승화시켜놓고 거기에 쟁쟁한 공명을 이끌어내여 치유의 엔돌핀으로 증오와 사랑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서슴없이 고백하여가는 ㅡ 솔직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을 십여일전 이메일로 받아놓고 무엇을 쓸가? 어떻게 쓸가? 여러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필을 든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탈변을 시도로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는 근작시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읽어보기로 하자

 

절충을 강요하는 무형(无形)속의 새로운 이중관념

 

묻지 않으리

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바라만 보리

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상처를 들고 상처를 찾지 않으리>전문이다

 

일찍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의 전반 과정으로 보았다.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수선화는 굳이 이름 불러주지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 <나는 조선토종이외다> 등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륙속 출품시켜 한때 조선족시단을 나름대로 풍미했고 심플하게 러시 아워까지 이끌어 냈던 한영남시인의 전반 시적 풍격을 꼼꼼히 살펴보면 리드미컬하게, 혹은 한결같이ㅡ 세찬 파도나 거친 풍랑, 외재적인 그러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게 항상 내재적인 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돌돌돌 맑고 깨끗한 시내물 과도 같이 잔잔하게 흘러오다가도 불쑥 시적 공명을 크게 울리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 . 그런 한시인이 요즘 들어 근작시에서 절충에 절충을 강요해가면서 이중관념적인 여러가지 단시들로 지금 필자를 깜짝 놀래우고 있다. 도합 2련으로 나뉘여진 이 시의 제1/묻지 않으리/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에서 볼수 있다싶이 누구나 쉽게 직시할수 있는 피크(顶峰)된 시인의 상처, 즉 유형(有形)과 무형(无形)의 비좁은 삶의 공간을 비집고 나와 어마어마한 전률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클로즈업된 시인의 아픔과 그러한 상처자국들ㅡ어쩌면 필자나 독자들로써는 감히 그 깊이나 너비마저 예측할수 없는 삶속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절절히 느껴지게끔 하며 특히 제 2련은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만 보리/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결속되여 이 시는 곱씹어 읽을수록 꼭 무엇이라 이름할수는 없지만 잔잔한 울림이 변두에서서부터 시작되여 점차 중심으로 모아지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럼 아래에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하는 다른 두수의 단시도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저녁 황혼

 

타네

 

붉네

 

인생

 

울어라 바다가 넘쳐나도록

웃어라 하늘이 흔들리도록

 

여기서 <저녁황혼> 도합 여섯글자로 그나마 1, 2련으로 나뉘여졌지만 <인생> 고작 두개 련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저녁황혼> 보다싶이 제목자체가 그냥 <황혼>이여도 무방하려만 특별히 <황혼>앞에 <저녁> 덧붙여 시간적인 개념이나 강조의 뜻을 강하게 크게 나타내려고 하였음이 엿보이고 <인생> 어쩌면 아무렇치도 않게ㅡ 혹은 대수롭지도 않게 쉽게 씌여진듯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울음> <웃음>, <바다> <하늘>, 그리고 재치있게 형용사 <넘쳐나도록> <흔들리도록> 존속적인 결속어로 붙어있어 곱씹을수록 만만찮은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어쩌면 한영남시인이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지는 시적탈출구를 이번 근작시들에서 절충과 이률배반적인 모험으로 새롭게 헤쳐나가가려 하는 그런 과감한 행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찍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것임> 보여주고저 철학가이며 정치가였던 폴 미셀 푸코는 전생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결국 <지식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까지 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방식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여 준적이 있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도 개혁의 행보는 매 한발자국마저 조심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로도 될수 있을것 같다 . 예술의 소외는 억압이 아닌 승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다.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

 

지성의 씨앗, 그리고 균열의 사고속에서 건져보는 자연과 삶의 찡한 감동

 

<천재는 모든 사람을 닮아 있지만 아무도 그를 닮을수 없다> 말이 있다. 비범한 자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몸담그고 있는 사회나 어떤 현상에대하여 가끔 강렬하게 반응하게 하고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상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불쑥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시되는듯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며 가끔 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여기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고 산고(产苦)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런 운명이기도 하다. 예술분야에서, 특히 언어예술부문에서 시인의 경우 그런 비극적인 음영은 더욱 짙으며,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는 항상 광기의 그림자가 손을 드리우고 있다…p 브르노의 말 한마디를 개조하여 인용해본다.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지성의 씨앗을 근본으로 균열이 불러온 한()과 상처문학의 계승이고 전승>이라고 하여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 조금 더 진부하게 첨부되였고 나름대로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지는것은 삶과 자연속의 새로운 마찰속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그 애절하고도 가슴이 찡한 감동, 즉 뼈에 맺혀 아픔으로 여린 가슴에 되 돌아 울려오는 그런 공명감이 더욱 커진듯한 느낌이 든다. ㅡ 그럼 아래에 잔잔한 서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문적 휴머니즘품격을 고차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한영남시인의 시 몇수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오월

오후

해가 줄 볕 다 주며

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

 

멀리

저리

하느작이는 풀잎들은

연초록 아니라도 좋으련만

 

하필

하얀

구름들이

푸른 하늘 걸려 시름없고

 

휘이

휘이

바람 부드런 손

땀이마 쓸어주는데

 

이일

저일

고향 옛일들 떠올라

울어버리고 싶네

 

<오늘은 울고싶어라>전문이다

 

이 시의 제1련에서 텍스트의 모티브로 추정이 되는 /오월/오후/해가 줄 볕 다 주며/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는 재치있고 간결하게 설정한 환경묘사가 남달리 돋보이며 <해와> 시적화자로 대두된 이 시의 잔잔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제2련에서 별로 큰 소망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하느작이는 풀잎은/연초록이 아니여도 좋으련만/에서는 여리고 깨끗한 시인의 고백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도 하며 특히 3련에서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에서 <> 잠시 전략적으로 굴절되여 있고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로 다시금 이미지를 집중시키였다가 마침내 제 4련에서는 벌써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휘이/휘이/바람 부드러운 손/내 땀이마 쓸어주는데/로 단단히 초점을 모아놓고서 마침내 제5련에서 /이일/저일/고향 옛일들 떠올라/울어버리고 싶네/<울고싶은 심정> 극대화시킨다. 모두 알다싶이 제목자체가 <오늘은 울고싶어라>이고보니 시적화자가 견인해낸 <고향의 이런저런 옛일들> 시인을 울리기에 너무나도 충족하며 더불어 읽는이들의 가슴까지도 툭툭 건드려 공명감을 생성해가는 그런 효과음이 큰것 같다. 부킹된 휴먼드라마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더더기 하나없이 간결하면서도 운치가 철철 넘쳐 흐르는 이 시는 아마도 필자로써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1967년도생인 한영남시인은 양띠, 필자보다는 한살 이상 , 한영남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들이 아직 알지못하고 있는ㅡ 어쩌면 시인 혼자 평생을 울어도 결국 다 울어버릴수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옛이야기들과 아직도 굴벰이 죽죽하도록 아리고 쓰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앞에 놓인 접시에

한줌의 소금으로 고스란히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

사랑의 이름뿐이 아닌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혼자 아프지도 아니하도록

손 모아 매일 기도하며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얀 소금으로 당신곁에 남겠습니다

 

<마른 눈물 한접시>전문이다

 

눈물이 말라 한접시의 소금을 완성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얼마만큼 애간장을 태워야 할지 필자로서는 알수조차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눈물의 소금 한접시를 시인은 결국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꽁짜로 그냥 드리겠다/고 고백한다. 특히 5행과 11행사이에서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사랑의 이름뿐이 아닌/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로 재강조하여놓고 /살아가면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환자처럼 /아프지도 아니하도록/두 손 모아 기도하며/내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결속구인 제일 마지막 두련에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하얀 소금으로 그냥 당신곁에 남겠습니다/고담담히 마무리한다. 여기서 하얀 소금은 말그대로 쓰나미처럼 하얗게 가슴에 다가와 읽는이의 가슴마저 너무 쓰리고 아프게 한다. 한수의 시에 왜 이처럼 많은 독자들이 웃고 또 우는지 한영남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조금 알것도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면

세상 열리나

오면

세상 닫히나

 

열흘

열사흘

한해

두세해

 

맨날

그리다

행여

만나도

 

말도

못하고

손도

못잡고

 

그냥

그리움밖에

끝내

서글픔밖에

 

가면

세상 깨지나

오면

세상 터지나

 

<미웁다가 그리웁다가>전문이다

 

간다고 허망 열릴 세상이 아니고 온다고 쉽게 닫힐 그런 세상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인의 각도로 살펴보는 허무와 공허의 불안한 요소들, 즉 가상적인 현실속에서 어찌보면 어젯날 이룰수 없었던 열련과의 뜻깊은 상봉, 혹은 그러한 갈구를 특히 3,4,5련에서 /맨날/그리다/행여/만나도/말도/ 못하고/손도/못잡고/그냥 /그리움밖에/끝내/서긑픔밖에/에서 시인의 특수한 애증표달을 표면만이 아닌 내면속의 진지한 감정으로 곧바로 승화시켜놓고서 제목자체에서 이미 독자들의 머리속에 미리 각인시켜놓은 <미웁다가 그리웁다가> 자연스럽게 떠올려가면서 결국 /세상이 깨지나/세상이 터지나/로 이미지 총집합을 시도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무리하면서

 

력사는 련속적이면서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 .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중에는 이외에도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가> <고향은 내가 울바자에 오줌을 싸도 나무라지 않았네> <거기에 추억은 울바자처럼 서있었네> <물덩이들의 반란> < 래일에 눈길 걸어두고> 등등 여러수의 시가 더 있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필자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상 몇수의 시에서 살펴볼수 있는바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는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점층법과 겹쳐그리기 기법으로 완성 된것이 많으며 대부분 시들이 또한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음미와 감상의 긴 여운으로 길게 남기려하는 시인의 대담한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여 온 구조주의적 모더니즘 사색에서 새롭게 탈출해보려는 시인의 굵직한 몸부림을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 다 함께 여기서 모더니즘 특성과 그 일곱가지 개념을 조심스럽게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모더니즘은 도시주의를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파리, 조이스의 더블린, 엘리어트의 런던, 도스패소스의 뉴욕 등등은 대체로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적 삶의 문제를 형상화로 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은 공업기술주의를 지향한다. 기술세계란 도시적 삶의 토대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립체파,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무엇보다 강조한것이 기술성이다.

셋째, 모더니즘은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특성과 관계가 있는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비인간화는 오르테가 익가세트에 의해 현대예술의 기본개념으로 리론화된적이 있다.

넷째,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지향한다. 원시주의란 추상화 된 삶, 현대시의 기본원리로 나타나는 은유나 상징 등도 이런 맥락우에 서 있다.

다섯째, 모더니즘은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었다

여섯째, 모더니즘에서 읽을수 있는것으로는 반도덕성을 들수 있다. 이른바 도덕률을 페기하는것은 현대미학이 삶의 도덕적 기초의 와해에서 출발하기때문이다.

일곱째, 모더니즘은 실험주의를 지향한다. 시간적 질서에 대한 회의, 따라서 모든 시간성을 공간으로 인식하려는 동시성의 개념이기도 하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에 대화의 양식을 활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도 하다. 시에서 이중적구조법과 다성적 언어를 사용하면 곧바로 전통적인 시 쟝르의 해체라는 문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아무튼 한영남시인의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이번 시적 행로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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