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과 손수레

 

홍옥(紅玉)이 탐스럽다. 한입 베어 문 사과에 단짝 친구가 보였다. 친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니가 과일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 바람도 햇살도 고마운 10월에 친구 어머니는 사과 농장에서 손수레에 과일을 담아오다 발목을 겹질렸다. 친구는 엄마에게 오늘 하루 쉬라며 장사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사과 담긴 손수레를 보고 친구에게 사과 팔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친구 엄마 몰래 손수레를 끌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손수레를 끌고 집을 떠난 우리는 신나서 꿀맛 나는 사과 사라고 외쳤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소한 도전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집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과가 팔리지 않았다. 철부지의 도전은 망망대해처럼 아득했다. 사과 팔러 가자고 한 말이 후회스러웠다. 친구와 서울로 가자며 G시 돌다리에서부터 망우리 고개를 향해 손수레를 끌었다. 망우리 오르막을 오를 때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 지점에 도착했다. 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내리막 급경사는 위험해 걱정이 앞섰다. 망우리 고개 내리막은 미끄러지지 않게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우리는 내리막을 천천히 걸으며 땀을 뻘뻘 흘렸다. 무게 중심을 뒤에 두고 내려가다 무게에 밀려 손수레가 가로수와 충돌했다. 뒤에서 손수레를 잡아당기던 내가 넘어져 팔꿈치 살이 벗겨져 피가 났다. 손수레의 충격으로 떨어진 사과가 데굴데굴 길가로 굴렀다. 중학교 3학년이던 우리는 사과를 주우며 사과를 다 팔고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했다.

지나던 행인이 안쓰럽게 쳐다보며 사과를 두 봉지 사주었다. 사과가 팔리자 힘들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힘이 솟았다. 망우리 우림시장을 지나 중랑교 다리를 지나면서부터 사과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위생병원을 지나 경의 중앙선 철교 다리 위에서 손수레를 내려놓고 석양을 보며 친구가 눈물을 닦았다. “배고픔보다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라고 말했다. 나의 엄마도 복숭아를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기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눈물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었다. 힘들던 마음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상처가 난 사과를 하나씩 베어 물었다. 한 입 베어 물은 사과는 기력을 충천하게 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손수레를 끌고 청량리를 향해 걸었다. 손수레를 끌고 네 시간을 걸어 청량리 대왕코너(현 롯데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청량리 시계 탑 앞에서 사과를 팔던 우리는 다시 돌아다니며 팔자고 손수레를 끌고 대왕코너 우측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은 이상한 사람들과 알 수 없는 분위기로 낯설었다. 처음 접하는 분위기에도 넉살이 좋았던 친구가 웃음기 없는 한 여자에게 “누나 사과 사세요.”라고 외쳤다. 그 여자는 우리에게 “여기는 미성년자 출입 금지 구역이야.”라고 말하며 돌아가라고 했다. 친구가 사과 못 팔면 엄마가 아픈 다리를 끌며 사과를 팔아야 한다며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사과를 다 팔고 싶은 간절함에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손수레를 끌며 사과 사라고 소리쳤다. 그곳은 어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했던 젊은 여인의 슬픈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네였다. 인생의 여정 중에 뜻하지 않게 불시착한 곳, 그곳은 엄마 얼굴 보고 싶어 눈물짓던 그녀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마음의 고통을 겪으며 어머니가 나를 데려갔으면 하는 마음에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우리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가 다가와 사과 스무 개 달라며 돈을 내밀었다. 친구가 사과를 봉지(封紙)에 담아 건네자 그녀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내가 열 여섯이라고 말하자 “내 친동생과 같은 나이네.”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에서 나 온 그녀가 빵을 내밀며 “배고프지! 어서 먹어.”라고 말하는 눈가엔 눈물이 촉촉하다. 눈물 마를 날 없이 슬픈 일이 쌓여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그들이지만 막상 우리를 보고는 깊은 동정으로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준 빵을 허겁지겁 먹으며 사과 팔 생각도 잊고 있었다. 우리가 빵 먹는 동안 그녀는 옆 건물 여자들을 데리고 와 맛있겠다며 사과 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들은 고향 동생을 대하듯 따뜻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주었다. 외로움에 눈물을 삼켜야 했던 날들에 맏딸 몫을 눈물로 감당하던 그녀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밤을 지새우며 돈을 벌어 집으로 보내주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녀들 마음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시골집의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와 무작정 상경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과 친구 엄마의 짐을 덜고 싶은 우리는 서로 닮은 점이 있었다. 우리는 사과를 담은 손수레를, 그녀들은 마음의 손수레를 끌며 인간이기에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우리는 각자 많고 적은 짐을 지고 손수레를 끌고 다닌다. 어떤 이는 육체적인 손수레를 또 어떤 이는 마음의 손수레를 끌며 조물주가 준 고통을 겪으며 이겨낸다. 철없는 짓으로 격랑을 치른 자신감에 그 어느 것도 무섭지 않았다. 우리의 철 없던 고생과 그녀들의 책임감 있는 젊은 날의 고생은 마음 켜켜이 쌓여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생소함에 딱딱하게 헤매며 뛰었던 치열함이 느껴졌다. 처음이라는 도전 앞에 섰던 두려움은 자신감으로 극복했다. 철없던 첫걸음의 도전에서 차차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한 줄기 햇살처럼 밝아 보였다. 새로운 도전은 결핍이라는 그릇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

 

잘 돼야 할 텐데

 

식당 창업을 만만하게 보고 개업을 서두르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밑천을 투자해서 조기에 장사를 접으면 수천에서 수억이 증발하기도 한다.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고 가정이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소중한 재산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려면 신중하고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전국 여러 곳에서 식당 관련 사업이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경기는 침체되고 매출은 줄고 최저임금 등에 따른 고비용 부담으로 견디지 못한 자영업자가 문을 닫기도 한다.

TV 프로그램 중에서 창업자에게 도움을 주는 방송이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영업의 정보나 경험을 전수하고 초심을 잃으면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도 친다. 음식 준비로 시작해서 설거지와 청소까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치고 힘들어 몸살이 나도 쉴 새 없이 가게를 운영해야 한다. 장사는 운도 따라야 하고 몫도 좋아야 하지만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 맛이 제일 중요하다. 음식을 맛있게 먹은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맛을 기억하고 찾아가게 된다.

진접 택지지구 왕복 4차선 T자형 도로 모서리에 상가가 마주 보고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상가는 십 년 전 동시에 개업했다. 출·퇴근길에 항상 지나치는 도로여서 눈여겨보게 되었다. 가게는 90㎡로 적지 않은 공간이다. T자형 도로 오른쪽 상가는 감자탕을, 왼쪽은 닭갈비로 개업했다. 두 상가는 신장개업 행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힘차게 출발했다.

토요일 오전, 등산을 마치고 오른쪽 감자탕 상가에 들렀다. 감자탕은 돼지 특유의 냄새가 나는듯했고 푹 끓이지 않았는지 진한 맛이 아니었다. 김치와 깍두기 맛도 별로였다. 식당 방문객 중에 많은 사람은 맛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하며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자 감자탕 가게는 맛이 없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왼쪽 상가에도 들러 닭갈비를 먹어보았다. 춘천 닭갈비를 먹어 본 기억을 더듬어 맛을 비교하였다. 춘천 닭갈비와 똑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감자탕보다는 더 맛있었다. 그 후로는 가족과 감자탕보다 닭갈비를 자주 먹으러 다녔다.

손님으로 가득 차던 닭갈비 상가는 1년여가 지난 후부터 활기가 사라진듯했다. 한창 바빠야 할 시간에 손님이 전처럼 많지 않아 예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며칠 지켜보니 종종 장사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소문에 의하면 사장이 아파서 자주 못 나온다고 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괜한 마음에 문을 닫지 않을까 걱정이 들 때 가게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사업이 실패로 끝난다면 한 가정의 삶 자체가 위기를 맞는다. 당장 일자리를 잃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은 가족의 생계를 위태롭게 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눈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닭갈비 가게는 공실로 반년 넘게 방치되다 칼국수 음식점이 새로 들어섰다. 여 사장은 손맛을 제일로 생각한다며 단골이 되어주길 당부했지만, 끝내 1년여를 버티지 못했다.

칼국수 가게가 정리되자 곧바로 고추장 삼겹살 가게가 들어섰다. ‘잘 돼야 할 텐데,’라는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가게 또한 2년여를 넘기지 못하고 정리했다. 오른쪽 감자탕 가게는 1년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는데 예상을 뒤 업고 오랫동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뭔가 색다른 비법이 있나 궁금해 오랜만에 감자탕 가게에 들렀다. 창업 초기 돼지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고 푹 끓였는지 진한 맛이 일품이었다. 김치와 깍두기는 달고 짜지 않아서 먹기에 딱 좋았다. 처음 먹어본 맛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부족했던 초창기 맛을 보완해 끈기와 인내로 장사를 이어왔다. 개업 초기에 진한 맛이 아니라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 후로도 왼쪽 닭갈비 상가는 10여 년 동안 생선구이와 의류 판매까지 여러 업종으로 바뀌었지만 오래 하지 못하고 폐업을 거듭했다. 가게를 닫고 새로운 업종이 생길 때마다, 가게가 잘 안 되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싶고 그곳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새로 시작할 때마다 ‘잘 돼야 할 텐데’라고 간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초창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감자탕 가게는 10여 년 이상 장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가운데서도 대박집은 존재한다. 대박집은 무엇이 다를까. 아마도 진정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박집마다 고집하는 진정성은 다르지만, 우리가 모르는 운영자의 확실한 철학이 담겨 있다. 장사 잘하는 비법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항상 우리 가까이 있다. 장사 잘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음식에 큰 정성을 담아 맛깔나게 내놔야 한다. 수없이 상호가 바뀌는 가게 사이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성공과 실패의 사이에서 아무리 돈이 귀중해도 자신의 가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말이 있다. 사람과 돈의 우선순위를 혼동하지 말고 가치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 실패하여 넘어졌다고, 난 가진 것이 없다고 자신에 대한 평가절하는 절대 금물이다.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는 것도 진정한 삶의 승리다. 장사 밑천을 회수하지 못해도 건강을 잃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성공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돈을 쓸 것인지의 마음이다. 성공한 인생은 돈보다 주위를 둘러보는 따뜻한 마음이다.

 

수필가 손민준
수필가 손민준

 

 

 

 

• 등단 : 공무원문학
• 저서 : 수필집 흰 눈 속에 꽃이 있다 외
• 수상 : 향촌문학대상. 인창문학대상 외 다수
• 전) 구리시청근무
• 현) 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사무국장. 명예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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