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역사상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 따라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노자, 공자, 장자, 맹자, 묵자 등 사상가들도 있고 서로 먹고 먹히는 난세에 모사로 유명한 관중과 범려가 있었다. 법가로 유명한 상앙, 한비자도 있고 병가로 소문난 순무, 오자서도 있었다. 모두 위대한 인물들이지만 가장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범려이다. 내가 범려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다. 중국속담에 ‘사내대장부라면 저지를 때는 용감하게 저지르고 내려놓아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男子漢大丈夫, 必須會拿得起放得下).’란 말이 있는데 범려가 바로 이 속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월동주라는 고사가 있듯이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랫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먼저 월왕 구천이 오왕 합려를 전쟁터에서 죽였다. 합려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올랐고 오나라는 강대국이 되었다. 부차가 아버지 원수 갚으려고 월나라를 침략해 승리했다. 구천은 오나라에 끌려가 부차의 노예가 되었고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었다. 구천은 부차의 대변까지 맛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렇게 지옥 같은 삶을 3년을 보냈다. 그때 구천을 따라 간 신하 범려가 있었다. 범려는 3년 동안 구천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구천에게 와신상담할 것을 당부했다. 3년이 지나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여전히 장작더미에서 잠자고 매일 아침 기상하여 쓰디쓴 곰의 쓸개를 혀로 핥으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한편으로 구천은 범려의 부국강병의 방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20년 만에 오나라를 무너뜨려 천하의 패주가 되었다. 
구천이 오나라를 패망시키고 천하의 패주가 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범려는 돌연 구천의 곁을 떠난다.
“구천은 얼굴이 길쭉하고 입이 뾰족하게 생겨 고생은 같이 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나눌 수 없는 인물이다.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잡아먹듯이 나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범려는 친구 문종(文種)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이것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고사의 유래이다. 
범려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제나라에 가서 장사 길에 올라 대부자가 된다. 소문이 나자 제나라 재상으로 등용되지만 잠깐 벼슬을 했고 또 정계를 떠나 이번에는 도(陶) 땅에 가서 장사에 종사한다. 장사수완이 뛰어난 범려는 이번에도 별안간 대부자가 된다. ‘돼지는 살찌기 무섭고 사람은 이름이 나는 것이 두렵다.’는 속담이 있다. 범려는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번마다 번 재산을 전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라진다. 
범려는 정치가로 뛰어난 면도 있지만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천하 4대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서시와의 로맨스로 후세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멋진 사나이 범려에게도 자식을 잃는 아픔이 있었다. 

범려는 아들 셋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아들 셋이면 호랑이 세 마리라는 뜻으로 ‘표(彪)’라고 불렀다. 그런데 범려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 가서 사람을 죽이는 재국을 치고 만다. 자고로 중국 법은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사람을 죽인 범려의 둘째 아들은 초나라에서 죽게 생겼다.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만 볼 아버지가 어디에 있으랴! 하물며 천하의 대부자인 범려가 눈 감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막내아들에게 천금을 주면서 초나라에 가서 형을 구해오라고 했다. 이때 맏아들이 자기가 초나라에 가겠다고 나섰다. 예로부터 종법(宗法)에 의하면 가문에서 크고 작은 일은 장남이 떠맡는 것이 하나의 불변의 룰이 되고 있었다. 범려도 장남이 나서는데 차마 그만두라고 하지 못하고 내키지는 않지만 아우를 구하는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에 도착한 범려의 장남이 아버지의 분부대로 초나라에서 명망 높은 선비인 장생을 찾아갔다. 그는 장생을 만나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천금을 맡겼다. 장생은 친구의 아들 목숨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 돕기로 맘먹었다. 

장남이 초나라에서 여관에 머물며 장생의 소식을 기다리던 어느 하루 길거리에 사면 벽보가 붙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보니 아우의 이름도 있었다. 즉시 무릎을 탁 치고 만면의 웃음을 띠고 장생을 찾아갔다. 그는 장생을 찾아간 목적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왕의 사면 발표가 있으니 거금을 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장생에게 맡겼던 천금을 되 돌려받으려는 의도로 갔던 것이다. 장생은 그 돈이 뇌물이라 생각되어 수모를 당했다고 여겨 즉시 왕을 찾아가 도주공(陶朱公, 범려의 다른 호칭)이 뇌물을 써서 아들을 구하게 됐다는 소문을 펴고 있으니 사면은 없던 일로 하자고 건의해서 끝내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비장한 각오로 떠났던 장남은 아우를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어 아주 난감해 있는 장남을 본 범려는 어깨를 툭툭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네가 구해오지 못하리라는 답을 알고 있었느니라.”
범려는 어떻게 미리 장남이 아우를 구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범려는 이 일과 관련하여 훗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막내는 내가 부자가 된 후 이 세상에 태어나 어려운 줄 모르고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막내에 비해 장남은 내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 태어나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맘이 몸에 배어 만사에 대범하지 못하고 주저하기 일쑤이다. 만약 내가 막내를 보냈다면 백 프로 형을 구해왔을 것이지만 장남이 나섰기 때문에 나는 둘째가 초나라에서 영락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알고 돈도 써 본 놈이 쓸 줄 안다.’는 속담이 범려의 아들 셋 이야기에 딱 어울리고 딱 들어맞는다. 혹시 이 속담이 이 고사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지? 아직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이 속담을 내심 신봉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범려와 관련한 사료(史料)를 찾으려고 나의 ‘보물고’인 서재에 들어섰다. 나의 서재에는 책 외에 법무장관, 서울시장, 구청장, 경찰서장 등등의 기관장들로부터 받은 임명장과 표창장들이 있다. 그날 들어서자마자 먼저 경관(京官, 서울시장)의 성함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요즘 선거철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로 강력했던 경관이 살아계셔서 당내 경선에 참여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이어서 민주당 차기 대선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00지사가 떠올랐다. 만약 00지사가 여자문제로 탈이 생기지 않고 이번 경선에 참여했더라면? 그러나 역사에는 가설이 없다는 쪽으로 맘을 접었다.
하지만 이 분들이 너무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거나 콩밥을 먹고 있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가 없다. 혹자는 사필귀정이라고 매몰차게 비판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경관과 회의도 해보고 그의 표장장도 받았으니 인연이 있는 셈이고 한때 그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삼복더위에 여느 옥상을 세 맡아 거주하면서 선풍기로 더위를 물리치고 길거리에 나서 쓰레기 줍는 모습을 보고 나의 맘이 떠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이 행위가 서민생활 체험이랍시고 옆집 아저씨 같은 친서민 모습을 보여 주어 일부에서 찬양이 있긴 했지만 나는 어쩐지 못마땅하다는 쪽으로 맘이 기울었다. 

천만의 도시 경관, 나라 대통령은 옆집아저씨 같은 모습이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업무수행에 있어서 백 배 낫다. 보름인지 한 달 동안인지 옥상에 올라 선풍기로 더위를 물리치는 체험을 하는 시간이면 시장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켜놓고 시민의 삶을 걱정하며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시정연구와 발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며 또 올바른 일이다. 이렇게 하라고 경관 자리에 앉힌 것이지 선풍기 켜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서민체험을 하라고 선출된 자리가 아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은 가령 후에 높은 자리에 앉더라도 자신의 삶의 경력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경관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서민체험에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나의 부친은 평생 시골에서 당의 사업에 충실했다. 내가 세상을 안 이후로 가정생활이 그때 그 시절 상대적으로 가난하지 않았다. 그때는 남자들의 나들이 옷(와기, 윗도리)을 완성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옷감을 사서 읍내 마선으로 봉재해서 살아가는 가게에 맡긴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번마다 나들이옷에 회중시계 주머니를 만들었다. 그러나 부친은 끝내 회중시계를 사지 못했다. 우리 집 생활형편에 사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랬으니 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왜 사지 않았을까? 범려의 장남처럼 내밀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이유는 부친이 개인적으로 회중시계를 사고 안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밀손이 없는 성향이 장(長)으로서 다른 일에도 미쳤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시절 양 옆 촌들이 모두 동방홍 트랙이 있었는데 나의 부친이 당지서를 맡은 우리 촌만 없었다는 사실을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친의 내밀손이 없는 탓이었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사람이 나라살림을 맡으면 어떤 폐단이 나타날까? 자고로 다수의 가난한 사람은 소수의 부자들 때문에 내가 못 산다는 원한을 품고 있다. 가령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하고 성장보다 분배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이런 폐단을 극복하고 또 범려의 장남처럼 할 일을 못해내는 쪼잔한 성향을 극복한다면 나라운영이 원활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범려의 장남은 돈이 아까워서 만날 미투에 걸려들 것이지만 막내는 쓸데는 쓰는 성향이라 미투에 걸릴 확률이 제로다. 
서양의 바람둥이 대명사로 유명한 카사노바는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122명의 여인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카사노바는 여인을 사귀면 지갑을 아예 맡겨놓았다고 한다. 

서양에 카사노바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서문경(西門慶)이 있었다. 소설『금병매』의 주인공인 서문경은 과거 아주 나쁘고 저질스런 인물로 배웠었는데 요즘 말대로 하면 사내로서 아주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서문경도 카사노바처럼 여성편력이 굉장해 여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카사노바처럼 범접했던 여인들에게 전부 두둑하고 깔끔하게 보상해주었다. 이병아가 가출하자 이병아의 시녀 수춘을 찾아 이병아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만났다가 성욕이 발작하여 건드린다. 수춘은 그 당시 분위기로는 짓밟혀도 끽소리 못할 처지였지만 생각 밖으로 서문경한테서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 서문경은 이렇게 모든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잘해주었다. 

어느 나라 한 나리는 108명(양산박의 호한이 108명)의 정부(애인)를 두어 관리가 버거우니 애인 가운데서 리더를 선발해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그 나라 또 어느 한 나리는 아파트 100채 사서 100명의 애인을 두었다고 하니 현대판 아방궁이다. 이 두 사건 모두 언론을 탄 사실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나리들은 한 여인을 어설프게 건드려 인생을 종쳤으니. 수지가 전혀 맞지 않는 노릇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능한 사람을 선수라고 표현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알고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아는 것이 선수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먹어보지 못한 고기를 어설프게 먹으려다가 치른 대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며칠 전 국민의힘 원희룡 후부는 아내의 말실수 공격에 아주 분노하여 격하게 반응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내를 책임 못 지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나는 본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내로라하는 나리들이 ‘밖의 여인’ 하나 건사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건사(운영)’하는 깜냥이 된다고 생각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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