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챙이

프로필 등단 :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03년 문예사조 시, 2012년 문예감성 수필저서 : 동시집숙제 안 한 날 비둘기 선생님은 뭘 몰라 시집 별들도 슬픈 날이 있다수상 : 2014년 살림출판사 어린이책 당선. 2020년 바다문학상(수필)본상 현재 : 서울 돈암초등학교 근무
프로필 등단 :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03년 문예사조 시, 2012년 문예감성 수필저서 : 동시집숙제 안 한 날 비둘기 선생님은 뭘 몰라 시집 별들도 슬픈 날이 있다수상 : 2014년 살림출판사 어린이책 당선. 2020년 바다문학상(수필)본상 현재 : 서울 돈암초등학교 근무

‘모지랑 비, 모지랑 붓, 모지랑 숟가락….’

물건을 닳고 닳도록 쓰던 시절, 흔히 듣던 정겨운 단어들이다. 그 중 모지랑 숟가락을 우리는 ‘달챙이(딸챙이)’라고 불렀다. 오래도록 쓰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놋쇠 숟가락이 어느 장날 새로 사 온 숟가락에 밀려 버려질 운명이 처했을 것이다. 알뜰한 안주인은 그를 버리지 않고 다시 쓰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공로는 지대했고, 그의 존엄은 대단했으므로 함부로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여 ‘달챙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했을 것이다.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을 얻는 순간 그의 존재는 되살아난다.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감자를 까고, 호박껍질을 벗기고, 무즙을 만들고, 가마솥 누룽지를 긁으며 달챙이는 우리 집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그 무엇이 되었다. 그는 쉼 없이 집안 곳곳을 다니며 우리 집 건사에 발 벗고 나섰을 것이다.

언니가 함지박에 감자와 달챙이를 챙겨 도랑 가로 나오면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포실포실한 감자를 곧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군침부터 돌았다. 유난히 감자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늘 배고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짭조롬한 감자 맛을 무엇에다 견주랴. 언니는 도랑물에 감자를 뽀독뽀독 씻고 물을 흥건히 담아 편편한 돌멩이가 있는 물가에 나와 앉았다. 함지박 속에 담긴 달챙이가 반달처럼 반짝 얼굴을 내밀면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거무죽죽하던 감자는 언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뽀얗게 속살을 드러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언니를 나는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하지만 세간살이가 궁핍한 우리 집에 달챙이라곤 단 두 벌 뿐이었다. 하나는 왼손잡이인 어머니 용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오른쪽이 반달처럼 움푹 패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돕고 싶은 마음뿐, 함지박 앞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았거나, 심심해지면 감자를 탑처럼 쌓았다 무너드렸다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나에 맞춤한 달챙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때마침 언니가 잠시 쉬려고 허리를 펴면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나는 손안에 쏙 들어갈 크기의 감자를 들고 언니 흉내를 내어 보곤 했다. 어림도 없다. 오히려 도랑에 달챙이를 빠뜨려 동동거리거나, 건지려고 옷을 다 적시는 등 언니를 성가시게 할 뿐이었다. 감자를 긁는 언니의 달챙이 소리는 사각사각 참으로 경쾌했다. 감자분이 뽀얗게 튀어 하얀 점순이가 되곤 하던 언니. 나는 그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서 함지박 물을 찰방거리며 깔깔깔 웃곤 했다.

유난히도 손이 빠르고 손끝이 맵던 그녀는 어머니의 든든한 살림 밑천이었을 것이다. 오 남매 학비를 근심하는 부모님 마음을 제일 먼저 눈치채고 형제들에게 배움을 양보했던 그녀, 집안일을 암팡지게도 잘 했던 그녀. 두레박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잘도 긷던 그녀. 그녀는 그 옛날 우리 집에 요긴했던 달챙이를 닮았다.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난 여기 어르신들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래서 몰래몰래 머리도 깎아줘. 좋은 일인데 왜 그런 걸 못하게 하는지 몰라. 깔끔한 어르신을 보면 내 속이 다 시원해지거든. 신문에 재미난 것 나오면 오려다 읽어주기도 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난 행복해, 그러니 동생아, 걱정하지 마.”

요양사인 그녀는 여전히 부지런하다. 날마다 이리저리 바쁘던 그 옛날 달챙이처럼.

직분을 다해 사는 삶은 아름답다. 남을 위해 내어 주고도 내색하지 않는 사람, 기쁘게 행하는 사람, 스스로 제 길을 내고 제 길을 묵묵히 가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 땅엔 이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달챙이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도 제 몸을 희생하며 누군가의 거름이 되기를 서슴치 않는다. 꽃이 대지의 품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듯. 세상은 그들로 하여금 따뜻해지고, 보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된다.

한 손으로 함지박을 인 언니와 손을 잡고 간다. 다닥다닥 청미래 덩굴로 엮은 사립문 너머에 마음씨 좋은 할매 집을 지나, 자두가 다글다글 달리던 친구네 집 대문을 지나,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고 번쩍 안아 올려주던 까끌까끌 수염 아저씨를 피해 고샅을 달려가다 보면 봉숭아 꽃 핀 우리 집 마당이 보인다. 멍멍 꼬리를 치며 누렁이가 반가워한다. 아궁이에 불이 붙고 커다란 양은 솥엔 감자가 짭조름하게 익을 즈음 ‘챠르릉’ 솥뚜껑을 열고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는 언니가 있다. 뜰팡에 앉아 젓가락에 감자를 끼워 들고 호호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예닐곱 살의 내가 있다.

정겹던 그 풍경은 이제 꿈에서나 만날 수 있을까?

“택배 받았지? 어제 담은 김치야. 무말랭이도 꼬들꼬들 맛있을 거야.”

잘 받았다는 인사도 게으른 동생, 제 할 일에 바쁜 척 살아가는 동생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주는 달챙이 같이 부지런한 언니. 근데 그 달챙이는 쓸수록 반짝였던가? 그녀는 세월이 흐를수록 반짝이는 인생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 옛날 우리 집에 요긴했던 그것처럼. 구불구불 어렵사리 걸어온 그녀의 길이 아득하다. 앞으로 갈 그녀의 길은 햇살 따뜻한 꽃길이길 빈다.

남도의 어디쯤 국화꽃 마을이 있다지? 그곳엔 국화꽃이 한창이겠다. 시를 줄줄줄 잘도 외는 그녀와 ‘국화 옆에서’를 읊조리며 손잡고 걷고 싶다. 천둥도 먹구름도 무서리도 다 이겨낸 그녀에게 딱 맞춤 한 시. 이 가을 꽃향기 가득한 그 길을 오래오래 걷고 싶다.

 

사랑의 묘약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친구를 만나 분위기 좋은 곳에서 놀다 주머니의 돈을 계산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마운 분께 보낼 과일을 특대로 살까? 실속형으로 살까?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백화점에서 맘에 드는 옷을 두고 돌아서지 않아도 될 만큼,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흔쾌히 베풀 수 있을 만큼, 그만큼의 돈이 있다면 좋겠다. 살면서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행복한 걸까?

 

‘돈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의 종교는 같다’라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다. 나의 친정아버지다. 당신은 내가 아는 한 유일하게 돈을 좋아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아니, 당신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으셨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5남매를 키우셨다. 돈은 언제나 바닥이 나고 힘은 부쳤을 것이다. 첫사랑의 꿈도 돈 때문에 꺾였고, 청운의 꿈 또한 돈 때문에 주저앉았다. 가장으로서 자녀들 앞길 또한 돈 때문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을 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였다. 그는 그만 돈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돈은 당신의 팔자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그야말로 돈 보기를 돌같이 하셨다. 그리하여 귀한 집 외동딸이셨던 어머니는 자녀들 뒷바라지에 억척스레 돈과 싸워야 했다.

“육성회비를 내야 하는 날은 왜 이리 자주 돌아오는지? 동동거리는 너희들을 위해 이웃에 가서 황급히 융통이라도 해야 하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어렵던 날들을 회상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성실했으되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돈에 관한 한 지나칠 만큼 무관심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던히 아버지를 원망도 했던 것 같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던가? 이제 와 보니 나의 형제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대체로 고만고만 살고 있다. 욕심껏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욕심을 내 봐야 크게 부자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자포자기일까? 아무튼, 딱 자신의 분수만큼만 자족하며 산다.

가끔 친정에 가서 용돈이라도 드릴라치면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시곤 하셨다.

“난 필요 없다. 주려거든 느이 엄마나 줘라.”

아버지는 옷을 사 오는 것도, 먹을 것을 푸지게 차리는 것도 지나치게 싫어하셨다.

역정을 내시기까지 했다.

“저 양반은 새 옷을 사다 주면 고맙다 하면 될 일을, 오는 복도 차버린다니깐.”

어머니의 안타까운 푸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녀들이 올 무렵이면 분주하게 준비해 두시는 것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십리 길을 달려가 옥수수 강냉이를 튀겨다 두시고 몰래몰래 숨겨 놓은 비상금을 찾아 손주들 숫자만큼 용돈 봉투를 만들어 두시는 거다. 평생 추수나 전답에서 얻어지는 돈도 당신 명의 통장에 넣는 법이 없으셨던 분이셨다. 유일하게 들어오던 몇 푼의 유공자 연금도 대부분은 어머니께 찾아 건네주시곤 하셨으니 당신의 돈은 거의 있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욕심 없던 아버지가 당신의 성정처럼 훌쩍 떠나신 지 3주기다. 고향 집 문을 열면 고소하게 달려 나오던 강냉이 냄새도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서랍장 당신의 유품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가지런히 정리해 둔 손때 묻은 책들 사이 겨우 300만 원이 찍힌 통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남기려면 많이나 남기지. 나한테 다 주고 또 뭐가 있다고 맨날 감추더니만….”

어머니도 눈물을 글썽이며 괜한 한마디를 하셨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인 줄 알겠다. 막걸리값 몇천 원을 빼면 오로지 손주들 용돈을 위해 모아두고 싶으셨을 지상의 돈, 삼 백만 원!

‘나눠줄 만한 것이 있고, 기꺼이 나눠 준다면 부자’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부자였다. 누가 한평생 겨우 300만 원이라고 우습게 볼 것인가? 늘 누군가를 위해 나눠줄 준비가 되어 있던 분. 주름 자글자글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시며 손주들 손에 즐거이 용돈을 쥐여주시던 분. 평생 웃는 모습보다 꼬장꼬장 훈장님 같은 모습에 익숙한 당신을 자녀들은 안다. 아버지의 가장 행복해 보이는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그 순간, 어린 손주들에게 용돈을 쥐여주시던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안 계신 명절은 허전하다. 손주인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당신을 그리워한다. 당신은 세뱃돈을 그냥 주시지 않으셨다. 성공(性空) 이라던가, 합격(合格), 건강(健康) 같은 지극한 바람을 한자로 정성껏 눌러 써 봉해 주시곤 하셨다. 작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살아가며 대체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행복한지?

돈과 행복의 관계는 밀접할 것이다. 하지만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명제는 맞지 않는다. 방글라데시나 부탄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먼 나라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아버지는 평생 값비싼 명품이나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부끄러울 만큼 적은 돈으로도 친구분들을 만나면 먼저 막걸리 한 잔 사실 줄도 아셨고, 얻어먹은 다음에는 꼭 갚아야 속 시원해하셨던 분, 자녀들에게도 절대로 기대려 하시지 않았던 분, 손주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꼬박꼬박 담아 줄 줄 알았던 당신은 가난해도 무한 부자였던 분이 틀림없다. 뒤돌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누구나 물질을 소비하는 성향은 다르다. 따라서 행복한 돈의 액수는 사람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자기 분수에 맞게, 나눌 수 있을 만큼. 사랑의 마음을 표할 수 있을 만큼이면 족하지 않을까? 수백억 원을 가진들 나눔의 마음 전달하지 못하면 빈손만도 못하다. 이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허황한 말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욕심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함을 아는 것이라던가? 돈, 그의 마법 같은 힘이 사랑의 묘약이 되어, 세상 모두가 행복해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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