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숙 :재한동포뮨인협회 이사.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동포문학 우수상 등 수상 다수. 시, 수필, 소설 등 발표.
홍연숙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동포문학 우수상 등 수상 다수. 시, 수필, 소설 등 발표.

그늘에 도착한 보라빛 기억들
 


큰꽃으아리는
새 순을 살리고 있었다

어둠속 긴 잠을 깨우듯
길게 울리는 진동
그 곁을 배회하는 발걸음이 오래 멈추었다

순 올리고
잎 내리고
꽃 피우는 작업이
무대위의 공연을 준비하는 것 같다

기둥을 끄러안고
기둥이라서 끄러안고
긴장한 등골에서 초록 아가미가 나와
헤염을 치는 여름 밤
누구도 모르게 토해버린 은어들이
달빛에 다듬어지고
햇빛에 펼치는 보라빛 향연

그늘 아래
신기(神奇)를 품고 며칠을
서성이고는 했다


꽃망울이었던들
우연이었던들
인연인듯
영원회귀속에서 맺은
불변의 약속

너는 첫 남자였을 지도
나는 아마 큰꽃으아리지 않았나 싶다

영겁의 시간을 너머 너는
큰꽃으아리로 돌아왔을 것인데
여기 흐르는 커다란 침묵
큰꽃으아리의 밀어들을 듣는다

인간과 꽃으로
기어이 지켜지는 약속을
너와 나는 지켜왔다는 것이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노각
 


죽은 나무에 매달리는 것도
남발하는 햇살에 견디는 인내심도
참선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만신창이된 육신을 열어
환하게 쏟아부은 씨앗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 생의 죽음으로
다른 봄을 기약하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집념으로 간직했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진물이 녹아 흐르지 않는다면
작문이 아닐 것이고
작문이 저렇게 눈부시지 않을 것이다
 


2월
 


그것은 노랑이었다

얼룩덜룩 바람의 빛깔로
서툴게 써 놓은 편지

맑은 하늘에 
한 송이씩 피어올랐다

철자도 틀리고 받침이 없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메마른 손끝에 딱딱한 껍질 사이로 
노랗게 물 오르는 산수유 꽃

가슴털이 노란 
새 한마리 앉아 있었다
 

 

비줄기
 

 


이불속에도 비의 줄기는 자라고 있다

가슴으로 떨어지고
피와 살에 섞이어
하염없이 집안에서 자라고 있다

저것들은 무얼 먹고 자랄까

베개에 뿌리를 박고
목구멍을 태우고 간장을 녹이며
줄기는 굵어진다

요양병원에 도착하자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담배연기에 젖어 들었고
구부정한 어깨위에 흘렀고
터벅터벅 발걸음소리에 스며들었다

주룩주룩

불효자는
아버지를 빗물에 묻었다

 


봉숭아 꽃
 

 


마당의 봉숭아가 잎을 떨어트리고 있다
떨어지는 꽃잎들은 하나하나 멍이 들었고
한 겹 한 겹 포개진다
덧 바른 분으로 떡칠을 하던 이웃집 언니
창피하다고 고만 처 바르라는 가시돋힌 소리에
습관처럼 머리를 내리던 얼굴은
언제나 퍼렇게 질렸다
돌을 맞을 만큼 열열했던 사랑이던가
멍든 잎들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흘렀다
꽃이 쉽게 지는 줄도 모르고
봉숭아는 미련하게 씨를 품었다
부른 배를 감싸 안은 손에는  봉숭아의 마른 눈물이 얼룩져있었다
가을바람이 틈새로 들어 앉아 꽃을 피울 줄이야
하얗게 웃는 바람 꽃 향기는 소스라치게 짙었다
사정없이 말라버린 봉숭아는
씨를 터뜨리고
재가 되어 부서졌고
죽어서도 뿌리까지 붉게 물 들어 있었다
 



스모그
 



세상이 불타고
모락모락 피어난 우리는
스모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구름처럼 떠도는 명성에
우리의 어마어마한 군체가 어느 화가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줄 알았다
바람따라 여행을 하며
자유로운 영혼의 시로
시인의 가슴에 다가갈 줄 알았다
우리의 격앙된 혁명가로
해와 달의 얼굴을 가린다는 건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혐오대상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한다
비에 씻기어 한 포기의 풀이라도 키우고 싶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하늘이 아닌
복종으로 사정없이 짓밟히더라도
생명의 원근인 흙이고 싶다
기만과 탐욕에 서걱이는 불협화음으로
나무와 꽃들이 시들며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위협하는
우리의 존재는 악을 부르는 것이고
이대로 가만히 있는 다는 건 더 큰 죄악이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우리를 고발한다
 

 


비짜루 국화의 여백
 

 

그리다 만 거예요?
하고 물으면
그게 나 예요.
라고 대답할 것 같은

흰 바람벽을 배경으로
비짜루 국화가 언뜰거린다
가느다란 선 끝머리에
핀 듯 오므린 듯
연분홍 몇 점

절제된 미라고 환상하지않는
가난한 시는
시인의 결핍이 아니다
시인이 누리는 결핍이다

보도블럭 사이에 외로운 존재 
말라가고 비워가며 훌 훌 털어
갈 때는 기꺼이
하늘로 날 것이니
 


파도
 


순수하고 맑은 이슬이 비상하고
하얀 날개를 퍼덕이는 싱싱한 날들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나의 고뇌는
서릿발 아래에서 신음하고 포효한다
꿈으로 쌓인 빙하는 산산이 부서지고
거품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물음들
넘을 수 없는 산이 앞을 막고
내 죽음도 저 너머
무지의 세상에서 손짓한다
바다는 어김없이 나를 쓸어버릴 것이고
갈매기들은 환호할 것이며
붉은 포도주 축제로
이 세상은 다시 열릴 것이다
 


나의 종교

 


나는 이단아다
나의 무지막한 행동은 벌을 받았고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십자가에 들려 갔다
어릴 때는 울며불며 엄마 손에 잡혀갔지만
철이 들면서 스스로 찾게 되었고
헌금 액수는 점점 많아지고
고해성사도 많아졌다
나는 신을 신봉하게 되었지만 가끔 방종하여
도덕의 불복종으로 불륜을 저질렀고
대중을 기만하여 간교한 자아로 반역을 꿰했다
그때마다 내 몸은 알았다는 듯이 아프기 시작했고
극심한 고통에 죽을 고비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신의 추종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까지 해싸며
나의 그 고통스런 이력들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나의 생활은 양심의 기도로 시작하여
욕망의 기도로 끝나는 시간들로
나의 피부로부터 혈액까지
골격부터 생식기 까지
그 어느 구석이라도 남김 없이 내어주는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이었다

오~ 전능하신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여
당신을 믿습니다
오늘 일용할 약을 주옵시고
저를 약에서 구합소서
식후에 한 알 하루 두 번
아멘~

 



물고기의 일생

 


물고기 한 마리 뭍에 올라와 
어느 부리에 쪼였는지 뻐끔한 눈이
강을 다 빨아들이듯 동굴 처럼 깊다
죽음은 모래밭을 서걱이면서
누구의 밥이 되여 똥이 되지 않은 요행을
고향땅에 묻힐 수 있는 다행을
하염없이 뻐끔거렸을 것이다
낚시의 법칙은 낚시꾼을 위한 법이였으니
고기들이 좋다고 살을 찌우는 건 고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고기들은 낚일 수 밖에 없고
미끼를 물어야 하고
잡혀야 하고
먹음직스럽게 요리되어야 했다
생이 끝나면서도 부끄럼없이
하나의 개체 물고기로서는 행운인 것이다
 


 


겨울이 우는 건 아닐 것이다
메마르고 혹독한 추위속에서
한 방울씩 흘리는
그런 눈물은 아닐 것이다
당장은 보여주지 않지만 꼭 쥔 주먹에
숨죽이는 다짐
한 겹 한 겹의 껍질은
터지고 피 흘리던 입술이었다
입술에 말라 붙은 붉은 피
끓어 오르는 혈관들이 소리를 내듯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틈새로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겨울바람에 흐느낌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고
앙상한 가지에 맺힌 이슬들
길가에 홍매화 나무가 추위속에서 떨고 있다
저 견딜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매화나무의 사랑
또는 떠나간 잎새들이 그리워서
몸부림을 치는 매화나무의 것
용역들의 손에 뿌리 뽑히지 않으려고
제 몸을 완강하게 지키는
홍매화 나무가 길가에 서 있다
우리의 안에는
터전을 뺏긴 수많은 매화나무들이
붉게 일어선다

 


물결
 



면 위에 선들이 속도에 시간들이
하늘에 구름이 백노와 갈대들
끊기지 않고 잘리지 않고 면면히 흐른다
들려오는 음악은 길어지고 가늘어지고
얼어 버린 기억이 조금씩 녹아
한 뼘씩 부드럽게 다가온다
익숙한 목소리는 커지다가 작아지고
입술에 키스 자국이 도돌도돌 일어난다
지워지지 않는 물감처럼
희미하게 새겨진 벽화처럼
내 몸에 각인 된 너의 물결은
지금도 여기에는 흐른다
가슴의 변두리를 철썩이면서
뇌리를 빙빙 돌며 파문을 일면서

 


씨앗의 기억
 


가문비나무숲은
첫 서리가 올 때면 긴 잠의 의식을 치른다
알래스카에서 배아기를 보낸 가문비나무가
먼저 서두르는 것은
그들의 유년기가 다르기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모른다
남들이 자기와 다르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별 난 놈이고 이상한 놈이고 나쁜 놈이라 한다
씨앗의 기억이 다르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건
누구를 탓 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지금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한 목소리를 원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밟히고 부러지고 사위어가는 것들을
들여다 보지 않고 숲을 사랑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뻔뻔스러운지를
 

 

부추꽃

 


겨우내 버티다가 새 순에 떠밀려 씨알까지
다 뺏기고 깃털처럼 누웠다

지나던 바람도 들렀던 해빛도
왕년의 전성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과부집 담 넘던 일도
떠도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바람 한 점에 날리다가
마른 쑥대가지에 걸리더니 맥없이 떨어지고

비석 없는 무덤 위로
봄이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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