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화의 수기

최미화 프로필: 필명 아화.
최미화 프로필: 필명 아화. "연변여성" 잡지에 수필 다수 발표. 작사한 노래"백세인생 닐리리 " "변함없는 내 사랑 " 연변텔레비죤방송 매주일가프로에 방송. 동요 '눈까플" 제17회"중국조선족청소년음악제""우리네 동산" 제26회 창작동요제 우수상 수상.연변음악계렬도서 "행복의 길'에  작사한 노래 발표. 

아버지의 로맨스가 시작된 것은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1년후였다. 당시 74세였던 아버지는 심신이 아주 건강하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기억력이 좋아 평소에 책보기, 일기쓰기를 즐겼고 매일 한시간 이상 산책하는 습관도 있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고독하고 쓸쓸하게 홀로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자녀들은 안스럽기 그지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우리 4남매는 자녀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음 맞는 동반자를 찾아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내시라고 권하였다. 
자식들 2남2녀중에 셋은 외국에 돈벌이를 나가고 아버지 옆에는 셋째인 나만 있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집에서 살다보니 아버지를 모셔올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형편이 안되였고 아버지 또한 자유롭게 혼자 살기를 원했다. 
정작 아버지한테 동반자를 찾으라고 말씀은 드렸다만 돈만 밝히는 요즘 세상에 농촌에서 올라와 번듯한 집 한채 없이 한국 간 언니 집에서 생활하고 퇴직금도 없는 로인에게 마음 줄 할머니가 있을지도 막연하였다. 


그런데 나의 우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싹 가셔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인의 소개로 6살 년하의 소학교 퇴직교원을 만났다고 알려주었다. 아담한 체구에 인물은 수수하나 알뜰하고 마음씨 착하고 교양이 있는 분이며 혼자 사는 집도 있고 퇴직금도 있어서 아버지한테 경제부담은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한동안 두분이 좋은 만남을 반복하나 싶더니 정식으로 사귀기로 결정하였다고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끼니도 챙겨주고 말동무도 해주는 좋은 분이 나타났으니 우리 자녀들 립장에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녀된 도리로서 그 분한테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것이 례의 같아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면 어떠냐고 아버지께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두분이 상의한 끝에 량쪽 자녀들한테 서로 소개하지도 않고 각자 자기 집에서 지내면서 보고 싶을 때 만나서 식사하거나 가까운 곳에 함께 려행을 다니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였다. 로년을 즐기는 아주 특별하고도 새로운 ‘신혼’생활-두분만의 ‘황혼의 로맨스’를 계획하였다는 것이였다.
늘 자녀들한테 부담을 줄가 봐 걱정하고 있던 아버지를 몇십년 동안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고 있기에 나 또한 그 립장을 리해하고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해드렸다. 하지만 그 분도 같은 결정을 했다니 은근히 의아해났다. 아무리 로년의 만남이라도 명분을 가지고 자녀들한테 떠받들리고 대접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 대부분 어르신들의 소망일 텐데 자녀들을 배려해서 너그러운 선택을 한 그 분이 마음속으로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그럴수록 만나뵙고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갔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두분의 결정을 존중해달라면서 거듭 말렸다. 명절 때마다 두분은 각자 자기 자녀들과 함께 보내고 명절후에 시간을 타서 두분만의 공간에서 행복하게 명절을 쇠군 하였으며 려행도 같이 다니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새로 문을 연 식당이 생기면 나는 항상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색다른 음식들을 대접시키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한끼 식사가격이 얼마인지, 영업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근사한 환경에서 음식을 드시니 자연 그 분이 떠올랐나 보다. 아버지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나중에 같이 드시러 다니라고 번마다 식사쿠폰을 여러장 사드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한치 사양도 없이 어린아이마냥 기뻐하였다.

내가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화룡진달래축제에서였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축제분위기도 느끼고 진달래마을도 구경시키고 맛나는 음식도 대접하고 싶었다. 그전에 아버지한테 슬쩍 여쭤보았다. 아버지 혼자 놀러 가면 그 분한테 미안하고 또 서운해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내가 만나뵙고 인사도 드리고 같이 모시고 놀러 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아버지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 모습에서 나는 찬성이라는 두 글자를 읽었다. 아버지는 우선 그 분의 의견부터 들어봐야겠다면서 뒤를 남기였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자주 드나들기에 그냥 나를 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대 대로 그 분도 동의하였다. 
진달래마을로 떠나는 날, 나는 그 분을 차에 모시며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첫인사를 올렸다. 뜨거운 열기에 젖은 축제분위기 속에서 두분의 사랑도 익어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수줍어하는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걸었고 활짝 핀 진달래를 배경으로 행복한 기념사진도 남겼다. 축제 공연도 보고 맛나는 음식도 드시면서 마냥 즐거워하는 두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름다운 황혼의 로맨스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원했다.

그 뒤로도 두분은 초기에 세운 자신들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면서 자녀들이 뒤에서 묵묵히 보내주는 축복 속에서 6년이란 세월을 행복한 ‘부부’로 알콩달콩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나한테 직접 전화할 리 없는데…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쿵쿵 뛰였다. 의사가 아버지는 관상동맥이 좋지 않아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이 건강한 것 같아도 갑자기 쓰러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허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침까지도 함께 나들이 가자고 약속했던 아버지가 병원 문 앞도 가보지 못하고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두분의 행복한 로맨스는 6년 만에 쓸쓸히 막을 내렸다. 아버지를 하늘나라에 보내드린 며칠후 우리 4남매는 그동안 옆에서 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펴드리고 자녀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안해’표 사랑과 행복을 주신 그 분한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저 한번 만나자고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그 분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극구 사절하였다. 결국 아버지 집 열쇠는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핑게 아닌 핑게를 대서야 나와 언니만 그 분과 잠간 밖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어색한 만남이였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분이였기에 큰 보답은 아니더라도 언니가 성의껏 준비한 화장품 세트에 아버지가 남긴 얼마 안되는 돈에서 일부를 봉투에 담아 감사의 인사와 함께 드렸다. 그 분은 로년에 아버지를 만나서 6년간 행복하게 보낸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데 무슨 인사가 따로 있느냐고 하면서 한사코 사양하였다. 안 받는다는 그 분과 드리겠다는 우리는 한참을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엔 돈을 넣은 화장품 가방을 그 분 옆에 내려놓고 부랴부랴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아버지가 황혼의 로맨스로 사귀였던 녀주인공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벌써 3년, 돌이켜보면 두분의 사랑은 소박하면서도 뜨거웠고 순수하면서도 고상한 황혼의 멋진 로맨스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그 분, 부디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한 여생을 보내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연변녀성 2020년 3월호 발표작품으로 중국 조선어문법을 사용한 원작임을 밝힌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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