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박사, 훈춘에서
곽승지 박사, 훈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1) 이후 중국 공민으로서 동북지역에 터 잡고 살아온 조선족 동포들은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1990년대 초까지 변함없이 그 지역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왔다. 대부분 농민이었던 동포들은 동북지역의 넓고 비옥한 땅에 의지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천명(天命)으로 받아들였다. 광복 후 한반도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 동북지역에 남기로 결심한 후에야 그곳에 정주하기 로 마음을 다잡았던 이들은 중국에서 사회주의 제도 가 정착되는 과정에서의 혼란 속에서도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며 운명처럼 그 땅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한 삶을 살았다. 중국 동북지역은 명실공히 조선 족 동포들의 삶의 영역이었다.

조선족 삶에 영향 미친 1992년 두 가지 사건

그러나 조선족 동포들의 이러한 삶은 1992년에 이루어진 두 가지 사건(?)에 의해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마음속 한 켠에 내재해 있던 나그네 의식 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사건은 그해 벽두에 이루어진 등소평(鄧小平)의 남순강화 (南巡講話) 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중 국사회를 변혁시켜온 등소평은 그 변혁의 진원지인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등 남쪽지역을 순방하며 적극적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천안문 사 태(1989.6.4) 이후 움츠러들었던 변혁에 대한 의지를 일깨움으로써 개혁개방 정책의 고삐를 다잡은 것이 다. 등소평의 남순강화는 동북지역에 갇혀(?) 살던 조선족 동포들에게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기회를 제 공했다.

다음의 사건은 한국과 중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 (1992.8.24) 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제의 탄압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한반도를 떠나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 이지만 냉전체제의 틀 안에 갇혀 살아온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남한)을 잊어가고 있었다. 단지 조선(북 한)만을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고국으로 인식할 뿐 이었다. 기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람들에게도 조선 족 동포들은 동포로서 자리매김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전쟁에서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중공(中共)의 백성일 뿐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성사된 한 중수교는 조선족 동포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등소평의 남순강화로 시작된 적극적인 개혁개 방 정책에 더해 든든한 ‘비빌 언덕’이 새로 생겼기 때 문이다.

연변 화룡시와 용정시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해란강변의 넓은 평강벌.
연변 화룡시와 용정시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해란강변의 넓은 평강벌.

이 일련의 사건들은 조선족 동포들에게 두 가지 기회를 제공했다. 하나는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 회이다. 당시 중국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적극적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경제 적으로 물질주의가 팽배한 상태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돈’을 쫓았고 조선족 동포들은 그 방법으로 한국을 찾게 됐다. 다른 하나는 중국 연해지역의 개방도시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한중수교는 한국 기업에게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는데 이들이 중국에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 동포들에게도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국 기업은 조선족 동포들이 있어 언어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었고 조선족 동포들은 동북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탈냉전 체제와 경제적 실리주의가 맞물 린, 도도한 변화의 물결로부터 비롯된 필연적 현상이었지만 이 상황으로 인해 조선족 동포들은 새로운 기회를 쫓아 그들이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아온 중국 동북지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족 동포들의 동북지역에서의 탈 영역화가 시작된 것이다. 초기의 이주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개별적 이주였고 돈을 벌기 위한 일시적 이주였다.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별적 이주는 가족 간의 집단적 이주로 발전했고, 돈을 벌기 위한 일시적 이주는 새로운 삶을 위한 장기적 체류형 이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족 동포들의 타지로의 이주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가운데 동북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영역을 찾는 과정이었다.

 

크고 빠른 탈 영역화로 인한 부작용들

조선족 동포들의 탈 영역화 과정은 순수하고 단순 한 동기에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리적이고 복잡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그 수도 급격히 늘었고 속도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1백92만3천여 명의 조선족 동포들 중 4 분의 3이 농사지으며 살았던 동북지역에는 그로부터 30년 정도 지난 지금 당시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한 50만여 명 남짓 남아 그들이 지키고 가꾸었던 땅을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 을 수 없을 만큼 단 시간 내에 한 종족이 집단적으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그것도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평화로운 시대 에 자발적으로….

탈 영역화 과정이 크고 빠르게 진행된 만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이 역시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족 사회 내부의 문제이다. 동북지역 이곳저곳에 모여 살아온 조선족 동포들은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대부분 농민인 이들은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 살며 같은 학교를 다녔다. 혈연 지연 학연이 엉켜있는 전형적인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를 형성하였다. 토지도급경영을 통한 농촌 개혁정책의 시혜를 받아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자 이들은 서둘러 그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혹은 연해지역의 개방도시로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친인척 방문 등 특별한 기회를 얻어 이미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한국은 이들에게 엘도라도(황금이 있는 곳)가 되 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문은 너무나 좁았다. 단지 연고가 있는 사람이나 연수생들만이 합법적으로 한국에 갈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서둘러 한중수교를 이루었지만 그것이 조선족 동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사람들은 기회를 잡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몰두했다. 젊은 여인들은 한국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바리데기가 되어 한국인과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 틈새를 일부 한국인 브로커들이 파고들었고 급기야 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사기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비록 문은 좁았지만 그런저런 방법으로 한국에 안착한 사람들은 2000년대 초 20만여 명에 육박했다. 그중 약 70%가 불법 체류자였다. 그들은 브로커에게 준 빚진 돈을 갚기 위해, 돌아가면 다시 올 수 없기에 가족들과의 생이별의 시간을 늘려갔다. 그 결과 가족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가정은 파탄이 나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은 방황했다. 그렇게 조선족 사회는 병들어갔다. 오래전 중국에서 만난 한 조선족 원로 작가의 말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조선족 사회는 한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다. 그 아픔이 여전히 생채기로 남아있다.”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향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흑하시 북안시 주성향 지역의 넓은 벌판.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향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흑하시 북안시 주성향 지역의 넓은 벌판.

크고 빠른 탈 영역화가 가져온 또 다른 부작용은 한국 사회와 조선족 사회간의 갈등이다. 한중수교 직후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 사람들은 이들을 크게 반겼다. 오랜 동안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그들이 겪었을 모진 세월을 위로하듯…. 그러나 방문자들이 늘어나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고 일부 업자들은 불법 체류자의 약점을 이용해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에서 받는 설움이라 이들의 마음은 더 아렸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와 조선족 사회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2009년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사회와 조선족 사회 간의 갈등은 중상 정 도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탈 영역화를 넘어 바람직한 재 영역화 추구해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세계화시대에 즈음해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민들의 긴 행렬에서 이를 엿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넘나드는 경계가 낮아진 상황 에서 이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 조선족 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중국 동북지역에 갇혀 살아온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동북지역의 옥토를 두고 떠나고 있음을 아쉬워하자 한 젊은 조선족 학자가 “왜 우리는 동북지역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야만 하나”고 되묻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조선족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조선족 사회 의 미래를 놓고 상반된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던 적이 있다. 위기론과 기회론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동북지역을 떠나고 있는 것이 위기이냐 기회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모든 상황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어떤 점을 강조할 것이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필자는 당시 위기론의 입장에 섰었다.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옅어지고 한 민족의 관점에서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가 약화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탈 영역화가 보다 구조화되어 가는 지금 더 이상 위기론을 주장할 수는 없게 됐다. 탈 영역화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후의 보다 바람직한 재 영역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불과 한 달 후면 2022년이다. 조선족 동포들의 탈 영역화를 촉발한 등소평의 남순강화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긴 시간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이 기간 동안 조선족 사회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다음 10년, 아니 다음 30년 후의 조선족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자유마당 12월호>

출처 : 재외동포포럼(http://www.dongpofor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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