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정치학박사)

곽승지 박사
곽승지 박사

조선족 동포들이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서 자리잡고 살아온 역사는 농사일, 특히 벼농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초기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동북지역으로 이주했고 일제하에선 반강제로 대대적인 농업 이민이 이루어진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사 중에서도 벼농사를 주로 해 온 것은 전통적으로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것을 동경해온 범부(凡夫)들의 소망과 무관치 않다.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마음껏 배 두드리며 이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을 터이니 동북지역의 넓은 옥토에 의지해 그 바람을 실현코자 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여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해 온 지역은, 유연산 작가가 <혈연의 강들>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부분 크고 작은 강줄기가 이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실 중국 동북지역은 길림성 남부와 흑룡강성 동북부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넓고 광활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토질도 비옥하다. 흑룡강성지역은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흑토(黑土) 지대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넓은 지역을 큰 강들이 흐르고 그 강들 사이사이로 흐르는 작은 지류들이 년년세세(年年歲歲) 풍년을 기약해 왔다. 실제 현지에서 만난 동포는 지금까지 흉년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만큼 땅은 비옥하고 기후 여건 역시 농사에 적합하다는 뜻일 것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주로 농사일을 하며 농촌지역에서 살아왔음은 한 연구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이 1990년에 행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는 1백92만3천300여 명이었다. 이 무렵 조선족동포들 중 약 3%(5만8천여 명)만이 북경 상해 등지에서 살았고 대부분은 동북지역에 적을 두었다. 그리고 그들 중 76%는 진(鎭)급 이하의 농촌지역에서 살았다. 이들이 경작했던 토지는 한국(남한)의 전체 농지면적(2014년 기준 1만9천379평방킬로미터)의 절반이 넘는 1만1천평방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4명 중 3명이 대체로 농촌지역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 동포들이 살던 농촌지역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장백조선족자치현과 함께 대부분 중국의 민족구역자치제에 따라 형성된 자치촌과 자치향(鄕) 및 자치진(鎭)으로 구성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특정 지역에 일정 규모 이상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을 때 그들이 그 지역 안에서 고유문화를 유지하며 자치할 수 있도록 하는 민족구역자치제를 핵심 소수민족정책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구역자치제는 곡절을 겪어왔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사실상 이 제도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조선족 동포들 역시 ‘10년 대동란(動亂)’으로 불리는 정치적 사변으로 말미암아 자치는 고사하고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야만 했다. 공식 통계상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무려 2천650여 명에 이른다.

다행스럽게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직후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스스로 그 동란을 ‘모택동의 오류’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동안 방치했던 민족구역자치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등 소수민족들에 대한 정책을 재정비했다. 조선족 동포들이 다시 특정 지역내에서 자치를 하게 된 것은 중국 국무원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정지됐던 민족구역자치제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1983년 10월 민족향 설립 문제에 대한 규범을 재정비한 이후부터이다. 현재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하고 있는 민족촌과 민족자치향(진) 등은 이후에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민족구역자치제를 추진해온 과정을 조선족사회에 비추어 간략히 정리해 보자.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수립됐지만 중국의 헌법은 1954년에 이르러서야 제정됐다. 그러니까 중국공산당이 해방전쟁에서 승리해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헌법을 제정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기까지는 5년여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이 기간 국가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한 중앙인민정부위원회가 1952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을 공포했다. 요강 발표 직후 조선족 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연변지역은 ‘조선민족자치구’로 지정(1952.9.3)됐다. 연변 밖에 있는 상당수의 조선족 집거지들도 1954년 무렵 ‘민족자치구’로 명명됐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시를 관통하는 연집강(부르하퉁하의 지류).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로서 조선족사회의 문화·행정·경제의 중심지이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시를 관통하는 연집강(부르하퉁하의 지류).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로서 조선족사회의 문화·행정·경제의 중심지이다.
1980년대 이후 민족구역자치제 재정비

헌법이 제정되는 등 국가체제가 완비된 이듬해인 1955년 국무원은 헌법에 의거해 기존의 ‘민족자치구’를 규모에 따라 계서화(階序化)하고 새로이 민족향을 건립하는 문제 등 민족구역자치제와 관련한 규범들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했다. 그에 따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그해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뀌었다. 이어 1956년부터 동북지역 각지에 설립된 ‘자치구’들을 포함해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해 사는 지역들은 ‘자치향’으로 새롭게 설립되거나 개칭됐다. 예컨대, 흑룡강성 상지시에서는 1956년에 신흥조선족향을 새로 설립했으며, 1957년에는 기존의 ‘민족자치구’였던 하동지역을 ‘하동조선족향’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1958년에는 압록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장백현을 ‘조선족자치현’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민족구역자치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20년 이상의 시련기를 거친 후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새롭게 체제를 정비한 1980년대 들어서야 정상화되었다. 결국 민족구역자치제는 장기간 동안 부침을 거듭하다가 중국의 정치체제가 안정되고 나서야 자리를 잡게 됐다.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에 흩어져 살아온 조선족 동포들은 개혁개방이 본격화되어 한국 등 외국, 혹은 중국 내의 개방도시로 탈영역화를 도모하기 전인 1990년대 초까지 민족구역자치제의 틀 안에서 조선족향(진)과 조선족촌에 집거해 살아왔다. 중국이 1958년 호적등록제를 실시해 도시와 농촌간의 이동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족 동포들이 동북지역의 생활근거지를 벗어나 재영역화의 길을 찾아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를 도모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굳이 말하자면 1992년이 분수령이었다. 중국이 1992년에 등소평(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계기로 본격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데 이어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1992.8.24)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 집거지가 민족구역자치제가 실시되고 있는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동북지역의 주요 대도시들이나 조선족향(진) 및 조선족촌이 있는 인근의 거점 도시 등에도 조선족 동포들이 모여 살아왔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조선족 동포들의 탈농촌화에 이은 타지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따라서 조선족 집거지를 민족구역자치제 실시 지역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조선족 동포들의 절대 다수(1990년대 초 기준으로 76%)가 농촌지역에 있는 조선족향(진)과 조선족촌에서 살았다. 조선족 집거지로서 조선족향(진)과 조선족촌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이 조선족향(진)과 조선족촌에 모여서 살아가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조선족촌에는 소학교(초등학교)가 있었고 규모가 큰 촌에는 중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인구증가가 정체된 가운데 조선족 동포들이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면서 조선족촌의 인구 유실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그 결과 조선족촌에 있는 학교들은 학생 자원의 부족으로 차츰 문을 닫게 됐다. 오늘날 조선족 학교는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해 살고 있는 인근 지역의 거점 도시(현과 시)에 소학교와 중학교 1~3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조선족촌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족촌을 벗어나 대도시 혹은 주변 거점 도시로 옮겨가고 있다.

북안시 주성향 제2기 조선족초복 축제 개막식 기념촬영.

조선족 집거지로서 향(진)이 당면한 위기

조선족사회는, 중국의 급격한 경제발전과 세계화를 감안하더라도, 한중수교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어느 사회보다도 빠르고 크게 변했다. 변화의 내용과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한 변화는 조선족 집거지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해 살던, 민족구역자치제가 적용된 조선족향(진)은 50여개가 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현을 제외하고도 조선족촌은 1천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족향(진)은 30여개에 불과하다. 40% 이상이 줄어든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족촌의 공동화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기 시작했는데 유지되고 있는 조선족향(진) 중에도 이름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조선족사회의 변화와 함께 공업화 및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중국사회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민족구역자치제하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집거해온 삶의 터전으로서 조선족향(진) 및 조선족촌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조선족향(진)들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현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고향땅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할빈시에서도 200킬로미터 이상 북쪽에 위치해 있는 주성조선족향(흑하시 북안시 통북현) 주민들은 우리민족이 무더운 여름을 준비하며 즐기던 ‘초복날’을 ‘초복절’로 명명하고 이날을 주민축제일로 기념하고 있다. 타지에 나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인근 마을의 한족들도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주성 사람들의 존재감을 널리 알리고 있다. 송화강 중하류지역에 위치한 탕왕조선족향(가목사시 탕원현)은 인구의 유출로 어려움을 격고 있는 관내 조선족촌의 활로를 찾기 위해 ‘집중향’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흩어져 살고 있는 주민들을 향 중심지역으로 모으고 관내의 관광자원을 개발해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하겠다는 복안이다. 위기를 맞고 있는 조선족 핵심 집거지인 조선족향(진)들이 다시 본래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물론 조선족사회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많은 성원이 절실하다. 

<자유마당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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