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순희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삶이 흔들린다. 일상은 마비되고 사람들은 마스크라는 방호벽으로 서로 경계벽을 쌓는다. 언제 바이러스가 나를 덮칠지 모르는 공포가 매 순간 삶을 조여 온다.

거대한 고통이나 혼돈 앞에서 사람들은 할말을 잃었다. 당연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당연한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3년전부터 한국 인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간병일을 했었다. 지난 2021년11월5일 내가 일하던 요양병원에서 첫 코로나 감염자 2명이 나왔다. 텔레비에서만 봐왔던 코로나의 현장 모습들이 눈앞의 현실로 되여 버렸다. 

그 시각부터 우리는 방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환자들과 함께  격리되었다.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이었다. 환자들 앞에서는 태연한체 했지만 사실 나는 많이 떨었다. 떨리는 몸을 방호복 속에  감추고 환자 케어를 해야만 했다. 모든 일상이 그 좁은 공간에서만 허용되었다. 

병원장이 방역 규칙을 소흘히 한 탓에 감염이 확산되어 날마다 확진자가 수십 명씩 증가했고 병원은 비상사태에 처했다. 병원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져 일어 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 확진자가 미확진자를, 미확진자가 확진자를 돌봐야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병원의 일상은 뒤죽박죽이 되였고 코로나는 거침없이 확산되었다. 

확진자가 무더기로 증가되면서 병원 측에서는 감당이 안 되였다. 원무과장이 병원 전체에 "지금부터 확진자가 나와도 격리를 위해 이동시키지 않겠으니 전체 직원들은 각자 위치에서 계속 일하라" 고 방송통지 하였다. 명령식 강요로 공포감은 심화됐고 확진자와 미확진자를 분리하지도 않은 상태로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확진자와 미확진자를 함께 돌봐야만 했었다. 
우리는 매일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7시면 어김없이 확인 메시지가 날아온다. 기다리는 7시가 우리에게는 고문이엇다. 가슴은 콩닥콩닥, 입안은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기다림이었다. 그 시간이 천년같이 만년같이 느껴졌다. 띵동 메세지의 알람이 울린다. 떨리는 손으로 폰을 여는순간은 입시생이 수험성적 확인하는 초조함이라할까, 재판관의 판결문을 기다리는 피고인의 긴장함이라 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와~,음성이다.' 긴장과 공포 속에서도 환희의 전율이  흐른다. 우리 간병인들은 이 시간 때면 서로서로 문자를 전하고 , 평안을 빌면서 하루를 시작하군  했다. '아~. 나는 오늘도 음성이다.' 하고 환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동료 간병인의 확진 소식에 기가 죽었다. 날에 날마다  들려오는 공포의 확진자  소식에 두려움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첫 확진자가 나타나서 4일만에 내가 맡아보고 있는 병실에도 양성 판정 받은 환자가 3명이나 나왔다고 병원장님이 통보해 주었다. 그 순간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머리는 멍~, 마음은  불안~,전신은 떨렸다. 병원이 코호트 격리 상태라 도망 갈래야 도망갈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부딪혔다.  갑갑했다. 어찌해야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운명이라면  피할 길 없으면 차라리 즐기"라고 했던가? 나는 냉정하게 마음을 다 잡고 코로나와 싸워 꼭 승자가 되여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2년전 중국 의료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무한으로,코로나 최전선에 자진하여 뛰어가던 그 고상하고 숭고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코로나 전담병원에서 직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일하던 현장의 감동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최소한 내 담당 병실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생명 안전은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에 코로나 현장을 이탈할 수 없었고 사명으로 코로나와 싸워야겠다는 다짐으로 매일 최선을 다 하였다. 

방호복으로 전신을 무장한 우리 몸은 매일 땀으로 물참봉이 되었고 저녁이 되면 기진맥진 해서 숟가락 들 기운조차 없었다. 화장실 다니기 불편해서 물마시는 것 마저 부담스러웠다. 낮에는 복도 걸상에서 잠깐씩 휴식하고 저녁이면 복도에 놓은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밤중에도 수도 없이 병실을 드나들며 환자들 상태를 보살폈다.

확진자 마씨 할머니는 원래 기관지 천식이 있는 환자인데 코로나 증상이 심각하였다. 기침이 심하셨는데 기저귀 교체하느라 밀접 접촉할 때면 그 기침으로 내뱉는 호흡에는 얼마나 많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섞였을까? 하는 상상으로 몸이 오그라질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주저 없이 환자를 돌봤다.환자 주변과 나의 몸에 소독약을 듬뿍 뿌려 철저히 소독하면서 하루에 5~6번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식사 시중들고 양치시키고 얼굴과 몸도 닦아 드렸다.

병실 부족으로 확진자와 미확진자가 격리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행이 식판만은 분리되어 나왔다. 확진자 김씨 할머니는 끼니마다 불평하면서 아예 식사를 거부하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뭐라고 달래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할머니는 이미 감염된 줄도 모르고 확진자가 될까봐 매일 공포 속에서 떨고 있었다. 할머니한테 진실을 알려 드리면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어 알려줄 수가 없었다. 나는 입맛 잃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끼니마다 두유,뉴케어 등 간식을 챙겨 드리며 온갖 정성으로 살폈다. 

보호자들의 강력한 항의에 확진자들이 전담 병원으로 이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진자가 끊임없이 나왔다. 박씨 할머니, 최씨 할머니, 조씨 할머니...

나이가 90이든 100세든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박씨 할머니는 사유가 밝은 분이다. 간호과에서 직접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알려 드리면서 전담 병원으로 이송준비를 하라고 통지 했었다. 86세의 고령인 할머니는 10여년 신장 투석으로 생명을 연장해가는 장기 환자다. " 여태껏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야 편안히 낙을 누리고 살만 하니까 이게 무슨 세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슬피 우셨다. 짐정리 하시면서 "치료 받고 돌아와 녀사님과 함께 있겠으니 내 침상을 꼭 지켜달라 "고 나의 손 잡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셨다. 나는 울컥하여 할머니와 함께 펑펑 울었다.

김씨 할머니는 7명 환자중 유일하게 미확진자로 남았다. 보호자는 매일 나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셨고 여사님 너무 감사했다고, 할머니는 장기 환자인데 여사님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하셨고  코로나에도 걸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를 누구한테 맡겨야 할지 근심 걱정에 잠도 자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틀후 확진자들을  보건소에서 배정한 전담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이렇게 나는 14일이란 시간을 코로나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보건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보건소에서 보내준 방역 택시로 11월 19일 병원에서 탈출해 격리 방으로 옮겼다. 

나는 2년반이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정들고 때묻은 텅 빈 병실을 쓸쓸히 둘러 보고  만감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봉쇄된 병원문을 나섰다.

물리치료사 서선생님이 대기하고 있는 방역택시까지 바래다 주면서 "푹 쉬고 꼭 다시 오세요"라고 손짓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방역 택시를 타고 격리방으로 오는 동안  내내 슬픔의 눈물,비통의 눈물, 애처로운 눈물을 흘렸다...

치료센터에 갔다가 다시 나의 방으로 보내시겠고하신 보호자들과의 약속, "여사님 꼭 우리를 기다려줘야해." 하시던 할머니들의 절절한 목소리, 코로나에 걸려 고통스럽게 신음하시던 얼굴들이 나의 가슴을 허비였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음 아픈 추억으로,상처로 남았다. 

나는 차 안에서 할머니들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오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코로나와의 싸움은 힘든 싸움이고 긴 싸움이다.

우리 모두가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평범한 일상을 즐기며 사람마다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환한 얼굴로 웃는 미소로 사는 밝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중국-장춘호텔 격리방에서 
2021년 12월 25일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