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회적이라 함은 어떤 집단에 귀속되어 정체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냉전시대 인간은 공산주의와 자유자본주의 양대 진영에 귀속되어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와해가 냉전시대 종말을 고하는 종소리였다.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해체되었고 동구권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졌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양대 이념과 사상에 갇혀 있던 정체성을 잃은 인간은 저마다 ‘나는 누구냐?’라고 묻게 된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하버드대학교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그의 저서『문명의 충돌』에서 이렇게 말했다.

“냉전시대 인간의 정체성을 지배하던 이념과 사상이 사라진 그 자리를 문화가 대신한다. 미래 세계의 인간의 정체성은 전통문화, 민족문화, 종교문화에로 회귀할 것이다.”

동·서독의 통일과 남·북베트남의 통일은 전통문화와 민족문화에로의 회귀이다. 1990년대 초 동구권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문명의 충돌』이 발간된 지가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다.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정세는 대체로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돌아갔으며 지구촌의 인간집단의 정체성은 대체로 문화를 매개로 새롭게 이합집산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냉전시대에 마음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해외 화교·화인들이 개혁개방 이후 대거 투자에 나섰다. 특히 1989년 천안문사태 직후 구미 및 일본 대중국 투자가 주춤거려 개혁개방이 위기를 맞고 있을 때 화교·화인들이 투자에 적극 나서 중국경제를 활성화 시켰고 개혁개방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개혁개방 초기 홍콩 대재벌 리카싱(李嘉誠)이 대중국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말렸다고 한다. 이유는 사기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리카싱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기를 당한다고 해도 고향사람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니 나는 사기라 여기지 않고 부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세아의 가장 큰 재벌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한 배포와 스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외 화교·화인들의 민족문화회귀의 표현이다. 

2008북경올림픽 개막식 서막에 ‘친구가 멀리서 왔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有朋遠來不亦樂乎).’는 표어가 붙었는데 이것은 공자의『논어』에 수록되어 있는 구절이다. 또 3천6백 명이 광장에서 붐비고 있은 것은 공자의 제자가 3천6백 명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008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는 공자였다. 중국이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전통문화와 민족문화회귀를 완벽하게 이뤄내고 있다. 한 러시아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중국에 두 가지가 부럽다. 하나는 공부자(孔夫子)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천 만의 화교·화인 집단이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비해 새뮤얼 헌팅턴의 예언이 빗나간 곳은 유일하게 한반도이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분단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이념과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과 북이 싸우는가 하면 남측 내에서 썩어빠진 이념논쟁을 벌이고 있다. 

남측의 이념논쟁 중심 포인트는 멸공이다. 공산주의국가와 공산주의자를 소멸하자는 것이 멸공인데 냉전시대 성행했던 멸공이 21세기 개명 천지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아직도 외쳐지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
멸공구호를 한국정치권에서 먼저 떠들었다면 그나마 조금 이해가 갈 수 있지만 뜻밖에도 장사꾼이 불을 붙이고 정치권이 따라서 춤을 추는 모양새로 번지고 있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멸공 사건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은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이다. 나는 한 때 이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다. 2014년인가, 그 이듬해였던지 하여튼 신세계그룹이 ‘지식향연’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첫 강연자로 이 사람이 나섰다. 돈벌이 하는 장사꾼이 강연에 나서다니? 그때까지 대한민국 재벌 오너들이 강연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해 맘이 확 끌렸다. 대한민국에서 2·3등을 다투는 연세대와 고대에 가서 강연하였는데 무려 1,000명 대학생이 참석하여 그 규모부터가 정말 압도적이었다. 그의 강연의 키워드는 인문학이다. 스마트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위기극복과 행복한 대한민국 꿈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제언. 재치 있는 농담과 진지한 조언이 섞인 그의 강연에 천여 쌍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어쩌면 그 열혈 청년들이 가장 닮고 싶고, 또 닿고 싶은 사람일 수 있는 그의 강연은 뜨거운 호응 속에 예정보다 1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막을 내렸다. 
그는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고전을 많이 읽어야한다. ‘레미제라블’을 읽으면 스토리보다 장발장이 느낀 절박함, 죄책감 등의 감정을 곱씹어야 한다.”
고전을 안고 살아가는 나는 굉장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냥 고전을 읽고 인문학에 몰두하면서 장사나 잘하면 좋았을 것 괜한 ‘멸공 짓거리’로 세간의 말밥에 오르내리고 있어 굉장히 실망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제일수출국은 미국이 아닌 중국이다. 수출 양뿐만 아니라 대중국수출은 늘 흑자를 기록하고 있어 대한민국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며칠 전 지인의 초대로 근사한 한정식 음식점에서 식사한 적이 있다. 벽에 식자재 원산지 표지판이 걸려 있어 쳐다보았다. 20여종의 식자재 중에 무려 10여 종이 중국산이다. 전체 식자재 중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례만 보아도 한국은 중국과 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벌 오너가 이러한 양국 공생관계를 무시하고 멸공이라니? 외교문제에다 중국진출 한국기업 영향 여론이 불거지자 슬쩍 타깃을 북쪽에 돌렸는데 얍삽한 행위라는 것이 금세 들통 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고전을 읽고 인문학을 외쳐도 장사꾼은 아디까지나 장사꾼이므로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멸공 횃불에 춤을 추는 정치인들, 특히 마트에 가서 멸치와 콩을 구매하는 장 보는 것으로 멸공바람에 가세한 대선후보가 있어 여론이 더욱 뜨거워졌다. 

자신이 오너로 운영하는 기업의 주식이 떨어지고 불매운동의 조짐이 보이자 ‘고객이 발길을 돌린다면 정당성을 잃는 것’이라고 뒤늦게 사과하긴 했지만 한 때 굉장히 좋아했던 그 사람은 나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0년 6월 북경에서 아세아게임이 얼렸다. 한중 수교 전이지만 이 축제를 계기로 수많은 한국관광객이 백두산 투어에 나섰다. 그때 나는 연변에서 여행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한국인 수백 명 만났다. 그때 한국여행사 가이드 한 분이 한 말이 지금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
“참,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이쪽에서 종이를 네모기계에 넣으면 바다 건너에서 받을 수 있고(팩스), 더욱이 우리 한국인이 중국을 이렇게 올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내가 보기엔 남북통일도 10년 안에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되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통일이 눈앞에 당금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현재 부모형제자매끼리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것이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한반도 민족이다. 
남북 간의 화해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이 분위기에 북한은 미사일을 쏘아대고 남측에서는 멸공 부채질이나 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한심한 짓거리로 느껴진다. 

30년 전 새뮤얼 헌팅턴의 전통문화, 민족문화에로의 회귀가 한반도에서는 도대체 언제 가야 이뤄질 것인지?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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